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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데레사의 꽃송이 선문집 (選文集)
글: 박 병해/스테파노신부님
1. 내적인 상처, Blessures interieures 자서전 29,13
[13].내가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은 여러 번 이 현시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나는 내 곁의 왼편 족에 몸 모양을 한 분의 천사를 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보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비록 여러 번 천사들이 나타나긴(再現) 하였습니다만 그들의 모양을 보지는 않고 첫 번에 말씀드린.지난번 현시처럼만 뵈었던 것입니다. 이번 현시는 주님이 이렇게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키는 크지 않고 작은 편인데 몹시 아름답고 그 얼굴은 얼마나 환하게 타오르는지 모든 천사들을 다 포옹하는 것 같은 아주 높은 천사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저들은 아마 케루빔이라고 부르는 천사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의 이름은 나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상에는 이 천사들과 저 천사들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차이가 어떻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런데 금으로 된 긴 화살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쇠붙이 끝에는 불꽃이 조금 붙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천사는 몇 번인가 나의 심장이 있는 곳을 찌르는 것 같았는데 그 화살은 나의 창자에까지 다다르는 것이었습니다. 화살을 찔렀다 빼낼 때는 창자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았으며 나는 하느님의 큰사랑에 온전히 불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팠던지 아까 말씀드린 그 신음 소리가 나왔지만 그 아픔이 초래하는 감미로움은(suavidad)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이제는 이런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소원하지도 않고 영혼이 하느님보다 못한 것으로는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이 고통은 육체적이 아니라 영신적인데 육체가 참여하게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아주 감미로운 아부(阿附, requiebro)여서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맛보게 해주시도록 나는 하느님의 좋으심(善性)에 간청을 합니다.
Le chateau interieur, sixieme Demeures, chapitre 2,2 영혼의 성 6궁방 2장 2
[2]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위에서 내가 말한 그 맛 스러운 것과는 아주 딴판인 것입니다. 당사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더구나 하느님을 생각지도 않는데 당신은 삽시간에 지나가는 살별, 아니면 소리 없는 번개처럼 그 사람을 그 사람을 깨우치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 순간 영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똑똑히 깨닫고, 깨달아도 아주 사무치게 깨달아서, 때로는 – 특히 처음 그런 일을 달할 때는 –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아픈 데는 없건마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기까지 합니다. 감미롭기 짝이 없는 상처를 받은 것을 느끼기는 하지마는, 누가 어떻게 그 상처를 내게 했는지 이것은 알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 거룩한 은혜임만은 잘 알고 있기에 절대로 그 상처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그 사랑하는 님께 소리를 내면서까지 사랑의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님이 함께 계시는 줄은 알지만, 계시는 그 님과 즐길 수 있을 만큼 당신을 보여주려 않으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사롭고 흐뭇하면서도 목 견딜 아픔...아픔을 없애자니 그럴 수도 없고, 아니 절대로 없애려는 생심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아픔은 고요의 기도에서 맛보는, 고통이 없는 저 감미로운 황홀경보다 훨씬 더 영혼을 흐뭇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혼의 성 / 6궁방 2장 4
[4] 그럴지라도 이 은혜는 영혼 안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므로 영혼은 열망에 불타고 있지만, 한편 하느님이 정년 자기와 함께 게시겠거니 하고 생각 하기 때문에, 대체 무엇을 빌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응당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의식을 가진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며, 고통스러울 게 무엇이겠느냐, 그 이상의 행복을 무엇 때문에 원하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나도 모를 일입니다마는, 알고 있다면, 그 고통이 마치 폐부를 찌르는 것 같다는 것과, 상처를 내게 하신 하느님이 화살을 뽑아내실 때 그 폐부마저 함께 뽑혀지는 느낌이라는 것인데, 그만치 격렬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롯불... 거기에서 불티 하나가 튀어나와 영혼에 닿게 되면 저 뜨거운 불길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불티는 아직 영혼을 살라버릴 만큼 거세지는 못할지라도 한편 또 흐뭇하기 짝없는 것이어서 영혼은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이 비유는 내가 생각해낸 것치고는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집니다.
이 감미로운 괴로움, 고통이랄 수 없는 이 괴로움은 항상 같은 것이 아니고, 어느 때는 오래 계속하는 수가 있는 가하면, 또 어느 때는 이내 그쳐버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 지는 게 아니라 주께서 당신 마음대로 주시거나 말거나 하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한동안 계속되다가도 없다가 있다가 하면서 결국 오래도록 줄곧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말끔히 타버리지 않는 것도 이때이니 막상 타오르려 하자, 어느덧 불꽃은 꺼져버리므로 그럴수록 저 감미를 다시 맛보고자 애탑니다.*
2. 환희 La jubilation, Le chateau intérieur, sixiemes Demeures, chapitre 6,10
영혼의 성 6궁방 6,10
[10] 쓰고도 달콤한 이런 일 가운데에도 대로는 주님께서 커다란 기쁨,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기도를 영혼에게 내리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런 은혜를 받거들랑 하느님을 많이 찬미하시라고, 그리고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아들으시라고 여기 적어둡시다. 내가 보기에는 이 경우 여러 가지 능력이 한데 합치는 것 같은데, 주께서는 이 기쁨을 맛보도록 능력과 감각들을 자유로이 해주시지만 그 맛이 무엇인지 또 어떤 것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아라비아 말 같은 소리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으로, 영혼은 이 너무나 한 기쁨을 혼자 누리기가 아까워서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와 함께 주님을 찬미했으면 하는 충동만이 여기에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 모든 사람이 당사자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야 여봐 란 듯이 잔치인들 벌이지 못하겠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기분으로 마치 저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사람들을 다 불러서 푸짐한 잔치를 베풀고 싶을 것이니, 자기의 영혼이 – 적어도 그때 만은 – 의심 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기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영혼의 가장 그윽한 속에서 울어 나오는 마음 속의 기쁨이 이렇듯 크신 평화와 더불어 있다는 것, 그의 행복감 전부가 오직 하느님의 찬미를 재촉하는 이것은 악마로부터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지성적 뵈옴/ Vision intellectuelle, 영혼의 성 제 6 궁방 8장 2-3
[2] 한데 영혼은 이런 은혜를 받으려니 하는 생각이 전혀 없고 받을 만한 자격을 생가해본 적이 조금도 없는데도, 홀연 자기 곁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영안으로 나 육안으로나 당신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지성(知性)의 보임 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나는 하느님께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을 아는데 그가 받은 다른 은혜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그는 처음 한동안 퍽 괴로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으로는 못 보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연히 알다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를 몰랐습지다. 이렇게 예수님은 의심할 수 없으리 만치 당신을 드러내셨으니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의 ‘보임’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보임’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 – 그 훌륭한 결과로 미루어 하느님의 것임을 알 수 있었지만 – 얼떨떨하기만 했으니, 지성의 보임이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본 알조차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위에서 말한 그런 식으로 자주 이야기 하시던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은혜를 받기까지는 말소리만 들을 뿐 그분이 누구이신지는 까맣게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3] 이 보임은 상상의 보임과 같이 얼른 지나가버리지 않고 며칠 동안 그리고 때로는 일 년 이상을 끄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이 보임이 무서워져서 참다 못해 고해 신부를 찾아간 사실을 나는 압니다. 신부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보았다면서 그게 우리 주님이신지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렇다면 말해보십시오. 얼굴이 어떻게 생기셨습니까?” 그 여자의 대답은 “모릅니다. 얼굴도 뵙지 못했고, 더 이상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여자가 아는 것이란 말씀하시는 이가 ‘그분’이신 것뿐, 결코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무섭게 을러댔지만 그래도 그는 대체로 의심을 품을 수 없었고, “무서워하지 말라, 나다.” 하실 때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찌나 힘이 있으신지 듣는 동안은 의심을 하려고 할 수 없고, 그지 없이 좋으신 님과 같이 있는 것이 한 없이 즐겁고 용기는 백배로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큰 도움이 되어서 항상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고, 언제나 당신이 보고 계시는 느낌이 들므로 싫어하시는 일이란 결코 않으리라는 조심이 생기는 것을 밝히 깨쳤던 것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나 안 드릴 때나 매번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자기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당신이 바싹 가까이 게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소리가 들리는 때는 그가 뜻하지 않은 때, 그러나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의 느낌으로는 주님이 바로 자기 오른 쪽에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흔히 누가 우리 곁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아주 다르고 미묘해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어찌나 확실한지 그 확실성은 감각과 훨씬 더한 것이니, 감각은 착각일 수 있어도 이것만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에게 놀라운 이익과 결과를 끼치는 것이니, 신경병의 소치라면 그럴 수가 없을 터이고, 악마라면 이렇듯 좋은 일을 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악마의 소행일 경우 영혼은 이렇듯 안온한 평화 속에서 살거나 끊임없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욕망, 그리고 당신께로 이끌어주지 않는 것이면 일체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악마의 소행이 아님을 그가 확실히 깨닫기는 그 뒤의 일인데, 시간과 함께 그의 보임은 차차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서전 27장 참조)
제 27 장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 장에서는 주님이 영혼에게 가르쳐 주시는 다른 방법에 대해서 말하며 말을 하지 않고도 아주 놀랍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게 하신다. 또 현시와 상상적이 아닌 현시를 주님이 베푸신 데 대해서 설명한다.
1.그러면 다시 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내가 그 비탄과 고뇌 속에 이미 말씀드렸 듯이. 열렬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 때 이 길은 사람들이 너무나 수상 하다고 들 말하니 보다 더 안전한 길, 다른 길로 주님이 나를 인도 하시게끔 간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상 이것을 하느님께 간청하며 다른 길을 발견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영혼이 얼마나 양호(良好)해 졌는지 사람들이 나를 어쩌고저쩌고 말을 해서 나에게 겁을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척 시달려 있었을 때가 아니고는 항상 청원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런 소원을 갖는다는 것이 맘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아주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는데 하느님의 손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합당한 것을 알고 계시니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뜻인 것을 나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주님은 이 길을 통해서 나를 천국으로 이끌고 가시고 계심을 보았는데 그 전에는 내가 지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길을 소원해야 하고 그것이 악마라는 것을 믿지 않으려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비록 내가 그것을 믿고 소원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맘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선업(善業)을 하게 되면 이것을 위해서 내가 한 것을 봉헌했습니다. 나를 악마에게서 해방하시게끔 신심있는 성인들에게 의뢰하기로 했었습니다. 나는 9일 기도를 계속하고 새로운 신심을 가지고 성 힐라리온과 성 미카엘 천사에게 부탁을 하고 주님이 진리를 드러내시도록 말하자면 지존하신 님이 이 일을 완성하시도록 다른 여러 성인들에게 의뢰했습니다.
2. 나는 이렇게 해서 2년 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를 다른 길로 이끄시거나 진리를 밝히시거나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도 주님은 나에게 말씀을 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성 베드로의 축일을 지내던 어느 날 나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나의 곁에 계신 것을 보았는지 느꼈는지도 모르겠고 육체의 눈이나 영혼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소견에는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봤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와 같은 현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으로 처음에 큰 두려움이 엄습 되어 그냥 울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안심하게 하는 한마디 말씀을 하시자 나는 여느 때처럼 되어 태연하고 행복하고 아주 아무런 두려움이 가신 듯 사라졌습니다. 항상 나의 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상적인 현시가 아니었음으로나는 어느 형상으로 그를 봤는지 모르겠고 나는 항상 그 오른 편에 계시다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느꼈었습니다. 또 그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다 증거하시는 분이었으며 한 번도 내가 좀 잠심 하거나 무척 분심이 되어 있지만 않으면 나의 곁에 계셨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3.그 다음에 나는 아주 지친 채 즉시 고백 신부님께 찾아가 그 모든 것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내가 어떤 모양으로 봤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어떤 모양으로 뵈옵지는 않았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그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았느냐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으며, 나는 그를 명백히 보고 그를 느꼈으며, 내 영혼의 잠심은 아주 더 컸으며, 정온의 기도 중에 있었고 아주 계속적이었으며, 그 결과들은 내가 보통으로 가지던 것과 아주 달랐었고 아주 명백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이해하게 해보려고 여러 가지 비교를 하기는 했으나 물론 이런 양식의 현시에는 그렇게 척 들어맞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단계에 처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그 다음에 성인이시요, 대 인물인 알깐따라의 베드로 수사라고 하는 분이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최고의 단계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길게 말씀을 드리렵니다. 그리고 다른 대학자들도 나에게 말씀하셨으며 이곳에는 악마가 가장 끼여들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해서 조금밖에 모르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더 잘 이해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상적인 현시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 내가 육안(肉眼)으로나 영안(靈眼)으로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하고 내 곁에 그가 있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도 더 명백하게 긍정하게 되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가령 어두운 곳에 있는 한 인물과 같아 그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을 못 본다거나 만일에 그가 맹인이라면 잘 안 맞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감각으로 느끼거나 말하는 것을 듣거나 만지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에 그렇게 차이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고 어두움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태양보다도 더 밝게 영혼에게 한가지 지견(知見)을 통해서 재현될 뿐입니다. 그야 내가 태양을 본다거나 그 밝음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의 빛, 보이지 않는 빛이 오성을 비추어 영혼이 그렇게도 큰 선을 차지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는 무척 큰 선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4.이것은 특히 일치와 정온의 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느껴지는 하느님의 현존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를 하고자 할 때 누구와 이야기할 상대자를 만나는 것 같고 그 결과들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이해하는 것 같은데 큰사랑의 느낌들과 믿음과 다른 결심들의 영성적 느낌들을 아주 부드럽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요, 이런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이 기도가 극히 소중한 것이니 그것을 크게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시가 아니고 지존하신 님이 이런 방법으로써 그렇게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하시고자 하실 때 영혼에게 이루시는 결과로써 하느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동정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것이 명백히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다른 기도에서는 신성(神性)의 몇 가지 영향들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런 모든 것과 함께 우리를 동반하신다는 것이 보이고 지극히 거룩한 인성(人性)까지도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5. 고백 신부님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누가 나에게 말했느냐?"고 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가 나에게 그렇게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고 나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의 오성에 박아 주셨으며 그 이전에 벌써 그것을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를 보지는 못했었습니다. 만일 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일이 있었던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말을 하면 내가 눈이 멀었거나 아주 캄캄해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소개한다면 그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그 사람을 누구라고 분명하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론 안 보이면서도 의심할 수 없는 득이 그렇게 명백하게 한가지 지견(noticia)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이 오성에 얼마나 잘 새겨지기를 원하시는지 보이는 것 이상으로 더 의심할 수 없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시력이 어떤 때는 우리에게 환상이 아닌가 의혹을 하게 되는 때가 있으니까 그 이상 확실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런 의혹이 갑자기 일어난다 하더라도 한 편에는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몹시 확실한 채 머물러 있게 됩니다.
6.하느님이 영혼을 가르치시고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으시면서도 말씀하시는 또 한가지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아주 천상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이 체험으로써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신다면 여기서는 더 말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를 오해를 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영혼이 알아듣게끔 영혼의 아주 내부에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두시고 거기서 형상도 말의 형식도 없이 앞서 말한 이 현시의 양식으로 그것을 재현시키십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이 양식을 잘 주목하십시오. 하느님이 원하시는 큰 진리들과 신비들을 영혼이 이해하게끔 하십니다. 지존하신 님이 나에게 재현시키고자(reprsentarme) 하시는 어떤 현시를 나에게 선언하실 때 자주 내가 이해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런 이유로) 이런 이유. 그 다음 것. 다음절에 다시 시작하는데 즉시 다른 문제로 들어가 29장에 돌아온다. 말미암아 악마가 별로 개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만일 이런 이유들이 좋지 않으면 내가 속을 것입니다.
7. 이와 같은 양식의 현시와 언어의 양식은 아주 영의 것이기 때문에 감관 기능들과 감각에 아무런 잡음이 없음으로 나의 소견에는 악마가 어디로 꺼낼 무엇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이것은 가끔 아주 잠깐동안 이루어지는 것이고 어떤 때는 능력들이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감각들이 떠나지도 않고 아주 말짱한데 이러한 현시는 항상 관상(觀想)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드물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있을 때는 말하자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이 하시는 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음식물이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도 같은데 먹지도 않고 어떻게 그 속에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거기 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알아듣듯이 여기서도 그 음식물이 무엇인지 누가 그것을 거기다 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비적 말씀 하심에는 물론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거기다 놓았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그것을 본 것도 아니오, 그것이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지견(noticia)이 나에게 떠올랐던 것도 아닙니다.
8. 우리가 그전에 이야기한 "말씀 하심(habla)" 있어서는 하느님이 오성을 일깨우시어 가령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 하더라도 거기서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영혼이 다른 청각들을 가지고 듣게 하는 것 같은데 영혼이 그것을 정신차리게 해 다른데 정신을 팔지 않고 듣게 하십니다. 마치 어떤 사람에게 말소리가 잘 들리고 귀를 막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여럿이서 함께 큰 소리로 그에게 말을 하는 것과 같아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혼은 자기에게 말하는 것을 알아들으려고 주의하고 있으니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신비적 말씀 하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전번의 경우에는 다만 듣는다고 하는 그 약간의 수고까지도 다 면제되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처럼 모든 것이 다 장만되고 요리가 먹혀져 있으니 이제 기뻐할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누가 배우지도 않고 글을 읽기 위한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아무런 연구도 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 a. b. c.(가 나 다)도 하나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자기 안에 벌써 모든 지식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9.이 맨 마지막의 비교는 이와 같은 천상적 선물에 대해서 무엇인가 약간 설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영혼은 학자가 되어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와 다른 여러 가지 아주 숭고한 것들의 신비가 얼마나 환히 내다보이는지 이와 같이 위대한 것들의 진리를 놓고 신학자를 상대로 해서 감히 토론하지 못할 인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영혼은 이에 감격한 나머지 이런 은혜들의 단 한가지만으로도 그가 목격하는 분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끔 한 영혼을 온전히 감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자기편에서는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렇게 큰 선에 기능을 발휘하게 하고 그에게 비밀을 전달하며(comunica) 그와 얼마나 우애와 사랑을 교환하는지 그것을 기록하는데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은혜들에 대해서는 감탄이 하도 기가 막히고 그런 은혜를 받기에는 별로 자격이 없는 이에게 베푸셨기 때문에 아니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의혹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만일 아주 생활한 믿음이 없으면 믿어질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에 다른 것을 나에게 명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만일에 무엇인가 혜택을 보게 할 수 있는 어떤 현시들이나 혹은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다면 나에게 일어났듯이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혹은 주님이 나를 이끌어 오신 방법과 길을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말할 것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쓰라고 명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10. 그러면 다시 이와 같은 이해 양식에 돌아와 말을 하자면, 주님은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든지 이 영혼이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어떤 지견(noticia)을 갖게끔 원하시는 것 같으며 내 생각에 이렇게 천상에서처럼 거기서 말을 하지 않고도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내가 확실하게 알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은데 주님이 당신의 선성으로 말미암아 황홀 중에 그것을 보고 나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기까지는 그랬습니다). 여기서는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영혼은 이해가 되고, 다만 지존하신 님이 이해하기를 원하시는 것만으로 다른 아무런 수단도 없이 이 두 사람의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알아듣기 위해서 충분한 것입니다. 마치 현세에서 만일 두 사람이 무척 사랑하고 서로 잘 이해가 되면 비록 아무런 표시가 없이도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보진 못해도 이 두 애인들이 아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대함에 말하듯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 될 것인데 나는 거기에 그렇게 써 있다고 들었습니다.
11. 아! 하느님의 놀라우신 친절이여! 내 영혼의 눈처럼 그렇게도 시력을 잘 사용하지 못한 이 눈으로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게 두십니까? 주님, 이 시력이 천한 것들을 이미 안 보는 데 길들어 당신을 뵈옵는 것밖에는 아무 것에도 만족하지 않다니요! 아! 인간들의 배은이여! 언제까지 그렇게 되겠습니까? 나는 경험으로써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주님이 이와 같은 경지에까지 한 영혼을 이끌어 올리시는데 대한 최소한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기도를 하기 시작하고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영혼들이여 ―끝없이 영원을 위해 획득되는 것은 접어 두고서라도― 이러한 선들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선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12.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신다는 것이 이와 같이 확실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Mirar). 한 사람도 차별을 하지 않으시고) 로마 2, 11 마태 22, 16 사도 10, 35. 모두다 사랑하십니다. 누가 아무리 비참하다 하더라도 아무도 핑계 댈 사람이 없습니다. 실상 나를 이와 같은 신분에 들어올리시며 나에게 그렇게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이 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척도는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이 영혼에게 베푸시는 현시와 은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당신의 비밀과 위대하심, 이 지상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훨씬 초과하는 향락(享樂)들을 이해하게 하시는 때에 느끼는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오락이라는 것을 일체 싫어한다는 것은 아주 마땅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쓰레기입니다. 여기다 무슨 비교를 한다는 것은 무한하게 누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끔찍하게 흉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폭포 같은 강물의 단 한 방울만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런 것과 비교를 한다는 것은 못마땅한 것입니다.)
13. 이것은 참 부끄러운 것이요, 나는 물론 나에 대해서 부끄럽습니다. 만일 천국에도 모욕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더 거기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 아주 마땅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그 많은 선과 향락들과 무한한 영광을 착하신 예수님의 희생으로만 모두 다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치레네오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주님을 도와주지 못할 바에야 예루살렘의 딸들과 함께 왜 울지도 못하겠습니까?) 두 가지 암시 루가 23, 27과 마태 27, 32. 그래 주님이 그렇게도 피를 흘리시어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것을 쾌락과 시간 소비로 즐겨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나라를 차지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신 멸시를 보상하려 우리는 허영을 가지고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잘못되게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니 절대로 그곳에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에게서 이러한 자유를 거두셨으니 신부님은) " 이러한 진리들을 큰 소리로 외치셔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하느님이 뒤늦게야 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문구이다. 다음에 책을 통해서 보게 되겠지만 내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주 괴롭습니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만 싶습니다. 그 중에 내가 여러 번 생각해 본 몇 가지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내가 이 선을 즐길 수 있는 목적지까지 나를 이끌어 주소서.
14. 이미 이런 행복을 차지하고 있는 복자들에게는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는데 비록 늦기는 했지만 어떻든 그 다음에는 자기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하느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자기의 능력과 신분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방법을 다 써서 자신을 바치기 위해 끊어 버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얼마나 특별한 영광이요,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영광도 컸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재물을 다 버린 사람은 얼마나 부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명예를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무척 경멸 되는 것을) 이 문장 전체가 복음서에 상관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즉 마태 19장 21-29, 27장 28절, 2 코린토 11, 16 등…. 보는데 기꺼워한 사람은 얼마나 영예를 받겠습니까! 지혜 자체이신 분을 사람들은 광인이라고 불렀으니 그가 미친 사람이 된 것을 흐뭇하게 여긴 사람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적습니까! 그리스도의 참된 애인들로서 영웅적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 이제는 없어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 같습니다. 오! 세상이여, 세상이여 그대를 아는 사람이 이다지도 적으니 너는 마냥 명예가 증가되게 하는 것 같으냐!
15.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우리를 학자로 취급하고 슬기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더욱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마 슬기롭게 신중을 기함에 따라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즉시 각자가 자기의 신분에 따라서 무척 조직적이요,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감화를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와 수녀에게까지도 헐고 기운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신풍(新風)이요, 약자들에게는 스캔들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척 잠심 하고 있는 것이며 기도를 하고 있는 것까지도 세상의 풍을 따라서 와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큰 열정에서 오는 완전한 것들을 얼마나 잊어버렸는지 이 시대에 있어서는 불행에 더 해를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경멸에는 주님이 이런 스캔들(惡表)을 그들 안에 큰 이익으로 바꿔 주기 때문에 말로 그것을 표현하듯 행동으로 그것을 이해하게 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스캔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악폐를 받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후회를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을 묘사해서 보여주고 싶은데 오늘날 이런 것은 어느 시대보다도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알깐따라의 복되신 베드로 수사님
16. 그런데 이제 하느님은 알깐따라의 복되신 베드로 수사님을 데려 가심으로써 우리에게서 얼마나 좋은 모델을 빼내신 것입니까! 이제 세상에는 그만한 완전을 견디어 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신체의 건강 상태가 약하고 옛날 사람들 같지 않다 고들 합니다. 이 성인은 우리 시대 사람인데도 옛날 사람들처럼 그 정신은 거대하였으며(굵직하였으며) 그와 같이 세상을 발아래 두었었습니다. 그야 비록 알몸이 되어 살지 않고 그분 만큼 그렇게 엄한 고행을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전에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세상을 이기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용기를 보실 때 그런 방법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존하신 님은 지금 말씀 드리고 있는 이 성인에게 모두 다들 알고 있듯 그렇게도 엄한 고행을 47년 동안이나 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를 주셨습니까! 나는 그것이 다 진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 생애에 대해서 약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7. 그는 나와 또 한 사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말해 주던 사람에게) (또 나에게는 그가 나에게 기울이고 있던 사랑이 원인이었는데 주님은 내가 아주 곤란에 빠져 있을 때 나에게 용기를 주고 그가 나를 위해 도움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서전 27장 3절, 그 다음 30장에 보라.)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밤과 낮 사이에 한 시간 반밖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잠을 이긴다는 것은 처음에 그가 이행했던 고행 중에 가장 힘든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잠을 이기기 위해 항상 무릎을 꿇고 있었거나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잠을 잔다는 것은 앉아서 벽에 밖아 놓은 막대기에 머리를 기대고서 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눕고 싶어도 눕는다는 것은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의 방이란 ―주지된 바와 같이― 길이가 넉자 반밖에는 안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러 해 동안에 아무리 태양이 쪼이고 비가 와도 머리에 까뿌숑을 쓰지 않았다고 하며 발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고 의복도 없이 지냈답니다. 살결에 닿는 다른 내의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겨우 거칠게 짠 모직물의 일종으로 만든 것을 걸치고, 이것도 아주 꼭 끼게 만들어 얼마나 괴로웠겠는지요! 그리고 그 위에 같은 천의 외투를 입었답니다. 그리고는 아주 추울 때는 그것을 벗어 놓고, 방문과 창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그 다음엔 자기 몸을 덥게 하기 위해 망토를 입고 문을 닫아 좀 더 바람막이에서 은신하고 있었답니다. 음식은 아주 보통으로 삼일 정도씩 먹는 것이었다는데, 내가 무엇을 그렇게 놀라느냐고 말하며 그런데 길들인 사람이면 아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를 동반하는 사람은 어떤 때 8일 간 먹지도 않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나에게 말을 했습니다. 한 번 나도 본 일이 있는데 하느님의 사랑의 충동을 받아 큰 황홀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아마 기도 중에 있으니까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8. 그의 가난은 극도에 달했었으며 극기는 어릴 때부터 시작했었는데 삼 년 동안 자기 수도회의 어느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전혀 눈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말소리가 아니면 그가 어떤 수사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곳에 가려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의 뒤를 따라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이것은 길을 갈 때도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여자들이라면 전혀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이것은 여러 해 동안 그랬었다고 하며 이제는 보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안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무척 늙어 있었습니다.) 또 그의 기력은 얼마나 쇠약해져 있었던지 마치 나무 뿌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앙상하게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높은 성덕에 겸하여 그는 또 무척 정다우셨습니다. 드물고 묻지 않으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