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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예수 성탄 "

 
 

성탄이 다가오고 있다. 성탄의 상업성은 날로 더 기승을 부리면서 교회 안에도 은연중 침투하고 있다. 산타클로스와 징글벨로 연상되는 그런 성탄이다. 그래서 대림절의 시작과 더불어 벌써 요란한 성탄장식으로 대림의 의미도 실종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요한복음 첫머리에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라는 말씀은 성미술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성미술과 우상숭배를 혼돈하고 있는 우리나라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교회의 성미술을 우상숭배의 차원으로 공격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에서 성미술은 성서적 내용을 시각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는 면에서 또 다른 의미의 멋지고 감동적인 한편의 강론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15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화가였는데, 생전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를 만큼 명망있는 화가였는데, 이 주제의 접근을 통해 성서의 시각적인 차원을 너무도 명쾌하고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예수 성탄이라는 정감적이면서 대중적인 주제를 통합된 신앙의 차원에서, 아주 깊은 사색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경쾌한 성탄 풍경의 선사가 아닌 깊은 성탄 신학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아주 드문 구상으로 성탄 말구유 앞에 엉뚱하게도 성당의 아치를 배치했다. 보통 이 주제의 작가들은 말구유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작가는 성서적 내용이 섬세히 조각되어 있는 우아한 아치의 배치를 통해 성가족이 탄생하신 주님을 경배하고 있는 말구유를 어떤 기념물이나 조형물이 아닌 성당이란 발상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성전이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곳이라면,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신 말구유야말로 더 없이 휼륭한 성당이라는 착상으로 아치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치가 시작되는 양 기둥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성기 부분을 가린 채 서 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아담과 이브가 범죄 후 취했던 몸짓이다. 즉 죄를 지음으로 죄의식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의 뜻을 어겨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청춘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담의 모습은 만고풍상을 겪은 늙은이의 모습이며, 이브 역시 아담을 유혹했던 요염함을 풍기는 농염한 모습이지만 삶의 생기를 상실한 허탈한 여인의 모습이다. 위의 대리석 아치에는 6개의 조각이 있는데, 아담의 범죄 후 전개되는 서글픈 모습들이다. 창세기는 이 추방으로 시작되는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 자식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6-17)

 

이 장면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비극은 이들이 낳은 자식 카인이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하느님은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 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은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4,12)

 

예수 성탄의 내용에서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실낙원이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성서적 사색의 표현이다. 로마서 5장은 구원자 그리스도의 역할을 아담과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서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는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12-13.18-19)

 

요셉과 마리아

땅바닥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 곁에 성모님과 요셉이 무릎을 꿇고 아기를 경배하고 계신다.

요셉의 표정은 구세주를 만났다는 마음에 더 없이 흐뭇하고 푸근한 표정이다.

 

신발

헌데 요셉이 무릎을 꿇은 앞에 요셉이 벗어둔 신발이 있다.

이것은 구약의 탈출기에 나타나고 있는 모세가 야훼 하느님을 만났을 때의 정경과 일치시키고자 한 것이다. "모세가 보러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5-6)

 

요셉은 지금 땅위에 누운 이 아기가 아담의 범죄로 상실한 낙원을 되찾아 줄 인류의 구세주임을 알아보고 마치 모세가 하느님 앞에서 취했던 것과 같은 자세로 그 아기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일부 역사에 무지하고 편협한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이 신자들에게 성서를 보급하지 않았기에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은 성서와 거리가 먼 그런 성해공경과 같은 미신행위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주장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독일에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1450년이었으며,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이 인쇄술을 이용해서 성서를 대량 보급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전에 성서 보급은 필사에 의존했기에 보급 속도나 물량에 있어서 제한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수도원이나 뜻있는 신자들의 성서 연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기에, 작가의 이 표현은 당시 교회가 얼마나 성서 이해를 정확히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가 된다.

 

천사 사진

성모와 요셉 곁에 네 명의 천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다. 주님 성탄을 전하는 루카 복음에서는 주님 성탄을 목자에게 알린 이들이 천사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라는 찬미를 바쳤다고 되어 있다. 이 천사들은 성서의 이 내용을 상기시키는데, 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입은 옷이 바로 당시 성직자들이 입던 비단으로 짠 코프라는 옷으로서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천사들은 천상적 존재이긴 하나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기에 우리 가까이 있는 사제들처럼 너무도 친근한 존재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 뒤 목동들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 놀라운 사건을 마음에 되새김하고 있다. 이 목동들은 관객들의 시선을 마굿간으로 모이도록 인도하고 있다.

 

 예루살렘

말구유 뒤편엔 도시가 보이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시다가 마지막으로 성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실 수난의 장소이며 주님 사명이 완성되는 영광의 장소인 것이다. 작가는 이 한 편의 작품 안에 자신의 성서적 신앙을 압축 요약하고 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되어 탈출기를 이어 신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성탄 일화와 복음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주님 수난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치 잘 준비된 강론처럼 너무도 명료하게 주님 성탄의 성서적 의미성을 관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기둥에 있는 인간 군상 

작가는 성서의 여러 부분을 인용하여 성탄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칫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관객들의 관심을 살짝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재치있는 설정을 성전 아치의 기둥 아래에 해 두었다. 즉 기둥의 양쪽 밑에 남자 둘이 힘겹게 기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둘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힘겨운 인생살이를 꾸려야 하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상징하고 있다. 어려운 인생살이나마 구세주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세의 고통은 견딜만하다는 격려를 아울러 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연상시킨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18-21)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상업적 축제 분위기에 편성해서 솜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남는 것이 없는 허망한 성탄을 보내기 쉬운 우리들이 곱씹어야 할 성탄 메시지의 알맹이를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