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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 관상과 절정과 천한 속사 "


*   관상의 절정과 천한 속사俗事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이 부富로 변하고, 자연과 은총은 서로 대립되기는 커녕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또한 피조물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창조주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준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이러한 영적인 삶의 기적을 통찰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한편 관상의 시인이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생활은 다른 모습을 띤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영혼의 능력과 하느님과의 순결한 합일만을 남겨 두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이 영혼의 능력이 하느님 안에서 그 순수한 활동응 얻기 위해 차차로 그 감각적 사용에서 이탈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영혼의 능력들의 감각적 사용은 우리를 아직도 이 지상에 얽매어 놓는다. 그 감각적 사용은 영적 사용과 관련시켜 볼 때, 하나의 상징인 동시에 하나의 접근이다.

성녀 데레사와 성 요한의 사상을 함께 종합해서 보지 않는다면 가르멜 정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두 영혼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상반되는 점도 있지만 두 가지 공동 사명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깊고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두 영혼은 서로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꿰뚫어 보았고, 서로 경탄했으며 경쟁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철학적 명상이 절대자와의 신비적 일치의 완성 안에 사라져 버리는 절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녀 데레사는 가르멜 수도회의 혁신가였다. 그녀는 성 요한과 똑같이 자기를 의심하는 관리 앞에서 자기 신앙의 정통성을 고백해야 했고, 하느님께서 위탁하신 소명을 이행하기 위해 몰이해와 의심과 협박과 박해을 참아야만 했다. 그녀가 받은 능력과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백절불굴의 용기, 그리고 완전한 복종심과 개방성은 - 이 복종심과 개방성으로 그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고 원하시는 것을 귀담아 들었다. - 모든 것을 참아 견디고 결코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며 패배를 용납치 않을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책임진 이 단체에서 오는 온갖 어려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 중에서도 수도회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도록 기강을 활립하는 데 노력했으며, 자신이 맡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육체와 영혼으로 다 느꼈다. 그녀가 책임지고 있던 공동체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근심 걱정을 끼쳤으며, 자주 되풀이되는 크고 작은 걱정들도 언제나 그녀를 괴롭혔고 기진 맥진케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을 항상 비추어 주고 힘을 준 - 비록 어떤 감각적 표시로도 그것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던 - 하느님의 현존은 극히 사소한 일에서까지도 그녀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책임진 영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불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규칙에 순종할 것을 동의했다 할지라도 열심의 부족이나 또는 과도한 열심으로 규칙에 불규칙하게 되지 않을까, 혹은 문자文字를 정신보다 더 중요시하지나 않을까 늘 걱정하였다. 또 인위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내적 솔선을 - 이 내적 솔선이야말로 규칙에 의의를 주고 결실을 준다. - 그들 자신 안에서 찾아 얻는 데 실패하지 않을까 근심하였고, 그들에게 해방감을 안겨 주어야 할 규칙이 멍에와같이 생각될까 봐 걱정하였다. 또 하느님이나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애덕이나 신앙심에 스며드는 자애심의 - 자애심은 미묘하게 우리 모든 행위에 뒤섞여 그것을 가려내기는 극히 어려우며 언제나 영적 완성을 위협한다. - 온갖 미묘한 움직임에 대해서 근심했음은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데레사 성녀는 이 비루하고 역겨운 자애심에서 오는 난관을 누구보다도 더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자애심을 볼 수 있는 이 세상을 개혁하려 하는 숭고한 활동 안에서까지도 떼어버리기가 어렵다. 차차 식어 가는 영적 생활의 불길을 다시 그 시원始原으로 이끌어 가려 할 때, 이 성녀보다 더 절실히 반항하는 관습과 이견과 허영 등을 느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또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생활을 위한 노력과 공동생활의 요구를 조화시키려 할 때, 또 하느님께 봉헌된 실존을 성화하려는 열정과 물리적 조건 - 이는 언제나 영혼의 활동을 저지하려 한다. - 을 조화시키려 할 때, 우리가 극복해야 할 온갖 반발을 성녀 데레사보다 더 절실히 느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갈등과 직접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곤란도 그녀의 영혼이 머물러 있던 관상의 절정에서 그녀를 끌어 내릴 수는 없었으며, 그녀의 활동도 그녀의 관상 생활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모든 갈등이 그녀에게는 관상 자체에 대한 시금석試金石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효능과 가치의 증거가 되었으며, 아마 그 관상을 결실께 한 유일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성녀 데레사는 관상 생활과 활동 생활이 절대로 분리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녀보다 더 높은 관상에 도달한 영혼도 드물며, 그녀만큼 인생이 우리에게 짊어지우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의무에 시달린 영혼도 드물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 두 가지 삶이 아마 단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관상과 활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관상은 터무니 없는 공상에 불과하거나 제 구실을 못하게 될 위험이 많을 것이며, 또 관상없는 활동은 순전히 맹목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될 위험이 많을 것이다. 이 두 삶이 융합하는 곳에서 마르타의 삶과 마리아의 삶은 하나가 된다.

성녀 데레사의 예例는 관상과 활동의 합일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 아니라 영성을 형성함에 있어 여성의 역할을 생각하게 해준다. 관상과 활동의 분열은 남자들 한테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남자의 활동은 언제나 전문적인 행태로 나타나며, 분업은 남성적 활동의 법칙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까지도 여성은 일반적인 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이 일반적인 활동은 여성을 유지해 주는 내적 비약에 의한 사랑을 더 많이 요구하며, 매일매일의 현실존現實存에게는 필요한 일상적이고 친근한 일이 되어 버린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둘 다 전형적인 여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과, 그러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두 과업이 이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데 대해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여인의 속성은 이 두 과업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마리아는 더 좋은 몫을 차지했는데 이는 마르타가 혼자서 자족自足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타의 불평을 정당한 것이 되게 해서는 안되었다.

성녀 데레사의 예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행한 역할을 묵상케 한다. 성녀 샹탈은 우리 여성들은 남성들과 달리 지식보다는 많은 겸손과 단순성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비약과 애정과 온화함이 영적 생활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성모 마리아의 덕행은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가 된다. 복음에 나타난 여성들의 활약에 감동한 영국의 어떤 저술가는 루가 복음의 여러 구절을 해석하며 말하기를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여성들은 남성들과 천사들보다도 먼저 기뻐했다"고 했고, 또 이어서 "나는 복음에서 어느 남자가 예수께 돈 한푼이라도 드렸다는 사실을 읽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를 따랐고 모든 정성을 다해 그를 도와 드렸다. 자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은 것도, 예수의 무덤에 가서 그 몸에 향유를 바른 것도 역시 여성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것도 여성이었고,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부터 무덤에 묻히실 때까지 무덤 옆에서 돌아가신 스승의 모습을 지켜 보던 사람도 역시 여성이었다. 부활하시던 날 아침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역시 여성이었고,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한 것 역시 여성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