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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 스페인의 아빌라 "

■ 아빌라(AVILA)

‘성인의 도시’ 아빌라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8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작은 도시이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시로 아직도 로마식 성벽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아빌라는 해발 1,131m의 높은 위치로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간에 300년 동안이나 공방전을 계속한 곳이며 파괴와 수리를 되풀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된 때가 1099년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400m, 높이는 12m. 중세적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빈센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 그리고 13세기부터 르네상스까지의 조각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 등이 있다.
역사상 아빌라가 낳은 최고의 인물로 성녀 데레사가 있다. 1515년, 유다 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가서 하 느님의 사랑에 가까이하기 위한 영혼의 완벽화를 추구하며 보다 엄격한 수도 규율로의 개혁을 추진하고 별도의 카르멜리타스 데스칼사스 (Carmelitas Des Calzas, 맨발의 갈멜회)를 만들었다. 그것은 엄동설한에도 샌들만 신고 다닌데서 유래하는데, 데레사는 하느님과 영혼과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열정이 극에 달하면 몸이 바닥에서 떠올랐다고 한다. 그녀의 종교 활동의 발자취는 거리의 도처에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서깊은 곳으로 산타 데레사 수도원, 엔카르나숀 수도원, 산 호세 수도원 등이 있다.


◆ 성벽(murallas)
중세 성벽은 유럽 각지에서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완벽하게 같은 모습으로 현존하는 것은 드물다. 주위의 전장 2.5Km, 탑수 90, 출입문이 9개소이다. 성벽일부는 로마시대의 요새의 흔적이 라고 하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11C 말이다. 성벽 내측에는 대성당, 산타 테라사 수도원, 산 후안 교회, 빠라도르 등이 있다. 돌 성벽은 높이 12m, 폭 3m이며 위로 올라가는데는 카르보 소테로 광장 부근이 좋다. 성벽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황색과 적색으로 변화하여, 색다른 정경을 자아낸다. 이것을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선 사라망카 방향 2.5Km 지점의 로스 쿠아토르 포스텔 전망대가 좋다.


◆ 아빌라 대성당 (Avila Catedral)
아빌라는, 스페인 중앙부 그레도스 산지의 북쪽 기슭에 있는 해발 1,000m의 고원도시며, 아빌라현의 현도다. 로마의 식민도시 아빌라에서 비롯되는데, 사도 성 베드로의 제자가 전도한 곳이다. 714년의 이슬람 점령에서 부터 11세기 말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 회복 전쟁까지 양 세력의 최전선에 위치하여, 11세기 후반에 국왕 알퐁소 6세의 사위인 우르고위 백작 라이문도가 도시를 지배하는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 북부로부터 그리스도교도를 끌어들였으며, 1090년부터 9년에 걸쳐서 2,000명을 투입하여 높이 12m, 평균 너비 3m, 둘레 2,526m의 시벽으로 도시를 완전히 둘러쌌는데, 타원형 탑이 88개소, 성문이 9 개소가 있었다.
1120년경에 주교좌가 설치되었으나 대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착공하여 16세기에 완성됨으로써 명실공히 리지외 교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당은 시벽의 반원형 탑을 형성, 시벽 밖을 향해서 무게있게 자리잡고 있어, 요새의 본진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아빌라 대성당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대데레사가 출생한 곳에 세워져 있음은 물론, 일찍이 갈멜 수녀회를 중심으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나서 수도자의 엄격한 규율과 경건한 생활이 널리 알려졌으며, '성인들의 아빌라'라는 소문과 함께 수도자가 늘어났고,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분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아빌라 대성당은 1090년 아빌라 성벽 건설과 함께 알바르 가르시아의 설계로 착공하였다. 12세기 착공 14세기 낙성(준공)이라는 연대에서 보아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양식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축조된 성당 벽은 한눈에 구별되는 여러 종류의 벽돌이 사용되었고, 좌측량의 소성당은 후년에 증축된 것으로 르네상스 양식이 완연하다. 정면 출입문 왼쪽에 우람한 종각과 쌍 종각 위에 왕관 탑이 씌워져 있고 오른쪽에는 종탑 부분이 미완성인 채로 있다. 외부의 위엄 있는 느낌과는 달리 내부는 교회다운 분위기로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로마네스크 중앙 제단은 15세기의 거장 페드로 베르게테의 최후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성녀 대데레사의 생가 성당
시의 남쪽에 있는 데레사의 생가 터에 1636년에 건립된 바로크식 성당으로, 데레사가 태어난 방이 성당으로 되어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15-1582)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한 성녀로 ‘예수의 데레사’ 로 불려진다. 축일은 10월15일.
성녀 대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신심이 두터운 귀족의 딸로 탄생했다. 그러나 12세 때 어머니를 여윈 데레사는, 성모상 앞에 꾾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자기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돌봐주는 어머니도 없고, 또 많은 사람들의 나쁜 표양 때문에 세속적으로 흘러감을 염려한 아버지는 그녀가 14세 때, 아우구스티노 수녀원에 위탁하여 교육을 시켰다. 데레사는 그곳에서 자라며 차차 마음이 바로 잡혀가는 중에 병에 걸려 친가에 요양하러 가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요양하면서 성 예로니모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세 때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완덕의 길을 닦기 시작하였다.
성녀는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을 그린 상본을 쳐다보고 또 성 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에서 받은 감명으로 크게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자기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레사의 신비 생활의 기본인 것이다. 성녀의 이런 생활은 바울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라는 말씀과 상통하고 있다.
성녀 대 데레사는 신비신학의 기초로서 신비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無)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라는 사상이다. 영성적으로 점차 깊은 신비체험을 가져 "영적 결혼"의 상태를 경험하였다. 이렇듯 데레사는 영혼을 신비계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가르멜회의 개혁에 착수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니 다른 수도회의 모범이 되었다.


◆ 엔까르나숀 수도원 (Convento La Encarnacion)
아빌라 성벽의 북쪽 300m에 있으며, 1515년 4월 4일 문을 열었는데, 이 날은 데레사가 세례를 받은 날이기도 하다. 데레사는 이 수도원에 입회하여 27년간 수녀생활을 하였고, 이곳을 떠나 산 호세(성요셉) 수도원을 설립, 운영하다가 다시 이 수도원에 돌아와 14년간 원장직을 지냈다.
데레사는 1555년과 1556년 사이에 환시를 보고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는 데, 너무도 두렵고 벅차서 불안에 떨었다. 아빌라의 고해 신부 겸 상담자인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에게 영적 지도를 받은 후, 그 환시가 진실임을 확신하게 되어 반대를 무릅쓰고, 그 당시의 다소 해이해진 수도 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봉쇄생활을 원하는 수녀들을 위하여 아빌라에 성 요셉 수녀원을 세웠다.
1567년 갈멜 수도원의 총장인 루베오 신부가 성 요셉 수도원과 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다른 수도원을 세우도록 그녀에게 허락하여, 메디 노 델 깜뽀에 제2의 수도원을 세울 때 청년 수도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만났다. 1568년에는 두렐로에 남자를 위한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는 데, 이것이 최초의 개혁 갈멜 수도원이다. 데레사는 스페인 전역을 순회, 갈멜 수도원의 개혁에 전념했으나 1575년의 총회가 그녀의 개혁활동을 제한하였다. 1580년까지 갈멜 수도원 내부에는 보수파와 개혁파 간에 투쟁이 격심하였으나, 이윽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맨발의 개혁파를 독립관구로 인정하게 되었다.
데레사는 수많은 편지와 저서를 남겼는데, 영성문학의 고적이 되어 오늘날 널리 읽혀지고 있다. 신비가의 한 사람인 데레사는 지적이고 빈틈없는 분으로서, 깊은 영성을 지녀 차원높은 관상생활과 실천생활을 성공적으로 조화시킨 위대한 성녀다.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선종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최초의 여성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스페인 도처에서 성녀 데레사의 행적이 기려지고 있는데, 특히 엔까르나쑌 수도원에는 역사적 유품과 기풍이 이어지고 있어,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성녀 대데레사


성녀는 1536년 까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다음해 첫 서원을 했다. 1560년 데레사는 개혁 까르멜 창립을 결의하고 그 작업을 진행하여 1567년 8월 15일에 메디나 델 깜포에 드디어 수도원을 창립하게 된다. 이 때 십자가의 성 요한 수사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음해인 1568년 11월 28일에는 십자가의 요한 수사에 의해 까르멜 남자수도원이 창립되었다. 성녀는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17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데레사 성녀는 개혁가와 조직가, 영성가로서 교회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575년부터 까르멜 안에서 개혁파와 보수파간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온갖 박해가 있었는데 강생 수녀원 55명의 수녀가 파문 당하고 십자가의 요한 수사가 감금당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579년 드디어 개혁파가 보수파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얻어 박해도 끝이 났다. 그리고 1581년 개혁파와 보수파가 분리되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고통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나이다."고 하면서 극기 수덕의 길을 걷던 데레사 성녀는 1582년 10월 4일 저녁, 기쁨 중에 "주여 나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면서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17년 스페인 국회는 데레사를 스페인 주보로 선언하였으며, 사후 40년이 지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970년 9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살라망카 외곽의 '알바 데 또르메스' 수도원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녀의 심장과 팔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있다.(알바 데 또르메스 수도원은 살라망카 참조)
성녀 데레사의 저서로는 「자서전」, 「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상」, 개혁 까르멜 「창립사」, 「영혼의 성」, 「완덕의 길」, 「영적 보고」,「하느님께 외침」, 「수도원 시찰방법」 등이 있다. ‘자서전’(천주 자비의 글)과 ‘영혼의 성’ 등이 다수의 책이 번역되어 성녀의 삶과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