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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성인의 꿈과희망

' 성 프란치스코의 근본 정신 '

성 프란치스코의 근본 정신


 


그가 살던 세기를 충만케 하였고 또 오늘날에는 교회의 한계마저 초월케 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이 위대한 영향력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것은 틀림없이 그의 완전한 단순성과 이기심의 절대적인 근절에 기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완전한 단순성과 이기심에 대한 극단적인 근절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걸림돌을 제거함으로써, 우리가 관여하는 모든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해주며 그 활동을 명백하게 해준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뜻에 마음을 쓰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이 우주 안에서 우리의 지성을 밝혀 주며 우리 의지를 이끌어 주는 하느님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가르쳐 준다. 전에 양심을 분열로 이끌던 갈등은 이제 신기하게도 진정되고 우리가 긍정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인 비참한 처지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풍요함을 가져다 준다. 아직까지 투명하지 않고 어둡게만 보이던 자연은 이제는 빛으로 싸여,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대신 은총의 시녀가 된다. 시간은 더 이상 우리의 실존을 분열시키지 않고 영원을 갈망케하는 유예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영원을 우리에게 현존케 해준다. 활동은 이제 관상에 반대되지 않고 협조하게 된다. 왜냐하면 활동은 이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며, 그 창조적 의향과 협조하기 때문이다. 쾌락의 단념은 우리한테서 아무 선도 앗아 가지 않을 뿐더러,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오는 기쁨 속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어떤 여분의 것을 준다.

이제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의 여러 면을 차례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청빈이다. 청빈은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그 회의 규칙 중에서 다른 모든 덕행이 예속되어 있는 중추적인 덕이다.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넓은 덕으로서 내적 단순성과 일치한다. 이 단순성은 하느님과 구별되는 대상에는 전혀 애착하지 않고 그저 적나라하고 자유로운 우리 마음을 완전히 아무 저의 없이 하느님께 내 맡기게 하는 단순성이며, 또 세속의 모든 지혜를 무색케하는 순결하고도 거룩한 단순성이다. 이러한 단순성과 일치하는 청빈의 덕은 우리 영혼 안에 빈자리를 준비해 준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빈자리를 우리 마음 안에 준비할 것이니, 하느님께서는 이 자리를 채워 주실 것이다. 영혼이 자신의 부족함과 궁핍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풍요함을 얻게 될 것이며, 오래지 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자기네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작은 형제"라고 부른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자신을 가난하게 비우는 자)가 하느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알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네에까지 내려오실 수 있도록 마음속에 경사진 지름길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처럼 볼 수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하느님의 위대함에 대한 느낌은 자신의 미천함에 대한 느낌과 동시에 생겨난다. 벌써 겸손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그 겸손은 우리를 땅에 붙게 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예방해 준다. 그러나 이 덕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게도 해준다.

청빈은 모든 보화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다. 이 덕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가르쳐 준다. 참된 부유함이란 소유하지 못한 것을 가지러 하지 않는 것이며, 또 소유한 것에 애착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선을 포기한 자만이 자기 앞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자이다.

청빈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온갖 불안과 근심 걱정을 벗어 버릴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감정과 개인적인 책임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며, 우리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내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번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극히 섬세하고 세심한 사람에게는 이런 희생이 가장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내적 속박에서 벗어나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영적 경쾌함과 순결함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렇게 되면 우리 영혼은 안전하게 하느님께 도달하게 될 것이며 아무것도 우리를 무겁게 누르지는 못할 것이다. 청빈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태도 아니며 우리가 받은 은혜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깊은 지혜다. 청빈은 우리를 순결하게 해주며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며 그 소유물의 허구성을 일깨워 준다. 동시에 청빈은 우리에게 무한한 선을 발견케 해준다. 즉 이 선은 우리가 청빈하게 될 때에만 얻게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