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이라는 덕과 자연의 영신화는 아마도 프란치스코의 정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일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정신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정신이 우리 활동을 면제해 주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정신은 정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둔스 스콧투스(Duns Scot)는 프란치스코 학자였지만 의지의 가치를 매우 강조했다. 의지없이 어떻게 마음의 청빈을 실천할 수 있으며, 어떻게 모든 자연적 경향을 하느님께로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행운이나 자연의 선을 즐기는 사람은 외부에서 오는 것만을 유의하고 외적인 자극만을 원한다. 이런 영혼은 다른 모든 사물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대상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끼쳐진 영향의 결과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이런 영혼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영적 생활은 자유로운 것이다. 영적 생활은 외적 현상과 거리가 멀며 그 숙명도 이 외적 현상에 달려 있지 않다. 영적 생활을 하는 영혼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적 현동現動에만 마음을 쓴다. 이 내적 현동은 각 사람에게 본존재를 준다.-인간을 '창조된 창조자'라고 한다. 왜나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로 이 현세계를 설계해 나가며, 아울러 영적 자아를 형성해 나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 의지의 선용으로 자신에게 존재를 주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현동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전히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이 현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현동은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 아무것도 무시하지 않고 모든 것에서 이탈하여 소유를 단념하는-그러나 사랑의 현동을 통해 소유를 끊임없이 초월하기 위해-자만이 참으로 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자신 안에 안주케 하는 안일함과 한가함을피애야 한다. 악마는 이런 한가함에 틈타서 우리 안에 잠입하기 때문이다. 청빈은 우리에게 일하고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
프란치스코 정신이 지식보다 활동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활동을 통해서 참된 인식을 얻으려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는다. "사람들은 활동하는 그만큼 안다" "활동과 관상은 결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관상은 단지 부동적이고 순수한 활동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를 들어 높여 주는 것은 활동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활동이 순전히 수단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 진다. 활동은 순전히 지향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활동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 그 성공이나 실패에 구애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새가 쪼아먹지나 않을까 하여 씨를 뿌리지 않는 자들과같이 되고 말 것이다. 활동의 최고 가치는 언제나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모방하는 데 있으며 그 의향과 본질에 참여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니 우리의 활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이 당신의 창조 사업을 수행하도록 하신다. 성 프란치스코의 성덕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그저 감미롭고 체념적이고 세심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단호하고 민첩하며, 정열적이고 모험적인 백절 불굴의 강인한 정신이다.
◎정적주의靜寂主義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정상적인 완덕의 길을 무시하고 그릇된 길을 주장하는 일종의 신비주의이다. 정적주의자들은 신비로운 죽음이라하여 모든 것을 완전히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고 하고 구두로 이루어지는 기도나 묵상 기도까지도 필요 없다고 하고, 모든 외적 종교행위를 부정하고 다만 관상만을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필요도 없고, 죄의 사함이나 하느님의 은총을 빌 필요도 없다고 하며 선종을 위해서도, 죄인들의 회개나 연옥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 죄악을 거슬러 싸울 필요가 없고, 완덕을 위한 노력도 필요 없으며, 다만 완전히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적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이론가였고 실천가였던 몰리노스(1928~1696)에 의하면 완덕에 이른 사람도 중한 죄를 밤할 수 있으나 이런 경우에 그 죄악은 악마의 것이며, 완덕에 이른 영혼을 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아 경시나 하느님께 대한 위탁을 증진시킬 뿐이라고 한다. 몰리노스는 1687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11세 때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68항에 이르는 오류에 빠져 있다는 언도를 받았다. 그는 이 종교 재판의 판결에 승복하고 자기 주장을 취소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한 수도원에 감금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