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눈을 땔 때 우리 앞에는 자연의 장관이 펼쳐진다. 그러나 과연 자연 안에는 나쁜 원리-끊임없이 우리를 기만하려 하고, 신의 은총이 작용하려는 것을 막으며,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있게 하고, 또 우리가 영적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대항해서 싸워야 할-가 없단 말인가?
성 프란치스코는 이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 그는 피조물을 창조주와 대립시키려 하지 않았다. 자연은 부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의지가 그것을 부패시켰을 따름이다. 자연에도 물론 양면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때로는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를 엿볼 수 있으니, 어디서나 자연의 무구함과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연 안에서 단지 야수성과 무질서와 죄악의 흔적만을 볼 수도 있으니, 이는 우리가 자연을 그 원리에서 분리시켜 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런 삶의 내적 움직임들이(여러가지 걱정들이) 하느님께 불충할 때 그것들은 시정되고 변형되어야 한다. 하느님과 자연과 삶 사이에는 어떠한 적대성도 없다. 그것은 자연과 삶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모두 다 하느님을 섬기고 그의 영광을 기리는 데에 그 존재 이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이들을 거슬러 싸울 필요도 없고 제거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장려하고 정당한 것으로서 증거해야 할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이 세상은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합창단이 될 것이며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의 전당이 될 것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한다. 성 프란치스코도 친히 태양과 피조물을 찬미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로 하느님의 피조물로써 사랑해야 할 것이며, 청빈의 정신으로써 사랑해야 한다. 청빈의 정신은 소유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을 없애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비로소 자연은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의 궁극 목적을 향해 걸어가야 할 길의 안내역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안에서 타락의 흔적만을 찾아보지 않고 구원의 표시를 찾아보도록 해주는 데 있다. 어떤 수덕가修德家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에 대한 공포증에는 종종 자애심과 불순함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대로의 순박한 삶에 대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은 정신의 비약을 위한 증거와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가 범신론적인 자연주의에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는 영신을 자연화하지 않고 도리어 자연을 영신화했다. 특정 사물에 애착하려는 동일한 갈망은 또한 우리를 거기에서 이탈시킬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는 이 개별적 대상들을 통해 우리를 피안에로, 즉 이것들을 유지하고 지탱해주는 절대자에게까지, 또 이것들을 비추고 있는 빛의 원천에까지 옮겨다 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에 사물들의 물질성은 사라지고 영적인 뜻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에게서 요구하는 쾌락을 줄 수 없게 될 것이며, 다만 관상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영원한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게게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사상이 너무나 쉬운 체념을 설교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에 대한 어떤 태도가 더 바람직 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기로 하자. 맹목적이며 반동적인 자연을 그저 포기해 버리는 태도일까? 아니면 이 자연을 정화하고 투명하게 하여 하느님의 모습 그 자체가 되도록 하는 것일까? 혹은 욕망을 단순하고 결백하게 하여 의지로 하여금 그를 따르고, 은총으로 하여금 그를 완성케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