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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및 세계교회현황

' 일본의 오우라성당 / 꼴베 기념관 "

오우라 성당(大浦天主堂)/꼴베 신부 기념관(일본)

일본의 국보 오우라 성당
일본 최고의 가톨릭 교회 국보로 1864년 프랑스인 선교사 프티잔신부에 의해 건립되었다. 하얀 벽면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래스가 잘 조화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1864년 2월에 축성식을 봉헌하였는데, 3월에 세 여인이 프티잔신부를 찾아와서 여기 저희들도 신부님과 같은 신앙입니다 하며 은밀히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 뒤 우라까미등에 잠복해 있던 신자 약 1만명이 교회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 성당을 건립한 프티잔 신부는 1866년 일본주교로 임명되었다. 오우라 성당 우측에는 일본 최초의 신학교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나가이 박사 및 콜베 신부 유품전시기념관

나가이 박사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자기 몸은 오랫동안 방사선과 조교로, 의사로, 교수로 일하면서 너무 많은 방사선을 쬐였고, 게다가 원폭의 피해도 함께 입어서 백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폐허가 된 나가사키를 재건하고, 방사능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나가이 박사는 자신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백혈병이란 불치병을 갖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가족을 잃고 인생을 포기하려는 수많은 시민들, 불치병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며 삶에 의미를 갖게 해주는 일을 잘 감당해 왔다. 백혈병으로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계속 집필활동을 하며, 그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고아가 될 두 자녀를 위해 쓴 글이 있다.
핵폭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나가이 박사는 자신은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사람임을 발견했다. 바로 자기 곁에 계신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동행하면, 사막 한가운데서도 에덴 동산의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콜베 신부
라이문도 콜베는 1894년 1월 8일에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줄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브스카의 둘째 아들로 탄생한다. 1910년 16세에 라부프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하고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는다. 1912년에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공부를 시작하고, 1914년 11월 1일 세라피꿈(프라치스코회 국제신학대학)에서 종신서원을 한다.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비밀 결사단인 프리메이슨에 맞서 싸울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군대’를 생각하고 1917년 10월 16일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한다. 1918년 4월 28일 사제로 서품되고 그 다음 날에 기적의 메달 성모님이 유대인인 알퐁소 라티스본네에게 발현하신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로마)에서 첫미사를 봉헌한다.

신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19년에는 조국에서 성모기사회를 창설하지만 폐결핵으로 두 번 휴양기간을 가진다. 1922년에 최초로 「성모기사」가 창간되고 1927년 10월에는 바르샤바 근처에서 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한다. 니에포칼라누프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온전히 봉헌된 프란치스코회 공동체로 1939년에는 15채의 목조건물과 1채의 블록 건물로 성장하면서「성모기사」의 발행부수는 백만 부에 이른다. 더 놀라운 일은 700명이 넘는 수사들이 이루어내는 기도와 침묵의 삶이다. 기계들도 하느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곳, 모든 것이 전례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니에포칼라누프이다.

1930년, 니에포칼라누프가 발전하기 시작할 때 콜베 신부는 아시아 선교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나가사키에 도착한지 한 달 만에 일본어「성모기사」를 일만 부 발행하고 이어서 소신학교를 세우며 무젠자이노 소노를 이룬다. 1936년에 폴란드 관구는 콜베 신부에게 니에포칼라누프의 원장직을 다시 맡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1939년 9월 19일에 1차로 독일 나치 헌병에게 체포되고, 1941년 2월 17일에 2차로 체포되어 5월 28일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된다.

1941년 7월 말경에 아우슈비츠의 소장인 프리치는 14A 블록의 죄수 한 명이 탈출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아사 감방에서 죽을 10명을 뽑는데 콜베 신부는 그 중의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를 대신하여 죽기를 원한다. 13블록의 지하 아사 감방의 죄수 아홉 명은 착한 목자의 보살핌으로 평화롭게 하늘나라로 간다. 마지막에 남은 콜베 신부는 그들이 놓은 독약 주사를 맞고 8월 14일에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다음 날인 성모 승천 대축일에 화장된다.

1971년 10월 17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복자로 선포한다. 1982년 10월 10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한다. 콜베 신부가 생명을 구해준 가조브니체크는 시성식에서 마치 콜베 성인을 뵙듯이 교황님의 품에 안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이 돌아가신 아사 감방에서 ‘어려운 우리 세기의 수호자’께 사랑의 꽃을 봉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