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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 사세타 '


제목 :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1437) 작가: 사세타 (Stefano di Giovanni Sassetta: 1392? -1450) 규격 : 88X 52cm: 템페라 목판화 소재지 : 영국 런런 국립 미술관

오상 체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의 절정 체험이기에 여러 화가들이 다룬 주제이다. 성인에 있어 오상은 결코 기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고픈 극단적 열망의 확인과 같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기적이라는 데 비중을 두기보다 그가 얼마나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수행을 통해 그가 중세 영성의 정점인 그리스도를 닮음(Imitatio Christi) 이라는 목표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오상 사건은 성인이야말로 명실상부한 “ 제2의 그리스도”라는 강하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성인에 관한 전기 여러 곳에 이것이 제시되고 있는데 <잔꽃송이>에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1213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동틀 무렵 라 베르나 은둔소에서 지내시던 성인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친다. “내 주 그리스도여 구하오니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소서. 먼저 제가 살아있는 동안 제 영혼과 육신에, 사랑하는 당신 예수께서 가장 괴로웠던 수난시간에 견디어 내신 그 고통을 기꺼이 견디어 내실 만큼 불타올랐던 넘치는 사랑을 제 마음에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주소서.”

이 기도가 응답되어 하늘로부터 찬란하고 불타는 여섯 날개를 가진 한 세라핌 천사가 내려와서 그의 육신에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놀라운 모상(模像)과 인간(印刻)을 남겨 놓았다.

성인은 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오상을 몸에 지닌 살아있는 십자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중세기 여러 작가들이 이 주제를 다룬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15세기 시에나(Siena) 학파의 대표적 작가인데, 이 학파는 동방의 비잔틴 예술과 서방의 고딕 미술의 정수를 뽑아내어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처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에 이 학파의 그림은 그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시에나는 대중 설교가로서 예수 성명 공경 운동을 통해 프란치스칸 개혁 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셨던 베르나르도 (1380- 1444)성인이 활동하시던 도시이기도하다.

시에나는 당시 베르나르도 성인의 활동에 의해 도시 전체에 회개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던 때라 영적 활기 또한 대단했기에 작가는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진면모를 표현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작가는 시에나 학파의 선배 작가들의 기법을 정확히 전수했으나, 이 작품은 그리스도 삶의 절정체험인 수난과 연관되는 것임을 감안해 화려한 색채 처리와 우아한 선 처리의 방법에서 과감히 이탈해서 가난과 겸손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성인의 모습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파격적으로 단순한 구성과 색깔처리를 했다.

시에나는 이웃 도시인 피렌체와 쌍벽을 이루던 도시였으나 , 중세기에 와서 피렌체가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면서 르네상스로 진입한 것과 대조적으로 고딕 양식에 머물게 되었기에 오늘 이웃 두 도시는 성격상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작품의 색깔은 붉은색 벽돌 건물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시에나 양식에 어울리는 것이다.



성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위로 주님께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의 모습으로 그를 향해 오고 계신다. 제일 윗부분을 푸른 창공에서 붉은 형상의 주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성인에게 내려 오시는 것으로 배치한 것은 오상 사건은 바로 주님과 일치되며 중세 영성의 큰 관심이었던 그리스도를 닮음(Imitatio Christi)의 완벽한 모형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샤야 6장에 세라핌 천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 다녔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이처럼 여섯 날개를 가진 존재로 설명되는 세라핌(Seraphs) 천사는 하느님 곁에서 그분을 보위하며 섬기는 존재로 나타나며, 작가가 활동하던 15세기 부터는 이 천사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 부대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린 형상의 주님을 모시고 성인에게 다가오고 있다.

세라핌 천사는 케루빔(Cherubs) 천사와 다른 역할이 있는데, 세라핌은 지(智)의 천사로 푸른 색으로 나타나는 반면 케루빔 천사는 사랑의 천사로 붉은 색으로 나타나는데, 푸른 하늘에서 붉은 모습의 천사의 옹위 속에 오시는 십자가에 달린 모습의 주님은 이사야 서와 창세기(3: 24)에 나타나고 있는 엄위로운 하느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는 오상 체험은 신기한 기적 사건이 아닌 하느님의 내림 (Theophany)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섯 날개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이 작품 전체를 흐르면서 오상은 지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천상의 사건임을 전하고 있다.



생애 말기 성 프란치스코가 라 베르나를 찾았을 때 그는 심한 정신적인 갈등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가르친 제자들 중 여럿이 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으며, 형제들의 수효가 많아지면서 형제회의 경향이 자기가 걷잡을 수 없이 다른 방향으로 잘못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크게 실망하고 자기의 일생이 실패로 끝나는 것 같은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 방황의 의미성을 확인하기 위해 라 베르나에 칩거하며 기도하는 성인에게 주님께서는 천사의 옹위를 받으며 오셔서 성인의 갈망인 오상을 박아 주셨다.

성인의 뒤에 있는 교회는 산에 가려서 빛을 받지 못해 문이 캄캄한 모습으로 있는데 이것은 영적 생기를 상실한 성인 당시의 교회의 상징이다. 중세기의 교회는 빛이신 주님을 전하는 교회가 여러 세속 사정에 연루됨으로서 겉으로는 대단히 막강하면서도 주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겉만 멀쩡한 쭉정이가 된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성인의 시선을 다음 사진에 나오는 십자가에 고정시키고 계실 때 성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내려 오신다. 그런데 성인이 주님의 빛을 받고 있다는 표식은 무릎을 꿇고 계신 성인에게서 조금도 드러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너무 평범하고 다른 것과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성인이 빛을 받고 있다는 표식은 성인의 뒷면 그림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떠나온 교회와 라 베르나 언덕 사이에 조그만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손을 들고 계신 성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주님께서 실망으로 어두워진 성인의 마음을 희망의 빛으로 채워주신다는 표식은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으며 드리워진 그림자로서 드러나고 있다. 마치 주님의 부활이 철저히 인간적인 실패와 좌절이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성인의 인간적인 실패와 좌절체험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따르고자 원했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만남으로서 보상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토록 원했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신 성인의 심정은 사도 바울로의 다음과 같은 고백과 너무도 어울리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2: 19- 20)".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기록에는 한결같이 라 베르나의 오상 체험은 성인이 혼자서 치룬 것으로 되어 있으나 중세기 화가들은 이것을 더 감동적으로 전하기 위해 성인의 애제자였던 레오 형제가 이 사건을 목격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 프란치스칸들에게 익숙한 지오토(Giotto di Bordone:1267- 1337 )의 작품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의 중요성은 벽감처럼 뚫린 바위에 모셔둔 십자가이다. 이 벽감을 만든 바위가 바로 라 베르나의 상징이며 척박하기 짝이 없는 단순한 바위이다. 그런데 이 초라하고 단순한 나무 십자가에 주님 수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위 붉은 색의 표시는 성인이 그토록 갈망하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주님 수난의 상징이며 가시관은 그분이 겪으신 고통의 상징이다.

성인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순간에 세라핌 천사의 옹위 속에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당신 사랑의 상처인 오상을 받게 된다. 앞의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교회의 외적 모습은 밝은 색의 생기에 차 있으면서도 문은 닫힌 채 어둠에 잠겨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 부분의 라 베르나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 덩어리이면서도 그 안에 십자가를 모시고 있기에 생명이 흐르고 있다.

이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야 말로 <제 2의 그리스도>이심을 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자기 제자들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 것처럼 성인 역시 자기 형제들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귀찮은 존재로 따돌림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 역시 마지막 수난 직전 게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고뇌하신 것처럼 성인 역시 자기 형제회의 변질을 바라보며 자기가 창설한 형제회 미래에 대해 불안해 했다.

러시아 출신의 예언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어떤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있으니 교회 운영도 어렵고 거북해지니 좀 떠나주셨으며 좋겠다는 권고를 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교회가 제도화 되는 과정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겪어야 했던 아픈 갈등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형제적 카리스마를 창출하고 제자들은 모았다.

그러나 그 역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보다는 예수께서 걸으셨던 실패 체험을 그 제자들을 통해 하게 된다. 그런데 불가항력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실패를 체험한 순간 그는 오상(五傷)이라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예수님과 온전한 일치를 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그는 실패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닮고픈 순수하고 강한 갈망을 더 없이 충족시킨 승리의 인간으로 변신되었다. 그는 주님의 도움으로 복음적 삶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상적 단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삶을 실패로 끝냄으로 주님을 온전히 닮았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 세상 어떤 성인들과도 비길 수 없는 < 제2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성 바오로의 다음 고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나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 앞으로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갈라디아 6: 14- 15. 17)”.

성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는 순간 세상은 새롭게 탄생한 <제2의 그리스도>로 인해 영적 쇄신으로 활기찬 모습이 된다.

푸른 빛 밝은 하늘에 사랑의 빛깔인 붉은색의 주님이 천사의 옹위속에 내려오시면서 교회쪽에 있는 나무와 라 베르나 쪽에 있는 나무 색깔이 빛을 받아 황금빛을 발산하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체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처럼 새로운 희망의 시작임을 전하고 있다. < 작은 예수회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