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느님 나라와 교회 :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교회를 세웠다고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 공공연하게 교회의 설립을 선언한 것 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둘의
이면에는 ‘이미’ 와 ‘아직’의 긴장 관계가 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역
사적 발전 단계가 아니며 또 현현 형태도 아니다.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의 나라가 하느님 구원 계획의 궁극적 목표이며 온 세상 구원의 완전한
현상이다“(쉬나캔부르크, 166). 교회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주권은 교회의 영역을 벗어나 현신적인 행위에서 발견된다. 주님
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는 자기의 지상 실재가 종말론적 유보 아래 있음
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회는 자신을 이미 조알론적 크기
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께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의 고동체
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의 역사적 일시성 안에 하느님의 최종적 공동
체를 간직하고 있으며, 희망 가운데 이 공동체에 참여한다. 교회와 하느님
나라의 이런 관계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표현된다. “진실히 너히에 이르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시게 될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
겠다“ (마르 14, 25). 여기서 예수님은 (그리고 그 후의 공동체는) 교회
의 시대에서 결코 현재가 될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또
교회는 전례적 식사에서 상징적으로 이미 예수님과의 공동체를 체허하고
있으며, 이로써 상징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종합하고 있다. ‘이미’ 와 ‘아직’
의 긴장 속에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제2
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 (교회 45항)라고 표현
하고 있다. 이미 온 분과 아직 기다리고 있는 분 사이에 놓여진 존재로
특정지어지는 교회는 십자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주인 처럼 주
님의 영광 속에 들어 가기 위해 (루가 24. 26) 고통을 받아야 한다. 교회
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순례의 도상에 있다.
참고 : 한국가톨릭대차전 제2권 1995년판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