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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신부님과 함께하는 성경

~ 마르코 복음 입문 / 마진우 신부님 ~

마신부와 함께 하는 성경강의

성경 강의 입문과 마르코 복음 1장


삶과 동반하는 성경

성경은 그 자체로 공부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늘 우리의 삶의 단편과 연관시켜야 한다. 성경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결과물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없이는 우리는 그저 우리의 지식의 단편을 하나 늘린 셈이다. 따라서 매번의 성경 공부 뒤에는 매번 얻게 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나의 자리에서 실천해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 오는 사람에게 이 공부는 지극히 유익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그저 지식을 늘리겠다는 이에게 이 성경 공부는 따분한 시간일 뿐이다.


                      사전 준비

매주마다 성경의 각 장을 배우게 되는데 배우기 전에 반드시 성경을 한 번은 읽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을 하는 이 과정에 일주일 내내 단 한 번도 해당 부분을 읽지 않은 채로 온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 자세를 알 수 있게된다.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 성경 강좌의 교리교사로서 여러분에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요구하고 싶다. "강좌에 오기 전에 반드시 해당 장을 읽고 오시라." 이 작업을 잘 해 온 분들은 성경 강좌 때에 성경을 들고오지 않아도 좋다.


1장의 큰 주제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준비 - 세례 - 유혹 - 전도 - 제자단 형성 - 구마 - 개인 치유(봉사자) - 다수 치유 - 전도여행 - 나병환자의 치유


준비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그 입구를 잘 정돈해 두어야 한다. 온갖 쓰레기로 방구석을 어지럽혀 두고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은 그 손님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복음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준비작업으로 구약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인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제시한다. 이 준비작업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부분이다. 길은 과연 무엇이고 '곧게'라는 것은 무엇인가? 땅에 물을 쏟아보자.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고 지대가 높은 곳에는 물이 차지 않는다. 지나치게 낮아도 그 곳으로 물이 모두 쏠려 버리고 지나치게 높으면 메마른 상태 그대로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다가오시려는데 지나치게 낮은 구석이 있으면 거기에 머무르시고 지나치게 높은 구석이 있으면 거기를 지나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고 따라서 우리의 마음 속에도 이런 두 부분이 있다. 지나치게 좌절한 마음, 자기 스스로를 폄하하는 마음과 그 반대로 지나치게 교만한 마음,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이다. 낮은 마음은 주로 과거의 죄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이 마음을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높여 두기를 바라시는 셈이다. 또 반대로 지나치게 교만한 마음이 있다. 자기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쥐고 흔든다는 이 마음. 이 마음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낮아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선하심을 그 어느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작업만 잘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그분의 은총은 물 흐르듯이 흘러 들어오게 되어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때에, 우리가 군더더기 없이 우리 스스로의 본연적 모습에 충실하게 될 때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은 그와 함께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이와 같이 되라'라고 하신 것이다.


세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을 받으시고 다른 한 편으로 예수님은 이 세례를 도리어 정화하고 축복하고 계시는 셈이다. 세례가 단순히 '죄를 씻는' 행위의 상징이었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룩한 예식이 된 것이다. 이 예수님을 통한 세례는 '성령'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우리의 세례를 살펴볼 차례다. 여전히 물로만 세례를 받는 이들이 많다. 진정한 세례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로 물로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죄를 씻는 세례를 받고 그걸로 그만이라는 식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세례가 있으니 바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이다. 물의 세례가 우리의 외적인 것만을 깨끗이 했다면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는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한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를 씻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꼬마가 컵을 깨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못을 용서받았다. 이는 외적인 세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성령에 의한 세례는 보다 깊은 함축적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한 꼬마가 지난 번에 엄마에게 당한 섭섭한 일로 복수하려고 컵을 깨었다. 하지만 엄마는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용서해준다. 이에 이 아이는 지니고 있던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엄마를 사랑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세례'와 유사한 내용이 담겨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외적인 표지로 자신의 신앙을 살아간다. 미사를 참례하고 법규를 지키면 '신앙인'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이 그 내면에 깃들여져 있다. 우리는 착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성령을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외적인 표지만으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를 받도록 하자. 바로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유혹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이 부분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이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지…"라는 그저 막연한 생각 뿐이다. 하지만 그분이 겪으신 유혹은 진짜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유혹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나약함을 더욱 잘 이해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에 빠져드는 잘못을 뉘우칠 때에 그분은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신다. 유혹을 크게 겪어낸 사람은 다시 거기에 빠져드는 일이 거의 없다. 마치 언어를 하나 배운 사람이 다시 그 언어를 배우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유혹들은 한번 극복해 내고 나서 내성이 생기고 나면 크게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술, 이성, 마약과 같은 지극히 육적인 유혹들에서부터 명예 권력이라는 내부적인 유혹, 그리고 교만이라는 상급 유혹에 이르기까지 유혹에도 수많은 단계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고 일단은 나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구별해 내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일종의 유혹에 빠져들고 쓰러지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일어설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도의 시작

'하느님의 복음'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것이 사실 우리 교리의 전체를 꿰뚫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당신의 통치가 이루어질 나라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 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해 온 그릇된 것들을 뉘우치는 '회개'를 하고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을 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통치는 깨끗하고 의로운 마음, 사랑과 용서로 이루어지니 우리 역시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고 그 동안 이 땅에서 물들여온 그릇된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교리는 복잡하거나 난해한 게 아니다. 정말 간단 명료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다른 쪽으로 자꾸 파고 들다가 그만 교리책이 두꺼워져 버린 것이다. 교리책 한 권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한번의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다가온 하늘 나라에 대한 인지와 회개와 복음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


제자단 형성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어부'였다. 절대로 성전의 고위 관리층이라던지 정부 관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신 건 바로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원래 직분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부였고 그리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었다. '어부'에는 전혀 변함이 없는 셈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한다. 뭐가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금 머무는 자리, 부모, 자녀, 직장인, 학생 등등의 자리에서 그저 마음을 하느님의 나라로 옮기고 같은 일 속에 전혀 다른 방향을 담는 작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향이다. 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했다면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제자됨이 단순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버리고 가족을 버린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세상의 근본에서 하느님의 근본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근본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주는 안락과 평안과 편의에서 마음을 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다.


더러운 영의 내쫓음

더러운 영이 활동한 곳은 다른 시장바닥이 아니라 바로 '회당', 즉 당시에 예식을 집전하던 성전이었다. 이 말인즉슨 지금의 교회 안에도 더러운 영은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니 아마도 다른 곳보다도 거룩한 장소인 회당 안에서 이들은 더 날뛰게 될 것이다. 특히 회당의 더러운 영은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을 성가시게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하려는 이들을 가로막고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이 있다면 행여 '더러운 영'에 걸린 게 아닌가 스스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말은 많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이 주로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교회적 지식이나 인맥을 자랑하지만 전혀 '사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배를 사랑하며 자신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하는 이들이다. 악마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그분의 의도를 알지만 전혀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공작을 펼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교회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알지만 전혀 협력하지 않고 매사에 비판만 하고 전혀 일은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장모의 치유

마르코 복음의 첫번째 치유의 장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몬의 장모는 치유를 받은 뒤에 바로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일할 이들부터 치유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이 치유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슨 무적이라서 교회 안에서 그런 봉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도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인 셈이다. 먼저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면 가까이 있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보살피기를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들은 결국 견디다 못해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많은 병자의 치유

이어서 예수님은 본격적인 치유 활동을 하신다. 하지만 이 치유의 근본 목적은 무엇일 것 같은가? 단지 그들의 육신을 낫게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보다 극명하게 마귀들의 말을 가로막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단순히 치유가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엄청난 광고를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치유 센터를 개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인 치유에 관심이 있었고 마귀들은 예수를 유명하게 만들어 버려서 이를 가로막으려 한 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전도여행

예수님의 목적은 유명해지거나 권력을 얻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짧은 생애 동안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셨고 이곳 저곳 다니시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어둠의 영)을 쫓아내시는 작업을 하셨다.


나병환자

나병환자에게서 예수님의 유명세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진다. 사실 이 나병환자의 치유는 예수님의 사목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병환자에게 불쌍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치유하게 되었고 결국 그 나병 환자는 자신의 입을 주체할 수 없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널리 퍼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보다 본질적으로 원하셨던 복음화 사업보다는 '치유'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실 악마들은 이를 원했던 것이다. 그분의 활동을 가로막고 싶었던 것이다. 본질은 육의 치유가 아니다, 본질은 하느님의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은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고 있다. 특히 부자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돕는답시고 기도보다는 단순히 돈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조심해야 한다. 돈 맛을 알게된 사람들만큼 복음화 사업에 위험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2장


2장의 주제의 흐름

치유의 계속(육체) - 죄인과의 만남(영혼) - 단식 논쟁(법규와 본질) - 안식일(법규와 본질)


2장은 그리 길지 않은 느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계속되지만 이제 예수님이 보다 본질적으로 무엇을 치유하고 싶으신지가 잘 드러나게 됩니다. 나아가 단식 논쟁과 안식일 사건으로 외적인 법규와 보다 본질적인 것 가운데 무엇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든 들어가시면서 가장 먼저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최우선시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의 혜택을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찾아옵니다. 그는 바로 중풍 병자였습니다.


타인을 위한 전구, 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것은 '중풍 병자'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중풍 병자는 다른 네 사람이 들것에 싣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진리 하나는 '타인을 위한 전구, 기도'라는 주제입니다. 때로 우리의 생에 영적으로 중풍 병자의 꼴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자기 스스로 선을 찾아 행할 줄을 모르고 언제나 세상 것을 향해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리스도 신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리스도 신자 가정에 더 많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부드러울텐데, 이 신자라는 딱지를 단 사람들은 벌써 한 번 맛을 보았으니 안다고 생각하고는 거기에서 멈춰 굳어져버린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굳은 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4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음을 모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한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영적으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미사 중에 하는 신자들의 기도 만이라도 우리가 마음을 진심으로 모은다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들의 믿음

중풍 병자는 그렇게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신다는 것에도 주목합시다. 앞서의 주제에 상응하는 대목입니다. 사실 중풍 병자는 만사가 귀찮은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침대에만 누워 있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 앞에 오기 전에 그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이 술주정이 심하고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을 때에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남편의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죄의 용서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첫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조금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몸이 굳어 있는 환자를 데리고 갔는데 '죄'를 운운하다니요.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지니신 분으로 모든 사물의 진수를 꿰뚫고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했다는 것은 실제로 중풍 병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중풍의 치유가 아니라 그 마음 속의 '죄'의 치유라는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몸의 병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신앙에 매달리는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악습에서 비롯된 병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작된 병이라면 정말 이 병이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좋으신 하느님은 애초부터 그걸 시작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병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걸 껴안음으로써 얻게 되는 영적인 열매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고통스러워 하는 병자는 곁에서 그 고통을 함께 해 주어야지 이런 가르침을 주면서 '알아서 해라'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사랑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는 '육'의 치유에 앞서서 '영'의 치유를 선행하시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보다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권한

이어 예수님에게 의문을 품는 이들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권한을 신비로운 양식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분은 '영의 치유'의 권한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육의 치유'를 마치 손쉬운 일을 하듯이 처리하십니다. 그저 말 한 마디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청원

우리는 예수님을 무엇 때문에 찾고 있는 걸까요?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우리의 영의 치유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현세적인 어떤 목적을 갈구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청하고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시니까요. 그러니 쉬지말고 청하십시오. 당신의 기도가 하늘에 닿게 하고 당신의 정신이 깨치지 못한 것들을 성령께서 대신 청하게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안의 성령의 청원을 들으시고 필요한 것을 이루도록 도와 주게 하십시오.


레위와 세리와 함께한 식사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크나큰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성가신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두 부류가 있으니 한 부류는 언제나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는 부류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밝히 드러나시게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온갖 선의 근원이신 그분 앞에서 자신의 나약과 부족을 뼈저리게 체험한 이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그야말로 간절히 필요로하는 이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고 이미 오른 직분도 높아서 함부로 내려오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합당한 권위가 명령할 때조차 그 권리를 포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들은 눈 먼 이들이며 마음이 닫힌 이들입니다. 이들은 순명의 가치를 모르며 반대로 온 세상이 자기에게 순명하기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 두 부류에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는 말씀이 반대로 교만하고 가진 자들에게는 비판의 말이 되어 버립니다. 같은 입에서 동시에 두 방향으로 말씀이 나아가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걸 알아보는 건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서 기뻐하나요 아니면 성가시게 되나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답은 가까이 있습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이번 장을 꿰뚫고 있는 주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껍데기 신앙에만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일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마음과 정신에 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옛 것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의 대표격은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아직 인간들의 의식이 깨이지 않았을 무렵 약자를 보호하고 악한 이들을 벌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자신이 가진 틀에다 비춰보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법'에 사로잡혀 있지요. 법이 하는 역할은 '죄악'을 극명히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법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지요. 법은 무엇이 죽을 죄인지를 극명히 밝혀주지만 반대로 '사랑'을 드러내지는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쩌다 한 번 고기를 구웠는데 그 날이 금요일이었습니다. 이런 따스한 어머니의 마음을 법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규정대로 심하게 벌하겠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그 법을 뛰어넘어 그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감싸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보다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겨났는지 그 법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가르침들은 온전히 새로운 것이어서 새로운 그릇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옛 것에 길들여져 있었고 옛 것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수 밖에요.

예수님은 모든 혼인 잔치의 주인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그 나날들이 얼마나 기쁜 나날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있을 틈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건강히 먹고 마시면서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처럼 이들은 곧 예수님을 빼앗길 운명이었고 그때에는 마땅히 단식을 하고 슬픔과 비탄을 마음 속에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 밀이삭 사건

앞서의 새것과 헌것 논쟁은 이 안식일에 행한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으로 더욱 확고해집니다.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그 다음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위해 모든 법규와 규정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르코 복음 3장


오그라든 손과 오그라든 마음 -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원하는 것 - 열두 사도의 선발 - 예수와 베엘제불 - 예수님의 참 가족


3장에서는 여전히 이어지는 치유사화, 하지만 그 내면의 본질은 영적인 것을 향해 있는 치유사화와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현명하게 맞이하시는 모습, 그리고 배반자가 섞인 열두 사도의 선발, 사람들의 모함, 그리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 등등 다양한 주제들이 산발적으로 나옵니다. 



오그라든 손, 오그라든 마음


한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안식일과 회당이라는 내용에 뭔가 동떨어진 느낌이 되어 버렸지만 분위기를 보다 현대적으로 바꾸어서 주일과 성당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꾸어 보도록 합시다. 보다 직접적인 분위기가 보이는 듯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

먼저 우리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많은 이들이 '주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며 주일을 나오고는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요? 혹은 주일은 쉬어야 한다며 막연히 몸을 놀릴 생각을 하거나 특별히 죄 짓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진탕 마실 생각을 하지는 않나요? 주일의 본연적인 의미는 '주님의 날'입니다. 올바르게 육신의 휴식을 취하면서 주님께 드려야 할 공경을 합당하게 드리는 날이지요. 지금 바리사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일의 의무'라는 그 외곽선만 넘지 않는 선에서 도리어 엇나간 모습을 더 많이 드러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마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은 아랑곳없이 '안식일 법'에 집중하여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주일의 진정한 의미'는 아랑곳 없이 '주일의 의무'에만 집중하여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온갖 다른 일을 계획하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일은 오전에 성당에 잠깐 다녀온 뒤에 그 동안 못 논 걸 진탕 먹고 마시면서 노는 날이 아니라 그동안 세속의 일에 몰두해 있던 영과 육을 진정으로 쉬게 하고 주님의 뜻을 찾는 날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안식을 취하거나 그 동안 마음쓰지 못했던 필요한 봉사를 할 수도 있는 날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봉사를 강요당하거나 소위 '성당일' 만을 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지는 못한 모습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이

자 이런 거룩한 날에 도움을 청하러 사람이 왔습니다. 딱히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해서 '병자'나 '거지'를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범위를 확대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주변을 조금만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우리가 꾸준히 무시한 사람.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표현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가장 필요한 부분,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부분이 오그라들어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바로 우리의 가족 안에 그런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손의 자리에 '마음'을 넣어봅시다. 그 사람은 바로 여러분의 부모이자 아내이고 여러분의 자녀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안식일의 법'을 지킨다는 허울좋은 핑계로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마음이 오그라든 이

전혀 다른 의미의 마음이 오그라든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마음을 굳힌 이들입니다. 우리 역시도 자주 빠지게 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정당한 미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아무런 이유가 없이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합당하고 정당한 미움의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미워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느님께는 바로 '부당함'이거늘 우리는 그 가장 큰 부당함을 무시하고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이유에 정당함을 부여하려 한다는 모순입니다. 바리사이의 완고한 마음에 예수님은 슬퍼하셨듯이 지금 우리의 정당한 미움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슬퍼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모여든 군중

군중은 예수님을 밀쳐대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병을 고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딜 가시든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유일한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전혀 다른 관심사로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참으로 현명한 방법으로 처신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배를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그들과 직접적인 대면은 피하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속적인 관심'을 지닌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을 마냥 내치는 것도, 그리고 그들 안에 온전히 함께 머무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현명한 방법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두면서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전하는 방법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배'였습니다. 과연 우리 사목자들은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 걸까요? 그건 각자가 찾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관심사로 당신의 일상을 '밀쳐대게'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온전히 '동떨어져서도'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진탕 골프만 쳐대는 사제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거룩한 사제도 반성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맺는 우리의 친교를 사람들에게 전해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부르짖음

더러운 영들은 다른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부르짖음을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이르십니다. 결국 아무리 허울 좋은 말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귀에 아름다운 듣기 좋은 말을 찾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높아져가는 자존심과 교만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성도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달콤한 언사는 결국 우리의 성령에 따르는 진정한 사도적 활동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선발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시고 그들을 부르신다는 것에서는 굉장히 '영적인 상징'이 읽혀집니다. 예수님은 평지에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시고 그들이 따라 오도록 합니다. 우리가 흔히 논하는 '리더'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먼저 앞서서 나아가고 그리고 사람들이 뒤따라오도록 합니다. 흔히 사람들을 밀쳐대는 '보스'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의 등을 떠다미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에서 배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올라서고, 나서고, 궃은 일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길에 사람들을 불러야 합니다.


제자들이 받은 권한

'당신과 함께', '파견', '복음 선포', '마귀 퇴치' 이 4가지가 전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파견을 받았으며, 복음을 선포할 줄 알았고, 마귀를 퇴치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첫 사도들의 권한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권한을 지니고 그대로 행사한다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셈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주님의 파견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항목인 '마귀 퇴치'는 광범위하게 이야기해서 세상에 깃든 악을 저지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꼭 구마예식을 해야 마귀가 퇴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때에 그 자리에는 그 어떤 마귀도 머물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 제자

예수님의 마지막 제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유다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의 기질을 모르셨을까요? 우리는 이런 예수님에게서 '부족함'을 감싸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다의 마음을 알고 계셨지만 당신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감싸 안을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수난 전날 저녁 마지막 만찬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끊임없는 경고를 주시면서 그가 마음을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장면에 묘사됩니다. 결국 유다는 마음을 굳혀 버렸고 약속된 수난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만일 유다가 그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꾸었더라면 예수님의 사명은 몇 년 더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만일에'라는 가정은 전혀 소용없는 짓입니다. 우리는 배신자의 대표격으로 '유다'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꿀 자유를 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

질투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님의 영을 모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참으로 중요한 언급이 하나 등장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 모독하는 발언도 용서를 받을 터인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죄만 피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용서를 받는다는 말이니 어찌보면 구원의 열쇠가 되기도 하는 말 같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합시다. 성령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영입니다. 우리의 육은 정신의 명을 받들고 우리의 정신은 영의 명을 따릅니다. 오직 두 종류의 영이 있으니 하나는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언제나 이 두 흐름에 내어맡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의'와 '악의'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악의'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의'를 '악의'로 비난한다면 그는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작용인 '선의'는 누가 지니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선의'는 성령의 작용으로 누구나 지닐 수 있습니다. 뻔히 악을 하는 자는 드러나지만 '선의'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도대체 '선의'를 지녔는지 아닌지 우리로서는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뻔한 악행은 분명 '악의'의 발로입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악행을 하는 자 앞에서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가 '선의'를 회복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바꾼다면 그들의 악행은 하느님 앞에 잊혀질 것이고 그들은 '성령'을 따라 구원을 입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온갖 약점과 어두움에도 절대로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이는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심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살아 숨쉬는 그 누구에게도 마지막 희망을 건다면 우리는 최소한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

같은 공간에 거주한다고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립하신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내면의 일치,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을 '가족'의 범주로 넣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앞으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게 될 모든 이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뜻' 안에 일치해서 한 가족이 될 이들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가족으로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하느님 나라 비유 컬렉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비유 - 해설 - 등불 - 저절로 자라는 씨앗 - 겨자씨 - 비유로 가르치기 - 풍랑


4장에는 풍성한 교리교육 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교리교육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올바로 심어주는 것이고 그것이 일단 한 번 심기고 나면 알아서 싹이 트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4장의 전체적인 구조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잘 시킨 다음에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잘 알려주고, 그리고 실제 삶으로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불안 속에서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체험으로 알려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을 통한 '현세적 인기'에 편승해서 모여든 군중들을 피해서 예수님은 배 위에서 가르치십니다.(3장 참조) 그리고 그들의 마음밭을 비유의 말씀으로 잘 가꾸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유명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강론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들고 그리고 그것을 따로 제자들에게 해설도 해 주십니다.


삶에서 나온 비유

예수님의 비유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 환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설교가들은 이 점을 유심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우리는 '언어의 폭력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비자 교리 때에 성경을 설명하면서 적잖은 이들이 성경의 권수나 복음 사가들의 역사적 배경 등등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면서 예비자들을 '질리게' 만듭니다. 그런 설명은 학교 교육 안에서 충분히 받은 것들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예비자들이 현재 처해있을 만한 상황 속에서 적절한 비유를 찾아 내어야 합니다. 문득 찾아온 누군가의 방문과 좋은 소식이라던지, 처철한 아픔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이라던지, 이런 저런 현대인의 삶 속의 현실을 바탕으로 적절한 비유를 들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오늘날의 산업 사회에서는 '씨도 안 먹히는' 일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예수님은 당신의 이웃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누가 들을 귀가 있을까요? 호수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들을 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진실함과 그 영적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렇게 말하니 엄청 어려운 느낌입니다만…), 즉 '의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의지, 의도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엉뚱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흘러가 버립니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어 죽겠는데 엄마가 옆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씨도 먹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그 내면의 의도가 '들을 마음이 없기'에 귀로 들려오고 있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셈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의지',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

이 부분은 언뜻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 아니 하느님의 원의는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일진데 어째서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행여 선택된 이들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일까요? 과연 '운명'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운명

우리에게 운명, 즉 정해진 방향은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선한 이들은 그 상급을 받고 악한 이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운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운명의 결정권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이들로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지닌 이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의 의미로 되돌아가서 이해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어둠의 운명을 선택해서 멸망하는 이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신 의도는 그런 이들이 지금 이 말을 듣는 동안이라도 마음을 바꾸라는 경고를 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말은 뒤바꾸면, '알아보고 깨달아 돌아오면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미묘하고 알쏭달쏭한 것 같지만 조용히 성찰해 보시면 예수님의 본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비유를 듣는 동안 경각심을 가지고 깨달으려고 애를 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깨닫고 알게 되는 순간 구원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해설

그리고 예수님은 친절하게 제자들에게 그 뜻을 풀이해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쓰시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시고 그리고 친절하게 풀이해 주셨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등불의 비유

빛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우리의 선한 의지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감추려 든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고 수치인 탓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진정 빛으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은 빛이 아니라 수치인 모양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니 말이지요. 여기서 드러내라는 말이 길거리에서 외치라거나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귀찮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바를 삶으로 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하라'고 배웠고 '용서하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된다'는 것도 배웠지요. 하지만 왜 그리 실천하기가 힘이 들까요? 반면 우리는 일상 안에서 세상 소식은 어찌나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리는지요. 자신이 아는 최신의 소식, 최신의 사건 사고들은 사정없이 떠벌리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진솔한 삶을 나누는 건 왜그리 부끄러워하는지요? 그 말인즉슨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차를 한 대 새로 사면 자랑스러워하지만 우리 안에 십자가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숨기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책에서 제외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이런 비유들을 트럭으로 갖다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보아도 보아도 전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여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예비된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주는 만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주고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해서 사실 아무것도 주고 있는 게 없습니다. 받을 줄 뻔히 알고 주는 것은 주는 게 아닙니다. 투자하는 거지요. 눈에 뻔히 보이는 결과 속에서 받게 될 걸 알면서 준다면 그는 '자선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받을 것이다'는 현세적인 의미의 되받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받을지는 우리 중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오직 그 '신뢰'하나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주는 것이 '증오', '질투', '시기'와 같은 것이라면 그 또한 고스란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긴 우리는 그런 어둠의 것들은 곧잘 타인에게 내어줍니다. 그리고는 돌려받지는 않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들도 분명히 내어 준 이들에게 돌려주시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더욱 거룩해지고 애를 씁니다. 반면 영이 흐트러져 있는 이들, 세상 일에만 몰두해 있는 이들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것들도 모조리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심층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말이 얼마나 기쁨의 소식이며 또 반대로 '경고'의 소식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심고', '추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일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눈을 뜬 이는 누구나 '심거나', '거둡니다'. 우리는 많이 심어야 합니다. 일단 제대로 심기만 하면 분명히 그 땅에 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꾸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심는 작업'만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 줄기가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열매는 때가 되면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려서 일단 심겨지게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때로 많은 사목자들, 교리교사들이 심고는 열매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명은 열매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추수꾼은 전혀 다른 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걸 추수하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열매가 자라나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이 추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누군가가 뿌린 씨의 열매 덕을 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에 순교자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신앙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우리는 그 달콤한 열매를 맛보고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기고 때가 되면 그 자리를 떠나거나, 아니면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만 주어진 기회 안에서 씨를 많이 뿌리려고 노력하십시오.


겨자씨의 비유

일단 하느님의 나라가 심겨지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과거에 코나 흘리고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훗날 고향의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의 가르침도 일단 사람 안에 심어지고 나면 그 사람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이들이 그 나무 그늘에 쉴 수 있을만큼 커져버리게 되지요. 하느님의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비유

앞서 말씀드린 '비유'를 복음 안에서 새로이 요약해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생활화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에서 가르칠 거리를 만드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교사들'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행여 나는 현학적이고 어려운 신학용어를 들이대면서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 좋은 강론이란 신학 잡지에 게재될 강론이 아니라 '초등학생도 알아듣는' 강론이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을 곧잘 쓰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걸 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걸 '과시'하려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다분합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사실 배울 것이 없습니다. 좋은 스승은 괴상한 말을 툭툭 뱉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힘

앞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실사판이랄까요? 눈 앞에 닥친 어려운 현실에 허덕이는 제자들 앞에서 에수님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온 존재를 차지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두려움과 겁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을 '알지 못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를 들었지만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세상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주종관계'가 분명했습니다. 태풍이 불고 불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고, 우리가 죽고 사는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설령 죽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진데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번 4장은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거듭 거듭 읽어보시고 온전히 이해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 그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라도 훌훌 털어 버리시고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아멘.

마르코 복음 5장


구마와 치유


5장은 2가지(엄밀히 말하면 3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이고 다른 하나는 '치유' 나아가 '부활'입니다. 본격적인 이해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에게 나의 영혼이 환하게 열리도록 도와주시라는 짧은 기도를 바치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


더러운 영의 특징

이야기는 속히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 건너편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특징이 나옵니다.


- 무덤에서 살았다.

그는 죽은 이들 사이에 머무릅니다. 더러운 이들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 이와 죽은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현세 생명의 끊어짐이 죽음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죽은 이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아마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을 파헤치기도 하고 시체들을 손상하기도 했겠지요. 이처럼 죽은 이들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손아귀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회색 빌딩 숲 속에 살면서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자신의 생각은 전혀 없고 그들이 주입시키는 생각에 따르는 이들, 바로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증오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상태에 늘 빠져 영혼의 올바른 선택을 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고, 따라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바로 우리 가운데 살아갑니다. 


-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이는 '구속'을 거부합니다. 그 어떤 연계를 거부하고 끊어 버립니다. 육체적으로야 쇠사슬만큼 튼튼하게 구속을 할 수 있는 것이 달리 있겠습니까마는 영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구속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명'이라는 주제와 직결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가르침도 거부하려는 반항적 기질을 품고 있습니다. 가볍게는 집안에서 가장의 명, 혹은 부모님의 명에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올바른 기강을 위한 틀도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도 주임 사제의 명을 우습게 봅니다. 나아가 때로는 사제들도 주교님의 명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런 불순명은 태초의 죄악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거부한 첫 인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복음서의 더러운 영도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는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에 불순종할 때에 우리에게도 더러운 영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구원에 직결되지 않는 이상은 장상의 명이 아무리 어리석어 보여도 마땅히 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명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일을 당신 측에서 진행하실 것이고, 순명 없이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곧장 더러운 영의 조종을 받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 소리를 지르고

더러운 영의 특징인 분주함과 소음입니다.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분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머물러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모습에서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기사를 검색할 시간은 있어도 한 5분 하느님 앞에 앉아 머무를 시간은 없습니다. 텔레비전은 밤새도록 볼 수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은 그런 분주함으로 채우고 있고 이런 분주함과 소음은 그야말로 악한 영의 특징입니다.


-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자기를 해치는 일, 자해를 공공연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현대인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해'를 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되는 줄을 모르고 세상이 좋다는 활동을 모조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관점은 주로 '영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우리는 영적으로 어떤 자해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여가 활동은 곧잘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 활동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쉼'은 영육간에 조화된 쉼이 아닌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쉰다는 핑계로 술을 진창 마신다던지 몸을 더욱 피곤하게 하고, 나아가 영적으로도 해악을 끼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해를 하는 이들이고 그 주체는 자신이 받아들인 '더러운 영'입니다.


- 간교함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인 줄 고백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미묘하게 비꼬는 부분이 있으니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간 적도 없고 그저 그 지방에 도착했을 뿐이며 실제로 다가온 것은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마르코 5장 6절) 악마의 간교는 대부분 이렇습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언제나 그 사실 안에 약간의 과장이나 거짓이 첨부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뜻 사실을 전파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누군가를 향한 적대감과 악의가 깃들어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둘 사이를 갈라 놓는 활동을 곧잘 합니다. 행여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말들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어떤 악의 섞인 과장이나 허풍도 삼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에 대해서 발언하는 적지 않은 이들은 자기 안에 은근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걸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마


- 신원을 밝히기

이제 예수님의 차례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처음에 하시는 일은 그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변 동네 사람들이 절대 하려고 생각지도 않은 일을 시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인격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타인을 돕는다며 '생각만'으로 돕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도 가고 남미도 갑니다. 오직 생각만으로 말이지요. 그리고는 자신이 도울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계획보다 오히려 나의 곁에 있는 형제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가서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피기만 해도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셈이 됩니다.


- 물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수많은 어둠의 영은 돼지떼를 선택했습니다. 주변의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왜 하필 돼지떼였을까요? 그 돼지떼에는 사람들의 탐욕이 깃들어 있고, 어둠의 영들은 그 돼지떼에 붙어 있는 사람들의 집착을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이는 전적으로 제 개인의 추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지금 눈 앞의 한 사람이 더 중요했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어둠의 영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 주십니다. 천 마리쯤 되는 돼지떼보다도 한 사람의 영혼이 소중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돼지떼는 모두 호수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는 분명한 어둠의 영의 작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지만 일어난 일(재산의 손실)에 절망하고 진정 소중한 분을 도리어 쫓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 상황의 반전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이 더러운 영에 들린 한 사람만을 보신 게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던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신 셈입니다. 사람들은 '재산'을 선택했고,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도리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따라 나서기를 청합니다. 상황이 그야말로 역전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그 고장 사람들이야말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임이 드러났고 지금껏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생각했던 이가 구원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 선교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따라 나서는 걸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깁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리고 그는 한 명의 선교사가 되어 두려움 없이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지방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마는 단순히 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시시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때로는 쓰러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을 올바로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한 명의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 - 딸을 사랑하는 회당장 아버지의 겸손

"한 사람이 청을 드려서 예수님이 일을 하신다." 라는 단순한 구조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보다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회당장이 와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단순히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회당장은 당시 사회 신분으로 보면 엄청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고 사람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던 직분입니다. 이는 마치 한 주임 사제가 신자들이 가득 모인 곳에서 용하다는 한 평신도를 찾아 가는 모습과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요. 그래서 이 부분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아버지가 뭔가를 청한 것이 아니라 이 아버지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대며 따라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

소박한 믿음

이 가운데 하혈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무려 12년 동안 그 병을 앓고 있었고 가진 것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렇기에 내면에 이런 저런 어두움과 원한이 자리잡을 만도 하건만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가졌던 생각은 지나치게도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런 소박하고도 신실한 믿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해서 커다란 스타디움에서 소리를 꽥꽥 질러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야 '와아~!!!!!'하고 감탄을 하지만 실제로 기적을 가져가는 이들은 이런 소박한 믿음을 지닌 채로 매일 미사에 묵묵히 참여하는 이들, 주임 신부의 모난 성정을 기꺼이 견디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사람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촛불을 켜고 묵주알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교님과 친구라고, 어느 신부님과 친척 관계라고 뭔가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소박하지만 굳건한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가까이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하혈이 멈춘 것을 느꼈습니다.


믿음의 시련

하지만 이 여인의 기적은 여기서 단순히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당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걸 눈치챈 예수님이 소위 그 '범인'을 찾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인에게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냥 숨겨 버리고 혼자 조용히 물러날 수도 있었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엎드려' 일어난 일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의 용기가 그녀에게 더 큰 위안의 말을 전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단순히 하느님 앞에 고백을 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시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용서야말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의 사죄경은 진실로 고백하는, 그야말로 '두려워 떨며 엎드려' 고백하는 신자에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대충대충 주일미사 빠진 것이나 내던지고 도망가려는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영적 위안이 없게 되지요.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아 넘쳐 흐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셈입니다. 이 하혈하는 여인의 소박한 믿음과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 안에서의 고백은 이 여인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이 말을 듣는 그 기쁨은 어떠할까요? 충분히 느껴보실 수 있으니 진솔한 고해성사를 준비해서 사제 앞에 나서십시오.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사죄경은 그 사제가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도구로서 그 사죄경을 여러분들에게 내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치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구원'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딸의 죽음과 아버지의 신앙

그러던 차에 딸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회당장의 신앙을 점검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딸이 죽었다고 알린 사람의 소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제 회당장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반응과 그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슬퍼하며 소란을 떨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바로 이 때에 회당장이 사람들의 편에 섰더라면 그 다음 구절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이라는 구절이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회당장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내었겠지요. 하지만 회당장은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기로 한 셈입니다. 만에 하나 딸이 되살아나지 못할 때에 자신이 받게 될 비난과 조롱을 회당장은 짊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예수님 일행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를 받게 되지요.


탈리타 쿰!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죽음의 잠'에 빠져 있던 아이가 일어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다니고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습니다. 이 감격의 순간에 잠시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복음서를 내려놓고 회당장의 마음이 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함구령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제자와 그 부모들만이 알아야 했지요.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걸어다니니 이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알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거듭 알리지는 말 것을 명하십니다. 당신의 복음 선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명성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반경을 극도로 제한하고, 또 결과적으로 예수님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애정

그리고 또 하나 잊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행한 업적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오히려 오랜 굶주림에 배가 고플 소녀를 걱정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만일 어느 설교가가 이런 일을 해 내었다면 자신이 행한 업적에 대한 자랑 스러움에 당장 그 주인에게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함구령과 더불어 소녀를 챙기십니다. 그분의 겸손과 따스함이 느껴지시는지요? 이 분이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