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 자신과 만나는 시간
침묵 속에 머물면 나란 인간이 보이는데
그때 재정비를 잘 해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다시 혼탁한 시간이 돌아오면 정신없이 바쁘다.
이것 저것 현세적인 사정을 챙기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새치가 하나둘씩 늘어간다.
어느 순간 딱 멈춰서서 자신을 바라보면
몸만 늙었지 마음은 여전히 세살바기 어린애일 뿐인 것이다.
마음을 성숙하게 하려면 침묵의 시공간을 찾아야 한다.
몸이야 때가 되면 지가 알아서 크는거고
정신 똑바른데 굶어죽는 사람 못봤다.
그러니 마음 키우기에 애쓸란다.
마음이 크면 무엇보다도 내가 푸근해진다.
그리고 내 주변이 내 푸근함으로 채워지고 평화로워지고
결국 나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셈이다.
세상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도
가장 먼저는 자기 꼬락서니부터 봐야 한다.
넥타이 하나 혼자 매지 못하는 판에
무슨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것인지...
머리에서 가슴까지
참으로 까가우면서도 먼 거리이다.
한 순간에 내려가기도 하는데 어떤 것은 수십년이 걸리기도 한다.
어떤 것은 생각만 하는 순간 바로 몸이 따르고
어떤 것은 우리가 쌓아온 탐욕을 그대로 거슬러 비질을 하고서야 비로소 이룰 수 있다.
그러니 아예 엄두도 나지 않는 셈이다.
잠깐 머리에 머물렀다가는 금새 내려놓고
쉽고, 편하고, 좋은 것만 찾기 일쑤다.
그리고 그러는 만큼 탐욕이라는 먼지는 더욱 더 쌓여만 가고
가뜩이나 흐린 영혼을 더 혼탁하게 하여
그나마 보이던 빛마저도 가려 버리는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참으로 가까우면서도 멀다.
할 만한 일들
주님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 속에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이는 '주님 뜻에 맞는' 글을 쓰고, 고기를 잡는 이는 '최선을 다해 성실히' 고기를 잡고, 물건 파는 이는 '정직하게' 물건을 팔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갑작스레 다른 나라를 가라, 목숨을 바쳐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활동 범위 안에서 우리의 뜻을 뽑아내고 하느님의 뜻으로 채우기를 바라시는 셈입니다.
우리는 왜 그리 주님께 나아가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몰라서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알면서도 '하기가 싫은' 셈입니다. 결국 '우리의 뜻'이 우선되는 셈이지요. 우리의 이 끈질긴 원의가 우리가 하는 일들 속에 주님의 뜻을 새겨넣는 데에 그렇게 큰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인 행세를 하고 싶은 것이지요. 내 돈, 내 직업, 내 명예, 내 권력, 내 가족, 내 나라, 내... 이런 모든 '내' 시리즈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쉽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자기를 버리기'가 쉬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나씩 해 나가면 됩니다. 우리는 하루에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할 만한 것들을 이루면 되는 셈입니다. 밥을 먹어도 사람을 만나도 그 안에서 '하느님'을 두고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너무 추상적으로 노는 느낌입니다. 헌데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세적인 바램들을 많이 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현세적인 욕구들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뉴스를 보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나마 사보던 신문도 의욕을 잃었습니다. 밥이 참 맛있었는데 옛날처럼 미친듯이 먹지는 않구요, 술도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또 한 번 쓰러지는 날이 오겠지요. 저는 나약한 존재이거든요. 하지만 할 만한 일들 속에서 주님을 깨어 기다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주님의 말씀 창고에서 꺼낸 보화들을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리도록 노력하지요. 왜냐면 그것이 제가 할 만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길
이 길은 누구를 무너뜨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은 나도 살고 너도 살아야 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이 살아남이 단순한 육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은 누군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 죽어야 하는 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둘 다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길은 '사랑'의 길이라 불리며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길입니다.
이 길을 가장 온전히 걸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사랑의 길을 온전히 알고 계셨으며
홀로 그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족적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지요.
십자가의 죽음으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길
모든 이를, 심지어 원수마저도 '친구'로 삼는 길
우리는 아직도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알아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를 그분에게 내어드릴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지만
우리 주님은 온전하시며
우리를 온전히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완전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내면의 진실
한편으로 '편집증 환자'가 되어가고 다른 한 편으로 '늙은이'가 되어 가는 기분입니다. 뭔가를 하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 속이 빤히 읽히는 것 같은데 겉으로는 노인네 마냥 '그러세요~' 하고 있습니다. 뭐 이든 저든 별 상관이 없는 게 대부분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네들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에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거절하게 되겠지요.
사실 세상 안의 상당수의 것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뭔가 대단히 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은 그 내면에 전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걸 이루어도 그만 이루지 못해도 그만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우리 스스로의 내면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늘 성찰하고 그 가운데에서 어둠을 향한 영역을 철저하게 막고 그 반대의 영역, 즉 빛을 향해 나아가는 영역을 활성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만큼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할 것은 '네'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저로서는 세상의 정치판이라던지 그 밖의 복잡 다단한 일을 모두 추려낼 순 없습니다. 이건 줄 알았던 이야기가 저 이야기를 들으면 저건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다 합당한 이유가 있더군요. 하지만 그런 문제를 접하면서 내 안의 내면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한 의로움을 찾으러 나가는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저들 하는 꼬락서니가 맘에 안들어 분통을 터뜨리는 건지 말이지요. ㅎㅎㅎ 우리의 내면을 살피고 할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넘들이 같이 한다 안한다 해서 화내거나 짜증낼 일도 없습니다. 내 안의 굳은 신념을 따라가는 셈이지요. 다만 저는 가톨릭 사제로서 그 굳은 신념 안에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있기를 기원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각자가 하는 것이구요.
참 쉽지 않은 세상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진리는 태양처럼 분명하게 내리 비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내면에 진실한 이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증오
'한잔 합시다!'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남자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라는 싸나이도 그런 자리를 마련했네요. 동네 이름있는 인사들을 잔뜩 불러서 연회를 열었습니다. 기분 짱이었지요. 그런데다가 자기 동생의 아내의 딸이 나서서 춤도 추어 기분은 더욱 극에 달했습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나라의 반이라도 주마!"
정말 줄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헤로데도 그 철없는 아이가 그런 걸 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자기가 청할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좀 대단한 것, 하지만 헤로데에게는 지극히 작은 선물이나 청했겠지요. 헌데 이 소녀가 쪼르르 달려나가더니 엄마에게 뭘 청할지 묻습니다. 그러니 이 사악한 여자가 헤로데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범위의 덫을 놓아 버립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하거라."
이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간직하는 '증오'의 위력입니다. 증오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겉으로는 당장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 증오가 싹을 내리고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최고의 순간을 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앞에 놓이는 선택을 주저할 수 없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증오'의 상징이고 헤로데는 우유부단한 우리 '의지'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헤로디아의 딸은 천진난만한 '상상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삼박자가 들어맞아 요한으로 상징되는 진리와 정의를 향한 최고의 '복수'를 완성하는 셈입니다.
여러분 안의 증오를 조심하십시오. 막연히 화가 나 있는 동안 여러분은 어떻게든 그 증오를 해소할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주변의 죄없는 사람을 그 희생양으로 삼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증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증오가 이루어지는 꼴을 보며 오히려 '쾌감'으로 다가와서 결국 그 증오는 오히려 더 증폭되어 버립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증오를 없애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방법은 하느님 앞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직 그때에만 증오는 눈녹듯 녹아 버립니다. 우리의 범죄가 어떻게 용서받고 있는지를 체험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 못난 모습을 어떻게 참아내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증오를 녹여내십시오. 절대로 감춰두고 키우지 마십시오. 그 증오는 바로 여러분 자신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기다리지 않은 게 아닙니다. 기다렸습니다. 밤이 새도록 기다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고 자기들만 존 것도 아니고 모두가 졸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기름이 떨어져 사러 간 것 뿐입니다. 헌데 이거 너무 매정한 거 아닙니까?
신랑이 오시는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만 등불이 꺼져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처녀들은 참으로 억울하기 이를 데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기름만 떨어져서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다니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신랑은 같은 대답만 반복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 말을 들을수록 더욱 서럽기만 합니다.
이 비유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신랑을 도로 비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 비유에 마음을 써 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선물받는 이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믿음'을 유지하는 능력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정말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믿음'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믿음'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린 정말 믿기나 하는지요? 믿음은 무엇으로 드러나는 걸까요? 세례 받으면 다 믿는 게 아니라는 건 신앙생활을 어느정도 해 본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마치 '하늘을 향하기'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서 처음에는 바닥만 봅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요. 처음에는 바닥에서 신기한 것들을 정말 많이 발견합니다. 흙이며, 돌이며, 풀이며 나무며, 나중에는 어쩌다 만나는 동전이며 주변 기물들이며 관심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점점 하늘에 눈을 들어 하늘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점점 길들어가게 되지요. 태양과 구름, 달과 별들에 점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아래에서 눈을 떼고 점점 위를 바라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위를 보는 것 뿐입니다. 우리 힘으로 오를 순 없지요. 헌데 어느 날엔가 하늘에서 새하얀 밧줄이 내려오는 걸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그걸 잡고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동안에 여전히 땅에서 재미난 것들에 취해 있는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하지요.
믿음을 유지하는 능력,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처없이 떠도는 생각의 고삐를 잡아쥐고 하느님께로 다시 향하고 다시 향하는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분심하고 잠들고 하더라도 또 기도를 하려는 노력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유지시켜 줍니다. 모두가 나약하기에 영적으로 잠들 때도 있지만 이 믿음을 훈련해 온 사람에게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 하늘을 바라보던 이에게 얼마간의 시간동안 하늘을 꾸준히 바라보게 하는 것은 곤욕이 됩니다. 왜냐면 여전히 발 밑에 채이는 것들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기 때문에 밋밋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자기 생각에는 너무나 어리석은 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양자가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던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에 잠이 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예시의 말씀이 주어질 것이고 그 순간부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밝혀 들고 있을 준비를 하려면, 지금부터 그 노력을 해 두어야 합니다. 그 시간에 기름을 사러 가겠다고 나서다가는 신랑을 놓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기분으로 문 밖에서 이를 갈며 분통을 터뜨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적 의미의 외모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조차도 그분을 보고도 동산지기인 줄 알 정도였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그 장시간을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의 신원을 알아차리지 못했지요.
우리가 부활하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육신을 얻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의 구절은 이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사실 '육신'과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셈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부활한 육신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부활 하시고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외모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 후의 영광된 모습을 입게 됩니다. 그 모습은 아마 전혀 딴 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외모에 너무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세의 외모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데 일조를 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은 기본적으로 모든 남자들의 호감을 얻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면이 그득한 남자는 얼굴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상대의 내면에 든 아름다운 마음이 없이 그저 얼굴만 이쁘고 허영이 가득한 여자에 대해서 남자들은 금새 실망을 하고 거부를 하게 됩니다.
내면을 가꾸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사실 나이가 중반을 넘어서고 나면 제 아무리 이쁜 사람이라도 그 외모가 스러져가게 마련입니다. 제 아무리 마릴린 먼로라 하더라도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눈앞에 두고 과거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나이에도 예전의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려고 고군분투한다면 오히려 추해 보이기 일쑤입니다.
진실함과 선함, 온유함과 친절함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얼굴을 꾸미는 것은 '미소'입니다. 많이 웃으시고 이웃들에게 잔잔한 미소 건네는 사람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________^ 스마~~~~~일~ ㅋ
진정한 하나됨
수많은 이들이 모여 '단체'를 형성합니다. 언뜻 부러워 보입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모여서 회식을 하고 왁자지껄하게 서로의 우애를 굳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왠지 그런 모임에 끼지 않으면 소외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이들의 특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서로의 '기호'가 맞아 떨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어울려 즐기고 좋아들하지만 어느 순간 수가 틀리는 때부터 그만한 '원수지간'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연결되지 않은 모든 관계는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닙니다. 이들은 서로의 욕구와 기호에 따라서 서로의 취향에 따라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모이는 특성을 지닙니다. 이런 관계를 '하느님'을 통해서 하나로 묶지 않는 이상은 이들은 이런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은 모든 것을 진정한 '하나'로 엮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간직할 때에야 비로소 모든 이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삼고 그것을 올바로 세우려고 할 때에 자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서게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친구도 원수도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일 뿐입니다. 지나치게 좋아하면서 '우리만의 경계'를 형성할 이유도 없고, 또 생각이 좀 다르다고 내쳐버릴 이유도 없습니다. 그와 나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는 이상은 하느님께서 다가서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하느님을 통한 진정한 하나됨, 잘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과연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스위치
사방의 벽에 스위치가 죽 늘어선 방에 들어왔습니다. 온갖 옵션이 다양한 스위치들입니다. 방안에 있는 다양한 전자기기며 전열기구 에어컨들이 즐비한 가운데 그 모든 것과 연계된 스위치들입니다. 이걸 켤 수도, 저걸 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구들은 방 안에 있는 배터리로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온가지 것들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곧 꺼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 방 입구 맞은편 벽의 한 가운데에는 '외부전원'이라는 초라한 모습의 스위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이 스위치를 찾아내어 외부전원을 연결시켜 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머지 스위치에 정신이 팔려 켜고 끄고 하는 동안 밧데리는 다 닳아 버리고 결국 전기는 모두 나가 방 안은 캄캄해지고 '외부전원' 스위치는 결코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생명이 사라져가는 판에 그 밖의 것들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입니까? 모든 것들은 먼저 '영원한 생명'의 기반 하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됩니다. 그러지 않고 전원이 다 나가버리고 나면 그 간에 우리가 소중히 여겨오던 가치들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스위치를 노려보고 있는 중입니까? 대학? 직장? 결혼? 아이? 성공? 재산? 명예? 자존심? 하지만 가장 먼저는 '영원'이라는 이름의 스위치를 찾아 연결시켜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기, 즉 '생명'을 생산할 수는 없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허무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그걸 가져오는 아이는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가능하지도 않구요. 다만 그 아이는 잠시 그 일에 열중하면서 즐기는 셈입니다. 모래성을 만들고 그걸 가져 가겠다고 떼를 쓰면 정말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지요. 누구든지 아예 시작 할때부터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는 셈입니다.
하지만 모래성을 쌓다보면 어느새 열중하게 되고 거기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행여 누가 모래성을 부수기라도 하면 엄청 화를 내게 됩니다. 어차피 버릴 거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아예 조금 쌓다가 스스로 부수면서 놀기도 합니다. 이미 그 모래성의 특성을 잘 이해한 것이지요. 쌓으면서 재밌고 부수면서 재미있어 하는 이 아이는 진정 모래성을 즐길 줄 아는 아이인 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적지 않은 일들은 '모래성 쌓기' 입니다. 우리는 시작할때부터 그걸 (영생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일을 하게 됩니다. 조금만 생각을 돌려 진지하게 지금의 일을 바라본다면 그 특성을 금새 깨달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모래성을 쌓으면서 어느새 거기 길들여지고 마음을 빼앗겨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너져도 다시 쌓을 수 있고 이든 저든 결국에는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느새 잊어버린 셈이지요. 우리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모래를 신중하게 쌓고 다지고 다듬는 중인 셈입니다.
명품구두, 가방, 고소득 직업, 거주, 직위, 명예, 권력, 수많은 재산… 이 가운데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지금 아주 진지한 모래성을 쌓는 중인 셈입니다.
이 가운데 이 놀이를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래성 쌓아 보기도 하고 무너지는 꼴을 보기도 하면서 모래성을 있는 그대로 즐깁니다. 달리 할 것이 없을 때에는 모래성을 쌓고, 때로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맛있고 시원한 주스도 얻어먹고, 아빠랑 수박을 쪼개 나눠 먹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서 모래성을 쌓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성을 내버려두고 나오기도 합니다. 오직 모래성 하나에 집중해 있는 아이들이 보면 이 아이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처럼 보이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모래성 외에도 해변가에 놀 것이 많다는 걸 아는 아이들에겐 모래성 놀이에만 열중하는 아이들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지요.
누가 진실일지는 나중에 가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서 노는 동안만 비교해 보더라도 누가 더 인생을 제대로 즐기느냐고 묻는다면 저로서는 모래의 특성을 이해한 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직 모래성에만 집중한 아이는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모래성 한 귀퉁이가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든요.
열심히 쌓은 모래성이 무너질 땐 조금 안타까워 하더라도 금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엄마 아빠에게 가서 다른 좋은 것들을 잔뜩 받아오는 아이들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모래성에 집착하는 몇몇 분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ㅎㅎㅎ
주님의 고통의 종류
우리는 손가락만 베어도 아파 죽겠다고 요란을 떱니다. 오늘은 우리 구세주께서 당하신 고통에 대해서 살짝만 알아보겠습니다. 말 그대로 살짝입니다. 왜냐면 그저 지성과 상상력으로 훑어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육체
40일간의 단식. 몸이 극도로 허약해질때까지 단식을 하심. 공생활부터는 온 고을을 돌아다니시면서 복음선포. 심지어는 밥 먹을 틈도 없을 정도로 몰려오는 군중들을 맞이하시면서도 그치지 않으심. 나중에는 구타, 채찍질, 가시관을 받으시고 그 몸으로 십자가를 끌고 골고타까지 올라가심.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져 손발에 대못으로 구멍이 뚫리고 매달려 계시다가 결국 육신의 죽음을 맞이함.
정신
일찍부터 미친사람 취급을 받음. 심지어는 친척들도 그분을 잡으러 다님. 곧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도전을 받는 상황. 그들의 간계를 파악해내고 대응할 수단을 찾으셔야 했음. 본심을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이 시도때도 없이 연출됨. 아무리 낮아지라 가르쳐도 제자들은 계속 높아질 궁리만 하고, 당신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수난과 죽음의 가르침 앞에서 도로 '하극상'을 선보임. 결국 직접 뽑은 제자인 유다가 자신을 배반함. 그것도 은전 30냥에 팔아넘김. 예수님이 잡힐 당시 제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짐. 어느 곳이나 따라 다니던 군중이 직접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고함을 지름. 이 땅에서의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모습을 절절이 체험함.
영
일찍부터 자신의 영을 포기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옴. 모든 기도의 순간에 자신을 버려야 했음. 게쎄마니 동산에서는 피땀이 흐를 정도로 자아 포기의 극단에 달함. 십자가 위에서는 단 하나의 마지막 희망,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뜻을 따랐던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마저도 버림받는 느낌을 절절이 체험함.
부활이후의 추가 고통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욕되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음. 비신자들이라면 차라리 괜찮겠으나 신자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많음. 심지어는 봉헌생활을 통해 자기를 바쳤다는 수도자들과 당신이 뽑아 세우신 사제들 중에서도 간혹 그런 모습이 보이기도 함. 끊임없는 배신감.
우리는 사실 '고통'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해도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주님의 고통을 따라 받는다면 벌써 까무러치더라도 수십번을 까무라쳤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근간으로 한 것일 뿐이니 실제 예수님에게 닥쳤을 고통은 얼마나 컸을지 저로서는 솔직히 상상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죄가 많아서 사실 그만한 보속을 해도 모자랄 판에 누구와 살짝 다투었다고 마음이 아프다고 아프다고 하는 이들,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억울해 죽겠다고 죽겠다고 하는 이들은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믿음
우리의 '이성'은 활발히 작용합니다. 참으로 논리적이고 우리가 이해할 만한 것들을 제공하지요. 1+1=2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이성을 통해서 사람은 하느님을 찾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다 합당하고 논리적인 것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이해력을 이끌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 위에 올려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꽤나 힘을 실어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걸 잘 아셔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는 걸 말이지요. 우리가 가진 이성이 '모두'를 캐치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어느 순간부터는 도저히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미사'를 봅시다.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예식의 기원과 모든 행위들의 인간적인 바탕입니다. 왜 팔을 벌리는지, 왜 포도주와 물을 쓰고, 왜 누룩없는 빵을 쓰는지와 같은 내용들을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추론해내고 그 의미들을 되새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부분, 즉 사제의 축복으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은 이성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작용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지요.
심지어 이성은 '믿음'이라는 행위를 빗대어 추론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예를 한 번 들어보세요. 내가 주머니에 땅콩 한 주먹을 숨겨서 조카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그 조카에게 '나 땅콩이 있어.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어.'라고 합니다. 그 조카가 나를 믿는다면 나에게 땅콩을 달라고 청해서 받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를 믿지 못한 채로 떠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인 셈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에게 '땅콩' 즉 '은총'을 받아먹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이해력으로는 삼촌이 땅콩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겉으로만 살펴봐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리 저리 모든 정황을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삼촌이 땅콩을 가졌는지 아닌지의 부분에서는 자신의 '믿음'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단순히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삶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상상력'에 불과한 셈이지요.
자기 자신의 머리를 믿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 머리를 따라가십시오. 하지만 그 머리가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비단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이성은 곧잘 한계에 부딪히곤 합니다. 하다못해 우리는 다른 이의 내면에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도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라 어제 한 마음을 지녔다가도 오늘 또 다른 마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머리만 믿는 사람은 그 머리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드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과 만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이성'의 길을 거쳐온 이에게 그 다음 수단으로 이성을 버리고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지요.
텔레비전
텔레비전을 끄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함께 사라집니다. 텔레비전이 지닌 장점과 단점이 모두 사라지는 셈이지요. 텔레비전으로 EBS 교육방송만 늘 보던 아이라면 '장점'이 사라지는 셈이지만, 많은 경우에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장점 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가진 존재입니다.
시간 빼앗기
기본 텔레비전을 보면 적지않은 시간을 거기에 보내게 됩니다. 프로그램 하나 당 1시간은 기본 넘기는 셈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그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있습니다.
호기심 자극
텔레비전은 많은 경우 다양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전에 없던 관심도 불러 일으키지요. 여러가지 광고들 안에서 드러나는 상품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 광고를 통해서 호기심이 생겨나고 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사고의 자동 주입
텔레비전은 모두가 계획된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주로는 '세상적 사고'를 가르칩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유명해져야 하고, 더 권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꾸준히 가르쳐 결국 우리 내면에 그런 인식을 튼튼하게 구축해 버립니다.
텔레비전을 끄면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사라지고 우리는 '균형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텔레비전이 지닌 장점도 함께 사라집니다. 텔레비전에는 '기분전환과 웃음'이라는 순기능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 잘 선별해서 시간을 정해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도 이 볼리비아에서 한국 방송이 나오지 않아서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투브에서 '개그 콘서트'는 다운을 받아서 휴식 시간에 신부님들과 함께 시청을 하지요. 고국의 언어로 한바탕 실컷 웃으면서 기분전환을 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해되지 않는 웃음 코드가 점점 늘어가는 기분입니다. ㅎㅎㅎ
온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외견이 섬뜩하면 일단은 가까이 하기 싫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아무리 속에 좋은 뜻을 품고 있어도 이 '온유'라는 기본적인 소양이 필요한 셈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아이들이 어렵지 않게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한 꼬마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곧잘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온유함'은 일종의 완충장치인 셈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공격적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온유함'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상대의 날카로움을 감싸안는 첫 번째 완충력이 없다면 우리는 곧잘 주변의 모든 사람과 부딪히게 됩니다.
실제로는 자신에게 이 덕목이 전혀 없음에도 자기 스스로는 굉장히 온유하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모남으로 상대방을 수시 때때로 찔러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온유한 게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이 온유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가 자기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나면 사정없이 쇳소리를 내며 충돌을 하고는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의 철천지 원수인 것처럼 생각을 하려고 듭니다. 실제로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말이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온유의 덕이 많이 부족해 곧잘 다른 이들과 부딪히곤 했지요. 어쩌면 아직도 그러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아는 만큼 온유함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적어도 본당의 아이들 미사를 마치고 나면 아이들이 생글생글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조금은 나아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에 두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의 입장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맞이하려고 노력합니다. 쉽지는 않네요.
하느님의 뜻
"아, 정말이지 누구누구는 말야… " 라는 주제로 말을 꺼내는 이는 곧잘 그들에 대한 한탄을 늘어 놓기 일쑤입니다. 그 대상은 국가가 되기도 하고 교회 권위자가 되기도 하고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으로 좋은 뜻을 품고 있으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탄스럽다는 이야기를 곧잘 하곤 합니다. 저는 대부분의 경우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지만 정말 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부분을 위해서 당신이 뭔가 하면 되지 않나요?"
우리가 곧잘 늘어놓는 탄식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 안타까움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곧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서 무언가를 원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치 공동선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이라고 포장해 버리곤 합니다. 실제로는 내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라는데 그걸 교묘히 숨긴 채로 이런 활동들이 '공동선'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만들어 내는 셈이지요.
나 스스로가 지닌 뜻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인지를 성찰한다면 크게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언제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나의 희생을 요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은 나의 안락과 편의를 위한 선택입니다.
누구는 마치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세계 어디로 나아가서 봉사하고 싶다는 큰 결의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교묘한 자신만의 계획'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하하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찌나 간사한 것인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일을 하면서 마주치는 이들의 숨겨진 뜻을 분별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그다지 착한 이들이 아닌 셈이지요.
압박하기와 제안하기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막연한 경계심이 생겨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거기다가 그 사람이 뭔가 '이질적'인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소위 '선교'를 한다는 미명으로 '한 걸음' 다가서면 그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뭔가 이상한 압박을 느끼고 당연 '한 걸음' 물러서 버립니다. 누른 만큼 퉁겨져 나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접해 오는 것들을 어색하게 여기고 거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우기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 중에 더 '좋은 것'에 사람들은 스스로 다가섭니다. 그것이 바로 '광고'의 역할인 셈이지요.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 가운데에서 자기네가 제시하는 것이 왜 더 좋은지를 알려 사람들이 스스로 다가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후자의 모습이 우리 신앙인들의 선교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섬뜩함을 느끼도록 잔뜩 이상한 기운을 풍기며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머물러 살아가며 그 가운데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들이 한 걸음 다가설 때에 그들에게 우리도 한 걸음 다가서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쳐대는 사람들은 사실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호감을 갖던 사람들에게마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도리어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선교의 모습은 그러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먼저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하느님을 살아 가십시오. 이것이 핵심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소금을 먼저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나면 자연스레 여러분들 각자의 현실 안에서 취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그 짠맛이 흘러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일상적 만남이든, 인터넷이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말이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물들여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밀어부치지 마십시오. 그들이 보고 선택하게 하십시오. 예수님도 '와서 보라'라고 하셨고, 당신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면서 사람들에게서 어둠의 영을 물리치고 병자를 치유하면서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들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호감이 갈 만한 '짠 맛'을 지니고 있는 걸까요?
신앙의 유무
때로 우리가 지닌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니, 신앙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과연 '신앙'은 어떻게 측정되는 것일까요?
최근에는 제품을 만들고 나면 제품 테스트를 합니다. 사실 만든 이들도 금방 나온 이 제품이 어떠한 환경에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전혀 의외의 결함 때문에 겉으로는 멀쩡한 제품이 단 한번의 충격 테스트에 산산 조각이 나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두드리고 떨어뜨리고 눌러보고 하는 등의 테스트를 하고 나면 비로소 이 제품이 어디까지 견디는지를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최초의 신앙 고백 때에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 그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천지의 창조주라 고백하지만 그분을 믿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는 지갑을 더 믿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테스트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도 넣어보고 저런 상황에도 넣어봅니다. 재물에 대한 테스트, 인간관계에 대한 테스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지에 대한 테스트를 거치는 셈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황금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인 '정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 제품 테스트를 거치고 나면 비로소 그의 신앙의 크기가 가늠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우리 스스로의 신앙의 크기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하느님 앞에 10000원 한장 내는 것도 아까워 바들바들 떨면서 마치 하느님에 대해서 큰 믿음이 있으니 하느님이 이런 나를 잘 봐주셔야 한다고 착각하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런 '교만한'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나면 적지 않은 이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모래와 자갈이 섞인 체를 치고 나면 고운 모래만이 빠져 나가고 자갈은 남는 것과 같지요. 우리는 더욱 고운 모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체를 통과해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시멘트와 섞여 하느님 나라의 건축물을 짓는 재료가 되는 셈입니다.
나약함
때로 나에게서 마주하게 되는 약점은 저 나락으로 저 자신을 고꾸라뜨리고 맙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아니,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상상력으로야 무엇을 못합니까?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도 되어 보았다가,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되어 보았다가 하면서 이상 세계를 넘나들지만, 현실의 나의 나약함에 부딪히는 순간 나의 위치는 저 나락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참 비참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우리들인데도 '기도'는 커녕 자신의 교만의 탑을 더욱 쌓으려고 안달입니다. 마치 더 가진 것이 자신의 힘인 양,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나은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자신의 힘인 양 착각합니다. 이런 이들일수록 지극히 사소한 감정적 충격에 미친듯이 흥분하곤 합니다. 얼마전의 항공기 안의 모 회사 간부의 행태는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마주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비참한 일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느님 앞에 올바른 위치를 잊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 '나약함'을 앞에 두고 있는 이상 교만 할래야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눈 앞에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스스로 깨끗하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 옷을 주님께서 빨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영광'을 입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율법의 가장 작은 하나까지 모조리 지킨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참으로 한심스러운 모습은 이런 스스로를 잊기 위해서 '향락'에 취하는 이들입니다. 더 맛있는 것, 더 비싸고 좋은 것을 찾는 우리의 쾌락중추는 이런 심각한 고민 따위를 싸그리 잊어버리게 도와줍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자기 스스로와 마주하려 하지 않는 가련한 쾌락 중독자들이 넘쳐 흐르는 세상입니다.
나약함은 우리더러 쓰러지라는 것이기보다는 보다 더 하느님께 매달리라는 하느님의 신호입니다. 나약함은 다른 한편으로 더할 나위 없는 하느님의 은총인 셈입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아멘.
교만
인간의 첫 범죄는 '교만'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지만 이들이 되고 싶어했던 '하느님처럼'의 의미는 하느님의 손길 아래에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하느님의 능력'을 갖고 싶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얻게 된 것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한계'였습니다.
인간은 결정적인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위대한 일을 하더라도 결국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무너져 버리고 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영원'이신 분 깨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인 활동을 많이 한다고 신앙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근본의 질문에 똑똑하게 응답할 수 있을 때에 신앙적이 됩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나의 자유의지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가?"
'하느님'이란 단어를 머리에 떠올린다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이란 그분의 존재를 알고 나아가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산골 아이가 부모에게 '황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금'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 가치로움 대해서도 다른 이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를 알지만 어느 날 길에서 실제로 황금을 만났음에도 그냥 반짝이는 돌이라고 생각하고 발로 차 버리고 맙니다. 이 소년은 황금을 인지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얼마나 하느님과 살아가는지요? 그분의 존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하는지요?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은 '옵션'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언제라도 사정없이 내칠 수 있는 존재가 '하느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멋들어진 글을 읽으면서는 모든 걸 내어줄듯이 하다가 실제 그런 상황이 닥쳐 버리면 사정없이 나 스스로를 챙기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일쑤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러한 '교만' 속에서 살아가다가 나중에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겠지만, 결국 쫓겨나고 말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예복'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고 오직 '욕구'만 있었습니다. 구원을 원했지 그것을 실제로 얻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지'는 못한 셈입니다.
이해하기 난해한 글이지만 그 안에 포함된 심각성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이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날에 과연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감정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한 것이라 지극히 작은 애정 표현에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한편 사소한 표현 하나에도 쇳덩이처럼 굳어지기도 합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역은 '감정'이라는 것인데요, 누구는 보다 더 섬세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무디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여기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게 마련입니다. 다만 신경을 쓰면 '훈련'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이 감정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도 때로는 울고, 화내시고, 아이들과 더불어 웃으시고, 휴식도 취하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은 '로봇'이 되는 게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감정도 '거룩하게' 쓸 수 있다면 참으로 유용하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일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때로 마치 '감정이 없는 듯'이 내비쳐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요, 일에 집중하다보니 그런 것일 뿐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또 상대의 감정을 눈치채는 영역도 고스란히 살아 있어서 상대의 '분위기'가 바뀌면 금방 알아차리곤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들의 감정을 다시 '좋은 쪽'으로 돌이키려고 지독히도 노력을 했다면 지금은 좀 무던해진 편입니다. 결국 '감정'이라는 것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도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그 모든 순간들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감정이 늘 좋은 쪽으로만 기울기를 바라는 건 일종의 제 욕심인 셈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정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감정은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는 좋은 훈련 도구가 되곤 하거든요.
감정이 '기쁘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무턱대고 기뻐할 이유도 없고, 감정이 '슬프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무턱대고 동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면 때로는 '사탄'이 우리에게 건네는 것도 우리는 '기뻐하기' 일쑤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건네는 것에 '슬퍼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죽이지는 않고 살려 두되 감정의 '종'이 되지는 말고 감정의 주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앞에 두고 노기띤 얼굴로 바리사이들을 보다가 그들을 위해 도리어 슬퍼하신 것처럼 우리의 내면 보다 깊이에서 우리의 생각을 정돈함으로써 우리는 이 감정을 보다 긍정적인 쪽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섭섭할 소리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이유는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느님께 투덜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악을 청산하지 않는다면서 하느님께 투덜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 그 투덜거림을 하는 사람도 남아나지는 못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그래도 큰 잘못을 한 게 없으니, 극악 무도한 사람을 심판하려는 것인데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그와 자기 내면 사이에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에 앞서 '누구를 미워하는 이'를 경고하셨지요.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계시는데 다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셈입니다. 우리는 '사탕'을 청하는데 하느님은 더 향긋하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사탕을 달라며 떼를 쓰는 상황이지요. 그러니 하느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요? 예수님은 청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신다는 걸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귀를 열고 하느님이 어느 부분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들어야지요.
하느님은 온 우주를 총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가운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시지요. 크나큰 우주에 먼지 한 톨도 안되는 지구 속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주는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으니 하느님은 이 땅을 지켜보시며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시는 것이지요. 해결책이 없냐구요? 이미 하느님은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당신 외아들마저도 보내셨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초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의 욕구는 얼마나 강렬한지 우리의 창조주의 섭리조차고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이제 하느님 섭섭할 소릴랑은 그만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려고 노력합시다. 가장 먼저는 우리 삶부터 바로 세우고 나아가 이웃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의 탐욕이 극에 달해 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어제는 우리 신부님들과 문화행사로 2009년도에 만들어진 "HOME"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지구의 탄생부터 오늘날까지를 담담한 톤의 나레이션과 함께 잔잔하고 아름다운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이 지구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으며 생명체들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그리고 인간은 그 가운데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중반 이후부터는 그만한 스릴러물이 따로 없습니다. 단순한 스릴러물이 아니라 우리 삶과 연관되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습니다.
인간은 최근 50년간 발전에 발전(인간적인 의미로서만)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허상이며 실제로는 모든 것이 공생하는 이 행성 지구를 사정없이 착취해 나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모두 '공멸'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전세계 재화의 80%를 20%의 사람이 쓰고 있으며 전 인류가 먹을 2배의 곡물을 재배하는데도 기아에 시달리는 이들이 10억명이나 되고 하루에 5000명이 썩은 물 때문에 죽어나갑니다. 지구 한 켠에는 물이 없어 주부들이 노동을 해서 물을 캐어내는데 다른 한 켠에서는 사막에다 물을 끌어대어 '라스베거스'라는 미친 쾌락의 도시를 만들어 일인단 하루 수백에서 수천리터의 물을 낭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저는 볼리비아에 살아가며 지구 문명화의 반대편의 어두움을 직시하는 셈입니다. 더군다나 이 곳은 여전히 태고의 사람살이의 모습과 문명의 모습이 뒤섞여 지독히 혼란스러운 모습을 창출해 내고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과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지요.
수영장이 있는 집과 바람도 못 막는 집 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저 스스로에게도 거듭 묻습니다. 저에게 굳어가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활요구는 반드시 들어줄 필요가 있다.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것을 제공해야 하고, 헐벗고 집이 없는 이들도 옷과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사제로서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해야 한다. 끊임없이 재화를 가져다 대는 것은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것이다. 나아가 부자들에게 이 '신앙'전수의 작업은 더욱 시급하다. 차라리 가난해서 나눌 것이 정말 없다면 모르겠지만 있으면서도 나누지 않는 이들의 마음은 영적으로 더 공허한 것이다."
나날이 갈수록 이런 저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 가는 셈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 곳 사람들과는 얼굴을 마주하면서 실제적인 해결책을 찾는 한 편, 이렇게 인터넷으로 다른 쪽 사람들에게 이 곳의 실상을 알리고 더 나은 길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하느님을 찾기
우리가 가진 그 어느 감각으로도 하느님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가장 힘들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감각적 영역으로 느껴지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는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인지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증언'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누군가가 해 주는 하느님에 대한 말, 인생의 진리에 대한 말, 믿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설명은 우리를 최초로 하느님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 증언을 따라가보면 우리는 풍부한 교회의 선구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지요.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은 오직 한 분을 증언해 왔고, 신약의 모든 이들 역시도 한 분의 증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셨고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례 속에서 '향기'도 느낄 수 있는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속이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순수한 태초의 감각을 빼앗고 우리의 정신을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배고픔을 채워주고 그 고유의 맛을 지닌 채소와, 이태리 장인이 한방울 한방울 땀을 흘려 만들었다는 소스를 뿌린 샐러드의 차이라고 할까요? 만일 그냥 채소만 먹어온 시골 소년이 그 '고상하다는 소스' 맛을 보았다면 너무 쌩뚱맞아서 인상을 찌푸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태리'와 '장인'과 '고귀한 세상적 가치'를 그 액체방울에 덮씌워서 마치 그 맛이 정말로 더 좋은 것인 듯이 착각하는 것이지요. 행여 그 안에 화학 조미료가 가득 들어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 정보가 알려지지 않는 이상은 '비싼 소스'일 뿐입니다.
다른 모든 가치들에도 이런 헛된 망상이 덮씌워져 있고 결국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게 정신을 팔려 옆길로 새어나가는 셈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고유의 감각을 점점 잊어가고 있지요.
그러니 자연 '거룩하다'는 것들에게서 멀어지고 그러한 것들은 '지겹고 힘든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 속에 살아갑니다. 단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성경은 따분하다'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지요. 다른 성인들의 저서도 그러합니다. '미사' 역시도 그 안에 숨겨진 것들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이 외견만으로 판단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순수한 감각을 회복하게 될 때, 자연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능력도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제6의 감각입니다. 바로 영적인 것을 느끼는 감각이지요. 과거 순박했던 시절 어르신들은 천둥만 쳐도 '천지신명'을 떠올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설 자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는 셈입니다. 천만에요 이 타락한 시대일수록 더욱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인간의 오감의 쾌락 수준을 더욱 높여 놓았습니다. 옛날에는 여행을 다녀야 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그 동네의 경치가 담긴 사진들을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르신들이 두런두런 옛날 이야기를 해 주며 교훈을 배우고 상상력을 키웠는데 지금은 화려한 영상이 담긴 영화로 증오와 파괴력을 습득합니다.
그러니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것이지요. 우리의 이 여섯번째 영적 감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닫혀만 갑니다. 하지만 자신들로서는 이런 상황이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뭔가 마음이 늘 공허한 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찾아 나서질 않고 더 나은 '쾌락'을 찾아 헤메고만 다닙니다. 그리고 늘 생각하는 것이 '아직 나에게 돈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지극히 유치하고도 단순한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것이지요. 천만에요,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결국 이런 정황을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 '믿음'이 있는 이들만이 안타까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나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증언'을 하지요. 먼저는 세상에 대한 갈구의 허상을 드러내어 밝히고 하느님의 가치를 설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안에 이 '세상'이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 있는지 여간해서는 빠져 나오지가 않네요. 곁에 머무는 동안 노력할 수 있을 뿐 우리는 타인을 구원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 사람의 믿음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곁에 두고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에게는 답이 없는 셈이지요.
돈이 전부가 아닌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돈에 대한 추구를 하느님에 대한 추구보다 더욱 열심히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가운데 예언자적 사명을 지닌 이들은 증언에 증언을 거듭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쪼록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 사명에 동참하는 분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배우자가 될 사람
배우자가 될 사람의 가치를,
그가 소유한 것이나 그의 외견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모습으로 찾는 사람은 복됩니다.
인간사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가 가진 재산이나 잘난 인물이 행복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균형잡힌 사고를 지니고 있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
나아가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줄 줄 아는 따스한 사람이면
먹거리가 없어 굶주리거나 생의 존엄을 잃을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끼리끼리 모입니다.
외모를 바탕으로 배우자를 찾는 사람은
그만큼 '집착과 허영심'이 많다는 것이고
결국 그만큼 그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 것입니다.
재력을 바탕으로 배우자를 찾는 사람은
그만큼 '탐욕과 이기심'이 많다는 것이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든 저든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우리는 살면서 배워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을 배치시켜 주시니까요.
하느님에게 감사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럼 모든 걸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게 됩니다.
저부터 그럴 작정이니까요. ^^
식욕의 허상
최근 들어 느끼는 진리는 우리의 식도락은 많은 경우에 진정한 허기를 채우는 게 아니라 막연한 공허감을 음식이 주는 쾌락으로 채우려 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살찔 이유는 없다. 과한 식욕의 결과는 우리 몸의 비대함으로 연결되고 과한 욕구의 결과는 우리 영의 마비로 이어진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음식 사진은 성욕을 억지로 자극하는 포르노의 이미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한 가치
거울이라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가 거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 거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다가가 만져보지 않는 이상은 거기에 존재한다고 스스로 믿는 셈이지요. 결국 자신이 '있다고 믿는' 마음 때문에 그것을 현실로 믿는 셈입니다.
우리가 보고 인지하는 모든 것들이 '실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내가 지금 타자를 치는 컴퓨터는 나에게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컴퓨터는 과연 '있는 것'일가요? 아니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무엇'이 아닐까요? 조금 복잡해 보이시죠? 다른 예를 들어 볼께요.
스페인어를 모르는 친구 앞에 스페인어로 된 책을 한 권 선물합니다. 그 친구에게 이 책은 그 안의 내용보다는 껍데기와 종이의 질, 무게 같은 것으로 인식이 됩니다. 결국 그 아이는 책을 한 권 받은 셈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 서적이 실제로는 구하기 엄청 힘든 어느 저자의 희귀본이고 가격이 수십억원을 호다가하는 책이라면 어떨까요? 그 선물을 받은 친구는 그런 가치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그 책의 외면만 바라보는 셈입니다.
이 비유로 이해가 좀 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 본래의 가치를 외면하는 경우도 많고, 또 반대로 원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다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 놓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외면하고 반대로 '구두'와 '가방'과 '사치품'에다 엄청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이런 식의 가치부여의 기준은 바로 '거울 안에 든 실제'와도 같이 모두 '허상'일 뿐입니다.
여러분 나무 한 그루와 10억원을 호가하는 골동품 나무 상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느님은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길까요? 하느님은 지금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 안의 생명이 더 소중하지 그것의 재화적인 가치가 소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10억원짜리 나무 상자를 애지중지 닦고 또 닦고 하면서 정작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는 사정없이 베어내고 맙니다. 이러한 일들은 동물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그 밖의 수많은 것들을 대하면서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한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올바로 분별하고 있는 걸까요? 한 인간 안에 든 '영혼'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요? 아니요, 알고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곧잘 '물건' 하나 때문에 '영혼'을 증오하기 일쑤입니다.
'허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루빨리 깨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은 알고있다.
땀을 흘려 일하고 벌어서 먹는 이들,
그들의 노동의 가치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곧잘 그 노동은 천시되고
기피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혼란한 세태 가운데 엉뚱한 일들이 필요 이상의 찬사를 받으며 드높여지고
그들은 어쩌다 얻은 재주로 지나치게 과한 수입을 얻으며 살아간다.
잘난 인물을 지녔다는 이유 하나로 노래 한 곡 부르고 수천만원을 채 가는 한편,
땅을 파고 흙을 가꾸며 살아온 어르신들의 가치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누구는 수백 수천만원짜리 명품 가방에 목매달고 있고
누구는 몇백원짜리 물약이 없어 죽어야 한다.
하늘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가난한 자의 신음이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제 값을 받게 될 것이다.
오직 '사랑' 만이 이 어둠의 세태를 구원할 수 있다.
영혼의 독수리
"퍼드덕! 철그렁! 털썩!"
'영혼'이라는 이름의 독수리는 오늘도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열망으로 날개를 퍼덕여 보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주저앉고 맙니다. 발목에 차여 있는 '죄악'이라는 이름의 쇠사슬 때문입니다. 사실 벌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제'라는 이름의 양치기를 만나면 그가 지닌 '고해성사'라는 지팡이로 이 쇠사슬을 쉽게 끊어낼 수 있다는 걸 말이지요. 하지만 독수리로서는 이미 어느 정도는 이 쇠사슬에 길들여져 있는 셈입니다. 이 쇠사슬을 차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에게 '쾌락'이라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가 있거든요. 언제나 만족스러울 정도를 가져다 주지 않아서 늘 배가 고프고 음식 자체도 그리 썩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장에 다가오는 '욕구'라는 배고픔을 해소해 주기는 하니 자꾸 그 음식에 길들어 가기만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는 동안 '탐욕'이라는 살이 자꾸 늘어가 날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명예와 권력'이라는 독극물이 '기도'라는 날개의 힘을 점점 빼놓고 있습니다.
그 동안 홀로 어떻게 쇠사슬을 끊어볼까 이리 저리 궁리만 하다가 결국 오늘은 결심을 작정합니다. 자신이 그 동안 지녀왔던 교만을 버리고 '수치'를 무릎쓰고 그 양치기를 부르기로 합니다.
"양치기님, 저 좀 도와 주실래요?"
의외로 양치기는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양치기는 다가와서 자신의 지팡이로 그 쇠사슬을 힘껏 내리칩니다. 순간 독수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 순간 '독수리의 제왕'이신 분의 영광스런 모습이 내비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뭐지? 방금 그건?'
쇠사슬은 순식간에 박살이 납니다. 독수리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마침내 쇠사슬에서 '자유'가 된 것입니다. 한동안 기쁨에 사로잡혀 있던 독수리는 비로소 날개를 펼칩니다. 그리고 두어번 움직여 보려고 시도합니다. 이런… 그 동안 몸이 이렇게 비대해져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날개는 형편없이 작았습니다. 독수리는 그만 움찔 해서 용기를 잃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 양치기가 다시 다가옵니다.
"두려워말고 힘을 내세요. 제가 함께 있을께요. 저와 함께 연습해요."
아, 이 말을 듣는 순간에도 독수리는 양치기 안에서 '독수리의 제왕'의 모습을 느꼈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내부에서 솟아났습니다. 그 날 부터 독수리는 '양치기'를 따라서 날개짓을 연습합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 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독수리는 심통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양치기가 자기를 가르칠 때에 언제나 흰색 망토를 걸치곤 했는데 그게 자기 눈에는 너무나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흰색을 싫어했습니다. 늘 검은색과 갈색을 선호했지요. 흰 색만 보면 뭔가 마음이 불안해지고 신경질을 내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이 독수리는 '양치기'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미 날개를 수련하는 법 정도는 배웠고 자기도 양치기 만큼은 거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무렵에는 자신이 보았던 '독수리의 제왕'의 모습도 이미 기억에서 아른거릴 뿐이었습니다. 이 독수리는 자신감에 온전히 사로잡혀 모든 걸 스스로 할 수 있노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느정도 커진 날개로 높은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날개를 시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 '성령'이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펼쳤습니다. 바람의 양력이 날개를 들어올리고 그와 더불어 함께 몸 전체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는 찰나였습니다.
"저기있다!!!!!"
저 앞에 그 쇠사슬의 주인이 '유혹'의 총을 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는 양치기를 통해 달아나 버린 독수리를 잡으러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번번히 양치기 때문에 다가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같은 총을 들고 그 독수리를 향해 가늠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타타탕!!!!"
독수리는 총에 맞았고 겨우 회복 되어서 날기 시작할 수 있을 뿐이던 날개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 쇠사슬의 주인은 독수리를 잡아 이번에는 두 발목에 쇠사슬을 모두 채우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이성과 논리'라는 동앗줄로 '기도와 신앙'의 날개마저 꽁꽁 묶어 버렸습니다. 독수리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해져 버렸습니다.
다시 어두컴컴한 지하 창고에 갇혀버린 독수리, 하지만 양치기의 목소리는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양치기는 애타게 독수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려달라!'고 비명 한 번만 질러도 양치기는 이 집의 모든 쇠사슬의 주인들을 무찌르고 자신에게 달려와 줄 수 있다는 걸 말이지요. 하지만 두려웠습니다. 쇠사슬의 주인들은 독수리에게 이런 저런 겁나는 일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지요. 실은 그 '양치기'가 독수리 고기를 좋아한다느니, 사실은 그들도 날지 못한다느니, 그들은 그런척 흉내만 내는 허수아비일 뿐이라느니 하는 온갖 거짓말을 늘어 놓아 독수리를 혼란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몇날 며칠을 그렇게 어두운 지하 창고에 있으면서 혼란스러워하던 독수리였지만 마음 속의 뜨거운 열망을 부정할 수 없었고, 예전 양치기에게서 날개짓하는 법을 배우던 그 순간, 그리고 자신이 미흡하나마 언덕 위에서 자유로이 날아오르던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자신의 마음을 채워 온통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용기가 생겼고, 양치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던 어느 날 독수리는 그 어두운 지하 창고에서 날개와 다리가 묶인 채였지만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양치기님!!!!!! 살려주세요!!!!!!! 여기예요!!!!!!!!"
양치기는 순식간에 그 집안에 들이닥쳐 쇠사슬의 주인들을 무찌르고 독수리가 있는 지하 창고까지 내려왔습니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익숙한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독수리의 발목의 사슬을 지팡이로 내려치고 동앗줄을 풀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독수리를 가슴에 안고 그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독수리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누가 자신을 속여왔는지 말이지요. 왜냐면 이 해방의 기쁨은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독수리는 발목에 '시련'이라는 상처가 있고 날개에도 '고통'이라는 상처가 나 아려 왔지만 기꺼이 모든 것을 양치기의 손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양치기 또한 예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쇠사슬의 주인들과 맞서기 위해 그 동안 힘을 길러왔던 것이지요.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으면서 그의 강한 두 팔과 든든한 가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이제는 절대로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스럽지가 않았습니다. 온 몸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마음은 더욱더 진정되어 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독수리는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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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는 깨어났습니다. 자신이 잠이 들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양치기는 보이지 않고 눈 앞에는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온통 빛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독수리는 자신의 몸을 살폈습니다. 통증은 커녕 온 몸에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다쳤던 발목과 날개는 멀쩡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쳤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예전보다 더욱 튼튼했습니다. 날개를 펼치니 오, 이럴수가 자신의 날개가 그렇게 찬란한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는 양치기에게서 그 동안 배운 것들을 실험해 봅니다. 단 한 번 퍼득였을 뿐인데 가뿐하게 몸이 솟아 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비행도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독수리는 배운 모든 것을 실행해 볼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더욱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얼마를 올랐을까요? 저 위에 너무나 황홀하고 찬란한 빛이 보였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져 독수리는 잠시 나는 법을 잊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빛에서 알지못할 힘이 솟아나와 독수리를 더욱 끌어당기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가 그 빛에 감싸여 하늘로 점점 더 올라가면서 그 빛의 근원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아… 독수리의 제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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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는 다시 잠에서 깨었습니다. 모든 것은 꿈이었습니다. 몸은 여전히 통증이 가득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라는 상처에서 빚어지는 통증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꿈에서 본 것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찬란함과 기쁨을 여전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양치기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여전히 예의 그 흰 망토 차림이었지만 이제 독수리는 양치기가 어떤 분인지 압니다. 그분은 '독수리의 제왕'님의 대리자였던 것이지요. 그분이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독수리의 몸은 점차 회복되어 갔습니다. 양치기님은 진정한 의사였기 때문이지요. 양치기 님이 마련하신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몸은 점점 더 회복되어 갔고, 결국 독수리는 완전히 나아 버렸습니다. 독수리는 더 이상 양치기님에게 날개짓을 배우지 않습니다. 이미 날아 다니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이 세상에 몸을 담은지라 지구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비행 거리는 점점 더 늘어만 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제 독수리는 저 높은 창공, 쇠사슬의 주인들이 절대로 다가설 수 없는 그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전에 처해있던 것과 같은 운명의 독수리들을 찾고 있습니다. 바로 '죄악'이라는 쇠사슬에 묶인 독수리들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독수리를 발견하면 두려움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리로 내려가서 그 독수리에게 말을 전합니다.
"양치기를 불러요. 그가 다가와서 이 사슬을 끊어줄 거예요."
이 말만을 전한 채로 쇠사슬의 주인들이 오기 전에 다시 높이 치솟아 올라 날아가 버립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다른 독수리들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 중의 일부는 '양치기'를 부릅니다. 그러면 양치기님은 다가가서 예전에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쇠사슬을 끊고 독수리를 구해내어 날개짓을 가르쳐 줍니다.
텅 비어있던 하늘에 이제는 독수리의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이들의 힘은 더욱 막강해져서 이제는 쇠사슬의 주인들이 감히 총을 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랬다가는 이 무리가 온통 내리날아 그들을 쪼아 쫓아내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양치기에게서 날개짓을 배운 독수리들이 하나씩 둘씩 날아 모여듭니다. 이제 독수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자신이 꿈에서 본 이야기를 함께 비행하는 독수리들에게 전하곤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감탄을 거듭하며 더욱더 높은 희망, 하지만 진정 '내밀한' 희망을 간직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독수리의 제왕'을 만날 희망과 기쁨에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양치기는 지상에 머물면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흰 망토 속에 숨긴 날개를 퍼덕이고 싶은 욕구를 겨우 억제하면서 말이지요.
미사
이거 뭐 하자는 건가요? 왜 그 지루한 강론이며 별 의미없어 보이는 행위를 쳐다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거죠?
미사는 '성사'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고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현세적 수단이 필요합니다. 마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하트'모양을 통해서 그 사랑을 표시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그 '하트' 자체에 사랑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트'를 전하는 이의 의도가 그 안에 담겨져서 전해지는 것이랍니다.
'성사'는 하느님이 마련하신 당신 은총의 전달 수단입니다. 가장 근본에는 '예수님'이 계셨지요. 하느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 교회이고 교회는 이 성사의 보화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꺼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성사를 통해서 각 자리에 합당한 은총을 받지요. '새로 태어남'은 세례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은 미사를 통해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수여'는 견진을 통해서, '두 사람의 하나됨'은 혼배를 통해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은 성품을 통해서 '용서'는 고해를 통해서 그리고 '영과 육의 치유'는 병자성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바로 이 일곱가지 '거룩한 일'인 성사는 모두가 예수님의 말과 행적에 그 근원을 두고 교회는 그 사명을 이어가는 셈입니다.
미사는 그 가운데 '영혼의 양식'을 담당하고 있지요. 비록 그 성사를 전하는 여러 수단들(전례의 거룩함, 사제의 개인적 영성, 참여자의 자세 등등)을 통해서 부가적인 요소들의 가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드리는 이는 그 '사제'가 아니라 그 사제의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드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제의 강론이 재미가 없다.' , '전례가 맘에 들지 않는다'라는 식의 표현을 쉽게 하시는 건 바로 '부가적인 부분'을 두고 평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미사에서 그 본질은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하는 감사의 기념 제사인 미사는 그 핵심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미사를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구요? 여러분에게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네, 당장 죽지는 않습니다. 다만 서서히 약해지고 병에 더 쉽게 걸리고 결국에는 죽어버리게 되지요. 한 끼만 먹지 않아도 굶주림에 다른 생각을 잘 못하게 됩니다. 정신을 집중할 수 없고 의지가 나약해지지요. 전에는 도둑질은 생각도 못하지만 한 사흘을 내리 굶으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은총을 얻는 수많은 다른 방법들이 실존하지만 '미사'를 제쳐두고 다른 은총의 수단을 찾는 것은 시원한 맑은 물이 펑펑 나오는 샘을 제쳐두고 '찔끔찔끔'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빨아 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네, 미사의 부가적인 부분으로 인한 어려움은 이해를 합니다. 사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강론도 마음에 들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성당에서 기분 나쁜 일도 많았을테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사를 내던지고 나면 그런 경향은 더욱 극심해질 뿐입니다. 힘들 때일수록 주님의 힘을 빌어야 하건만 인간적으로 힘들다고 주님의 권능을 저버리는 상태이니 참으로 유아적인 사고인 셈이지요. 엄마가 좀 힘들게 했다고 엄마가 주는 밥을 안 먹고 고집피우는 아이의 모습인 셈입니다.
쉬는 교우분들, 조심하십시오. 어둠의 영이 그나마 있던 빛마저 가로챌까 두렵습니다. 우리 인간은 언뜻 강해 보이지만 지극히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미사의 은총 없이 자기 홀로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성인은 저로서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회만 되고 가능하다면 제대 앞에 살 작정을 하셨더랬지요. 하지만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가르멜 수녀님들도 따로 노동 시간은 있습니다. 우리는 훗날 하늘 나라에 가면 아무 거리낌 없이 주님 앞에 앉아서 그분의 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사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 은총의 샘입니다.
단상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12시도 되지 않아 깨버렸어요.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네요. 주변에서 가라오케 소리가 시끄러워요. 여기는 토요일 밤이니까 사람들로서는 한 주일을 일하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밤인 셈이지요. 죄악의 소굴입니다. 저렇게 정신없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소음으로 스스로에게 몽환적인 주문을 외우는 셈이지요. 자연 '하느님의 영'이 영혼에서 빠져 나가고 '어둠의 영'이 가슴 가득 들어차게 됩니다. 퍼붓는 술은 그것을 더욱 도와 주는 셈이구요. 그런 상태에서 자연 찾게 되는 것은 더 나은 쾌락입니다. 이들은 그렇게 술을 먹다가 짝을 지어 섹스를 하러 가지요. 그러다 생기는 아이는 자연 낙태의 대상이구요. 뭐 낙태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그렇게 남자들이건 여자들이건 '관계'를 파괴시키는 '관계'를 찾으러 다니니 가정이 똑바로 설 수가 없지요. 자연 아이들이 그런 모습을 배우게 되고 '신앙'이라던지 '가치'라던지 하는 것은 바닥으로 내팽게쳐지고 젊은이들은 '더 나은 쾌락'을 찾아서 마약이고 술이고 담배고 손을 댑니다. 그렇게 토요일 밤이 흘러가지요. 그나마 습관적으로라도 주일 미사에 나오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흡하나마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라도 되찾아 가겠지요. 나머지는 아주 꽝입니다. 하느님을 모욕하기 일쑤이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쓸데없는 것에는 관심 가지지 말라고 가르치기 일쑤입니다.
한국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은 '한국적'인 어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더 나은 쾌락'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들의 노력은 이곳이나 거기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마약'이 없으니 그 점에서는 보호된 셈이지만 다른 퇴폐 향락 문화는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르지요. 그 많은 모텔들이 장사가 되려면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쾌락'의 문화는 교회 안에도 어느정도는 스며들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반드시 '뒷풀이'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 뒷풀이라는 것이 '거룩한 형태'인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기본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정말 화목한 회식 자리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만 그 중에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친구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요. 기승전"술자리"가 되는 셈입니다.
이런 이들을 올바로 이끌어 주어야 할 이들이 '사제들'입니다. 우리는 '방향성'을 잃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희망에 대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짖밟히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가 이 '소금의 맛'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것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영적 조언
아들 신학생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리까르도, 우리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을 마주하게 될 거야. 하나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맞서는 반대자들이지. 우리가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은 두 부류가 있어. 한 부류는 말 그대로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이고 다른 부류는 자신들의 약점으로 우리를 그릇되이 판단하는 데에 있지.
약점이 있는 이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우리 역시도 약점이 있어서 언제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니까 그런 이들은 이해하고 껴안아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어.
다른 한 편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을 위해서는 그들을 증오하거나 원한을 품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기도를 해야해. 그들이 회개해서 다시 선한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야 하지.
앞으로 이런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될거야.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마음이야. 만일에 우리가 '모욕'을 참아내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든 저러한 사람이든 그 어떤 모욕도 잘 견뎌낼 수 있게 될거야. 이든 저든 내가 마주하는 사람과 신경쓰이는 일이 생기면 그건 바로 내 마음 속에 거기에 반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 부분을 받아들여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해.
그 밖에도 가르쳐 줄 게 많지만 이 정도로 하자. 넌 지금 잘 해나가고 있고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조언을 해 줄 때가 올거야."
<디지털 시대의 성인>
산
산을 멀리서 바라다보고는 '푸르다' 한다.
산을 가까이서 마주한 이는 '나무가 많다' 한다.
산을 오르는 이는 '힘들다' 한다.
산을 정복한 이는 '기쁘다' 한다.
산을 내려오는 이는 '거뜬하다' 한다.
산은 말이 없거늘 주변의 인간들이 말이 많구나.
사제
사제로서 한 가지 다행인 건,
사제가 영적독서 하는데 막는 사람이 없고
사제가 기도 한다는데 막는 사람은 없다.
나아가,
사제가 사람들을 복음화 하겠다는 데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사제가 미사를 거룩하게 드리고 강론에 열을 쏟겠다는 데 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거다.
그러니 이런 일에 치중할수록 사제로서의 자신감이 더욱 커지는 셈이다.
헌데 그걸 모르고
취미생활에 열중하니 곧잘 비난을 받는거고
사람들과 어울려 곧잘 술판에 끼이니 뒷담화의 주제가 된다.
미사를 거룩하게 드리지는 않고 잡다한 것들을 챙기는 꼬장꼬장한 영감이니 사람들이 꺼려하고
강론대에서는 맨날 정치 이야기나 드라마 이야기나 우스갯소리나 해 대니 사람들이 싫어한다.
근데 왜 그걸 모르는거지? ㅎㅎㅎ
이방인
좀처럼 이방인으로 살아볼 경험이 없는 한국 사람들은 '이방인'이 느끼는 심정을 알지 못합니다. 어딜가나 말이 통하고 어딜 가나 같은 문화권이라 늘 기본적인 '안정감' 속에서 다른 것들을 걱정합니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살아오던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숨쉬는 것처럼 편안했던 '한국어'를 버리고 이방의 언어를 배워야 하고, 한국의 음식과 문화도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방 민족과 섞여 사는 것이지요. 국민으로서의 권리도 없고 늘 손해를 볼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이런 저런 것에 자꾸 부딪히고 따지려 들면 결국 제 자신의 손해만 더 커질 뿐이거든요.
이런 생활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것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위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왕국의 언어를 쓰고 그 나라의 법도를 지키고 살아가는 이들인데 이 땅에 잠시 와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셈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저들은 '증오'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겸손과 인내'를 따르는데 저들은 '권력과 투쟁'을 따릅니다. 그러니 늘 물과 기름처럼 뒤섞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섞여 살아왔는지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초대했던 수많은 이들의 구원을 바라보며 가슴 가득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원래 속해 있던 하느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우리의 참된 아버지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찬미 찬송 받으소서. 아멘.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 15장 19절)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여러분은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진리를 모르고 있을까요? '사실'과 '진리'는 다른 것입니다.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말하고 진리는 '진실한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1+1=2라는 것은 '수학적 진리'입니다. 변함이 없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논리적 차원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영적 차원의 '진리'인 셈이지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화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재화야말로 우리 생의 최고의 가치이다."라는 것은 한 개인의 신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지요. 돈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돈 때문에 생을 살지는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이들은 마치 이것이 최고의 '진리'인 양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실제 세상의 많은 부분은 우리들을 이렇게 속이고 있지요.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진리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신다."
"그분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모상을 불어넣어주셨다."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과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에 우리는 그분들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이 길을 꾸준히 걷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
저에게는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들은 인간의 변덕으로 쉽게 '부정'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 앞에 나머지 진리들은 '우스꽝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요즘의 과학의 시대에 누가 하느님을 믿느냐고 생각하는 철없는 젊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아무리 나머지 신앙 진리들을 이야기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소위 씨도 안 먹히는 셈이지요. 하지만 그런 철부지들도 '돈이 최고다'라는 진리는 막연히 따라가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거기에서 자신들이 찾은 열매를 얻게 되겠지요. 그 열매는 달콤하지만 '독'이 들어 있어서 결국 그 영혼을 완전히 망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결국 우리 앞에는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수많은 진리가 놓여져 있고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그 진리들 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셈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죄'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유의지는 소중하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훗날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의 결과물을 받게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조금은 바보 취급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을 선택하고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자극시키는 것
하루를 살아가면서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가를 살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나의 관심사를 제일 먼저 낚아채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꾸준히 추구하는 욕구의 단면입니다.
누군가는 하루종일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이 나오면 말 그대로 '채널고정'이 되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특정한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이성'이 그 대상이 됩니다. 돈도 명예도 어찌되든 상관 없지만 자신이 맘에 들어하는 이성 앞에서는 관심사가 수십배나 증폭이 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돈'입니다. 이든 저든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뭐가 돈이 된다거나 돈과 연계된 직업 이야기를 듣거나, 돈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순간 귀가 솔깃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루를 살면서 내면에 숨겨진 진리들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유혹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본성적 욕구를 자극하고 있고, 우리가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내도 우리로서는 상당한 이득이 됩니다. 비록 여전히 우리는 약해서 그러한 것들에 관심이 가게 마련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고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것 안에 숨겨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러한 것들을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 작업을 우리는 '성찰'이라고 표현하고 하루가 지난 후, 혹은 하루 중에 짬나는 시간마다 이런 작업을 함으로써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사, 하느님에 대한 관심사가 나날이 증폭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소문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혜서 5,9)
천상의 가치들
한 시골 순박한 아이가 왕궁에 초대받아 갔다오는 성은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돌아와서는 동무들에게 자기가 본 것들에 대한 것을 한껏 설명하려고 듭니다. 귀한 도자기며, 엄청 큰 성문이며, 그 수많은 신하들이며, 그 왕의 화려한 복장이며… 하지만 이 시골 동무들은 도무지 무엇을 설명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하고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아,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걸로 설명을 좀 해봐. 개구리 같은거야? 잠자리 같은 거? 아님 실개천 같아? 장에서 아버지가 사오는 구슬 같은거야?"
우리는 장차 일어날 일을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보고 듣는 것으로서는 설명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모이는 모든 것이 스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차원이 열리는 셈이지요. 저 역시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지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꼽는다 해도 천상에서 우리가 마주할 제 아무리 낮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데 더 재미난 사실은, 그 천상의 보화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연의 모습을 숨긴 채로 전혀 엉뚱한 모습을 하고 있고, 우리는 곧잘 그 가치를 무시하곤 합니다. 나중에 그 숨겨진 보물이 드러날 때에 우리는 얼마나 가슴아파하게 될까요? 로또 1등 당첨 번호를 고스란히 똑같이 적어놓고는 '나중에' 라고 했다가 그 번호가 그대로 1등이 되는 것의 수억만배 억울할 겁니다. ㅎㅎㅎ
잘 살펴보세요. 그 보물들은 우리 아주 가까이, 아아아아~~~~주 가까이 있으니까요.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기 30,14)
유혹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우리가 '음탕한 성적 욕구'에 불타는 한 남성이고 순박한 한 처녀를 꼬시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욕구를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법으로 처녀의 마음을 사려고 할 것입니다.
먼저는 처녀를 잘 관찰하겠지요. 그 처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살필 것입니다. 만일 처녀가 꽃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강아지를 좋아한다면 이제 좋은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이 욕구에 불타는 청년은 자신의 본의를 교묘히 숨긴 채로 자기는 전혀 좋아하지도 않는 꽃이나 강아지를 들고 그 처녀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게 환심을 산 후에 그녀와 대화할 기회를 잡고 그리고 그 처녀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냅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처녀의 욕구를 기꺼이 채워주려고 애를 씁니다. 좋아하는 장소, 음식, 좋아하는 상대의 모습등을 기꺼이 준비해서 드러냅니다. 그러면 결국 처녀는 이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마음과 더불어 몸을 허락하는 셈이지요. 이 남성은 처녀의 육체를 실컷 누리고는 사정없이 내쳐버릴 것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를 해본들 이미 늦은 셈이지요.
악마의 유혹의 과정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악마는 절대로 자기 스스로를 위험한 존재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선호하는 것을 먼저 알고 그리로 다가오기 일쑤입니다. 우리의 세속적 관심사를 알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마비 시킵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서 우리의 관심사를 온통 세속적인 것으로 뒤바꿔 놓고 그나마 남아있던 미흡한 '믿음'마저도 앗아가 버리고 나면 결국 악마는 우리의 영혼을 맛있게 시식하는 것이지요. 악마는 우리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빼앗고는 우리를 어둠의 구렁텅이에 집어 넣을 것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를 해본들 이미 늦은 셈이지요.
어찌보면 뻔한 수작이지만 이 뻔한 수작에 말려 들어가는 뻔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저 눈길 한번만 하느님께로 돌리고 간절히 청해도 하느님께서는 그 즉시 구원의 천사를 보내셨을 것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구원을 저버린 셈이 됩니다. 아니, 하느님은 이미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이끌도록 당신의 구원의 손길을 수차례 내밀어 주셨지요. 하지만 우리는 매번 그 손길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웃으면서 거절한 셈입니다.
- 이번에 우리 레지오 회합 하는데 한 번 가보지 않겠어?
- 여보, 이제 술은 좀 적당히 마시는 게 어때요? 주사가 심하던데요?
- 아빠, 오늘 주일학교 선생님이 가족기도 꼭 바치라고 하셨어요.
- 이봐, 돈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 이제 그만 마음에서 놓지 그래?
- 자네 신부님하고 사이 좋지 않은 건 알겠는데, 하느님하고 사이가 나쁜 건 아니잖아? 그러니 주일 미사 정도는 가자구.
- 하하, 텔레비전은 그렇게 보면서 성경은 왜 그렇게 싫어들 하세요?
- 세상 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더 커져요, 그러니 이제라도 천상의 가치를 찾으세요.
이 수도없는 초대를 과연 여러분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정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우리는 그 도움을 거절해 왔습니다. 훗날 하늘 나라에서는 이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의 파멸은 다름아닌 우리 본인들의 선택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 앞에서 단 한번도 하느님께 부르짖었던 적이 없었던 셈입니다. 아니, 오히려 유혹을 즐기면서 그리로 달려갔지요.
관심사의 변화
하느님에게 점점 다가갈수록 우리의 '관심사'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아직도 우리는 두렵습니다. 하느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들이 곧잘 하는 말은 지상의 것을 버리고 천상의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전히 우리는 '지상의 것'을 좋아하는 '관심사'를 너무나 많이 지니고 있기에 지상의 것을 버린다는 표현에서부터 부딪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도 그때의 장난감이 그토록 간절하고, 그때 먹고 싶어했던 사탕이 그토록 간절한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그때의 장난감보다는 지금의 옷이나 구두, 전자기기가 더 마음에 들어오고, 그때의 사탕보다는 지금의 고급 음식이나 심지어는 몸매를 위해서 어떻게 잘 '굶을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관심사 자체에 변화가 오고 나면 우리는 이전에 지상에서 취하려 했던 것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이 점점 싫어지게 됩니다. 재화를 많이 가지려 노력했던 것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런 것들을 가능하면 '덜' 가지고 싶어합니다. 만일에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 때문에 그것을 보유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가지고 있을 뿐, 그것에서는 이미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명예'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전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었고 드러나고 싶었지만, 천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거기에 맛들이게 되면서부터는 이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오히려 짐스럽기만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기적이란 기적은 다 일으키시고도 '함구령'을 명하신 것처럼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고도 '함구령'을 지키게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권력'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가 됩니다. 누군가를 조종해서 내가 편하기보다는 이제는 내가 나서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 앞에 '나의 뜻'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돈과 재물'을 좋아하기에 '천상의 사물'에 대한 사정을 들으면서 많이 괴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변화되는 날 우리는 '천상의 사정'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거슬리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기쁨에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그러한 사정을 듣고 싶어하고 그 방향을 연구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도 그러하니 우리를 그 길로 간절히 이끌고 싶어하시고 그 길을 따라서 오는 아이들에게 더 맛있는 천상의 양식을 먹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천상의 양식은 지상의 눈으로는 '고통'과 '슬픔'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 제대로 된 가치를 아는 이에게는 그만한 양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분별해 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 안에 슬픔이 다가오는지요 아니면 기쁨이 다가오는지요?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 것들에 마음을 많이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아직 하느님 나라를 가꾸는 밭의 '첫 단계'도 오르지 못한 셈입니다.
불가능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싶었던 것을 보게 될 때 '경탄'을 하게 됩니다. 얼마전에 텔레비전에 나왔다면서 동물들의 마음을 읽는 소년 이야기가 떠돌아 다니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것이 가능하니 사람들은 '경탄'해 마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 소년이 그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면 '동물 마음교' 정도는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 가운데 최고는 그런 세상 안에서 느끼는 신기한 일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영원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고 또 익힙니다.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한계'를 절절히 체험하는 셈입니다. 헌데 이런 유한한 존재들인 우리가 '무한'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경탄'해야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엄연한 사실은 너무나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합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 사실을 믿지 않고 그저 습관대로 종교생활을 하거나 세상적인 명예와 권위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이미 선물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걸 손에 쥐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가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선물하신 '영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하는 수많은 움직임들이 있으니 바로 '어둠의 영들'의 역할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죽이려고 듭니다.
토요일 복음에서는 이런 장면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정 선물하려는 것의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중력
우주선은 대기권을 벗어나야 합니다. 지구의 중력의 범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중력에 사로잡혀 지상으로 곤두박질 치고 맙니다.
우리의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중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저 멀리 드넓은 우주공간을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벗어남'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순간 벗어날 수는 있지만 정신이 들고나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추진력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잦은 시도를 통해서 영혼의 훈련을 쌓아 놓아야 합니다.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끝날 때에는 그동안 쌓아온 추진력을 모두 모아서 이 지상의 대기권을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대기권을 벗어났음에도 추진력이 남아 있다면 이제는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남은 연료를 소진하는 동안 우리는 도리어 가속도가 붙어서 더욱 더 멀리 자유로이 우주속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 추진력을 연마해 온 사람은 훗날 하느님의 품 안에서도 더 많은 은총을 얻어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이들은 비록 살아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세상 안에 몸담고 있지만 세상의 중력이 이미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론 그런 이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추진제와 엔진을 주시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특혜를 입은 이들이지만 그 특혜는 단순히 저 혼자 좋으라고 하느님이 주신 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이끌고 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이유 없이 주시진 않습니다. 당신이 주시는 모든 특은들은 그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추진제는 어떤가요? 이 지상의 중력권을 충분히 벗어날 만 한가요? 아니면 도로 그 무게감 때문에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중인가요? 그 무게는 바로 우리들의 '탐욕'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일수록 그 질량이 더해져서 그저 땅 위에 서있기만 한데도 땅 속으로 점점 꺼져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은 참으로 위험한 상태입니다. 날아오르기는 커녕, 저 지하의 어두컴컴한 곳에 처박혀 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딴 식으로 하다가는 우리 공동체에서 축출될거야."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모종의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고 누군가가 거기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생각입니다. 심지어는 참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공동체 내에서도 이런 움직임들이 곧잘 일어나곤 합니다. 이들은 언뜻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공동체를 산산조각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교사회 내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집단'을 형성한 뒤에 위세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차수가 많이 된 몇몇 교사들은 이런 '권력'을 형성해서 새로 영입된 이들의 은근한 '순종'을 강요합니다. 술자리에 가서 '우리 교사회에는 전통적으로 이런 관습이 있다'며 술을 억지로 권하는 식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종의 '입회식'을 잘 치르고 나면 원활한 관계를 약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때부터 아니꼬운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이상하게 형성된 집단은 언뜻 대단한 일들을 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의 상부 조직도 장악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소위 전통이나 구미에 맞지 않는 활동이 벌어지면 당장에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축한 상아탑을 보호하려 드는 것이지요.
초년기 보좌 신부들은 그들의 맑은 양심으로 이런 움직임을 쉽사리 캐치해 내지만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보좌'이기 때문이지요. 최종 결정은 '주임' 사제에게 달려있고 자신이 사제적 양심으로 아무리 분별해봐도 아닌 것 같은데 주임 신부님은 '받아들이라' 해 버리니 상황은 그대로 다시 묻혀 버리고 이들의 악습은 계속 반복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을 사람은 절대로 그들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들은 이든 저든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십수년간 정말 열정을 다해서 봉사해왔노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겠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의 지체의 분열에 힘써온 셈이지요.
비단 교리교사 안에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반모임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사목 회의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권력욕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존재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들이 그러하니 맞서 싸워야 하나요? 네,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기는 그들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같은 권력을 확장해서 맞서 싸우려 한다면 결국 그들이 축출되고 나서 우리가 같은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무기는 겸손과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오히려 침묵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권력'이라면 그 아래에서 진정한 권력인 하느님께 기대고 그들 앞에서는 우리를 낮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 역시도 자기들 나름의 '도덕적 규율'이 있기 때문에 얼토당토 않은 것까지 강요할 일은 없고 그저 작은 일들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만끽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뜻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죄스런 것을 강요한다면 보다 정당한 장상, 즉 보좌 신부님이나 주임 신부님에게 알려서 그것을 수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십시오.
영적인 여정의 복습
1) 인간의 기본에 대한 이해(욕구에 따른 움직임)
2) 하느님을 바라보기
3) 나 자신의 어둠의 극복
4)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
5) 어둠에 올바르게 맞서는 법
6) 사랑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저와 함께 걸어오신 여정입니다. 1번부터 시작해서 답변하실 수 있다면 제대로 걸어오고 계시는 셈이고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셔야 합니다.
1) 우리는 원하는 것에 따라 움직이고, 지금은 세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2) 이런 원의를 하느님을 향해서 들어 높여야 합니다.
3)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상존하는 어두움을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줄을 끊지 않고는 날아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하느님께 나아가는 수많은 방법들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5) 우리 주변에서 곧잘 일어나는 어두움들에 같은 어두움으로 맞서서는 안되고 참된 선과 진리로 맞서야 합니다.
6) 우리의 사랑이 완성에 이르기까지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제가 쓴 글들은 모두 저 안 어디에 포함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뭐 그냥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챙겨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한 주제에 온전히 종속된 것은 없었고 모든 주제가 골고루 들어간 글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 모든 잡다한 글들을 다시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성경 강의'만 제대로 따라오셔도 저런 주제를 다시 밟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축복 가득하시고 주님 안에서 깊은 평화를 잃지 않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평화와 믿음
세속의 자녀들은 평화로이 사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평화'를 구축해 두고는 '평화롭다'고 하지만 실제로 전혀 평화롭지 않은 셈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한 번 보십시오. 자기들은 그 안에서 온갖 부를 축적해 놓고 둘레에 공성을 쌓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상존하는 위협을 애써 가로막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보는 미국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들입니다. 이들은 전기가 끊어질까 수도가 끊어질까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질까 땅이 꺼질까 음식은 다들 안전할까 테러의 위협은 없을까… 걱정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는 단순히 돈이 많고 적고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면'에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돈이 적은 사람도 자신의 탐욕 때문에 늘 '투쟁'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참 평화는 오직 주님이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 신앙을 통해서 구축된 우리 내면의 영적 세계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신앙'을 누가 갖고 있느냐는 것도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그저 성당 근처에서 생활한다고 신앙이 생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모든 민족에게 공평히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였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밖에 앉아있고 저런 곳에서 어찌 신앙이 생겨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곳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벌어진 잔치에 '초대되었던 손님들'은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져 나가 있고, 대신에 사방 동서남북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 볼리비아 제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옵니다. 천둥 번개도 치네요.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저는 '비'가 좋습니다. 뭔가 창공을 가득 채우면서 내가 그 안에 포근하게 잠겨 있는 느낌이 드니까요. 오늘 아침에는 커피나 한 잔 해야 하겠습니다. ㅎㅎㅎ
원하는 것과 모여드는 이들
음식 - 배고픈 사람
물 - 목마른 사람
돈 - 욕심 많은 사람
하느님 - 신앙 있는 사람
대충 연결되는 게 보이십니까? 하나의 핵심 주제가 있으면 그 주변에 끼리끼리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목이 마른데 목이 더 막히라고 음식을 찾을 사람도 없고, 신앙이 가득한데 돈을 찾으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그 원하는 것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취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것들은 '한계'라는 것이 있어서 몰려드는 누구나 다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개떼들 사이에 고기를 던져 넣으면 서로 싸운다고 난리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주변으로 모인 이들은 피치못하는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은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면서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제 글 주변에 모여드는 분들도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전하려는 것은 여러분들이 욕심내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 미미하나마 제가 가진 '인기'라는 것에 질투하는 사람도 있고, 제가 가진 글재주라는 것에 '시기'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에 이 글들이 그런 결과물을 더욱 양산하게 될 때가 바로 제가 글을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에 다른 계기가 있어 그만 쓰게 되겠지만 말이지요. 그러니 이런 저런 걱정도 내려 놓으십시오. 왜냐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참 유치한 일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그렇게나 인기 많은 이들이 있는데 왜 제 미미한 글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요? 연예인들 홈페이지 가면 하루에도 수천명이 모여드는데 왜 거기는 안가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전하려는 제 페이스북에 와서는 자기 혼자 '시기'를 느끼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ㅎㅎㅎ
제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평화를 찾아 오는 분들이면 좋겠습니다.
어느 신부 이야기
신학교 1학년때 저는 '상상의 성인'이었습니다. 팔공산 언저리의 그 물맑은 곳에서 '준주성범'을 읽으며 서방 정토를 꿈꾸고 있었다눈...ㅋㅋㅋ
하지만 2학년부터 남산동으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현실과 부딪혀야 했지요. 다가오는 '의무들'과 '요구들' 속에서 저의 이상향은 점점 무산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학부를 마치고 군대에 갔지요. 나 자신의 인간적 육체적 한계와 더불어 세상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의 문화의 음란함과 음흉함, 하지만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싹틀 수 있는 좋은 가치들을 체험했지요.
돌아온 연구과의 신학교는 무너진 성을 다시 쌓는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지요. 또다시 다가오는 '의무들'과 '요구들'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목표로 삼던 '사제직'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그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기보다는 이든 저든 '통과'하기에 열을 쏟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는 보좌 신부가 되었습니다. 학교라는 모든 규칙과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듯 했지만 전혀 다른 규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임 신부님과 신자들이었지요. 그 중간에서 새로운 학습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신자들의 요구 사이에서 조율을 잘 해나가야 했지요. 신자분들의 요구를 끌어올려 교회의 권위에 합당하게 수용되는 방법을 찾으려 늘 노력을 했지요.
그렇게 윗분들을 몇 번씩 바꿔가며 다시 새롭게 배우는 건 '하느님의 진정한 권위'라는 것이었지요. 윗분들은 다 제각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서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순명'을 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더욱 힘을 썼답니다.
그러다가 볼리비아에 오게 되었지요. 뭐 여기서부터는 이미 일반 사제들의 공통된 감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네요.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 안에서의 새로운 시작이었지요. 하지만 어느 사제이든지 자신에게 특출난 분야가 생기게 되고 거기에 조금씩 '전문가'가 되어 가면서 겪어야 하는 비슷한 문제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겸손'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의 삶 안에서 스며드는 '매너리즘'을 극복할 방법 같은거죠. 저는 그 가운데에서 '영성'을 택한 셈이구요.
앞으로? 글쎄요. 한가지는 분명하지요. '죽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영원한 생명'이 있지요. 그 두 바탕으로 남은 생을 꾸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세에서 모으고 쌓아봐야 부질 없다는 걸 이미 아니까요. 영원을 조금씩 준비하다가 결국 마지막 숨을 거두겠지요.
그 뒤에는 아마 '룰루랄라?' ㅋ
미워하는 마음
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에 있다면 당장 정부 기관에서 데리고 가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쓸 것이 분명합니다. ㅎㅎㅎ
헌데 왜 우리는 마치 상대를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할까요? 딱 틀에 맞춰서 그에 대한 생각을 결정지은 후에 그 뒤로 내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그럴 경우에 갇히는 건 오히려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 하등의 여유를 주지 않는 셈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미 그 사람은 우리 내면에서 '결정지어져' 버렸습니다. 다른 여지가 없는 셈이지요. 그 사람은 나에게는 오로지 '나쁜' 쪽으로만 작용하고 그에게서 존재할지도 모르는 모든 '선'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의 변화 가능성은 나에게 있어서 0%가 되어 버리지요.
이것이 증오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사랑할 자유를 제한해 버리지요. 언제나 마음 잘 살피셔서 이 증오의 더러운 때가 끼이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한 번 마비되기 시작하면 딱히 치유약도 없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습
참된 사랑은 상대를 통해 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상대가 행복해짐으로써 내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가의 불행을 기다리면서 자기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그건 오히려 가로 막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는 것은 우리의 순수한 사랑이 될 수 있겠지만, 아이가 누군가를 때려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런 일을 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우리가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제 위의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철모르는 아이에게 값비싼 옷을 자꾸 사 입히는 엄마는 언뜻 아이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허영을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핑계로 채우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 옷의 가치를 모를 뿐더러 자신이 정작 필요하고 입고 싶은 옷은 전혀 비싸지 않은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그런 옷을 입혀서 주변에 보이고 싶고 그렇게 자신의 숨겨진 욕구를 채우는 셈입니다.
'공부를 잘 하라'고 아이를 학원에 억지로 보내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한국 사회는 학원을 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불안증을 자극시킵니다. 하지만 '공부'라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학습 능력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특성에 따른 것입니다. 모두가 의사나 판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노릇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어머니들은 '달리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아이에게 자신이 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을 강요하듯이 밀어부치는 셈입니다. 이런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없는 순진한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불안증'을 달래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번에는 악한 것을 원하는 아이를 향한 엉뚱한 사랑을 살펴봅시다. 설마하니 그런 것이 있을까 싶지만 이 역시 번번히 일어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싸우고 돌아왔을 때에 과연 그 아이에게 '용서'와 '사랑'의 소중한 가치를 가르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그저 아이가 맞은 것이 자기도 분해서 당장 찾아가서 따지고 들려는 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물론 아이가 왕따문제처럼 지독히도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건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보통은 그렇게 어른들이 도리어 이성을 잃고 나설 정도의 문제는 아닙니다. 싸우고 돌아온 아이는 '복수'를 원하는 것이 일반이고 현명한 어머니라면 그런 아이의 복수심을 잠재우고 아이에게 진정한 평화의 가치를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서서 '복수'의 가치를 가르쳐주려 하니 아이들의 인식 속에 그런 모습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어머니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도전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경험이 전혀 없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예시들을 들고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행여 그렇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일종의 영적 아이를 키우는 훈련이라면 그런 경험은 많습니다.
'악한 것'을 살리려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턱대고 좋아 보이는 것을 권하는 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상대와 전혀 '소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완강히 거부할 때에 엄마로서 무조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인내심을 갖고 아이가 뭘 원하는지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방법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고 싶어하십니다. 청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인 당신의 영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실컷 달라고 청해놓고는 손을 오므리고 있으면 너끈히 쏟아지는 성령을 지나쳐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준비를 갖춰 나가야 합니다.
성령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방언을 하면? 성령 안수를 받으면? 성령 세미나에 참석을 하면? 뭐 교회 안에서 언뜻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우선되어야 할 작업이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을 받아들일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손님 더러 어느때고 오시라고 하고는 방 속에 온갖 집기며 쓰레기며 정리 정돈을 어수선하게 하고 마치 창고마냥 길에서 주워다 온 것들을 잔뜩 쌓아 놓으면 손님이 집 근처까지 왔다가도 다시 돌아가 버리고 마시게 됩니다. 먼저는 집안 청소를 해야 합니다. 성령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 그 가운데 가장 최악인 것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이걸 의지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초대해 놓은 꼴이 됩니다. 손님더러 오시라고 말만 하고는 정작 그 방 안에 그 손님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을 갖다 놓고 방 안을 더욱 어지럽히는 꼴입니다. 먼저는 이 더러운 동물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사제에게 다가가 성사를 보십시오. 사제가 어떻다 저떻다 말씀 마시고 여러분이 가진 동물을 치울 수 있도록 여러분 스스로 잘 챙겨 나아가십시오. 벌써 앞에서 '고해성사 안에서 사제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기에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결함이 가득한 사제라도 그의 사제직은 전혀 변함이 없으니 여러분들의 동물들을 그 사제 앞에 내어놓아 그분의 사제직으로 치울 수 있게 도움을 얻으십시오.
가장 추악했던 '대죄'를 꺼내고 났으면 청소를 시작해야 합니다. 여전히 잡다한 소죄들이 많은데 그러한 것들을 모조리 꺼내겠다고 작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소죄도 시간이 허락할 때면 성찰을 하고 드러내어 깨끗이 청소를 해야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좋은 방법은 손님이 좋아하는 벽지로 새로 도배를 하는 것이지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벽지로 온 방을 조금씩 발라 나갑니다. 이 벽지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벽지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영혼이 완전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이지요. 일상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의 시간을 이 덕으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나아가 더욱 가능하다면 그 밖의 덕들이 가득한 꽃병들과 장식물들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인내'와 '겸손'의 꽃병을 두고, '절제'와 '감사'의 꽃을 꽃으십시오. 그런 소소한 덕들이 공간을 선점하면 그 밖의 다른 잡다한 것들을 놓을 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셈입니다.
이런 저런 준비가 어느정도 끝이 나면 '문을 활짝 열고' 성령께서 지나가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면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 즉시 여러분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하지 못하던 일을 하고, 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하게 되지요. 그리고 다시 성령께서 떠나시면 여러분은 방을 정돈하고 다시 꽃을 갈고, 더 아름다운 꽃병을 장만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사랑의 우선순위
연중20주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 법규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보다 생명에 직결되는 법이 있고 그 밑의 하위 세칙들이 있지요. 그에 따라 범칙금도 달리 부과가 됩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되는 이 두 가지 계명에도 분명한 우선 순위는 존재합니다. 때로는 많은 이들이 이를 혼동하기도 하지요. 물론 양자가 완벽히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때로 구분되어야 할 시기가 있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본다면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죄녀 막달라 마리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때 유다가 돈 욕심에 사로잡혀 '가난한 사람들'을 운운하지요. 하지만 그 순간은 분명히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경배를 드려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때로 이런 순간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인간을 위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도 이상한 모습입니다. 무슨 피정이다 특별 미사다 해서 쫓아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가정에 소홀한 이들을 우리는 종종 발견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탐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이지요. 진정 거룩한 이는 자신의 사회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즉 특별한 성소를 받아서 '봉쇄 수도원'에 갇히지 않는 이상은 '균형성'을 잃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우선 순위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는 모든 행위와 활동의 근간을 '하느님'을 위주로 살펴야 합니다. 이웃사랑마저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지 그렇지 않고 한 인간을 향한 애정 뿐이라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지요. 어느 아저씨가 살고 있는 집 주변에 여든이 넘으시고 홀로 지내시는 가난한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다른 집에는 두 동생들을 돌보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곱디 고운 소녀가장이 살고 있습니다. 이 아저씨가 '하느님의 사랑'을 이룬다면 두 가정을 모두 보살피면서 정말 도움이 더 필요한 곳을 챙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저씨가 '인간적인 사랑'에만 싸여 있다면 할머니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 채로 소녀가장만을 찾아다니면서 자기 나름으로는 그래도 이런 '봉사활동'을 하니 얼마나 좋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할 것입니다.
어느 단체의 봉사활동 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때그때 요구되는 도움의 손길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더 편하고 덜 더럽고 쉬운 곳을 찾습니다. 그러니 맨날 '어린이의 집'이나 '청소년의 집' 같은 데만 찾아다니고 '노인 요양원'이나 '장애인의 집'은 소외당하기 일쑤입니다. 거긴 더럽고 냄새가 나니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우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을 향한 사랑을 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을 먼저 간절히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순서를 뒤섞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선택된 이들
연중20주 목요일
잠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선택된 이들이 아닌가요? 선택을 받았으니 부르심을 받은 거 아닌가요? 단순한 이 두 단어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부르심은 이루어졌지만 선택은 아직 미궁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우리 형제교회 신자들은 곧잘 서로에게 확인을 합니다. '구원 받았느냐?'라고 말이지요. 그들에게 이 말은 '예수님을 받아들였느냐?'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신앙을 증언하지요. '구원받았다!'라고 말입니다. 만일 같은 질문을 가톨릭 신자에게 한다면 전혀 반대의 양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배운 구원은 늘 마지막 순간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고 그렇게 쉽게 확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구원 받았느냐?'라고 묻는다면 우리로서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때가 되면 알겠지요.'라고 겸손하게 대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요? '가톨릭 신자이십니까?' '믿음을 받아들이기로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이 '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소위 교회생활을 미덥게 하는 이들은 좀 고민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받은 가톨릭 세례를 부정할 수는 없기에 미미하게나마 '네'라고 하겠지요.
우리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아직 선택받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선택을 받았는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지요.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니까요.
부르심을 받았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입니다. 먼저는 그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조차 하지 못하는 이가 많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종교를 선택했다고 착각하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했으니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도로 물리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재혼이 성가셔지니까 다른 종교로 바꿔 버리고 재혼을 성사시킨다던지, 사제나 수도자가 성가시니까 그냥 성당이고 뭐고 쉬어 버린다던지 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자신의 부르심조차 거부하고 있는 이들이지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보더라도 신앙생활 중에도 늘 온갖 유혹거리에 시달리고 다시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때가 많고,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 중에서 하느님보다는 세상을 위주로 선택과 결정을 내리기가 일쑤입니다. 기도보다는 텔레비전, 성경보다는 소설, 묵상보다는 수다를 선택하기가 일쑤였지요.
부르심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가톨릭 사제가 적는 글을 받아볼 이유도 없겠지요. 전부 따분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앙이라는 보물이 뭔지 미미하게나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지요. 우리가 이룰 '승리'를 위해서 열심히 앞으로 달려나가야 합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두 방향
눈을 내리깔고 바닥에서 동전을 찾는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 정도는 찾을 겁니다.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지요.
눈을 들어 밤하늘의 별이나 낮의 태양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눈을 드높이는 그 모든 순간에 그 빛과 반짝임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성공'만 찾으면 언젠가는 찾겠지요. 아니면 말구요.
하느님을 찾는 이는 눈만 들면 모든 순간을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언제까지 당신의 현세적 '충만'을 찾으실 겁니까? 순간 머물다 사라져 버리는 걸 왜 몰라요?
눈을 들어 주님을 찾으세요. 당신을 보다 충만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거 안 믿습니다.
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면 곧잘 쓰는 말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알고있는 대상을 향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을 누가 믿는답니까? 그렇기에 '도를 아십니까'를 믿지는 않습니다. 이미 그들이 지향하는 바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근본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모르는 것에 대해서 '저는 그런 거 안 믿습니다'를 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릭 섣불리 알수 없는 사실들에 대해서 무턱대고 이 말을 내뱉다가는 정말 믿어야 할 것도 내쳐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습니다.' 그 기적들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정직하심'을 믿기에, 또 그분에 대해서 저술한 복음 사가들의 '성령'과 그 '정직성'을 믿기에 그 사건들을 '믿는' 것입니다.
보다 실제적인 경우로, 어느 사적계시가 나타났다고 해 봅시다. 이 경우에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섣불리 '믿는다', '안믿는다'를 떠나서 우리는 이 일을 교회에 맡겨야 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거든요. 교회는 '분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부활 후 두 제자가 열심히 달려 신심있는 신자들로 상징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해서 입구를 막은 돌이 치워진 걸 봤음에도 그는 들어가 모든 일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뒤에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달려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들어가고 난 뒤에 자신도 들어가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적계시'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가 먼저 그 일에 대해서 분별을 하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분별이 되면 그 뒤에는 우리가 자유로이 믿고 따르고 경배할 수 있게 됩니다. 파티마와 루르드가 그렇게 공적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이고 모든 공적 성인들이 그렇게 성인품에 오른 것입니다. 반대로 나주는 교회가 반대를 하는데도 고집스런 인물들이 여전히 자신의 고집대로 방문을 계속하고 있지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교회의 권위가 느리고 답답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엉뚱한 건 아닙니다. '순명'이라는 가치는 예수님도 소중히 여긴 것으로서 예수님은 수난의 잔을 마시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요구에 순명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에 순명하고 싶지 않고 하느님에게 직접 매달릴 수 있으면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여전히 교회의 보호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이루셨으며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말에 '순명'할 가치를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이한 일들'을 믿기 힘들지만 '전체 교회'는 믿을 수 있습니다. 전체 교회의 나아가는 방향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일부가 훼손된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은 부분으로 전체의 몸을 의심하지는 않으렵니다. 곧잘 일어나는 소소하고 기이한 현상들, 저는 그런 걸 함부로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나서서 살피고 결정한 일들은 믿고자 합니다. 그 일들 자체를 믿는 게 아니라 교회의 근본 방향을 믿는 셈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우리에게 늘 되새기는 것들을 믿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성부에 대한 신앙이고, 아들 예수에 대한 신앙이며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어느 특정한 체험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2000년 전부터 드려오고 있는 '미사성제'를 통해서 가장 완벽하게 완성된다는 걸 믿습니다. 결국 신앙은 일상이지 특별한 체험이 아니니까요. ^^
개미집
이 동네에는 불쑥 솟아오른 개미집이 참 많습니다. 다가가서 보면 의외로 크기가 상당합니다. 조금 큰 항아리만한 것도 곧잘 보입니다. 발로 툭 건드려보면 의외로 꽤나 단단해서 놀라기도 하지요. 그걸 부수려면 많은 노력이 듭니다.
하지만 이 개미집의 시작은 참으로 미미합니다. 곁에 가서 개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신의 체액으로 모래들을 뭉쳐서 밖으로 물고 나와 하나씩 하나씩 쌓기 시작합니다. 그럼 동글동글한 모래들이 그 집 주변에 쌓여 있습니다. 그저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르 무너지고 개미 한 마리가 하루에 한 노력이 일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더군다나 그런 개미집이 비를 맞거나 하면 그 모래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체액들이 녹아 엉겨붙어 내려앉지만 오히려 더 내면으로 튼튼한 구조물을 이루어 냅니다. 그렇게 개미집은 점점 높이를 더해가면서 아주 튼튼한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셈이지요. 개미들로서는 참으로 오랜 시간과 노력의 응집물인 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노력은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로사리오 한 꾸러미, 성경 한 단락 읽기, 묵상하기 같은 일상의 작은 노력들은 마치 작은 개미들이 체액으로 모래를 뭉쳐 밖으로 내다 나르는 행위에 비길 수 있지요. 아주 작은 유혹에도 금새 무너져 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시련을 만나면 몽땅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정반대인 셈입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는 이런 나약함과 실패로 인해서 보다 더 튼튼한 구조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소위 '내공'이 생기는 겁니다. 심지어는 악마가 와서 발로 차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영적 구조물을 구축하는 셈이지요.
여러분들의 노력이 지극히 하찮아보이고 아무런 결실도 없는 듯이 보이더라도 그 노력을 그치지 마십시오. 잠시 쓰러졌다고 실망 마시고 때로 다가오는 크나큰 시련에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안에 하느님의 성전을 마련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성전은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VICTORY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이길지 질지 모르는 미래를 내다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둔 승리의 도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에 동참하는가 아닌가 하는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둘을 견주어보며 누가 이기는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숟가락만 얹어도 이기는 판인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걸 하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서 '우리들의 승리'를 기다리는 셈이지요. 더 많이 갖고, 더 누리고, 더 편안한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승리를 구가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승리도 아닌 승리는 매일의 우리를 더 낮은 바닥으로 동댕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다시 기어 오르려고 악을 쓰는 중인 셈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코린토1서 15장 55절)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요한1서 5장 4절)
눈에 보이는 신기한 일들
곧잘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들을 이리 저리 돌려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형상이라던지 하늘에 형성된 신기한 모양의 구름(보통은 십자가 모양)과 같은 것들입니다.
예수의 데레사의 저서나 십자가의 성요한의 저서, 혹은 비오 신부님의 일화가 담긴 저서를 보더라도 성인들 가운데 '눈에 보이는 현상'을 중요시 여기는 분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경계하도록 주의에 주의를 당부하지요. 언뜻 신비신학이 '요상한 체험'을 위주로 하는 듯한 첫인상을 주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그런 체험에 집중하지 않을 것에 주의에 주의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오든 악마에게서 오든 본질은 그게 아니니 제발 신경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적 계시'는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각자는 제 목적이 있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것은 보다 내밀한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단순히 우리가 웹사이트에 돌아다니는 사진을 공유한다고 뭔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소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서 이런 저런 신기한 일들이 담긴 그림들을 실어 나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으로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미지'는 '본질'을 왜곡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느 그림을 보면서 실제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이라면 조심에 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오늘날의 '이단'들을 엄청 많이 양산해 내고 말았습니다. 보다 내밀한 것을 찾아 전하려는 한 명의 사제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림을 보고 신기해하시기보다는 차라리 '로마서'를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오늘 당신이 하는 일
수증기가 나오는 건 물이 증발하기 때문이예요. 물이 있는 건 어디서 물이 나오기 때문이죠. 그 샘솟는 물은 수원이 있고, 그 수원은 물이 모인 거에요. 모인 물은 결국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 하늘에 있는 물은 수증기가 모여서 된 거죠. 돌다보면 답이 없어요. 그러니 지금 내 손에 닿는 일을 해야지요. 원인만 따지면서 화내기만 하는 건 누군들 못하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해요. "그런 난 뭘 하고 있는가?"하고 말이지요.
내 마음은 내가 바꿀 수 있고, 그 바뀐 마음은 내 말과 행동에 작용을 해요. 그리고 내 주변 사람과 사물을 바꾸어 놓죠. 그 뿐이예요.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과 오늘 내가 하게 되는 일은 바로 나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사명인 셈이죠. 그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으로 하세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오늘 하루 마주하는 것들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거예요.
꿈이 있다면 지금부터 키워 나가면 되요. 투덜대어봐야 바뀌는 건 없으니까요. 그러니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세요. 그리고 할 일을 하세요. 비록 바다를 향한 물방울 하나이지만, 그 물방울들이 없으면 결국 바다도 사라지고 말 거예요. ^^
꿈과 희망을...
수많은 잡다한 영화들 중에 때로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시도해 볼 수 있고, 꿈이 크면 클수록 그걸 이룰 수 있는 추진력이 더욱 커지고 결국에는 그것을 이루든 이루지 않든 본인이 부쩍 성장하게 된다는 걸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지요.
우리는 꿈이 있는가요? 많은 사람들이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그 꿈은 세상에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더 좋은 직장을 잡고 더 많은 돈을 벌어 들이지만 그런 세상적인 이상 속에서 우리의 꿈은 점점 사라져만 가고 우리들은 지독히도 '현실적인' 존재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해 보니 안되더라' 어르신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꿈과 희망은 이 세상을 기초로 한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볼리비아 아이들에게 제 아무리 돈많은 나라를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그들의 내면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원래 가지고 있던 탐욕을 더 키우기 쉽습니다. 제가 꾸는 꿈은 그런 꿈이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이 '하느님께 다가가게' 도와주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어높여 더 '완전한 인간'이 되게 도와주고 싶습니다.
'현실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제 꿈은 짖밟힐지 모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이 필요하지 그런 말도 안되는 이상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말이지요. 네 가능하면 물질적으로도 도와야겠지요. 하지만 언제나 조심할 겁니다. 그 물질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게 말예요. 오히려 저는 '물질에 대한 걱정'은 어느 정도는 뒤로 미루어도 좋다는 걸 가르치고 싶습니다. 아직 그렇게 문명에 찌들지 않은 이 곳 아이들에게 '참된 신앙'의 가치를 가르쳐 주고 싶은 겁니다.
과연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려는 바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내공'을 심어주게 될 것이고 그렇게 내면이 큰 아이들은 이 사회의 어디에 갖다 두어도 바람직한 마음으로 자신이 지닌 것으로 최대한의 노력을 해서 온 공동체를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도와줄 것입니다.
비참한 현실
사람은 어떤 일이 벌어져서 실제로 그 일이 본인이 헤쳐 나가기 전에는 아무도 스스로를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자신이 얼마만한 참을성이 있는지는 참아야 할 일이 생기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자신이 물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는 그 물질을 잃어봐야 알 수 있게 됩니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한 채로 나는 물질에서 자유롭다고 하는 상상 따위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무도 자신을 모욕하는 일이 없는데 나는 그들의 모욕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쯤은 누구든지 하는 일입니다.
다들 스스로 '안정권'이라고 생각하다가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 자신의 근본부터 뒤집히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사람은 '겸손'이라는 것을 제대로 배우게 되는 셈입니다. 저는 수시 때때로 하느님 이야기를 하고 삶을 신앙적으로 해석해 내려고 하지만 과연 내가 하느님 생각을 세상 생각보다 더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뜨면 다가오는 주변의 사물들은 하느님의 손 안에서 놀고 있던 제 마음을 곧잘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러면 저는 금새 흐트러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시 하느님 앞으로 마음을 돌리는 데에 상당히 애를 먹곤 합니다. 또 귀로 들리는 소음은 어찌나 많은지요. 그나마 자연의 소리는 큰 무리가 없지만 지나다니는 오토바이와 차소리는 날 혼란케 하고, 또 근처의 집에서 틀어대는 심장을 울리는 음악 소리는 저의 분노를 자극시키기 일쑤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또 어찌 그리 찾아 다니는지 매 삼시 세끼마다 먹던 버릇은 여전히 밥때가 되면 이유도 없이 냉장고를 여는 행동을 하게 하지요.
우리는 이처럼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누가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꾸준하고 지극한 '겸손'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희망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절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부모와 아이
얼마전 복사단 아이들과 프로그램을 하나 했습니다. 종이에 가로로 선을 긋고 제일 왼쪽에 '탄생'이라고 시작점을 잡고 그 선 아래쪽으로는 '불행'을 윗쪽으로는 '행복'을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래프를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각 행복과 불행의 끝점에는 이유를 적으라고 했지요.
참으로 흥미로웠던 사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행복과 불행의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의 상태에 달려 있었습니다. 부모의 행복이 곧 자녀의 행복이었고, 부모의 불행이 곧 자녀의 불행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돈 때문에 싸우면 불행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사이가 좋아지면 그 행복은 극에 달했습니다. 아이들의 기쁨은 부모와 절대적으로 공유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는가에 따라서 아이들은 그 행동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곧잘 '어디서 이런게 나온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바로 그 말을 하는 당신이 그 아이를 만든 셈입니다. 아이는 백지와 같은 상태에 자신의 천부적인 성격을 지닐 뿐입니다. 하지만 그 성격을 선한 의도로 가꾸느냐 악한 의도로 가꾸느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 여러분들이 형성해 온 셈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에 자녀들에게는 그 어려움을 넘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신앙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오직 '신앙'만이 우리를 고통 중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게 하니까요. 많은 부모님들이 신앙을 지니고 모든 만사를 주님의 뜻 안에서 분별하여 아픔 중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문의 위험성
우리는 '소문'들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우리의 호기심은 언제나 먹거리가 필요하고 '소문'은 실제로 있었던 일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욱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지요.
특히나 언제나 '신비'에 가려져 있는 교회에 대해서 이 일은 수시 때때로 일어납니다. 한 사제의 삶이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언제나 곤두서있는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최대의 요리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호기심을 채우는 동안 실제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런 '소문'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중에 이든 저든 교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양산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시각은 참된 사랑의 길을 통해 교회의 아픔을 건설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못할 음산한 구름을 형성해서 교회에 아무런 선입견이 없던 이들이 교회에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사탄의 작업에 여러모로 동조하는 셈이지요.
둘째로는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영혼의 위험성입니다. 이든 저든 '소문'은 그 근본 의도가 좋은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근본 의도가 좋은 것은 '소식'이라고 하지 '소문'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식은 합당한 권위에 전해져서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그 일을 바로잡는 데에 쓰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사제가 실제로 잘못하고 있는 일은 그 장상에게 올바른 '소식'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소문을 전하려는 자는 올바른 권위자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를 다니면서 깃털을 흩날리는 자들과 같습니다. 나중에 뭔가 잘못되어 다시 주워 담으려 해도 절대로 추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또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은 상대가 내 말에 호기심을 더욱 갖도록 하기 위해서 곧잘 '허풍'을 떨기도 합니다. 이런 과장과 작은 거짓들이 더해져서 결국에는 그 소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말도 안되게 공격하게 되지요.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무심코 퍼뜨리는 소문들의 결과물이 그 대상자를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 자신도 그 공격 대상이 되곤 합니다. 그럴때면 우리는 그런 소문 퍼뜨리기를 좋아했던 우리 자신을 반성하기는 커녕 그런 뜬소문을 퍼뜨리는 이를 저주하겠지요.
여러분들이 무슨 소식을 들었을 때에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영성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런 소문을 자주 만나는 친구들의 모임에서 조잘조잘 떠벌리기에 앞서 먼저 성모님처럼 그 말들을 내 마음에 가만히 품고, 나아가 요셉 성인처럼 내 안에 진정한 사랑의 의로움이 있는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의 이야기를 혼인 전에 알았지만 아무에게도 소문내려 하지 않고 조용히 이루어져야 할 일만을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런 소문을 들을 때에 다른 데에 가서 그런 것들을 퍼뜨리기보다는 마음에 품고 성찰하고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는 그 일을 진정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분에게 가서 알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함과 부족함만이 주변 공동체에 널리 퍼지고 우리가 지닌 장점은 모조리 가려지게 된다면 우리는 무척이나 슬플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근본 의도는 자녀들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어머니 교회에 악평을 퍼뜨리지 않도록 진정한 사랑으로 올바른 소식을 합당한 분에게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기와 증오와 분노의 파괴력
여러분, 시기와 증오와 분노는 모든 걸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시에 먼저 여러분의 내면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그 어떤 종류이든 시기와 증오와 분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먼저 여러분의 내면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서로서로에게 화가 나 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를 고발하려고 들지요. 그리고나서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려 합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먼저 화를 가라앉히고 내 마음에 주님의 충만한 사랑을 채우고 나서 요구되는 일은 어떤 것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에게 '정당성'을 찾도록 부추기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논리적이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사람 앞에서는 논리로 맞설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논리가 무너지면 그 즉시 상대의 '비논리'를 찾고 찾고 또 찾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렇게 되면 '끝없는 싸움'이 되고 맙니다.
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기꺼이 용서하기도 하고 또 보다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진정한 용기를 내게 도와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정당성'을 이유로 '송사'에 휘말려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많은 시간을 분노와 증오로 채울 것이고 결국 이기든 지든 영혼이 무너져 있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무언가를 잡아 먹으려 드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내어주고 평화로이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에 상응해서 대응하다가는 가진걸 얻든 잃든 여러분은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억울함'이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사랑이 그 억울함을 껴안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훗날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되겠지요.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든 모든 억울함을 해소하려고 기를 쓰던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 속에서 억울함을 상급으로 돌려받던지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하나 다시 한 번 언급해야 할 부분은 진정한 사랑은 '용기'를 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면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람들이 다 나를 욕할지언정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구체적인 정황을 말씀드릴 순 없으니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이런 공간에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니 참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비유 하나만 들지요.
반 아이들이 모두 컨닝을 합니다. 그 가운데 홀로 정당하게 시험을 치르려고 하다보면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엄청 화가 나겠지요. 하지만 일단 그 화는 가라 앉혀야 합니다. 그 순간에 하는 활동은 나 자신에게 크나큰 해악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고 이제 '사랑'이 내 마음에 파고들면 그때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선생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 결과는 짐작할 만 합니다. 반 아이들 모두에게 '왕따'를 당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 나에게 요구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로 눈치 있는 분들은 알아채시길 바랍니다. ^^
한 가족 이야기
한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엄마랑 아빠, 그리고 어법 덩치가 큰 사춘기의 두 소년이었습니다. 뭐가 문제인고 들어보니 큰아들이 지난 밤 미친듯이 발작을 해서 물을 뿌렸는데도 아무 반응도 않다가 '성수'를 뿌리니 바로 멈추더라는 것이지요. 헌데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세례를 주고 싶은데 이 철없는 아이들이 세례를 거부한다고 하네요.
"하하하, 네. 어쩔 수 없죠. 원치 않는 걸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을 물가까지는 끌고가도 물을 마시는 건 자기 마음인 셈이죠. 봐봐 이 친구야. 내가 질문하나 할께. 둘 중에 하나를 받으라고 하면 뭘 받겠어? 똥이야 음식이야?"
"음식이요."
"그럼 뭐가 더 나은지 선택할 줄 아는거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원의대로 더 나은 걸 찾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지.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게 마련이야. 문제는 뭘 원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데 있어. 왜냐면 세상은 온통 거짓된 정보를 가르쳐주니까 말야. 텔레비전 광고를 봐봐. 어떤 물건을 사면 행복해진다고 말하지? 사실이 아니야. 왜냐면 물건을 사고 나면 그 물건을 책임지고 관리도 해야 하기 때문이지. 드라마를 보면 이 여자 저 여자 꼬시면서 행복할 것 같지? 천만에, 이 가정 저 가정을 무너뜨리면서 불행해 지는거야. 많은 젊은이들이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엉뚱한 선택을 하는거지. 좋다고 생각하면서 전혀 엉뚱한 걸 선택하곤 해. 마약을 팔아 돈을 벌면 좋을 것 같지? 그래, 당장 눈 앞에 돈이 생기니까 좋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다른 친구들의 삶을 무너뜨리는거야. 전혀 좋은 게 아니지.
사실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청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아. 전혀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고 뭔가를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전혀 그렇지 않아. 너 나중에 아이 태어나면 학교에 보낼거지? 주사도 맞힐거지? 그럼 그의 영혼은 어쩔거야?
좋아, 영혼부터 시작해보자. 하느님이 없으면 이 모든 건 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엉뚱한 이야기지. 하느님이 없으면 실컷 원하는 대로 다른 여자아이 성폭행하고 돈 훔치면서 살아도 괜찮아. 하지만 하느님이 있고 우리의 영혼이 있으면 어찌되는거지? 이 영혼을 보살펴야 하는거야. 그럴려고 네 어머니가 너에게 그렇게 세례를 권하는 거라구.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오해하지. 말도 안되는 활동을 하는 단체라고 오해를 해. 뭐 어떤 부분은 틀린 게 아냐. 교회에는 전혀 엉뚱한 모습의 신앙이 있지. 하지만 그건 나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 성모상에 대한 엉뚱한 경배와 그들의 탐욕에 물든 신앙은 나도 똑바로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바야. 그런 믿음은 없거든. 하지만 우리 손가락이 다쳤다고 그 손가락만 보여주면서 "봐봐 이게 나라는 사람이야." 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 우리는 전체의 몸을 봐야해. 다친 부분과 아픈 부분이 있지만 전체 몸이 다 그런 건 아니야. 헌데 그런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지. 바로 어둠의 영이야.
좋아, 인간이 그저 컴퓨터나 로봇처럼 지상의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이 모든 건 엉뚱한 일이 될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작용이 있어. 그리고 '영적인 존재'들이 있는데 그게 천사와 악마이지. 악마는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해.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니? 많은 청소년들이 술에 취하고 마약을 하고, 성적으로 문란하게 지내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악령'을 불러들이는거야. 그러니 그 악이 그들 안에 자리잡으면서 전혀 엉뚱한 일을 하는거지.'
"네 신부님. 얘가 간밤에 발작을 시작할 때 그냥 수돗물 물을 뿌리니 아무 반응도 없다가 제가 가져온 성수를 뿌리니까 딱 멈추는 거예요."
"네, 어머니. 알겠어요. 그러니 기회를 드리죠. 보통은 이 나이의 청소년들에게는 내년에 있는 견진을 등록하고 준비하라고 하지만 지금은 특별히 어머니의 말을 믿고 이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선택은 너희들이 직접 해라. 세례를 받을지 말지 말이야. 세례 강좌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니까 너희들이 들어보고 받을만하면 받고 싫으면 말아. 나로서는 여기까지 밖에 할 수 없네. 가자 너희들 성수로 축복해줄께. 하지만 잘 생각해. 내가 사제로서 너희들 안에 있는 어둠의 영을 쫓아낼 순 있어. 하지만 손에 쥐고 있던 걸 내려 놓고 다른 걸 쥐지 않으면 전에 들어온 그게 다시 들어올 수 있어. 그리고 더 심각한 놈들을 데리고 오기가 일쑤지. 그러니 잘 생각해. 축복 받고 싶어?"
그놈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찌어찌 설득은 된 모양인데 이제 겨우 한 걸음 나간거니 앞으로 갈 길이 머네요. 성당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 가서 성수를 뿌려 주었습니다. 과연 그 친구들 오늘 저녁에 세례강좌를 들으러 올까요? ㅎㅎㅎ
수요일 복음해설에 덧붙여...
우리는 대부분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달리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해본 적도 없다는 말이지요. 성당 안에서 활동한다고 그 곳이 바로 포도밭이 되는 게 아닙니다. 참으로 좋은 계기를 마련하고 좋은 시작점이긴 하지만 '성당 울타리' 안이라고 무턱대고 포도밭은 아닙니다.
성당 울타리 안에서 도리어 세속적인 생각을 더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성당에 나오니 조금만 일해도 사람들이 알아주더라는 말이지요. 그런 명예심 때문에 재미가 나서 일을 하다보면 슬슬 성당 안에 중요한 자리도 도맡게 됩니다. '권력'도 더해지는 셈이지요. 그런 헛된 마음을 키우는 수많은 이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신부들 중에서도 그렇고 수도자들 중에서도 그렇습니다. 내면에 진정한 '신앙감'을 키우지 않으면 곧잘 세속적 욕구로 일하기가 일쑤입니다. 언뜻 기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기도 양으로 우월함을 내비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기도를 '돈'으로 생각하는 부류들이지요. 이들은 진정한 기도의 맛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축적하는 재미를 쌓는 셈입니다.
진짜 포도밭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숨어 있습니다. 이 말이 곧 내면에만 파고드는 꽁생원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을 올바로 살피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누구와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돕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포도밭의 일꾼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계속하다보면 점점 하늘나라에서 제대로 맡게 될 포도밭이 늘어가는 셈이지요.
헌데 포도밭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로 예수님의 이 복음 말씀을 듣고 스스로를 포도밭에서 일찍이 일해온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부아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저였지요. ㅎㅎㅎ 제가 얼마나 교만했던지요. 쟁기를 잡지도 않은 채로 벌써 일을 다 끝내간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저는 말째입니다. 이제 겨우 포도밭을 깨닫고 도착해서 쟁기를 잡으려 하는 중에 있습니다. 용기를 내야지요. 우리 주인이신 분은 엄청 자비로우신 분이시니까요.
포도밭에 부름 받은 이들
(연중 20주 수요일)
우리는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으로 그 합당한 결과를 기다리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노동과 댓가'라는 차원에서 이해를 하려고 들면 말도 안되는 억지일 뿐이고 그 주인은 당장 노동청에 고발해서 물러나야 할 위인이 됩니다. 시급을 정하고 10시간을 일한 아이와 1시간을 일한 아이에게 똑같은 돈을 쥐어주는 주인을 누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이고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시커먼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주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비유를 들으면서 앞서의 '부당함'을 호소하려는 분들은 귀 기울여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가면 똑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에는 전혀 차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주잔을 가득 채우는 것이나 큰 양동이를 가득 채우는 것이나 가득 차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저마다가 가진 그릇의 크기대로 모두 가득차서 모두가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런 타인의 행복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도리어 자신의 그릇을 좁히고 있는 셈입니다. 그릇만 좁히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상하게 해서 차오르는 물을 줄줄 새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일찍 와서 일하기 시작한 이나 늦게 와서 일하기 시작한 이나 아무런 차이없이 같은 행복감을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차이가 없지는 않습니다. 저마다가 키워놓은 그릇의 크기대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사실 설명하는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일 뿐 이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를 합당히 설명할 비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든 저든 시간과 공간에 묶인 사람으로서 모든 것의 크기를 가늠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남의 그릇의 크기에 관심갖지 말고 내 그릇을 열심히 키워 나가고 그 그릇을 은총으로 채우는 데에 노력해야 하고 아직 이런 초대를 받지 못한 다른 이들을 많이 불러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우리 것이 아닌 걸 가지고 이런 저런 것들을 가늠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롭고 '후하시기도' 한 분이시니까요. 누가 더 높아질지 따지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주력하시기 바랍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ㅎㅎㅎ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연중 20주 화요일)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보인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왜냐면 세상 사람치고 돈에 욕심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사실입니다. 너도나도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헌데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하니 참 어찌보면 가슴시린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은 없다'라는 어찌보면 실낱같은 희망의 말씀도 남기십니다.
먼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부자라고 다 같은 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부자이고 싶어서 부자인 사람과, 부자이고 싶지 않은데 부자인 사람, 부자이고 싶으나 가난한 사람과, 부자이고 싶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이 네 가지 분류 중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바램'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를 주신 이들은 '부자이고 싶어하는 부자와 가난한 이'를 모두 포함합니다. 단순히 지금 가진 금액이 많고 적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이 부자이고 싶어하는 이들의 탐욕은 그 자체로 어둠입니다. 그 자체로 구원의 길에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닙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그 욕구를 내면에 채우는 것 만으로도 이들은 하루하루 구원의 희망에서 멀어집니다. 왜냐면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한 마음에 넣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마음에 간직하면 다른 하나를 마음에서 뽑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이 강렬한 욕구를 지니는 이상 제 아무리 좋은 글을 읽고, 제 아무리 신심 생활에 몸담는다 해도 헛수고인 셈입니다. 부자인 데다가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에 희망이 거의 희박하고, 가난한 데에 부자가 되려는 욕구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이들도 마음 자세가 바뀌지 않는 이상은 부자들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지만 위대하신 하느님은 이런 이들 가운데에서 선택한 이들을 부르시고 이끌어 내십니다. 누가 선택되었느냐구요? 모두가 선택되었지만 결국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최종선택하십니다. 이 부르심을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에 국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거룩함'으로 불리움 받은 이들은 그 자리가 어디이든 '성소'의 길을 걷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세상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두 부류가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부자이고 싶지 않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부자이고 싶지 않은 부자는 이제 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동안 부어주신 은총으로 재어놓은 것을 분주히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 쓸 참으로 아름다운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 가진 재물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현명해야 합니다. 복음의 부자 청년 처럼 기존에 개인적으로 가진 걸 모조리 가난한 이들에게 줄 수도 있지만 1000명의 직원을 지닌 사장이 한순간 모든 걸 내던지고 잠적해 버린다면 그 직원들의 생계를 내던지는 셈이기에 그것은 도리어 사랑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든 저든 이들은 지금 자신이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가진 재물로 수많은 이들의 삶을 구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기 시작합니다.
부자이고 싶지 않은 가난한 이들은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정진합니다. 이미 가난한 상태에서 하느님에 대해서 눈을 뜬 사람도 있고(선교지의 가난한 이들),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가난한 수도자들 - 하지만 지금 세상에 가난한 수도자들이 있나 의심스럽습니다.)도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낙타가 엄청 작아지거나 바늘귀를 엄청 키우면 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 영혼에 '탐욕'을 모조리 뽑아내면 원래의 우리 지극히 소박한 영혼이 나옵니다. 반대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키우면 우리가 통과할 바늘귀가 엄청 커지기도 하는 셈입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가진 재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곧잘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가진 재물에 마음을 떼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기회는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그분을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찬미할 수 있는 기회보다 훨씬 희박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부자들은 빼앗길 걱정, 잃을 걱정, 손해를 볼 걱정, 가진 물건 그 자체에 집착할 걱정 등등을 일상적으로 안고 살아야 합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선물 하나에도 너무너무 기뻐하며 하느님께 그 기쁨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이 모든 과정을 하느님은 이루어 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리고 또 돌리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마음 속에 뿌리박힌 탐욕의 가시를 뽑아 내시고 이미 가진 것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랑의 행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친구
저는 관계에 아직 굉장히 미숙합니다. 어찌보면 지독히 고립되어서 살아온 셈이지요. 어릴 때부터 돌아다닌 이사는 저를 '혼자 잘 노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음을 주고 우정을 맺으면 곧 떠나야했고 그러면 자연 멀어지게 된다는 걸 일찍부터 배운 셈이지요.
옛날 '구미'라는 동네에서 살면서 맺은 동네 아이들과의 우정이라는 것은 대구로 이사를 나오면서 불과 1년 사이에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나대로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그들은 그들 대로의 역사를 이루어서 서로 어울릴 수가 없었지요. 저는 한껏 기대를 안고 옛 동네에 도착을 했는데 이미 나의 친구들은 그때의 친구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이사를 수도 없이 다니면서 동네 친구라는 개념은 거의 없이 살았습니다. 그나마 성당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또 자연히 멀어지게 되더군요. 얼마간 연락을 하나 싶더니 그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신학교에서는 친구가 많았는가 하면 그도 아니었습니다. 동기들은 저마다의 그룹이 있었고 저는 언제나 동떨어져서 혼자 만화나 그리고 기본적인 관계만 유지한 채로 살아갔습니다. 언제나 조금은 아웃사이더였지요. 쉽게 말하면 '왕따'였습니다. 뭐 따돌림을 당한 건 아니지만 늘 뭔가 고립된 분위기였지요. 혼자 잘난 맛에 산 겁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소식이 궁금하고 마음이 가는 친구가 몇 있긴 합니다.
그래도 유일하게 꾸준한 친구라면 제 친형이 있습니다. 피가 맺은 연이 이제는 같은 성소의 길도 걷게 되어서 그야말로 둘도 없는 부랄친구가 된 셈이지요. 어릴 때에는 형이 저를 많이 돌보았고 이제는 뭐가 뒤바뀌어서 제가 종종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먼저 사제생활을 하고 있는 베테랑인 셈이지요. ㅋㅋ
그동안 참으로 '우정'이라는 것을 소홀히 해 온 셈입니다. 소홀히 했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고나 할까요? 친구란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전혀 배우지 못한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늘 붙어 있으면 그분이 저를 조금씩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최근에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 '우정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만나게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연을 맺게 된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내 앞에 내어놓으신 선물인 셈이지요. 그래서 앞으로는 잘 살펴보고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야심한 밤인데 잠이 깨었습니다. 낮에 그리고 저녁에 너무 먹은 탓이지요. 일어나 앉아서 좀 있다보니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 잠을 청해 보아야겠지요. ㅎㅎ
Ven Espíritu Santo
우리에게 식사가 한 끼였다면,
우리는 나머지 노력을 영적 양식을 먹는데 썼으리라.
우리에게 잡다한 관심거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나머지 시간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썼으리라.
우리가 가진 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원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세 끼를 다 챙겨먹고, 잡다한 관심 거리를 가지고, 많이 소유함으로써
덩달아 길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기에 어둠의 영은 악의 씨를 뿌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치고 박고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주님의 거룩한 영은 이를 가련히 여기사
우리가 다시 단순성을 회복하도록
절제의 영을 주시어 생의 욕구를 제어하고
분별의 영을 주시어 관심을 한군데로 모으며
지혜의 영을 주시어 거룩한 것을 원하도록 하셨다.
이에 원하는 이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하늘은 도움을 거절한 적이 없다.
어둠의 영을 식별하는 방법 - 깨어있기
어둠의 영을 식별하는 방법이라…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원리는 참으로 간단합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입니다. 짙은 어둠이건 옅은 어둠이건 '빛'이 없으면 그 자체로 어둠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어둠'이 절대로 자신을 '어둠'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둠은 속임수를 써서 스스로를 빛으로 드러내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은 빛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릇된 모습을 바로잡는 것이지요. 누가 나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명예에 관한 것이든 무엇으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손해는 기워 값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정의'로운 생각이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뜻 이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정의로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 '원리' 자체로는 전혀 손색이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속에는 곧잘 '어둠'이 끼어들곤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면서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증오'하기 시작하고 내가 손해본 영역을 회복하려는 '욕심'을 감추고 있기 쉽상이니까요. 이처럼 어둠의 영은 자기 스스로를 대놓고 '나 어둠입네!' 하고 내어놓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좋아 보이는 무언가'로 자신을 탈바꿈 하여 상대에게 드러냅니다.
이런 예는 수도없이 들 수 있습니다. 어둠이 자신을 빛으로 가장하여 다가오는 예들 말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곧잘 속아넘어가고 맙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저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보다 적극적인 사랑에로의 추구가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합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는 마치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뜨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게만 있다 보면 절로 눈이 감기고 잠이 들어 버리게 되어 결국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는 눈만 뜰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깨어있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활동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으니 대표적인 것으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은 절대 잠들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앞서도 누차 설명을 드렸으니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연락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일을 고해 드리고 그분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단순히 고함을 내어지르는 기도는 절대 기도가 아닙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여지를 남겨 드려야 하지요.
'단식'은 정당한 것을 절제함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의 수용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고 그 고통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받아들이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음식'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억울함'으로도 우리는 단식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 자존심을 단식하는 것이지요. 나는 충분히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임에도 그들이 나를 깔보는 행위를 참아 견디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무궁무진합니다.
'자선'은 나의 현세적 보물을 내어줌으로써 깨어있을 수 있는 좋은 행위입니다. 단순히 '돈'만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노력을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복음선포'에 헌신하는 것이겠지요. 그만한 자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최고의 자선'을 하는 셈입니다. 왜냐면 진정한 자선은 돌려받을 생각 없이 내어주는 것이고, '복음말씀'은 그 사람에게 전해져서 나에게 돌아올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통적인 이 세 가지 방법 - 기도, 단식, 자선 - 을 통해서 늘 깨어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둠의 영'을 곧잘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어둠의 영은 한편으로 지극히 단순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방향성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강하게를 고집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지요. 여러분들이 꾸준히 이 세가지 활동에 치중하다보면 자연스레 그 반대되는 방향들이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의 숨은 의도도 크게 어렵지 않게 분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낮은 곳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내리는 것과 자신의 본래 위치를 아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게 '낮은 곳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완전히 다른 내면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전자는 '영적 교만'이고 후자는 '겸손'입니다.
'영적 교만'은 자신의 본래 위치를 상당히 높이 잡아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짓 자신이 '진정으로 겸손한 척' 자신을 내리 끌어당겨 억지로 낮추는 시늉을 하는 셈이지요.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은 꽤나 높은 곳에 있고 이런 이들은 성모님이 당신의 기도에서 말씀하시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본래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에 비교대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 앞에 서 있는 우리들로서 본래의 위치를 합당하게 되새길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가치를 알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를 하고 맙니다. 하느님을 마치 동네 아저씨 취급을 하고 그분을 이해 못하겠다느니 그분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느니 하는 불경을 수시 때때로 범하곤 합니다. 물론 그분은 그런 잘못들마저 모두 용서받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마지막에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할 때이지 그런 행위를 상시적으로 하면서 '용서해 주실 거니까'라는 마음마저 먹고 있다면 이는 필시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의 본래의 위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겸손의 두 번째 위치는 '사람들 사이'에서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장단이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으뜸가는 탈렌트를 지녔다 하더라도 타인에게서 반드시 배울 점 하나를 얻게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세우지 말고, 그가 가진 장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겸손'의 올바른 위치입니다.
이 겸손의 세 번째 위치는 어둠의 영 앞에서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어둠의 영 앞에서 굴복하는 것도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선 그분의 모상을 닮은 피조물로서 '어둠의 영'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겸손입니다. 이 경우 '겸손'은 어둠과 맞서 싸우는 우리의 '무기'가 되는 셈입니다. 조금은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턱대고 낮추는 것이 겸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일 먼저는 하느님 앞의 우리의 초라한 존재를 인지하고, 나아가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낮은 자임을 알고 처신하되, 단 하나, 어둠의 영 앞에서는 당당히 일어서 있어야 합니다.
내 사람
한국의 철없는 신부들이, 특히 무슨 특수사목을 하는 신부들이 곧잘 '내 사람'을 만들려고 하기 일쑤입니다. '우정'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우정은 하느님의 선물이니까 친구를 갖는 건 참 좋은 일이지요. 헌데 자신이 머물던 지역에 있던 이들을 몽땅 데려다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헌신을 하게 만드는 움직임이 곧잘 포착이 됩니다. 이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는 일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빛을 전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 가장 본질적인 위치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선교'를 이루어야 하는 사제로서 진정 본질적인 것은 그 사람이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빛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우선되어야 할 자리는 바로 '본당'인 셈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무언가 특수한 소명을 감지한다면 자신의 소명이 이끄는 대로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제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수도원 재속회 영성을 살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교회에서 추진하는 특수한 형태의 사목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서로 '내 사람'을 만들어 일을 하려 하고 이런 움직임은 결국 본당 사목구 주임과 '충돌'을 야기하게 됩니다. 이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도시대 때부터 야기되어 온 문제이기도 하지요. 아폴로 파, 베드로 파, 바오로 파 등등으로 나뉘어 서로 얼굴을 붉힌 사건입니다. 특수사목을 하시는 분들은 생각을 잘 추스려야 합니다. 만일 그 일이 지금의 이 시대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가장 적합한 인물들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그 시대적 필요성과 사명감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쉬운 방법이라고 예전 본당에 머물던 사람들 중에서 열심하고 마음 맞았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다가 일을 하려고 드는 것은 삼가해야 합니다.
만일에 한 본당이 하나되어 올바른 모습으로 이끌어져 가고 있다면 '특수사목'에 해당하는 분야는 절로 해결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각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되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이는 한 본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교회 공동체는 각 가정과 지역이 살도록 도와주는 작업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바탕을 다져 놓고 나면 그 뒤에 그 터전에서 여러가지 교회의 특수한 부분에서의 탈렌트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말인데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구체적으로 언급을 시작하면 오해가 생기기 쉽기 때문이지요. ^^
싸우는 두 사람
자, 한번 생각해 볼까요?
'갑'이라는 사람이 1000만원을 '을'이라는 사람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갑'이라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자신이 노점상을 하며 10년을 걸쳐 모은 돈이었지요. 하지만 '을'이라는 사람의 사정이 참으로 딱해 보였지요. 헌데 '을'이라는 사람이 갚겠다고 한 기한을 넘기는데 계속 '사정을 좀 봐 다오'라고 하면서 갚을 생각을 하지 않네요. 결국 '갑'은 '을'에게 화가 났고 법정에 고소를 했습니다.
'을'이라는 사람은 사실 이 돈으로 부족한 사업 자금을 메꾸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실패를 해 버리고 말았고 당장 가족들을 먹여살릴 일이 코앞에 다가와 이 빌린 돈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당장 구할 수 있는 돈이 없기에 '사정을 좀 봐 다오'라고 부탁할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을'로서도 그런 자신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갑'에게 화가 났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각자의 배경을 바탕으로 이 '갑'과 '을' 사이에서 한 측의 의견에 알게 모르게 힘을 싣게 됩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갑이냐 을이냐,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둘 사이에 '사랑과 신뢰'가 식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가 모두 제 뜻이 있고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의 근본은 '증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이 논리를 서로에게 적용시켜 가장 논리적인 무언가를 찾더라도 안타깝게도 이 '증오'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게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악마가 노리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위의 문제는 '돈'이 연관되어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문제에도 늘 그 근본에는 우리의 모종의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남보다 더 나으려는 욕구, 남을 통제하려는 욕구, 돈에 대한 욕구… 이런 어지러운 욕구들이 그 정연한 논리의 밑바닥에 교묘히 몸을 숨기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우리가 상대에게서 '사랑과 용서'를 잃고 갈라서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의 대열에서도 갈라지는 셈입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죄악을 사랑하자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가 살아있는 이상은 사랑을 가지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됩니다. 참 어렵고도 난해한 문제입니다.
하느님 앞에 '정당한 증오'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최악의 순간에도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자유'는 세상 안에서 뭐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마지막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일상
"신부님"
어느 아줌마가 절 찾는다길래 얼른 사무실로 들어오시라고 했습니다. 아줌마가 사연을 꺼냅니다. 책 한 권을 펴는 기분이랄까요? 하하하.
"제 딸이 있는데요. 신부님이 좀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상황이 어떤가요?"
"한 날은 걔가 외박을 하고 돌아오더니 그때부터 저에게 거짓말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 날은 집에서 돈이 사라졌는데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모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딸애가 훔친 것을 알게 되었지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언뜻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조언을 시작했습니다.
"네, 자매님. 하나 말씀 드릴께요. 자매님은 그 아이에게 진짜 '엄마'가 되어주세요.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아이에게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어둠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곁에서 도와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지 심판관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자매님은 그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서 먼저 그 아이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나아가서 그 아이가 어떤 잘못을 했던지 기꺼이 용서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해 주셔야 해요. 만일 그러지 않고 지금의 그런 조급한 마음으로 아이를 불편하게 하기 시작한다면 그 아이로서는 유일한 의지처를 잃어버리는 셈이 되고 우리 모두는 그 아이의 영혼을 잃게 되는 거니까요. 아시겠지요?"
"저로서는 그 아이가 신부님과 이야기를 좀 해 봤으면 좋겠어요."
"네, 걱정마세요. 저는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요. 원하시면 언제라도 방문하시면 되요. 하지만 그 아이를 저에게 데려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매님이 되겠지요. 그러니 먼저 그 아이의 신뢰를 회복하세요. 그리고 그 아이의 사랑하는 엄마가 되어 주세요. 사실 저는 지금 그 아이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매님'에게 집중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 상대할 수 있는 상대는 자매님이니까요. 그러니 자매님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거듭 상기시켜 드리고 자매님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그 어둠을 지닌 아이에게 '사랑과 힘'이 되어 주세요. 아시겠지요?"
엄마의 얼굴이 조금은 환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사무실을 나갑니다. 저로서는 이 책의 2권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ㅋ
십자고상의 비유
오늘 미사를 마치면서 뭘 하나 더 가르쳐줄까를 고민하다가 제대 위에 올려져 있던 나무 십자가를 집어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십자가 보이죠? 이 받침대는 우리의 현세 생명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요. 수많은 이들이 여기에 집착을 하죠. 뭘 더 벌어들일까, 어떻게 더 좋은 직업을 얻을까, 어떻게 더 명예롭게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받침대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 고스란히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야말로 여기에만 집중하는 것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처럼 공허한 일이 되는 셈이지요.
자, 뭐가 남나요? 네, 나무로 된 십자가와 쇠로 된 예수님상이 보이네요. 헌데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불을 거치게 되어 있어요. 이 받침대를 뺀 십자가에 불을 붙이고 나면 과연 뭐가 남을까요?
(앞에 앉은 아이들이 '쇠요!' 하고 외칩니다. 기특한 것들 ㅋ)
네, 그렇죠. 이 쇠로 된 예수님 상만 남을 거예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하신거 기억나시죠? 우리는 바로 그 불을 거쳐야 하는 셈이예요. 헌데 우리의 마음 속에 '탐욕, 거짓, 시기, 질투, 음란'과 같은 나무 쪼가리만 들고 있다가는 몽땅 불살라지고 말 것이고, 반대로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보다 중요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으면 이 쇠로 된 예수님상처럼 남아있게 될 거예요. 그러니 각자 잘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마음 속에 뭘 지니고 있는지 말예요."
아이들은 그저 싱글벙글 어른들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강론을 하는 건 참 재밌습니다. 자기 생각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거든요. 일대일로 면담을 한다면 모종의 시도라도 할테지만, 군중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는 그런 경계심이 깨어지고 자연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모쪼록 우리 동네 사람들이 저의 강론에 모두 더욱 환히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저의 이 소박한 청을 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ㅎㅎ
유혹
흔히 생각하는 것이 '평신도들은 유혹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어서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다.' 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 인간 존재로서 '유혹'이 없는 자리는 없습니다.
이왕 언급한 김에 평신도부터 시작을 하면, 그들은 일상 안에서 잡다한 일들 속에서 많은 유혹을 겪습니다. 더욱 자극적인 것들을 접할 수 밖에 없고,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런 대화가 오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분명한 현실입니다.
사제들은 어떨까요? 사제들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유혹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물론 평신도들이 직장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에서는 면제되어 있지만 그 밖의 유혹들이 상시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존재하면서 언제 어디서라도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수도자는 좀 안전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수도자는 보다 더 세상에서는 격리되어 영적인 열매들을 생산하기 쉬운 상태이지만 또 그에 반해 비닐하우스의 식물처럼 지극히 작은 영향에도 큰 타격을 받기 쉬운 상태입니다.
어둠의 영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그 상황에 적합한 유혹거리를 만들어냅니다. 태초의 낙원이라는 거의 완벽했던 환경에서도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존재이니 그 영특함은 이루 말할 데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이 생을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유혹'의 총량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각자가 자기 삶 이외의 것은 체험해 보지 못하기에 서로의 삶을 쳐다보면서 부러워하기만 하지요. 마치 군인들과 똑같습니다. 평생에 군대라는 것은 한 번 뿐이기에(물론 어느 신부님들은 2번 입대하지만 ㅋ)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남을 바라볼 게 아닙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거룩함에 있어서 '에이 그건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거룩함을 이룰 수 있는 기회와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훗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반드시 나의 삶에 대한, 나의 데나리온에 대한 값을 치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거룩함의 자리
참된 거룩함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거룩한 체험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그저 '그의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체험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나약함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자신은 '모욕 당하는 걸 인내와 기도 안에서 겨우 참아내고 오히려 그에게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드러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 알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자주 접하는 것은 필히 좋은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필히 우리가 배워 익힌 것은 삶 안에서 '선택사항'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라 당신의 자녀들이 진리를 '배울 수 있게'도 하시고 나아가서 '체험할 수 있게'도 하십니다. 헌데 적지 않은 당신의 자녀들이 진리에 대해서 '배우기'는 잘 하지만 '체험하기'에서 용기를 잃고 도망쳐 버리고 맙니다. 이 양자의 거리는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듯이 머리와 가슴의 거리와도 같은 셈입니다. 100번을 듣는 것보다 1번을 실천하는 것이 더 절실합니다. 겸손에 대해서 배우기보다 '겸손'을 한 번 체험해 보는 것이 보다 가치로운 셈입니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이나 되는 듯이 학식만을 내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자랑하는 '영적 지식'은 대학교의 소위 박사들이 자랑하는 자기 분야의 지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아는 바대로 살지 못하면 그들의 영적 지식은 훗날 도리어 자기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심판의 도구'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지식만 알았지 실제로는 그 지식으로 온갖 교만을 떨고 다녔으니 말이지요.
이 점은 이 글을 쓰는 저도 쓰면서 반성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지나치게 너무 많은 것들을 서술해 놓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가운데 제가 저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는지 말이지요. 행여 제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저에게 그런 기미가 보인다면 여러분들이 나서서 제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은 보다 소중한 '성화의 자리'가 됩니다. 여러분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늘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접하는 '정보'보다도 바로 그들이 여러분을 훨씬 더 빨리 하느님에게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일상적인 영적 음식
우리의 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것으로 형성됩니다. 야채를 많이 먹으면 야채의 영양분이 우리의 몸을 형성하고 고기를 많이 먹으면 고기의 단백질이 우리의 몸을 형성합니다. 또 어느 날 술을 양껏 마시면 그 술이 우리의 몸 안에 퍼지기도 하지요.
우리의 영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으로 형성됩니다.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그 자양분이 영을 형성하고, 영화를 많이 보면 영화의 내용이 우리의 영을 형성하지요. 또 어느 날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우리 영을 더럽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흔히 보는 것이 '드라마'라면 그는 이미 그 드라마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자양분(남녀간의 애증관계, 성공 신화 등등)을 통해서 그 안의 수많은 것들을 형성한 셈이고 그 사람의 수준은 알만합니다. 또 누군가가 흔히 보는 것이 '연예 가요 프로그램'이라면 그는 그 프로그램이 지닌 일반적인 자양분(더 많은 인기를 얻으려는 바램, 더 나은 외모 등등)을 통해서 그 안의 수많은 것들을 형성해 둔 셈이기에 그 사람의 수준 또한 알만 합니다.
많은 이들은 소위 '거룩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언뜻언뜻 표현하지만 실제 그의 삶 안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룩함의 여정은 다른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의 여정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혀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떼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쪽으로 진흙을 계속 밀어 넣으면서 왜 내 컵 안의 물은 맑아지지 않는걸까 하고 한탄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 한심한 모습에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거룩함의 원의가 있다면 먼저 거룩하지 않는 걸 살피고 그것에서 거리를 두는 데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셈입니다.
'싫다'라는 스위치
"싫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늘 불안증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 '싫다'는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만일에 '공룡'이 싫다고 하면 크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멸종했으니 쥬라기 공원처럼 과학자들이 다시 되살리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꽤나 희박하구요.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것이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일 때에는 문제가 됩니다. 특히나 내 주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한 부분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를 깔보는 사람을 '싫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주변에 우리를 존중하고 들어높이는 사람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요. 언제나 우리를 깔보고 얕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 우리의 내면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에 반발심을 작동시키고 우리의 안정감을 빼앗아 가 버리는 셈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곧잘 하려는 작업은 '그'를 바꾸려는 작업입니다. 그가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하거나, 그가 함부로 깔보지 못하도록 그의 기준에 맞추어 나의 능력을 드높이려 합니다. 그러니 '피곤'하지요. ㅎㅎㅎ 그저 내 안의 스위치 하나만 바꾸면 되는 문제를 온 인생을 걸어 '그의 기준'에 맞춰 살려고 하니까 말이예요.
만일에 내가 드높이려는 것이 내 생을 걸어 할 만한 일이면 참으로 좋은 것이겠지만, 사실 우리 생애에 그런 일은 그닥 많지 않습니다. 상아탑을 쌓았더라도 결국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니까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말이지요.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에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지요. 더욱 큰 '믿음'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의 '희망'과 기쁨은 더욱 커지게 되고, 자연 '사랑'도 커지게 되어 현세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더욱 잘 받아들임으로써 심지어는 현세에서의 '기쁨'도 더욱 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러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 마음도 넓히고, 여러분 마음도 같이 넓힐려구요. ㅎㅎ
여러분 안에 있는 '싫다'라는 스위치를 잘 살펴 보십시오. 그리고 그걸 켜 놓은채 피곤하게 살아가려 들지 말고 그 스위치를 내리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제가 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 안에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로 그 스위치들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합니다.
가난이 싫다 - OFF
비천함이 싫다 - OFF
약한자 되는 것이 싫다 - OFF
그리고 나면 밤에 잠이 아주 자~알 옵니다. ^^
그리스도인 전쟁의 수단
우리도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지막날이 다가옴에 따라서 어둠의 세력은 거룩한 이들을 하나라도 더 유혹해 넘어뜨리기 위해서 온갖 공격태세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이에 우리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많은 없습니다.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전쟁 수단은 그들의 것과 전혀 딴판입니다. 그들은 주로 '힘'을 사용합니다. 논리의 힘, 무력의 힘, 권력의 힘, 명예의 힘, 증오의 힘 등등… 남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엉뚱한 것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까지 비춰지는 것들이지요. 그것은 바로 '희망, 사랑, 믿음, 인내, 온유'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니 세상에서는 싸움이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솔직히 꽃을 든 아이가 탱크 앞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탱크 안에서 그걸 조종하는 사람이 그 아이의 꽃에 감동하는 순간 상황은 반전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결국 탱크는 아이를 깔아뭉개버리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더 위대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그때가 되면 죽었던 아이가 부활하게되고 탱크는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탱크 안에 숨어있던 또 다른 아이만 남게 되지요. 부활한 아이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리고 탱크 안의 아이는 지독히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
네, 우리는 사도의 말씀대로 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육신이 피를 흘리며 죽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먼저 가신 분을 따라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악의를 지닌 이들이 여러분을 공격하려 들 때, 그들과 똑같은 적대감으로 맞서 싸우면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면에 선의와 사랑을 품고 있어야 하며 겸손과 인내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현세에서도 승리를 거머쥘 것이요,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영원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 평화!
두 종류의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의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워 보이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껍데기를 벗기고 내면을 들여다보면 잠재적인 전쟁이 숨어있는 평화입니다. 이는 '거짓평화'이고 '세상의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겉모습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는 외적으로는 정말 역동적이고 활력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그 내면 속에 오로지 한 방향, 진실하고 참되며 정의로움으로 가득한 방향이 있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바로 '참 평화'이며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두 아이를 떠올리면서 연상해 봅시다. 두 아이가 실컷 싸우는데 엄마가 와서 둘을 떼어 놓습니다. 두 아이는 언뜻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어머니가 잠시 틈을 주기만 해도 금새 둘이 들러붙어서 치고 박을 겁니다.
반대로 서로의 내면을 완전히 이해를 하는 두 아이를 떠올려 봅시다. 이 두 아이는 온갖 장난을 쳐대면서 함께 웃고 즐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두 아이의 내면은 진정으로 평화스럽습니다. 뭘 해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거짓 평화를 무너뜨리고 참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은 우리의 숨은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실 것이고 결국 하느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 편이 다른 편과 맞서 '전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자녀들은 전혀 엉뚱한 것으로 맞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사랑'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마치 하느님의 자녀들이 계속 당하기만 하고 손해만 보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고 보십시오. 진정한 승리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다가오게 될 테니까요.
어둠의 영이 성소자를 낚아채는 방법
사제가 되겠노라고 뜻을 굳히고 신학교에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의 뜨겁던 그 마음은 살아가면서 자연히 조금씩 가라앉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가라앉는 게 아닙니다. 어둠의 영들은 이 성소의 못자리에 그야말로 진을 치고 한 명이라도 공격하여 무너뜨리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제나 신학생의 성소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의심하는 것이 '이성문제'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비율이 그러하긴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셈입니다.
이들의 소위 '엇나감' 즉 '일탈'은 일찍부터 예견되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데에서 시작해서 그 여파가 신학생이 지닌 가장 약한 부분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은 바로 '신앙'이고 그 약한 부분이라는 것은 '독신제'를 지켜야 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상황입니다.
문제의 근본인 '신앙'은 도대체 어디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의 '부주의'로 인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수비를 세우고 방어를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분이 도무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침공을 당하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물론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선하고 합당한 인도자가 있었고 일어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만 있었어도 그와 대화를 나누며 많은 부분이 '예방'될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본당에서도 신학교에서도 그런 '인도자'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고, 기껏해야 함께 생활하는 같은 길을 걷고 고민하고 있는 동기들이 거의 전부인 상황입니다.
결국 이런 무방비 상태에서 침공은 시작이 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생활의 흐트러짐'입니다. 교사든 청년이든 어울려 다니면서 '술'을 많이 마신다던지 신학생으로서 상식에서 어긋난 교제를 시도 한다던지 하는 낌새가 반드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신학생은 벌써 근본에 마음이 엇나가 있다는 기미를 보이는 셈입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철없는 이들이 이런 행동을 더욱더 부추깁니다. 신학생에게서 뭔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될 때에 친구로서 형으로서 누나로서 어른으로서 사랑을 담아서 추스려 주어야 함에도 이들은 그런 신학생에 대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그저 '힘들어서 그러겠지'하고 자꾸만 봐주고 넘어가며 때로는 더욱 부추기는 셈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에는 일탈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져만 갑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모두가 익히 짐작하는 바대로 가장 쉽게는 '이성문제'로 불거지게 되는 셈입니다. 근본이 틀어진 신학생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은 '이성의 위안'이고 그렇게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행여 좀 더 마음을 써 주는 이성을 만나면 고삐가 풀리는 셈입니다.
결국 어둠의 영은 한 성소자를 낚아채어 발목에 차꼬를 채웁니다. 물론 이 사람은 머지않아 회복되어 평신도로서 나름 열심히 생활을 하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교회 안에서 탄생할 영적 장군을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특히나 이 일이 사제에게 일어나게 되면 어둠의 영들의 환희는 더욱 대단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평소에는 따스한 애정과 격려로 작동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따끔한 충고와 조언으로도 작동해야 합니다. 무턱대고 교회 안에서 '학사님'이랍시고 떠받드는 건 분명히 피해야 하고 식사 자리에서 술을 자꾸 권해 정신을 잃게 만드는 성인 남성 신자, 주부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재미삼아 권하는 한 잔의 술에는 어둠의 영들의 지독히 잔인한 의도가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특히 한국의 신학생들을 현대의 '술문화'에서 보호해 주십시오. 마치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대단한 일인 양 생각하는 데에서부터 저는 이미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건 자랑 거리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고 수치입니다. 여러분들, 성소자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강론
어제 구역미사에서 저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꺼내 보이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한 손에는 동전이 다른 한 손에는 지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둘 중에 하나만 선물하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뭘 고르시겠어요? 당연히 이 지폐겠지요? 왜냐면 그 가치를 아니까요. 하지만 어떤 꼬마애가 지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동전으로는 숱하게 막대사탕을 사 먹었죠. 그럼 이 아이는 뭘 고를까요? 네, 당연히 동전을 고를 겁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른들에게는 참으로 한심하게 보이겠지요?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속세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두고 고르라고 하면 수많은 이들이 영원한 생명과 그와 관련된 것들을 무시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주일미사에 전혀 나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주일미사보다는 술이나 한 잔 하러 가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러고 난 뒤에 죽을 때가 다 되어가면, 아니 죽고 남녀 사제를 불러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허덕입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우리의 영은 이미 갈 곳이 정해진 상태가 되어 있으니까요.
무거운 것을 넣은 풍선과 가벼운 것을 넣은 풍선은 손만 놓으면 제 갈 길을 가는 셈입니다. 그렇게 우리 영혼도 살아오면서 채운 것들로 제 갈길이 이미 정해진 셈이지요. 탐욕, 증오, 미움, 이기심, 분노와 같은 것들을 넣은 영혼은 아래로, 희망, 소망, 사랑과 같은 것들을 넣은 영혼은 위로 올라갑니다.
신앙의 대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보이는 것에 집착해요. 하지만 잘 따져보세요. 결국 여러분들이 찾는 '행복'도 눈에 보이는 건 아니예요. 다만 우리는 돈이라는 것에 행복이 있다고 믿기에 그걸 추구하는 거죠.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사랑을 드러내보일 수 있어요?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어떤 물리적 대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인데 우리는 행복과 사랑같은 걸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찾으려고 들어요. 그러니 길을 잃는 거예요.
진짜 행복은 진짜 사랑에서만 나와요. 진짜 사랑은 '거래'가 아니예요. 주고 받는게 아니죠. 그건 세상 사람들도 해요. 돈을 주면 그에 상응하는 상품을 줘요.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랑도 그렇게 하지요. 내가 너에게 보살핌을 줬으니 너도 갚아야 한다. 그런 건 엄밀히 말해서 사랑이 아니예요. 진짜 사랑은 기다리지 않고 내어주는 거예요. 진짜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용서'해 주는 거예요.
좋아요. 제 말이 복잡하죠? 다 잊으세요. 하나만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여러분들을 정말 사랑하세요. 그분의 사랑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랑이예요. 더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을수록 예수님은 여러분 가까이, 더욱 가까이 머물 거예요. 여러분들을 초대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우리 하느님은 아무도 잃기를 바라지 않으세요. 그렇다고 강제할 수도 없지요. 강제하는 순간 사랑이 사라지니까요. 우리에게 자유가 없으면 우리가 하는 건 죄도 사랑도 아니예요. 컴퓨터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어요? 불가능하죠. 컴퓨터에 10분 간격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프로그램을 넣는다고 내가 그 컴퓨터를 사랑하나요? 아니예요. 사랑은 우리 아이가 엄마와 아빠 사이를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살짝 다가와서 '실은 나 엄마가 더 좋아'라고 할 때 엄마가 느끼는 그 충만한 행복감이예요. 그 아이는 자유로운 존재고 그 자유로 엄마를 선택한 셈이니까요. 하느님도 마찬가지예요.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싶어하지 않아요. 우리가 자유로이 '사랑'을 선택하도록 말이예요.
자, 또 말이 길어졌네요. 다시 다 잊으세요. 하나만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구요.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아시겠지요?"
모두가 "네에~"하고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저도 조금은 안심을 하면서 남은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충분히 하나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제는 참으로 거룩한 미사를 모두가 하나되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이거 다 소설같죠? ㅎㅎㅎ 하지만 어제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 두 청년들이 오토바이 타다가 자빠진 그 사건 이후에 드린 미사지요. ^^
이상과 현실
좋은 인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엇나가는 길을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며 앞으로 걸어갈 길도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착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를 따라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지만 여전히 우리의 현실은 '바닥'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힘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아이에게 사회생활을 가르쳐주는 부모를 떠올려 봅시다. 부모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통해서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하며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소상히 알려줄 수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 마치 자신이 이미 그 모든 것을 이룬듯이 상상을 하지요. 하지만 당장 내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현실에 맞닥뜨리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은 구체적인 난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고통'이 전혀 수반되지 않고 그런 부분들을 얼마든지 건너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여 목적으로 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생각으로야 영어며 수학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멋진 박사를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 그런 박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수많은 수업을 듣고, 시험을 이수하고, 논문을 쓰고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인도자의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의 노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배워 익힌 바를 실생활에서 반드시 체험해 보고 '극복'해 내어야 합니다. 말로야 원수를 사랑하고 그와 빼빼로를 같이 물고 먹을 수 있어도 실제 그를 만나면 말도 걸기 싫은 우리의 나약함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수많은 좋은 글들이 양산되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움직임이지요. 하지만 읽은 것들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몫입니다. 저부터도 복음을 읽으면서 주님의 아름다운 말과 업적을 분석해 내지만 실제 제 삶에 있어서 그것을 적용하는 작업을 저 개인 나름대로는 열심히 해야 하는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온 생은 이를 위해 촛점지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눈을 두고 현실에서 다가오는 수난을 잘 견디어 내어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영혼은 대단한 것이니까요. 하느님은 괜히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병아리가 아니라 독수리 새끼입니다. 언젠가 활개쳐 저 창공을 날아오를 독수리들 말이지요.
해외 선교사를 돕는 방법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선'은 참 중요한 줄기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신앙적 성숙도에 올랐다는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깨달은 이는 절대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나눔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선'은 어찌보면 성숙한 신앙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한국에서 해외 선교사들을 많이 파견을 하면서 은근히 이런 '기부와 자선'의 움직임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자선'은 현명하게 해야 합니다. 무턱대고 돈을 쥐어 준다고 그 가난한 이가 잘 살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부자 나라의 선한 사람들은 곧잘 이런 착각을 합니다. 자신이 조금 내어주는 돈이 그 나라, 또는 도와주는 그 가정에 엄청난 이득이 될 거라는 착각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현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모종의 '사업'을 통해서 돈이 모이고 그것이 전달이 됩니다. 그러면 한국은 그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어 놓으라고 성화입니다. 아이들의 사진을 찍든,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든 뭐든 자기들이 도운 것의 결과물을 내어놓으라는 요구가 그치질 않습니다. 그럼 해외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사들은 정작 자신이 본질적으로 신경써야 할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돈 받은 '죄'로 그 요구에 맞게 움직이느라 신경과 노력을 다 소진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건네지는 돈(주로는 '가정 결연'일 경우가 많습니다.)이 과연 그 가정에게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습니까? 정말 그 가정이 그 돈으로 되살아나게 될까요? 아프리카라면 사정이 전혀 다를지도 모릅니다. 거기에는 절대적으로 생존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어설프게 가난한 나라 남미에서는 전혀 엉뚱한 사정이 벌어지기 일쑤입니다. 정기적으로 돈을 받는 이들은 그것을 당연시 여기기 시작하고 그만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단체는 일단 돈을 줬으니 결과물을 기다리고 그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 보이고, 선교사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사이지 그의 질적 삶을 개선시키는 사회 복지가가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목적으로 파견된 이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들은 그런 일들을 하는 여러 복지 단체에 맡기면 됩니다. 그들은 돈을 운영하는 사람을 찾고 그가 올바로 운영하는지 감시하는 조직도 만들고 현지인들의 삶의 개선을 조사하기도 하면서 제3세계 가난한 나라의 복지 개선에 치중할 것입니다.
선교사는 선교사로 일하도록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는 돈이 필요없는 것입니까? 아니요, 필요합니다. 선교사들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바라는 방법'이 아닌 '현지에서 요구되는 방법'으로 필요합니다. 결연 가정을 맺어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내면서 편지를 주고받고 사진도 주고받고 하는 소모적인 방식이 아니라 때로 '큰 목돈'이 필요합니다. 자동차를 구입하고 수리해야 하고, 성당이나 공소를 지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교육관을 지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만일에 제가 정말 어떤 목적으로 돈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은 무슨 수단을 통해서라도 저에게 그 목적에 합당한 재화를 쏟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기부'의 기회는 환히 열려 있습니다. 일반 사회 단체에서 늘 그런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개인 결연을 맺어 한 아동을 돕고 싶다면 그런 곳으로 연락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해외 선교사를 돕고 싶다면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들이 실제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여러분의 '관심'과 '기도'입니다. 여러분의 자선의 근본 목적을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돈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장 8절)
정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당장 시내 거리에 나가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지극히 작은 온정을 기다리는 수많은 걸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거절하지 마시고, 가톨릭 신문과 평화신문에서 여러분의 작은 정성을 기다리는 이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대구 분들은 '빛잡지'도 있구요. ^^ 하다못해 여러분들이 한 달에 한 번 마시는 커피 값만큼이라도 꾸준히 한 달에 한 번 자선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선도 일종의 훈련입니다. 지금부터 100원이라도 줘야 나중에 더 많이 내어놓을 수 있지 지금 한 푼도 내어놓지 않으면서 나중에 한꺼번에 하겠다는 건 그야말로 거짓말 중의 '상거짓말'입니다. ㅎㅎㅎ
밥 먹기
처음 볼리비아에 왔을 때에 조금 적응하기 힘들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손가락으로 음식을 쥐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포크를 들고 음식을 먹다가 곧잘 음식을 들고 뜯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제가 끝까지 칼과 포크로 고기를 발라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중요한 건 음식을 먹는 것이지 어떻게 먹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수십개의 칼과 포크를 앞에 주욱 늘어놓고 무엇으로 먼저 고기의 어떤 부위를 뜯어 먹을까를 고민하다가는 고기를 다 먹기도 전에 식사 시간이 끝나거나 먹어도 충분히 먹지 못할 수가 많습니다. 부자 동네 사람들이 그러는 동안 이 동네 볼리비아 사람들은 벌써 다 먹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교회의 여러가지 수단들은 모두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헌데 우리는 때로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어떻게 붙들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정작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과거 서슬이 퍼런 '성무부' 그리고 이어 명칭이 바뀌면서 '전례부'로 일했습니다. 제대 위는 차리는 방법과 매 전례 시기별로 챙겨야 할 것들을 일일이 챙기면서 전례를 배워 왔습니다. 그러니 당연 전례 안에서 보다 본질적으로 신경써야 할 것들보다는 그 주변 것들을 챙기고 지켜보느라 정신을 쏙 빼놓은 셈입니다. 행여 미사 중에 뭔가 부족한 게 있나 살피고 복사들은 제대로 하고 있나를 보느라 정작 '미사'를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참으로 잘 하고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사를 드릴 때는 미사를 드려야지요. ㅎㅎㅎ
음식을 먹읍시다. 하느님을 만납시다. 방법은 내키는 대로 좋은 걸로 골라 쓰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정말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원의가 있다면 모든 것은 같은 방향으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작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방법론에만 얽매이기 시작한다면 많은 이들이 헛된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 하느님도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처럼 말이지요.
교회의 역할
"부에나 페(Buena Fe: 좋은 믿음)"라는 지역 축복식에 다녀왔습니다. ㅎㅎㅎ 지역 명칭이 어찌나 좋은지 절로 설명이 되더군요. 무엇이 좋은 믿음이고 무엇이 나쁜 믿음인지 잘 설명하고 왔습니다. 나쁜 믿음은 현세적 욕구로 갖게 되는 잡스런 신앙이고, 좋은 믿음은 참된 하느님께로 걸어나가는 거라는 걸 말이지요. 나중에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군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사실 박수를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얻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찾습니다.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찾고자 노력하는데 이미 근본부터 방향이 어긋나 있는 셈입니다. GPS가 고장난 셈이지요. 그래서 열심히 달리는데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는 셈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되는 것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욕구'들입니다. 이 찰나적이고 강력한 방향성은 우리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어 온 셈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빛'을 비춰주는 작업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방향을 알게된 이들이 그것을 알고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한 번도 조명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절실한 작업인 셈이지요.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단순히 선교사나 사제의 일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일인 셈이지요. 교회는 지상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도맡아야 합니다. 빛을 비추는 역할이지요. 단순히 '예식'과 '성당활동'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빛을 한가득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좀처럼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구석구석 어디를 살펴봐도 좀처럼 빛을 보이는 사람은 없고, 저마다의 이유, 앞서 설명한 숨겨진 욕구들로 교회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오히려 빛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비춰들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쉽게 무시당하곤 하지요. 빛은 우리 아주 가까이에 있었고 우리는 꾸준히 그것을 무시해 왔습니다.
저는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일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의 빛은 다시 회복되어 비춰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서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로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풍선의 비유
이런 상상 한 번 해 보세요. 우리가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말이지요. 풍선을 퉁기면 참 많이 올라갑니다. 더 세게 치는 만큼 더 높이 올라가지요. 그러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르면 휘이~ 높이 올라가 버립니다.
풍선은 우리의 영혼이고 그것을 퉁기는 손은 이 지상의 삶, 특히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시련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이런 일상 안에서 그런 고통과 시련을 겪음으로써 우리는 더 높이 치고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러다 하느님이 그 영혼을 거두어 가시면 지극히 높은 천상으로 오를 수 있지요.
하지만 만일 풍선이 끈적끈적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퉁기는 손에 퉁겨지는 게 아니라 쩍 하고 달라 붙어서 땅에 머물게 되지요.
이것이 우리의 어지러운 욕구들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의 것을 탐하면 탐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끈적끈적한 때가 끼이게 되고, 결국 퉁겨져 올라 가라고 치는 손에 들러붙어 버리고 마는 셈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결국 그 어디로도 날아오르지 못하지요.
기도
기도? 기도!
기도 한 번 해 보세요. 이런 주문과 함께 가장 먼저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 '기도문'을 외는 것입니다. 염경기도라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기도들, '가톨릭 기도서' 안에 담긴 우리의 일상과 연관된 기도입니다.
기도의 현실
헌데 안타깝게도 여기서 다들 그치고 맙니다. 그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바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는 곧잘 흥미를 잃고 나가 떨어지고 세상의 흥미거리들에 집착합니다. 예비자 때에는 호기심에라도 쳐다보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좀 꾸준해지고 깊어지나 싶다가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다시 말라 버리게 됩니다.
왜 기도하는가?
다시 돌아와봅시다. 먼저는 기도에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기도'는 왜 하는 걸까요? 어떤 장점이 있고 무엇을 위해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걸까요? 이걸 스스로 잘 분별하지 못하면 기도는 단순히 신앙생활의 '의무'로 전락해 버리고 따라서 자연 하기 싫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기도 - 통로
기도는 '신앙의 가장 극대화된 일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 어쨌는데요? 그게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입니다. 이 '믿는다'는 행위는 세상적 시각으로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 좋은 것을 찾게 마련인데 이 기도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움직이거든요. 한 마디로 '허송세월'하는 것같아 보입니다. 혼자 방에 앉아서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이 효율적인 세상 안에서는 그야말로 '시간낭비'인 셈입니다.
기도와 활동
하지만 정반대로 신앙인들은 이 '시간낭비'를 통해서 우리 신앙의 극대화된 표현을 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니 우리의 기도 역시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한 헌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봉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가 수반되지 않는 봉사는 곧잘 인간 사이의 드러냄과 뻐김으로 변질되기가 쉽상입니다. 기도는 우리 신앙인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문열기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 나아가는 문을 살짝 여는 셈이 됩니다. 아니 반대 방향이겠지요. 하느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게 우리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문을 언제 열어두면 좋을까요? 네, 바로 그겁니다. '항상' 열어 두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기도는 '항시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요.
분심과의 전쟁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기도의 잠깐의 시간 마저도 어지러이 보냅니다. 이러저러한 현실의 걱정과 과거의 기억들이 '분심'이라는 형태로 우리를 엄습해오고 우리의 기도는 그러한 것들과의 다툼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의 왜곡
또 다른 이들은 '드러내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로사리오 기도를 하루에 몇 단을 이루어 내었는가 마치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데에 열중하듯이 기도를 양으로 갖다 내어바치려고 하고 결국 그렇게 이루어낸 기도를 열심히 자랑하고 다닙니다. "너희는 받을 상을 다 받았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숨은 일도 보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의 자세
기도를 한다면서 드러눕는다면 그건 잠들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누운 채로 로사리오 기도로 그 남은 시간을 보내는 건 있을 수 있지만 기도를 하겠다고 하면서 누워 버리면 그건 기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분명히 올바른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깨어 머물수 있는 편안하고도 합당한 자세를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시간
시간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루 온 종일을 다른 활동에 치중하면서 하느님을 위해서 1분도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시간을 기도를 위해서 마련해야 합니다. 하루의 직장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조용히 촛불을 켜 놓고 머무는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훈련을 위해서라도 기도 시간을 어느 정도는 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아침 저녁 기도를 바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이건 부모의 책무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분들은 여러분의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기도를 드리면 됩니다. 물론 여전히 많은 분들은 '아이'와 같은 수준이라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부터도 그러하니까요. 귀찮고 싫은 느낌을 극복하고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노력하셔야 합니다.
기도의 방법
시간과 자세를 마련했으면 이제 남은 것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은 기도의 목적에 따릅니다. 기도의 가장 근본 목적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모든 수단이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의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정답이다 저것이 정답이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매일같이 '주님의 기도'만 바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꿇어 엎드리기도 하시고, 홀로 온 밤을 새기도 하시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시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이든 저든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시간을 헌신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신 것이지요. 기도의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방법은 다들 각자대로 소중합니다. 어느 하나 낮추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미사'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시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 기도도 참으로 훌륭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고', '익숙한 것', '크게 거부감이 없는 것'으로 무엇이든지 시작하시면 됩니다.
- 염경기도(기도문 외우기)
- 로사리오(묵주)
- 묵상기도(특정한 주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성찰하기)
- 청원기도(청을 가지고 하느님께 아뢰기)
- 관상기도(하느님 안에 쉬기)
- 9일기도(특정한 목적으로 약조를 드리고 바치는 기도)
- 렉시오 디비나(기도하면서 성경읽기)
- 미사참례(굳이 설명 안해도 ㅋ)
- 성무일도(사제와 수도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시편과 찬미가의 기도)
- 예수기도(짧은 문구를 반복하여 바치는 기도, 반복적인 일상생활 중에 가능)
뭐 이 밖에도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기도가 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활동 중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그 행위 자체가 기도가 됩니다. 그러니 방법에는 제약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숨쉬는 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노랫말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되어야 하는 셈입니다.
*추가 - 분심과 싸우는 방법
분심은 '파리'처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파리를 죽어라고 쫓아다니며 그걸 다 잡으려면 정작 차려진 밥상에 주의할 수 없겠지요? 한 술도 못 뜰 겁니다. 그러니 파리가 다가오면 손으로 휘휘 젓고는 밥 한 술 뜨세요. 그리고 또 파리가 오면 휘휘 젓고 또 한술... 그렇게 밥을 먹어야지요. 하하하. 에프킬라 들고 파리채 들고 방 안을 온통 뛰어다니다보면 식욕도 사라져요.
뱁새와 황새
황새가 한 걸음을 크게 걷는 것과 뱁새가 한 걸음을 깔짝 걷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는 곧잘 뱁새의 걸음으로 황새의 걸음을 흉내내려 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성인들은 황새의 마음을 지닌 엄청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활동들은 지극히 사소해 보이지만 황새의 걸음이었습니다.
헌데 우리들은 곧잘 그들의 표면적인 것만을 배껴와서는 흉내내고는 마치 그들의 걸음을 거뜬히 흉내낼 수 있다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펴서 만나는 구절을 따라 실천해 보겠다는 이들 말입니다. 실제로 성인들 중에서도 그런 케이스들이 있습니다. 펼쳐지는 성경 구절을 접하고는 그대로 '평생을' 두고 살아갔습니다. 헌데 우리들 가운데에는 그런 성인들의 행위만을 따라하면서 오늘 하루의 삶을 '점치려는' 같잖은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 성경 구절에 '가진 것을 다 팔아'라고 나왔다면 그들은 당장 성경을 덮고는 '삼세번'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다른 곳을 펼칠 것입니다. 그야말로 황새와 같은 성인들의 엄청난 신중함과 진지함을 제쳐두고 뱁새로서 그 행위만 깔짝 따라하는, 아니 차라리 아니한 만 못한 행동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의 넓은 마음을 본받아 우리 다리의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걸음을 휘~이 걸을때 우리로서는 가능한 폴짝 더 뛰는 연습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성장시키다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황새의 걸음'을 지닐 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말고 비록 뱁새의 걸음이지만 열심히 오늘 하루도 최대한 멀리 다리를 뻗도록 노력해 보았으면 합니다. ㅎㅎ
엄마와 사탕
"오늘 밥 먹기 전에는 사탕 먹지 마세요"
엄마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언제나 두 종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1) 어떻게든 사탕을 먹고 싶은 아이들
"그럼 어떤 사탕을 먹어도 되요? 밥 먹기 전이면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지금은 먹어도 되는거죠? 오늘 안되면 내일 부터는 먹을께요."
2)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들
"네! 그럴께요 엄마."
모든 교회의 규정에는 이 두 아이들이 있는 셈입니다. 결국 이리 저리 뭔가 다른 길을 찾는 이들은 결국에는 그걸 하고 싶다는 의도를 반증하는 셈이 됩니다. 규정에 집중하고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는 '엄마'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럼 나중에는 엄마의 마음을 알게되고 언제 사탕을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지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의 종이 된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 그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에 집중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 율법의 종이 되고 결국 그 내면에는 죄를 향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잘 알고 그분의 친구가 되어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지요. ㅎㅎㅎ
깊이 있는 영혼
깊이가 있는 그릇일수록 물을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깊이가 있는 영혼일수록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때로 우리에게 어둠이 엄습할 때에 우리는 아파하고 슬퍼하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우리의 영혼에 구멍을 더 깊이 파는 시간이고
훗날 하느님께서 은총을 부어주실 때에 더 많은 은총을 품게 될 것이다.
굶주림을 알지 못하는 이가 주린 이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사람들에게 내치임을 당해보지 않은 이가 어떻게 뼈저리는 외로움을 이해할 것인가?
영적인 단계
우리 주변에서 수시 때때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한 번 단순하게 바꾸어 설명하려고 노력해 볼께요.
세상의 방향
세상이 원하는 것은 참으로 뚜렷합니다. 더 높고, 더 많고, 더 힘있는 것을 원하지요.
하느님이 계신 곳
이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는 이들이지요. 하느님이 계신 곳은 어디일까요? 높은 곳? 낮은 곳? 많은 곳? 적은 곳? 힘있는 곳? 힘 없는 곳? 아니요. 세상과 반대되는 곳이라고 무조건 하느님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곳에 없습니다.
첫번째 작업
그럼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요? 일단은 세상이 원하는 것에서 마음을 떼는 게 좋습니다. 안그럼 그걸 원하는 세상과 내내 다투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더 높고, 많고, 힘있기보다는 그 반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번째 충돌
사실 대부분의 인간사의 문제는 이 원하는 것이 같아 충돌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상대가 원하는 걸 내가 미리 포기하면 문제는 끝나 버립니다. 그 누구도 박스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시기하지는 않으니까요. ㅎㅎㅎ 하지만 조금이라도 뭔가를 지니고 있으면 바로 공격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두번째 작업
이렇게 세상이 원하는 걸 내려두고 나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는 마음을 들어높여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머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이루면 됩니다.
두번째 충돌
이때부터 두 번째 충돌이 이어집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나서면서 세상과 부딪히게 되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는 전혀 물리적인 충돌이 아니라 '영적인 충돌'입니다. 이는 겸손과 기도로써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싸워낸 영역이지요. 이 전쟁에 우리는 주님의 군사로써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두번째 충돌은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오직 겸손하고 선한 이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나머지 사람들은 첫번째 작업과 첫번째 충돌에서 모두 허덕이고 있거든요.
여기까지가 제가 발견한 영적 단계입니다. 아무런 이론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저 제가 살면서 알게 된 것들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열심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
두 여행자
차를 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두 여행자를 봅시다. 서로 간단하게 목적지를 결정한 다음에 차를 타고는 서로 아는 길을 달려 결국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참 쿨하고 깔끔합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목적지를 두고 다투다가 한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따라오는가 아닌가를 늘 조사해야 하고, 자기가 가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매 순간 살피고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놓고 목적지에 와서도 그 반대한 사람의 표정은 똥을 씹은 듯 할 겁니다.
하늘나라 가야 하는 거 알죠? 그럼 다들 거기서 만나요. 하면 쿨하게 끝이 납니다. 이렇게 결정이 된 사람, 그의 마음을 신뢰하는 사람은 서로 걱정할 게 없습니다. 나는 이리로도 가고 그는 저리로도 가고 결국에는 목적지를 찾아 올 테니까요.
하늘나라 가기로 해 놓고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심초사입니다. 그가 잘 가는지 봐야하고 가는 길도 알려야 하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알려야 합니다.
그런 고로 저는 어쩌면 제가 적는 글의 뉘앙스는 그 노심초사하고 있는 사람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또 전혀 의외로 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아니까요. 그냥 제가 할 도리를 다하고 나면 쿨하게 그 사람을 제쳐놓고 제 갈 길을 갈 겁니다. 그때에 매정하다느니 무심하다느니 말들이 많겠지만, 결국 지 팔은 지가 흔드는 거니까요. ㅎㅎㅎ
하느님을 전하는 순서
*개인적으로 사목자나 교리교사들에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별표 다섯개 짜리 글입니다. ㅎㅎㅎ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작업은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도식화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구마 - 어두움에서 꺼내기
2) 회개와 복음선포 - 방향을 잡고 하느님을 알리기
3) 병자치유 -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기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면서 뭘 수두룩하게 부탁한 게 아닙니다. 고작 위의 3종류의 것들이었습니다.
1) 구마 - 어두움에서 꺼내기
뚜껑이 있는 병에 물을 넣으려면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뚜껑이 있는 채로 물을 아무리 부어봐야 물이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뚜껑을 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악령을 쫓아내는 힘, 즉 구마입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교리교사는 대상자들에게 단호한 가르침과 명령을 통해서 어두움을 끊어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잘 이루어지면 그 이후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후에 우리가 아무리 맛깔스런 것을 내민다고 해도 허송세월을 하는 셈입니다.
세상에 만연한 어두움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지적하고 그것을 끊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남자들에게는 2차로 아가씨가 있는 술집에서 퇴폐적으로 노는 것이 옳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여자들에게는 모여서 누군가를 험담하면서 수다떠는 것이 옳지 않다고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십시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어물쩡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표양이 아닙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분명히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탐하는 것은 분명 악행이라고, 부모에게 살살 거짓말을 하려드는 자녀들에게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낙태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그건 살인 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십시오.
먼저 이 어두움을 끊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결국 교회 공동체가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릇된 마음으로 교리를 수료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된 늑대들은 양들을 하나씩 하나씩 물들여나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마침내는 온 교회 공동체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와 복음선포 - 방향을 잡고 하느님을 알리기
어둠을 털어내고 두번째로 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갈 방향으로 방향을 돌리고 그쪽 방향의 좋은 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서 갈 마음이 생기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가 실패하는 이유는, '강요'하고 '의무'지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그리로 가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부드럽게 이야기했다가는 가지 않을 것 같으니 온갖 위협과 협박을 하는 셈입니다. 바로 '이건 의무다!!!'라는 말로 말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현대의 율법주의가 생겨나는 셈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사리분별을 할 수 있고 옳은 게 있다면 선택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옳은 것이고 바른 것이고 좋은 것인지를 가르쳐야지요. 참 쓸모없는 교사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이 욕한 위선자들, 개종자 하나를 찾아 온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만나고 나면 가장 지독한 이들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분의 자비에 대해서,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무엇보다 우리 안에 지니게 될 '신앙'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자유 안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3) 병자치유 -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기
사람들은 회개하였지만 '약합니다.' 이 부분에도 교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이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여서는 안됩니다. 사제는 여러 기회 속에서(강론, 레지오 강복, 구역미사, 가정방문 등등) 눈 앞에 보이는 대상들을 바탕으로 그들이 힘을 낼 수 있는 음식을 주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의'가 아니라 '나약함'으로 인해 쓰러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악의는 벌써 1)번에서 정돈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이 순간까지 악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돌봄'이 아니라 합당한 꾸짖음이 필요합니다. 이 분별을 잘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악의'가 아니라 '나약함'에서 비롯한 죄인들에 대해서 사제는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부러진 갈데를 꺾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저는 이 분별이 최근에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저의 그릇된 판단으로 양들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돌보아야 할 이들은 '병자'들이지 '늑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모쪼록 여러 젊은 신부님들이 사목 중에 맞이하게 되는 어려움들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축복을 가득 전합니다.
행복
볼리비아 오기 전에 제가 아는 한 동갑내기 청년이 저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 신부님은 행복해요?"
제가 인생살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지요.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그 친구의 질문만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솔직히 대답할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물쭈물 뭐라고 대답한 느낌이 나네요. ㅎㅎㅎ 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 나 행복해."
왜 그때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뭐 무슨 별다른 이유가 있을라구요. 그저 행복하지 못했던 겁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긴 했는데 '이론'만 가르친 셈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체험'한 분을 가르칩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저의 행복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 행복의 완성은 그분만이 아시겠지요. 죽고 나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비록 완성된 행복은 아니지만 이제는 누가 묻더라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저 행복해요."라고 말이지요. ^^ 그리고 그렇게 묻는 이의 심리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덧붙여 주고 싶군요.
"당신의 행복은 이 땅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행복이예요. 저의 행복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네, 저는 행복해요. ㅎㅎㅎ"
저의 이 행복을 이해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행복하게요. ㅋ
죽음이 지배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코린토1서 15,26-27)
잘 생각해보세요. 진정한 '죽음'이 있는 동안은 우리는 허무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는 그 모든 활동과 노력은 허무한 이들의 한바탕 축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분명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생의 죽음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죽음'의 절망에 '희망'의 싹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은 죽으셨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이 생의 죽음을 이겨내신 분이시고 그분을 따르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올바로 깨달은 이들은 이미 '죽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죽지 않을 걸 알고 있기에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두려움에 수반되는 모든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 때문에 다가오는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그 두려움을 이기고자 우리는 수많은 헛된 활동에 몰입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좋은 차를 사고, 죽지 않으려고 보험에 들고, 죽지 않으려고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모든 것을 추구하다보니 자연 필요 이상으로 '돈'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돈을 벌어야지요. 돈과 연계된 권력과 명성의 활동을 추구해야 하는 셈입니다. 이 생을 더욱 극도로 누려야 덜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활동들이고 우리에게 '족쇄'처럼 작용한다는 걸 우리는 안타깝게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생에서 남을 이기기도 해야 하고, 남들 위에 올라서야 하고, 남을 공격하기도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ㅎㅎㅎ 하지만 잃을 게 없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공격을 바보처럼 당하고 삽니다. 그들이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들 스스로 내던지는 기회마저 어쩔 수는 없지요. 물가까지는 데려다 주어도 물은 그들이 마셔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어떤 일을 추구하다가도 남들이 공격해 들어오면 미련없이 내던지고 사라집니다. 이들은 모래성을 쌓으려고 쌓는 게 아니라 모래성을 쌓는 힘을 기르는 셈입니다. 그러니 모래성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그 동안 쌓는 방법을 익히고 자신의 팔힘을 길렀으니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악인들은 그들의 모래성을 차지해 소비하며 먹고 살지요.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삶을 충만히 누리는 이들이지요. 그래서 급할 게 없고 여유롭게 삶을 즐깁니다. 다가오는 기쁨, 슬픔, 고통, 환히 등을 가감없이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그것을 발판으로 더 힘차게 나아가지요. 결국 매 순간을 더 진하게 즐길 수 있는 이들입니다. 더군다나 '부활'의 삶까지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걸 아니, 이것 참 금상첨화입니다 그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니 지금의 순간을 더 즐기세요. 즐기라는 말에 '쾌락'만 쫓지말고 지금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 인생을 즐기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삶을 살면 훗날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시며 다시 오시는 걸 보게 될 겁니다. 그럼 우리의 기쁨은 더욱 커지겠지요? ㅎㅎㅎ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님의 탄생 비화는 어떻게 알려지게 된 걸까요? 그때는 사도들이 같이 다녔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도 이제 천사의 소식으로 잉태되기 시작하셨을 텐데 말이죠?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성모님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하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집에 모셨다는 것 기억하실 겁니다. 이제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당연히 성모님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겠지요. 성모님이 약혼할 당시의 나이가 대충 이십대 초반이었을테니 우리는 이 시절의 성모님의 모습을 50대 중반의 여인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중년의 성모님은 사도들을 모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겠지요. 그러는 중에 성모님의 잉태와 엘리사벳을 찾아가 부른 노래도 나오게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저는 지금 소설을 쓰는 셈이지요.
하지만 성모님의 노래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너무나 고귀합니다. 교만한 이들, 권력가들, 부유한 자들을 내치시는 하느님, 그리고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에 대한 성모님의 영성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부분에서는 성모님은 거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거의 드러나지 않으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는 하셨지만 역시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그 아래에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 보셔야 했지요. 이처럼 성모님의 핵심 영성, 미천하고 가난한 모습, 그리스도 앞에서 지극히 겸손된 모습을 성모님은 충분히 실천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저로서는 이런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사도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우상화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성모님의 노래를 지어낸 것일까요?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탄생 비화 치고는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만 해도 버드나무 잎을 타고 압록강인지 두만강인지를 건너고 했다는데 예수님의 탄생 비화는 초라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동정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천주의 모친이심과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기념하지요. 동정 잉태를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교회의 거룩한 전승'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성경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요. 원죄 없이 잉태됨은 성모님께서 직접 발현하셔서 알려주시기도 하셨고 다른 것들은 사도들의 체험에서 혹은 사도들이 모여서 회의 후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예컨대 성모님은 당신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연구하다가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인성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동시에 신성의 어머니라는 호칭도 지니게 된 것이지요.
결국 성모님에 대한 문제는 '성경'이 전부인가 아닌가? 라는 질문으로 비화되는 문제입니다. 과연 성경은 전부일까요? 한편으로는 그렇습니다. 성경이 구원 진리의 핵심을 모두 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요. 하지만 성경이 전부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다 담으려면 부족하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필요하게 되는 것이 교회의 거룩한 전승인 셈입니다.
아마 반대자들은 끝까지 반대를 하게 될 겁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로서도 나름 이유가 있고 자기들이 성장해 온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영향을 받는 셈이니까요. 그들은 언제까지나 성모님에 대해 삐딱한 시각을 유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분의 여러 교리에 대한 교회의 의견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분이 지니셨던 삶의 모습과 성경에 나오는 그분의 노래에 대한 진실성을 바라봐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영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교회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다분하신 분입니다.
관상의 실마리
"내가 진실로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수님은 누차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와 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헌데 마르코 복음 9장의 이 첫 구절에서 예수님은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를 선포하십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무언가를 체험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있는 능동적인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수동적'일 뿐인 영역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에게 허락된 때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베풀어 주신다고 해도, 즉 아무리 하느님이 후레쉬를 켜고 우리에게 비춰주신다 해도 우리 측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그 빛은 그저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상황인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기적을 체험하고 싶어하지요. 우리 이성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보고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런 일들은 분명히 일어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런 원의를 가졌다가 금새 다른 원의들로 채워 버리고 마는, 즉 눈을 잠시 떴다가 다시 감은 채로 세상의 것들에 몰두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우리가 늘 눈을 뜨고 하느님 앞에 기다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의 노력을 가상히 보실 것이고 그 자체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자세가 그 정도 된다면 이미 하느님이 후레쉬를 비춰 주시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왜냐면 이미 하느님의 비가시적인 영광을 우리가 그렇게 방향지워져 있다는 사실 만으로 너끈히 받고 있다는 걸 우리는 인지하기 때문입니다(이 문장은 이해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ㅎㅎ 잘 성찰하시길...)
우리는 곧잘 신비체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런 비슷한 것들이 꿈이나, 환시나, 환청으로나 들리고 나면 곧잘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시작합니다. 그런 말많은 아지매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자기가 체험한 걸 나불댑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절대로 하느님에게 선택된 존재도 영적으로 우수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순히 영적 교만에 빠진 미천한 사람들,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적 계시나 신비한 현상을 체험 했을때에는 오히려 입을 닫아야 합니다. 왜냐면 그런 현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다가가게 하는 데에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는 어둠의 영들도 그런 일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침묵을 하고 그러 현상이 반복되면 혼자 견디기보다는 주변의 영적인 도움을 줄 만한 사목자나 수녀님을 찾아보고 적절한 지도를 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심리학적 병증이기에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은 그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만일 그것이 진정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체험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오히려 더욱 겸손과 인내 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관상은 신기한 체험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관상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지 않을까요? 모든 곳에 다 계십니다. 결국 우리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 앞에 머물면서 관상기도라는 특정한 기도 형태를 통해서 그분 안에서 쉬는 셈입니다. 관상기도를 마치 기적 체험의 수단으로 쓰려는 엉뚱한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는 이들은 조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짜가거든요. ㅋ
요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치인다아~ ㅋ
영적 어린 아이
어느 분과 대화를 하다가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많습니다. 몸은 이미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 있는데 영은 아직도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인 셈이지요.
여러분들 정산적인 엄마라면 갓난 아이가 똥을 싸고는 울어 제낀다고 아이를 마구 때리시나요? 아니면 불같이 화를 내시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에게 얼른 달려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보듬어주겠지요. 아이가 쓰러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얼른 일으켜주고 우는 아이를 괜찮다며 쓰다듬어 주실 겁니다.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몸만 거대하고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온통 자기를 사랑해 주기만을 바라면서 마구 울어 제끼는 이들이지요. 자신의 욕구를 봐 달라고, 그 욕구를 채워 달라고 곁에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그런 의사표현을 하는데 그게 어른이 되니까 어른 식으로 하는 셈입니다. 전에는 먹고싶은 사탕을 달라고 보채다가 이제는 자기에게 필요한 돈을 달라고 울고 싸우고, 전에는 자기를 바라봐 달라고 보채다가 이제는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아달라고 교만하게 나서고… 뭐 하나도 성장하지 않은 셈이지요.
사람을 성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은 '시련'과 '고통'입니다. 영적 어른들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점점 성장해 나갑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고난을 많이 겪고 마음이 훌쩍 커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이제 자신의 욕구보다는, 아니 심지어는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면서까지도 타인의 욕구를 보듬고 살펴 줍니다. 진정한 어른인 셈이지요.
여러분들, 주변의 영적 어린아이 때문에 마음아파 하지 마십시오. 마치 엄마가 아이를 향해서 달려가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우리 영적 어른들도 그래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를 일으키고 얼르고 달랩니다. 이처럼 영적 어린아이들에게도 우리는 양보하고, 용서를 청하고(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사랑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직도 자라지 못한 어른들은 스스로를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내면에 정돈되지 못한 아기때의 욕구를 여전히 표출하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이름 나고 싶어하고, 타인을 통제하려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훌륭한 수단을 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일상의 고통'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껴안기 시작할 때에 점점 성숙해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의 또다른 의미는 어여 영적 어른이 되어서 나의 나라를 찾아오너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께 이르는 길은 좁고도 험해서 수많은 영적 어린아이들은 지나갈 수 없거든요.
우리가 아이일 적에는 부드러운 음식을 먹지만, 자라고 나면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잊지 않기를…
자위행위
수많은 청소년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합당한 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무겁게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에 따라 파생되는 여러가지 부작용도 많습니다. 왜냐면 억누른 건 반드시 다른 쪽으로 반발해서 튀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성인 남자 가운데 젊은 시절 '자위'를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요? 물론 모두가 다 한다고 나쁜 일이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 '성욕'이라는 부분을 올바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는 전통적으로 '정결'을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따라서 이 '성욕' 자체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지요. 성욕을 가진다는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늘 금기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정말 현미경으로 바라보듯이 바라보면서 곧잘 '단죄'를 해 오곤 했었지요. 자위행위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교회의 걱정은 '중독'과 '음란'이라는 것입니다. 중독은 뭐고 음란은 뭘까요? 중독은 한 가지 행위에 집착하여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음란은 '문란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어르신들의 걱정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여기에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고 또 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접하게 되는 여러가지 이미지들과 영상들을 통해서 자연 '문란한 성'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걱정인 셈입니다.
그분들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합니다.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니라 그런 경우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성에 중독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기고 문란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어 버리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위행위는 분명 단죄받아 마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자위행위를 했다고 해서 일상 안에서 늘 24시간 그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상적인 업무를 할 때에는 거기에 집중할 수 있고 또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성적인 욕구가 들 때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지금 살아있는 모든 성인이 그런 과정을 거쳐온 셈입니다.
문란함 역시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걸 본다고 모두가 다 거기 물들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마음의 방향입니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자극하는 것을 다 없앤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 안에 그런 것을 양산하려는 악의가 있다면 여전히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상상태'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성'은 굉장한 환상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성적 환상은 '돈'과 연계되어 엄청난 사업으로 성장을 했고 젊은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요. 마치 '성'만 취하면 모든 것이 행복으로 바뀔 것 같은 파라다이스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거나, 더 나은 쾌락을 추구하다보니 점점 더 죄악으로 치닫게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욕구들이 원하는 걸 충족하면 잠잠해지듯이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을 봅시다. 배가 고플 때 적당히 먹어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식욕을 이상상태로 자극시킬 수 있습니다. 1) 심하게 굶기던지 2) 음식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1)번 상태에서는 다시 밥을 먹으면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2)번 상태는 치유가 필요합니다.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 또 케이크를 먹으러 가는 아가씨들의 내면은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건 그들의 '환상'의 작용이기 때문이지요. 분명 모종의 심리가 작용하는 셈입니다. 케이크에 대한 환상이 어떤 식으로든 자리잡고 있는 셈입니다. 뭐 케이크 하나 더 먹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이 사회는 그 정도는 용인을 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성욕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에 환상이 덮씌워지고 그것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범죄'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이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며 주로는 강한 남성이 여성을 취하는 형태를 띄게 되지요. 온갖 성추행과 희롱, 도촬과 아동 성폭행 등등이 그 결과물입니다.
거듭 반복하지만 성욕은 '정상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1) 무턱대고 막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는 절대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장기 청소년의 내면에 이상심리를 형성해서 자신감을 잃거나 변태 성욕으로 나아가기가 더 쉽습니다.
2) 모조리 해소한다.
이도 한계가 있습니다. 성이라는 것은 늘 상대자를 요구하는 것이고 상대가 매번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요.
3) 이제 남는 건 제 3의 방법입니다. 이 세번째 방법은 1)과 2)를 최종적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먼저는 쌓여가는 욕구를 적절히 풀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목자의 지혜입니다. 교회는 이미 자위행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하다'는 분별을 내린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명해야지요. 하지만 이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자위행위가 대죄다 누구는 자위행위가 소죄다 하면서 계속 신학적으로 다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그들에게 남겨둡시다. 아마 세상 끝까지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사목자는 고통받는 청소년들을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을 '품어 안아 주도록' 합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를 잘 설명해야 합니다. 결국 이 '성욕'을 승화시켜야 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정당한 것이며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와 그들의 고유한 인격을 존중하는 법을 온유한 어조로 기회가 있을 때에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면을 성장 시키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바람직한 배우자를 고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사회는 조금 정신이 나갔습니다. 10대 아이돌들도 최대한 육감적인 춤과 복장으로 청소년들을 선동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우리 어른들이 나서야 합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을 어둠의 문화에서 보호하고 진정 바른 길을 찾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저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로 이 글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화를 내는 사람
가까이에 곧잘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이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화를 내는 이유
화는 왜 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어떤 엔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엔진에는 가솔린을 넣기만 하면 바로 시동이 걸리고 돌아가는 셈이지요. 이런 이들은 어딜 가나 화를 낼 일이 천지입니다. 모든 것들이 가솔린으로 작동을 하거든요. 이 엔진을 없애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엔진은 누가 없앨 수 있을까요? 그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면 이 엔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습성화되고 커지게 되고 더욱 예민해지기만 해서 나중에는 작동을 안 하던 연료에도 작동을 하게 되지요. 결국 이 사람은 화만 내다가 일생을 마감하게 되고 그의 영혼은 죽고 나서도 분노에 그득 차 있게 됩니다. 한 마디로 참 불쌍한 사람이지요.
도움
일단 작동을 하고 난 엔진은 모든 걸 파괴시키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곁에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솔린을 넣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계가 있지요. 아무리 조심을 하고 또 조심을 해도 그의 엔진을 작동하게 하는 우리의 오류와 실수가 생길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결국 이런 방법으로는 그의 화를 어느 정도 방지할 수는 있어도 잠재울 수는 없게 됩니다.
대화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대화' 뿐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서 그가 엔진을 좀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지요. 이런 대화는 진정한 우리의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가장 온건하고 온유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후에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엔진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들을 결국 그 화내는 본인 스스로 거절해 버리는 셈이고 자신의 인생 방향을 결정해 버리는 셈이지요.
거리
이때부터는 남은 일은 가급적 피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줄일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부모이거나 나의 배우자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신앙
이제는 우리의 엔진을 바꿀 차례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의 분노를 꺼려하는 엔진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가 화를 내든지 울든지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건네려는' 시도만을 가진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나아가 매 순간 그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좋은 여러 기회를 잡는 셈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논리나 이론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눈 앞에 분노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수용할 능력'만 지니고 있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가 화를 낼 때에 우리도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그의 분노에 우리도 따라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짜증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그의 불쌍한 영혼을 보듬어 안고 그를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말이지요. 전자는 우리의 본성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전혀 '신앙적'이지는 않고 후자는 우리의 '신앙'에서 기인하는 '사랑'의 행위인 셈입니다.
사랑
만일 우리가 그의 분노 앞에서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분노하고 있다."
이런 인지가 분명히 작용을 시작하게 되고 우리는 그 이전까지 훈련 받아온 '짜증, 슬픔, 분노'가 일어나는 것 또한 알아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신앙'을 꺼냅니다. 우리 예수님의 "너희는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라는 가르침을 꺼내어 되새기고 되새깁니다. 처음부터 될 리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본성과 감정이 우리의 이성과 신앙을 눌러 이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훈련에 계속 돌입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화가 그렇게 예전만큼 나에게 슬프고 분노스럽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도 생기고 때로는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이 '귀엽기' 까지 합니다. 그의 미성숙의 증거이니까요. ㅎㅎㅎ
제가 실제로 겪어 본 이야기이니 여러분들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까짓거 그냥 성인이 되십시오. ㅋ
두려움의 실체
어느 캄캄한 밤, 한 남자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동물의 소리가 나기에 이 남자는 최대한 길 오른쪽으로 붙어서 걸어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헌데 그 순간 번개가 번쩍 비추면서 주변 사물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뿔싸 왼쪽에서 나던 소리는 아주 작은 다람쥐가 움직이는 소리였고, 길 오른쪽 그의 바로 곁에는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그를 노리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겁을 냅니다. 주로는 세상 걱정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겁을 내어야 하는 존재는 따로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고 우리는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건 바로 영적으로 다가오는 위험들입니다. 벼룩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집어 삼키는 모양새입니다. 우리는 조금의 물질적 재산을 더 얻고자 쉽사리 영적 재산을 내던지는 꼴입니다. 돈 때문에 이웃과 싸우고, 현세적 바람 때문에 영혼 보살피기를 소홀히 하지요. 그야말로 다람쥐 소리가 겁이 나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판입니다.
'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한 번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고로 보여 주어야지요. 하지만 아예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보여주려 해도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결국 '귀 있는 자는 들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아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좀비들
'좀비'가 뭔지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요즘 외국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캐릭터인데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시체들입니다. 지극히 단순한 원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고기를 먹고 싶어합니다. 이들 앞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들이 하등 소용이 없습니다. 좀비 앞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지갑을 흔들어 보이고 전 재산을 준다며 사정을 해도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바로 눈 앞에 놓인 우리의 고기 덩어리일 뿐이니까요.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존재들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좀비'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눈앞에다 영적인 가치를 아무리 갖다 흔들어 대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육적인 원의'를 추구합니다. 미사가 좋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성공을 찾아 제 갈 길을 갑니다. 기도 생활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이들은 세상의 흥미거리에만 눈을 줍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들, Walking Dead 들입니다.
베싸이다의 소경 이야기 기억 나시는지요?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시고는 그가 사는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이 소경의 첫번 치유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나서 본 사람들의 모습이 '걸어다니는 나무토막' 같이 보였거든요. 바로 제가 설명드린 '워킹 데드'들인 셈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이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머물러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려고 노력은 하되 그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더 화려한 옷과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돈을 탐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살아있는 이들이 되십시오. 무엇이 더 소중한지 분별할 줄 아는 이들, 보다 거룩하고 참된 가치를 분별해 낼 줄 아는 이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분별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시길... 그저 눈 앞의 고깃덩어리만 쫓는 시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린 좀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살아있는 자녀들이니까요.
^^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진정한 우정
내 역마살 낀 인생에 하나 장점이 있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영원한' 사람은 없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우정을 강조해도
물리적인 공간이 멀어지고 나면 슬슬 잊혀져가고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훗날 다시 만나보면 그와 나는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닌
'타인'이 되어있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그와 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그 방향이 틀리지 않는 이상은 언제나 친구로 남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나에게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다가오는 이를 받아들이고
또 떠나보내야 할 때엔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 일쑤였다.
언뜻 굉장히 매정한 느낌이 들지만
훗날 알게 되는 것은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친구'를 아는 사람이었다.
곧잘 '우정'을 강조하고 '충실함'을 강조하는 사람치고
그닥 충실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니 정반대로 '섭섭함'을 느낄 때는
그 '충실'만큼의 '증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래서 난 내 곁에서 우리는 영원해야 한다! 고 외쳐대는 사람보다는
그저 옳다고 생각한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 더 듬직해 보인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자기를 발전시키고 또 발전시켜
그 누가 오더라도 잠시 머물러 쉬다 갈 수 있는 사람인게다.
내가 마땅한 우정을 보이지 않아 섭섭하시다구요?
그런 이유로 섭섭해질 우정이면 필요없으니 미련없이 떠나셔도 좋아요.
어차피 같은 방향으로 가다보면 저 위에 올라가면 다시 다 만날테니까요.
진정 자유로운 사람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1) 감옥 밖에 있는 사람, 돈 수천억원이 있어 어디에 써도 부족함이 없을 사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일까요?
2) 아니면 모든 욕구에서 해방된 사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일까요?
뭐 우리가 몰라서 못하는 건 아닌 셈입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 것들에 누구든 2)번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 즉 모든 욕구에서 해방되는 것이 왜 그리 어렵게 느껴질까요?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욕구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끊이지 않는 욕구?
정말 끊이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끊을 수 있는 걸까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욕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식욕은 자연스러운 욕구라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끊으면 우리가 죽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제가 말하는 건 그런 욕구가 아닙니다. 바로 '훈련되는 욕구'들이지요.
훈련되는 욕구?
네, 욕구는 훈련되어 갑니다. 우리가 관심사를 갖고 추구하는 것에 따라서 바뀌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돈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 훈련받아 온 셈이지요. 그 밖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꾸준한 세월 동안 그러한 '탐스러운' 것들을 원하게 되도록 훈련받아 온 셈입니다. 따라서 이런 욕구들이 훈련된 것이라면 다른 훈련을 통해서 그런 욕구들을 잠재우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욕구를 가질 수도 있게 됩니다. 바로 '거룩함'에로의 욕구이지요.
거룩한 바램
거룩한 것에 '욕구'라는 말을 쓰면 좀 어색하니 '바램'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거룩한 바램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바램이지요. 다른 말로 '구원의 희망'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가장 깊은 내면에 이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면 우리의 욕구는 점점 다스려지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연적인 욕구도 그 때를 벗겨내고 본연 그대로의 욕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음식'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초적 욕구들을 정화할 필요가 있고 때로는 정당한 욕구 마저도 '절제'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것을 전통적으로 '제를 지킨다'는 표현을 써 왔습니다. 단식과 금육 같은 것들이지요.
훈련의 올바른 방향
기본은 내 안에 '거룩한 바램'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커 나감에 따라서 나머지 욕구들의 자리가 줄어들고 원초적 욕구들도 잠잠해집니다. 단순히 욕구를 억압하면 도로 더 튀어나올 뿐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바램'을 키워 나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훗날 진정으로 욕구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욕구가 사라지고 나면 악마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됩니다. 유혹의 창구들이 다 막힌 셈이니까요. 모쪼록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
빛
빛을 전하려니 자꾸 오해가 생겨서
스스로 빛이 되기로 했다.
<디지털 시대의 성인>
통지서
초등학교 어느 반에서 수업을 마치면서 선생님이 말을 했다.
- 여러분, 어머니를 도와 드려야 하겠지요?
- 네에~
- 아이구 우리 친구들 참 착하네요.
하지만 그날 하루 어머니를 도운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아이들은 전혀 착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다음날도 수업을 마치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 자 우리 친구들, 어머니 잘 돕고 있지요? 어머니 도운 친구는 선생님이 상을 줄 거예요. 알겠죠?
- 네에~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도운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상'이라는 말마디에 굉장히 집중해 있었고 다행히 그걸 까먹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아이들은 다시 '상'에 대해서 까먹어 버렸고 당연히 어머니도 돕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한 아이가 계속 어머니를 돕고 있었다. 아이는 자기가 어머니를 도왔을 때에 어머니의 기쁨을 느낀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이 자기도 기뻤고 그래서 그 뒤로 어머니를 돕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가르침도 상도 필요없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돕는 게 너무 좋았다. 아이는 어머니를 돕는 것을 그 자체로 즐기고 있었다.
- 자, 오늘은 여러분에게 통지서를 드릴 거예요. 여기 "어머니를 도운 사람" 항목에 어머니를 도운 날짜만큼의 도장을 받아오시면 되어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통지서를 어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아이들은 사정을 설명했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도운 만큼의 날짜대로 도장을 찍어 주었다. 어떤 아이는 1개, 어떤 아이는 2개... 아이들은 보채었지만 어머니들은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 다들 받은 통지서를 앞으로 가져오세요.
아이들이 통지서를 들고 왔다. 어떤 아이는 도장 1개, 어떤 아이는 도장 1개, 심지어는 아무 도장도 없는 아이도 있었다. 헌데 유독 한 아이의 통지서가 눈에 띄었다. 통지서가 정성껏 꾸며져 있고 뒤에는 편지글도 있었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우리 아이에게 얼마나 잘 가르치셨는지. 아이가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온 이후로 저를 어찌나 잘 도와주고 있는지 몰라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한 가지 일로 저에게 미소를 짓게 만들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너무 감사드리고 싶어서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통지서를 꾸며 보았습니다. 따로 도장이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왜냐면 우리 아이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도왔으니까요. 선생님 거듭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감동에 북받쳐 묵묵히 그 통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으면서 말이지요.
광기와 거룩함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미친사람' 즉 '광인'이었다.
그분의 여러 활동들은 그들에게는 '광기'였을 뿐이다.
반대로 세상의 여러 미친 사람을 두고 우리는 간혹 칭송을 한다.
그들의 광기를 두고 우리는 그들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광기는 여러가지로 드러나는데
탐욕의 광기, 명예의 광기, 권력의 광기들이 주된 요소들이다.
재물을 있는대로 끌어모은 사람은 그 자체로 존경을 받는다.
누가 삼성의 이건희의 이름을 모른단 말인가?
누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를 모르는가?
하지만 나에게 그들을 떠받드는 이들의 현 상태는 광기에 불과하다.
명예가 드높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 존경을 받는다.
어쩌다 세상의 자녀들의 마음에 쏙 들어 이름이 드높여져 버렸는데
그 뒤로 하는 일들이 모두 칭송을 받는다.
누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모르는가?
누가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모르는가?
하지만 나에게 그들을 떠받드는 이들의 현 상태는 광기에 불과하다.
권력의 최상급에 놓인 이들은 그 자체로 그 권력을 쫓는 이들의 존경의 대상이다.
이명박, 박근혜, 김정일...
하지만 나에게 그들을 떠받드는 이들의 현 상태는 광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이해 못하는 나를 '광인'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을 '광기'로 비하시킬지도 모른다.
아니, 일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으며
나는 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못할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는 '신비로운 분'이고 '거룩한 분'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곧 그 대상이 미쳤다는 것이 될 순 없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 지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의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알랑가몰라아 왜! 그리로 가면 영원한 파멸 뿐이라는 걸...
한 인간의 생애
한 사람의 생이 대충 80년,
그 가운데 생존의 기본을 체득하는 시간과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체득하는 시간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느정도는 자리를 잡는 시간을 빼면
30년, 또는 35년이 지나간다.
결국 한 인간은 기껏해야 남은 40년 또는 50년의 생애 가운데에서 활동을 하고 하느님이 정해놓은 그 순간 떠나가게 되는 셈이다. 이 반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을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가?
누군가는 여전히 생존의 기본을 위해서 노력한다.(재물)
누군가는 여전히 사회적인 인정을 위해서 노력한다.(명예)
누군가는 여전히 더 나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권력)
결국 그러다 가는 것이다. 겨우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반세기의 시간을 헛된 곳에 허비하다가 떠나가는 셈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삶의 본질적인 영역을 발견하고 그것에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 영혼의 내밀한 곳이며, '하느님'이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한 인간이 생을 걸쳐 이루어야 할 노력을 단시간에 이루고는 나아가서 남을 위해, 타인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심지어 더이상 자신의 구원 조차도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건 '하느님의 뜻' 안에 이미 들어있는 문제이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셈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하느님의 뜻'에 집중을 한다. 그리고 더욱더 내밀한 곳으로 나아가 그분의 보화를 마구마구 퍼낸다.
우리는 이를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의무로 주일미사 가고 교무금을 얼마를 내어야 하는가가 신앙생활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영혼의 영역에 파고들어 하느님의 보화를 캐내는 작업이 진정한 신앙생활인 셈이다.
이 작업은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학교 선생님이면 학교라는 현장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아이들과 함께 그걸 이룰 수 있고, 내가 사제라면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이룰 수 있고, 내가 청소부라면 그분의 뜻에 맞게 열심히 비질을 하면서 이룰 수 있는 셈이다.
인생은 길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 그나마 거의 고생과 슬픔 뿐이니…
예수님이 주시려는 멍에와 짐을 메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훠얼~~~~씬 더 행복하다고 나는 과감히 말할 수 있다.
지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100년을 채 못사는 존재이거늘, 뭘 그리 잘난척을 해 대는지 원… 허허허. 하느님이 사라져라 인간아 하면 바람처럼 흩날려갈 존재인 주제에 왜 그리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반항을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모두 빼앗기게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들로 생각을 해야 한다. 돈이건 집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그렇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엔가 무덤 속에 들어가 개미들에게 살을 뜯기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영원한 생명과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사야 50,7)
회당장의 딸의 진정한 부활
살아난 회당장의 딸, 하지만 그녀의 고뇌는 성경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건의 중요성과 예수님의 권능을 충분히 알게 되었지만 그 딸에게 향후 일어날 일들은 단 한 번도 고려치 않았던 것이다.
살아난 그 소녀는 일약 유명 스타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늘 수근대었고 이런 저런 소문들이 마구 퍼져 나갔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예수'라는 분에 대한 신적 권위였지만 그 소문을 퍼뜨리게 만드는 핵심 인물은 바로 그 소녀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소녀에게 그 예수님이라는 분은 자신이 자다가 깨어 음식을 챙겨 먹이라고 했던 따스한 인간적인 분이었을 뿐 딱히 자신이 따로 아는 바는 없었다.
길거리에서 다른 친구와 놀라치면 어른들이 다가와서 귀찮게 물어대기 시작했다.
"그분은 누구시니? 어디가면 만날 수 있어? 너 지금은 어떻게 지내니? 그때(죽었을 때) 뭐 따로 본 건 없니? 죽었다는 게 사실이긴 하니? 너 거짓말 하는 거 아니니?…"
소녀는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그런 미친 것 같은 호기심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귀찮고 성가신 일을 당하고 집에 돌아오면 소녀의 아버지는 늘 소녀를 위로하면서 일어난 일을 거듭 거듭 상기시켜 주었다.
"내 사랑하는 딸아, 아빠는 너를 위해서 내 목숨도 줄 작정이었단다. 그래서 그분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었지. 우리 회당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또 아빠는 결정해야 했어.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한가닥 희망의 끈은 내가 그분께 매달리게 도와 주었단다. 그렇게 나는 빈정대는 그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분을 모시고 네 방에 올라갔었지. 그리고 그분은 단 한 마디 말씀으로 널 살리셨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그분이 행했던 모습 그대로 딸에게 '탈리타 쿰!(내가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하고 큰 소리를 내며 흉내를 내어 주었다. 소녀는 그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 깊숙히 느끼면서 동시에 그분, 자신을 되살려 주신 분에 대한 사랑도 키워 나갔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얼마 가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소녀의 부활 사건도 그분의 죽음에 대한 소식도 흘러가고 그러고도 시간이 더 흘러갔다. 소녀는 이미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헌데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이상한 소식을 전해왔다.
"그분들이 돌아왔답니다. 예수라는 자가 죽을 때 도망갔던 그 사람들요. 지금 이렇게 흉흉한 세상에 그 사람들 미친 게 아닐까요?"
소녀는 '예수'라는 그 이름에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소녀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분들이 설교를 하고 있다는 시장 광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들이 돌아와 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죽이셨던 그 분이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 계시며 우리가 보는 가운데에서 하늘로 오르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그 성령을 받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도 그 성령을 드리고자 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그분의 성령을 원하시는 분은 어스름 무렵에 강가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세례를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며 가며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인이 된 그때의 그 소녀는 마음 속에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여인은 내면으로 깊이 결심했다. 그리고 어스름 무렵에 강가로 나갔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그들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인은 얼른 달려가 그들의 대열에 끼였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이들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분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들도 만드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구원자이신 당신 아들 예수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여러분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와 그분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세례를 주고자 합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사람들은 하나씩 다가가 사도들에게 몸을 맡겼다. 사도들은 그들의 어깨를 붙들고 세번씩 물에 집어 넣으면서 세례를 선포하였다. 마침내 이 여인의 순간이 다가왔고 수염이 텁수룩한 사도는 그 여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에 집어 넣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물에 흠뻑 젖은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무도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이 여인의 내면 깊숙이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의 눈물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론
무엇을 하자는 건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토대로 해서 지금의 청취자이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강론자는 다음의 사항이 필요하다.
1) 말씀에 대한 이해
2) 대중에 대한 이해
3) 말씀을 대중에게 전하는 여러 방법론
1) 말씀에 대한 이해
강론자는 먼저 말씀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부족하면 결국 가진 게 없어 전해줄 수 없는 꼴이 된다. 손에 없는 걸 어떻게 남에게 준단 말인가? 강론자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 안에서 하느님의 본의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안되면 남들이 파악해 놓은 것이라도 받아들여 숙지해야 한다. 그저 교만하게 자신이 몇 번 강론 했다는 걸 바탕으로 그것에만 머물러 있으면 진정한 말씀의 샘을 본인 스스로 놓치는 셈이다. 강론자는 말씀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2) 대중에 대한 이해
강론자는 대중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목마름을 이해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쪽으로 말씀을 전하게 된다. 대중이 전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알아내려면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들의 삶에서 동떨어져 있는 강론자는 합당한 답을 전해줄 수 없다. 돈도 엄청 많고 학식도 높은 교수들이 바글바글한 지역에 사는 사람이 맨날 시장 다녀와서 바라본 서민들의 이야기만 한다면 이는 대상을 전혀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대중들이 누구인지 올바로 인지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필요한 수단들, 즉 그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라. 개인적인 체험으로 '고해성사'는 이 작업을 위한 훌륭한 매체이다.
3) 방법론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고, 대중들을 이해했으면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바로 방법론이다. 두 대상 사이를 이어주는 적절한 고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헌데 적지않은 사제들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 방법론 연구에만 매진하는 경우가 있다. 흔히 나오는 것이 엄청 어려운 단어를 제시하고 그것을 풀이하면서 자신의 학식을 드러낸다거나, 아니면 텔레비전에서 본 우스갯 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적절한 때에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 방법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놓쳐버린 채로 쓸데없는 것에 치중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추가) 강론의 부정적인 예들
참 많은 부정적인 경우를 보았다.
- 어린이들 앞에서 중장년층을 위한 용어를 써 가며 하는 강론
- 돈 이야기만 줄구장창 하는 강론
-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정치 이야기만 계속하는 강론
- 잡다한 일상사만 늘어놓는 강론
- 사람들을 웃기려고만 하는 강론
-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얕은 영적 수준의 강론, '사랑하세요', '기도하세요' 헌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 강론
- 자신의 신심을 강요하는 강론
- 특정 활동 만을 강요하는 강론(가두선교, 환경,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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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강론자의 내면이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에게 마음을 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가 가장 어눌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화려한 수단을 택한다고 해도 그 핵심이 없다면 그런 강론은 전혀 사람들에게 와 닿지 않는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마치 내가 강론을 엄청 완벽하게 잘 하는 것 같다. -_-;;; 다 함께 생각해 보자는 차원에서 적었을 뿐이니 너무 심려치 않으시길... (또 소심한 신부 나왔다. ㅋㅋㅋ)
하나로 통하는 길
참된 진리를 찾는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만일 그것이 참된 진리라면 여러 목적지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때로는 서로간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가 전혀 엉뚱하지는 않고
오히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하나로 모여 들기에
결국 그들은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지 비슷한 방식을 택하면서 정반대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들이 있으니
그런 이들을 마주치게 되면 조심해야 한다.
두 여인이 맷돌을 잡고 돌리다가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둔다
두 사람이 침대에 있다가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둔다.
나중에 이런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저 껍데기가 조금 틀려 먹었다고 대놓고 비판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외양이 비슷하다고 무턱대고 받아들일 것도 아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에 관심도 별로 없고 찬동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다 죽일놈이 아니며,
교회 일을 한다고 다 하느님의 백성도 아니다.
사탄이 즐기는 것은 갈라서게 만드는 것이고
서로의 차이를 통해서 서로 증오하게 만들어 본래의 목적지를 잃게 하자는 것이니
그 놀음에 놀아나지 말 것이다.
반대로 성령께서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분이니,
성령의 감도를 받아 걸어가는 사람은 단순히 다르다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움직임을 주시한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같은 방향, 즉 참된 진리이신 하느님을 발견하면
기뻐하며 제 갈길을 열심히 달리자고 서로 격려한다.
왜냐하면 결국엔 같은 곳에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영을 지닌 인간들은
소소한 차이 하나로 불같이 분노하며
세상 모두를 집어 삼킬듯이 역정을 낸다.
그런 이들 근처에 가지마라
불똥 튈라.
허무한 유명세
명사(유명한 사람)가 이야기했다고 해서 모두 새겨 들을 말은 아닙니다. 어떤 문장을 적고 그 밑에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으면 모두 그게 삶의 진리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천만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나폴레옹도 이런 말은 했을 겁니다.
똥 마렵다. 설사인가 보다. - 나폴레옹
방향성을 잃은 이들은 어떤 방향이든지 지시하는 것이 있으면 적어도 그가 방향성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존경스러워 하면서 무턱대고 그 방향성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무당, 점집, 타로카드, 그리고 보기 좋은 부분으로는 '세상의 명사들의 조언', '처세술', '성공비결' 등등입니다.
불분명한 어두움 속에서 누가 손을 잡아 끌어주니 좋다고 따라가는데 결국 따라간 곳은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곳, 즉 더 큰 암흑 천지이거나 벼랑 끝자락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이들이 있습니다.
책으로 제본되었다고 모두 '진리'가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주의자들도 자기 교본을 책으로 제본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에서 진정한 방향성을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우리 내면에 그 방향성이 있고 우리는 곧잘 우리 귀에 솔깃한 것들만 들으려고 하니 말이지요.
아주 오래 전부터 부자가 되고 싶었는데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찾게 되는 제목은 당연히 '부자 만드는 법', '20대에 부자되는 법', '부자가 되는 10가지 비결' 뿐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신심생활입문', '천주 자비의 글' 따위는 그저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고서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갈수록 그들의 성향은 더욱 뚜렷해지고 그들의 방향성은 더욱 고정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들의 운명을 자기가 정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신앙인은 내면의 공허함을 늘 지니고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아무리 추구해도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일찍 깨달은 이들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여정을 비로소 시작하는 셈입니다. 물론 여전히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세상 것들을 필요에 따라 취하고 때로는 길을 엇나가기도 하지만 가장 중심 방향을 잃지 않은 그들은 결국 제대로 된 길을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과연 그 사람은 여러분들의 가장 깊은 내면의 방향성을 건드려주고 있나요? 아니면 그저 멋들어진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우리의 욕망에 불을 지펴주는 사람들인가요? 스스로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깨어나십시오!!!!
두 가지 힘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가장 큰 핵심적인 힘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마치 이는 자석처럼 서로 다른 방향의 것들을 끌어당깁니다.
탐욕
세상의 자녀들은 모두 이 '탐욕'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의 마음의 근본 안에는 이 탐욕거리들을 찾는 방향성을 늘 지니고 있고 그쪽 방향으로 움직여 나아갑니다. 이런 이들은 가만히 놓아 두더라도 알아서 그렇게 나아갑니다. 더 나은 것, 더 높은 것, 더 많은 것들을 향해서 꾸준히 올라가고 싶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
하느님의 자녀들은 '신앙'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입니다. 단순히 탐욕의 반대방향으로만 생각하면 틀리기 쉽습니다. 이 방향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더 짧게 표현하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움직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뜻이 낮아지고 가난해지는 것이면 그리로 가야하고, 하느님께서 어떤 중요한 직분에 올리기를 바라시면 죽을만큼 싫어도 그리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늘 마음을 맑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과연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방향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이 근본방향 가운데에서 껍데기는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정말 유명한 사제라고 해도 내 안에 '탐욕'의 방향을 지니고 있으면 사람들의 평과는 전혀 별개로 나는 암흑 속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또 반대로 나의 외견과 사람들의 평이 엉망 진창이라고 해도 내 안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훗날 우리는 전혀 반대의 자리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커지면 더욱 커질수록 그 반대의 방향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악의와 탐욕스러움, 그들의 시기와 질투가 어우러지는 암흑 천지가 더욱 분명하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더욱 힘을 내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영적 감수성
우리는 영적 감수성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분별해 내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쓰는 글들을 봅시다. 과연 저는 어떤 목적으로 이 글들을 써내는 걸까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키우기 위해서일까요? 그들이 가져주는 관심을 누리기 위해서? 아니면 정말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걸까요?
바로 여기에 저의 영적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저 위에 제가 적은 목적들 중에서 사실 그 무엇도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모든 질문들에 조금씩은 긍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가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는 것이 분별이 되면 될수록 제 양심은 아파오고 제 영적 감수성이 살아 있다면 결국 이 행위, 즉 생각을 거듭하고 글을 써내는 행위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뭐 이든 저든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다못해 생을 다 해서라도 끝날 일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정신을 투명하게 해 두고 스스로를 잘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저의 욕구가 저의 영혼의 힘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은 마음에 '우리가 이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랴?'하고 하느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들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벌로 영원히 광야를 떠돌다가 광야에서 죽게 되어 버렸지요. 저 역시도 하느님의 자리에 제가 나서는 순간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정 커지셔야 하는 분이시고 저는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하니까요.
이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두고 분별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신의 일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영적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가장 근본 목적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살펴야 하지요.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진정 '하느님'을 위한 것인지 분별해서 '나'를 향한 방향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것들에서 내밀한 곳으로 점점 더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관심사에 크게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는 소화하기 힘든 내용이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육을 살리기'위해서 안달 복달하는 이들에게 '육의 죽음'을 선포하고 '영의 추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외계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런 이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약함을 보고 함께 약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지 그들의 관심사가 우리와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내밀한 곳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위해서 한 걸음씩 매일매일 걸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감수성으로 그런 이들을 찾아내어 친구를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훌륭한 영적 동반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이
길이를 재는 자를 들고서 용액 속의 산과 알칼리의 농도를 탐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서로 너무나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느님에게 다가가겠다고 하면서 피조물에서 그분을 찾는 이는 불행한 사람이다. 피조물은 그분의 지극히 일부를 드러내지만 결국 피조물에 머물면 길을 잃는 셈이다. 특히나 피조물의 형상은 그분과 닮은 부분이 전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수염이 덕지덕지난 하느님이 절대로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성도 뛰어 넘으신다. 그래서 이성에만 매달려 하느님을 찾겠다는 이도 결국엔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버리고 만다. 논리적이고 사고적인 과정을 통해서 도움을 얻지만 결국엔 이도 뛰어 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쓰여진 신학대전 안에도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오직 '신앙'이라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뛰어넘을 때에 결국 하느님은 그 어두움 속에서 우리에게 환히 드러나시는 셈이다. 우리의 지각과 이성에 캄캄한 어둠과도 같은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로 인도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이 글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셈이다. 내가 적은 건 초보자들을 위한 자극 수단이지 절대로 하느님께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없다. 이런 저런 거룩한 글들에 이끌려 일어났으면 '어둠'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감각적으로 아무리 뒤져봐야 그런 하느님의 형상을 했다고 하는 사물들과 자연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감각할 수는 없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야 우리가 왜 교회와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최종적으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니 오로지 세상적으로 바보같은 '헌신'을 통해서만 비로소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만한 용기 있는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부터도 '이성적으로 따져 생각하면' 그만 용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들어가면서
한국에서 '인체의 신비전'이라는 전시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진짜 시체를 플라스틱 용액 안에 담궈서 그 플라스틱이 각 세포 안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육체가 전혀 쪼그라들거나 하지 않고 원래의 형태 그대로 온전히 보전되게 되는데 이 육신은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일종의 현대의 방식으로 미이라화 하는 셈이지요.
우리의 죽을 운명
우리는 죽을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하지만 마치 플라스틱이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 들었듯이 우리가 '사랑'을 우리 존재의 내밀한 곳에 파고들게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의 본성적 특성으로 인해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사랑'이 파고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과 같습니다. 문을 열고 안에 든 호랑이를 빼내고 코끼리를 넣고 문을 닫는 거이지요. (참 쉽죠잉? ㅎㅎㅎ) 한 마디로 사랑이 들어갈 만한 곳에 놓여있는 다른 걸 치워내고 사랑을 갖다 놓아야지요.
문 열고 살피기
문을 열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안을 들여다보면 뭔가 잡다하게 들어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온갖 종류의 욕구들이지요.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욕구로 가득 들어차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마음 안에 다른 여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비워내야 합니다.
욕구를 꺼내기(제일 중요함!!!!)
욕구를 비워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욕구는 자연스레 우리 안에서 스며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왜 누군가는 달콤한 캔디를 좋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쓰디쓴 커피를 마시는 걸까요? 벌써 눈치 채셨겠지만, 다분한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살펴봅시다. 처음부터 커피를 먹겠다고 나서는 아이는 없습니다. 먼저는 커피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인지) 그리고 커피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지요. (학습) 그리고는 커피를 처음으로 입에 대어보기 시작합니다. (실천) 그리고는 커피의 쓴 맛에 깜짝 놀라고 거부하면서 이걸 왜 먹나 다시 의심을 하게 되지요. (실패) 하지만 다시 배웠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 커피를 마셨을 때의 좋은 점들을 되새깁니다. (복습) 그리고 며칠을 꾸준히 그렇게 하면 어느샌가 커피의 맛을 분별하게 됩니다. (체득)
사랑을 집어넣기(마찬가지로 중요함!!!!)
사실 욕구를 비우는 작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을 집어넣는 작업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욕구만 꺼낼 수는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랑을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마귀가 든 영혼에서 마귀를 꺼냈다가 돌아와 아무것도 없는 걸 보자 그보다 더 지독한 일곱 마귀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내용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는 빈 자리에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사랑을 집어넣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학습한 뒤에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되고 우리는 다시 사랑이 무엇인지 복습을 하고 재시도하면서 결국에는 체득하여 나의 것이 되는 셈입니다.
마지막 문을 닫기
코끼리를 다 넣은 다음에는 문을 닫아야지요. 하지만 이 문은 마지막 날,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닫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우리의 내면 안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호랑이 즉 욕구가 샘솟음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꾸준히 그것을 비워내고 사랑으로 채우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헌데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냉장고가 부쩍 커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코끼리 정도가 아니라 항공모함을 집어넣을 수 있는 크기가 되어 버리지요. 우리가 이 훈련에 얼마나 매진하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우주만큼도 커져 버릴 수 있는 셈입니다.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나가면서
사실 가볍게 쓴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분이 상기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루하루 실천하신다면 여러분은 언젠가는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인지'와 '학습'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사항들 즉 '실천','실패','체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런 훈련을 마음에 늘 간직하고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소한 훈련들을 견뎌낸 분들은 훗날 반드시 상급이 크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를 나중으로 또 나중으로 미루기만 한다면 결국 여러분은 아이들이 소꿉장난에 쓰는 냉장고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내면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여러분의 죽을 생명을 영원으로 바꾸어 나가십시오.
예수님은 이상의 내용을 고작 몇 문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박나는 거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6장 24-25절)
늘 이것을 기억하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영성생활을 미루지 말아야 하는 이유
자 부페집에 가 봅시다. 넓은 접시에 한껏 음식을 담으세요. 그리고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어느샌가 음식들이 접시에 가득 차겠지요? 헌데 아뿔사 가장 마지막에 제가 그토록 바라던 음식이 한가득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어쩐답니까, 이미 나의 접시는 가득차 버린걸요.
우리가 미리 마음을 비우고 음식을 덜 담았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원하는 대로 담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미리 마음을 비우면 우리의 원래의 가장 큰 접시 크기만큼의 영역을 우리는 은총으로 채우는 셈이랍니다. 이것이 영성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먼 훗날 우리는 영혼의 접시를 들고 하느님에게 나아가서 그분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이미 우리의 영혼을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 놓으면 하느님의 은총이 담길 곳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한편, 부페집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접시가 점점 작아집니다. 무슨 소린고 하니 우리가 지닌 원의들을 우리 스스로 '미리' 비워내면 그 영역은 은총을 담을 공간이 되어 간직되지만, 우리가 그것을 끝끝내 비우지 않고 있어도 접시 자체, 즉 욕구의 범위 자체가 우리가 늙어감에 따라서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우리가 미리 버리면 그 영역 만큼의 '신앙'이 생겨나지만 때가 되어 우리가 늙어져서 어쩔 수 없이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아름다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면 우리로서는 얻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는 셈입니다.
'나중에 하지'라는 생각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나중에 하면 할수록 원래의 은총을 담을 자리는 점점 줄어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젊은이 여러분, 어서 이 길을 재촉하십시오. 인간의 현세의 생은 멸망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시간이 많은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이 허락치 않으시면 지금 당장에라도 이 생은 마감되어 버리고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소위 그릇된 탐욕의 욕구를 가득 채운 상태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어 그분이 아무리 빛을 쪼여도 그 빛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귀 있는 자는 알아들으시길...
차분한 마음
평화를 간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흥분한 상태에서는 곧잘 그릇된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쩐답니까, 이 평화를 파괴하려는 움직임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항상 흥분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공격 대상을 찾아서 그 주변을 돌며 소란스럽게 하면서 그 영혼을 흥분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니 그가 좋아하는 기호와 욕구를 바탕으로 그에게 유혹 거리를 던져 주거나, 그가 안심하고 있는 특정한 덕목을 공격해서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렇게 약점을 공략당한 희생자가 완전히 함락되어 버릴 때까지 그의 곁에 서서 온갖 수작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고, 흔히 즐기는 먹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대상, 즉 우리의 욕구가 가 닿는 모든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해 보이는 것마저도 그 공격 대상이 됩니다.
본보기로 예를 들어 드리지요. 누군가는 술을 좋아하면 악마는 그의 기호를 파악하고 어둠의 영을 술을 통해 그에게 접근을 시킵니다. 평소에 작동하던 도덕적 기준을 해이하게 만든다던가 아니면 평소에 자주 시켜 먹는 술을 떨어지게 만들어서 그가 불안하게 한다던가 모든 종류의 수작을 다 피웁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의 것으로 인해 일어난 일종의 영혼의 불안정상태, 즉 평화가 없는 상태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첫 번째 단계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 뒤에는 보다 심도깊은 단계가 다루어집니다. 그런 불안정의 상태에서 평소에는 잘 작동해오던 영적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하고 그 틈을 타서 새로운 악의 기운을 불어 넣습니다. 증오, 시샘, 질투, 명예 등등 보다 내밀한 어둠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럼 거의 십중팔구는 넘어오게 마련입니다.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던가 종업원에게 화를 내는 식입니다.
그리고 나면 악마는 그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혜'를 불어넣어 줍니다. 이 사람은 일단 시작된 자신의 악의를 어떻게든 보호하고자 이유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일단 안에 들어온 어둠에 다른 '선의'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치는 셈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보호벽을 쌓아, 자기 안에 이미 들어온 '악의'가 더욱 증식하게 만듭니다. 이미 주변에서는 그의 말과 행동을 바라보면서 '진정하라'든지 '용서해라'라고 하지만 이미 그에게는 그런 주변의 권고는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 대상이 된 이를 향해 온갖 논리를 다 들어서 자신의 어둠을 더욱 강화 시켜 버립니다. 그런 흥분 상태에 있는 동안 악마는 여러 다른 수단을 써서 이 사람의 이상행동을 증가시키고 결국에는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걷게 만들어 버립니다. 훗날 돌아오려고 할 때에 그것이 가벼운 일이면 금새 넘어가지만 무거운 일이 될수록 '수치'라는 것도 함께 작동을 해서 도저히 돌아올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셈이지요.
평화를 간직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평소에도 훈련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예 악마가 들어올 수단들을 막아 버리는 것은 참 좋은 훈련입니다. 우리의 욕구를 잘 살피고 '절제'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예방 차원의 훈련으로 이미 함락된 도성을 재건축하는 데에는 더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들고 이미 가지고 있었던 도성을 다시 쌓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원래의 도성을 잘 지키고 그 도성을 더욱 더 보완해 나갔더라면 시간과 노력을 훨씬 줄일 수 있었겠지요.
여러분의 마음에 언제나 평화를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간직된 평화를 바탕으로 이웃들을 사랑하고 돕는 데에 헌신하십시오. 그렇게 도성이 무너진 이웃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내어주고 그들이 얼른 다시 일어나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셔야 합니다.
상기의 내용은 조금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찬찬히 본인의 경험과 비추어 생각해 보시면서 성찰하셔야 할 겁니다. ^^
분노한 제자
"이봐 젊은 친구…"
현자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앞에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분노한 제자가 서 있었습니다. 현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굉장히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자네와 나는 그닥 다르지 않다네. 자네가 무언가가 싫은 것만큼 나도 그걸 싫어해. 그리고 자네가 무언가에 끌리는 그만큼 나도 거기에 끌리고 있다네. 예컨대 자네가 일하기 싫어하는 만큼 나도 일하기가 싫어. 자네가 편히 쉬고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만큼 나도 그렇지. 그러니 자네와 나는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야. 아니 오히려 정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자네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걸세. 자네는 싫은 걸 '거부'하고 하지 않으려 들지. 하지만 나는 그 싫은 걸 '수용'하고 그럼에도 해 보려 한다네. 하기 싫은 일이 있어도 해 보려고 하는거지. 반대로 자네는 좋은 것을 '추구'하고 가지고자 하지. 하지만 나는 그 좋다는 것에서 마음이 멀어지도록 노력한다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무턱대고 집어먹지 않고, 안락함이 제공되어도 한번 더 생각을 하고는 물리지. 거기에서 자네와 나의 간극이 생기기 시작하는게야. 자네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셈이지. 마치 나자로와 부자의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놓여 있었던 것처럼 말일세.
사람들은 이를 '신앙'이라고 부른다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보이는 것을 헌신하는 행위이지. 그래서 이 '신앙'이라는 건 그들에게는 '암흑'과도 같은 거야. 그들로서는 암흑 보다도 더 짙은 깜깜한 암흑인 셈이지. 자신들의 이해력을 총동원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리는 셈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지금 그렇게 분노해 있는 거야. 아마 이 설명 자체도 자네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말일세."
젊은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아까 상기되었던 얼굴은 더욱 붉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어찌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현자는 분명히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었고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건 자신임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직 자신의 분노가 극에 치닫지는 않아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던 셈입니다. 현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툴툴 털며 그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배울 마음이 있거들랑 나를 따르게. 하지만 자네가 자네 갈 길을 가더라도 나에게는 전혀 미안해 할 것이 없네. 나는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자네를 '소유'하고 뭔가를 하도록 '강요'한 적은 없으니 말일세. 나는 이제 가려네 결정은 스스로 내리게."
현자는 지팡이를 주워들고 느릿느릿 길을 따라 걸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방금까지 지고 왔던 무거운 짐을 내팽개치고는 현자 앞에서 온통 열을 내던 청년이었지만 이 마지막 말에 제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묵묵히 다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현자를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고 현자의 그림자가 제자에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제자는 그 그림자를 옆으로 피해 현자에게로 발걸음을 재촉해 다시 따라 붙었습니다. 현자는 뒤로 제자가 오는 것을 느끼며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성인>
그런 데를 가는 이유
"왜 그런 데를 가려고 하지?"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왜냐면 저 역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도 제가 있는 곳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런 곳에 가려고 하는 걸까요?
하지만 이제는 감이 조금은 오는 것이, 자기가 그런 곳들이 좋아서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겁니다. 정말 그런 장소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서 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정말 드문 경우이지요. 대부분의 경우는 일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뭐가 더 하느님의 뜻에 옳고 바람직한 것일까를 고민하다보니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중에서 자연스레 그런 곳을 선택하고 나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마치 물이 더 낮은 곳을 자연히 찾아 흘러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만일 저 자신에게 솔직히 묻는다면 저는 아직도 더 편하고 안락한 걸 선호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게 싫어요. 그래서 있는 곳에서 언제나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가지요. 제 육신의 요구, 제 본능의 요구는 명백한 셈입니다. 육은 위로 올라가고 더 알려지고 더 많이 가지는 걸 원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선택이 앞에 주어졌을 때에 고민하다보면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자연히 알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빤하니까요. 그러니 반대 방향의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고 선택한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눈 앞에 미운 사람이 있을 때에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은 분노이고 증오입니다. 이는 '적으로 인식한 상대를 대하는 모든 동물들의 반응'에서도 똑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용서하고 나아가서 그를 사랑하라고 하지요. 바로 여기에 '신앙'이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요구하는 걸 거부하고 '신앙'이 요구하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 이것이 진정 신앙인이 되어가는 과정인 셈입니다.
본당에서 봉사하는 것도 그렇고, 직장에서 힘겨운 일 앞에서 웃음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사랑의 사도가 되어가는 셈이지요.
앞으로 어디를 가게 될까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주어진 두 선택지가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을 찾으려고 노력하겠지요. 보내시는 어디든지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물론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건 있지만 그런 제 지향과 의향이 하느님께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더욱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나병환자 9사람
예수님에게 치유받고 돌아간 나병환자 10사람 그 가운데 1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었고, 그 뒤로 오직 하느님의 구원을 주변 사람들에게 설파하다가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때에 함께 잡혀 들어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9 사람은 그 모진 박해 가운데에도 살아남아 서로 수소문을 하여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6명의 친구가 모여 있었고 나머지 3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늦은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어이쿠, 오래간만이네 요새는 잘도 걸어 다니는군? 전에는 다리 하나가 엉망이었잖나?"
"하하하 그러게. 그분이 고쳐주고 난 뒤에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 사지가 다 멀쩡해졌지 뭔가? 그러는 자네도 이제는 아주 코로 숨을 제대로 쉬는구만. 전에는 코가 짓눌려졌었지 아마?"
"그랬었지."
문득 옛 생각이 난 그들이 조용해집니다. 그러는 중에 허리가 두툼한 다른 사람이 성큼성큼 들어옵니다.
"어이, 다들 모이셨나? 어째 신수가 훤하신가들?"
"어이쿠, 자네는 몸이 어찌 이리 불었는가?"
"아, 그동안 너무 잘 먹었나 보이."
"그래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뭐 별거 아니고 조그만 식당을 하나 차렸지. 헌데 썩 잘 되는 건 아니야."
"그렇구만, 우리가 다들 그렇지 뭐. 그래도 전에 우리가 살던 꼴에 비하면야…"
다들 과거를 떠올리려는데 때마침 콧대가 뾰족한 마지막 사람이 들어오면서 인사를 합니다.
"좀 늦었네. 벌써 다들 모였군."
"아이구 이 친구 보게나, 그래 요즘엔 시장 출마 준비한다면서?"
"소식이 벌써 그렇게까지 갔나? 뭐 한 번 해 보는거지."
"자네 예전에 손가락이 하나도 없을 때는 우리가 다 챙겨 먹이지 않았는가?"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그 이야기를 꺼내?! 나 원 참…"
"이 친구보게나 그래, 벌써 잊을 참인가?"
"뭐, 고맙게는 생각하네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흐르지 않았나?"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은혜를 잊으면 안되는거지!"
이 마지막 말에 모두가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이 멈춰 섰습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한 사람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보게, 그라치오가 죽었다는 이야기 들었나?"
"그때 예수님께 돌아간 그 친구 말인가? 들었네."
"처참하게 죽었다더군. 사자들이 온 몸을 찢어발겼다고 하더라구."
"응…"
"실컷 몸 성하게 하고는 그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차라리 나환자였다면 그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뭘 그리 돌아다니며 예수를 전하는지 원…"
"자네에게도 찾아간건가? 자네도 자네에게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난 이제 그만 가려네."
"나도 가야겠네. 아내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거든."
"그래, 나도 그만 가야겠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했나 싶었던 박해가 다시 그 지역에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시장 후보와 상인 대표를 비롯해서 총 9명의 사람이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고 다니다가 순교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이 모두 예전에 끔찍한 나병환자였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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