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 신부님과 함께하는 성경

~ 영성글 모음 두번 째 ~





기억을 올바르게 채우기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굉장히 순수해질 것입니다. 어제 지은 죄도 사라지게 되고, 뭔가를 잘 했다고 뻐길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때그때에 충실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기억'에 뭔가를 던져넣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평온하고 충실하게 바뀌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뭔가 새로운 걸 접하려는 '욕구' 때문에 이 '기억'을 언제나 충만히 채워 나가는 셈이고 그로 인해 속이 시끄러운 셈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배워야 할 것을 마땅히 배우는 지적 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그 밖의 잡다한 일상사에 관심을 갖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관심'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던져넣는 것을 그만 둘 수만 있더라도 우리의 기억창고는 보다 정돈되어 갈 것이고 우리는 영적으로 더 안정되어 갈 것입니다.

쓸데없는 관심을 집어 치우십시오. 소란한 자리를 피하고 텔레비전은 끄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의 기억 속에 온갖 거룩한 재료들을 집어 넣으십시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감동이 있는 문학과 명작들을 접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시간이 갈수록 여러분들의 내면은 더욱 깨끗해지고 풍부해지게 될 것입니다.



요리와 식욕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어서는 안됩니다. 먹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온갖 요리에 각종 치장을 해서 주는 것보다는 투박한 음식이라도 배고파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낫습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먹으려고 하면서 때로 영적 양식을 청하는 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이들은 세계 일류 영적 요리사를 앞에 내놓더라도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며 내치게 될 것입니다. 애시당초 맛볼 마음도 없었던 것이지요.

축복식에 가면 '현세적인 축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서 축복식 보다도 그들의 영적 갈증을 일깨우는 강론을 하는 데에 더 신경을 씁니다. 그래야 하찮은 기도문이라도 그들에게 와 닿을 테니까요. 조금만 노력하면 그들의 영은 활짝 열리고 제가 하는 모든 말들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와 닿게 됩니다.

오히려 힘든 쪽은 자신이 영적으로 어느정도 안다고 자부하는 부류입니다. 이들의 교만은 엄청난 것이라서 스스로 힘들어 죽으려고 하면서도 가장 쉬운 도움의 손길마저도 거부하는 형편입니다. 장님도 그런 장님이 없지요.

힘들어 죽겠다며 투덜거리기만 할 뿐 실제로는 내면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늘 같은 일이 주변에 반복되는데도 시선은 늘 주변으로만 향해 있는 셈이지요. 이들의 특징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의견을 마주하면 날을 세우고 달려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주 작은 표현에도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이들은 그런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무척 바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돌아보면 실제로 무엇 때문에 배가 고픈지를 알 수 있는데 그건 바라보지 않고 그저 자기에게 적합한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며 '기호'에만 맞는 음식을 기다리니 배는 고파 죽을 지경이고 성질은 성질대로 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까탈스런 이들은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니 꼬라지를 알라

우리는 스스로를 올바르게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길에 나서면 다른 이들의 얼굴을 주시합니다. 눈은 밖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곧잘 타인들의 얼굴을 서로 비교하고 가늠합니다. 정작 내 입 주변에는 밥풀을 달고 말이지요. 이것이 영적인 면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올바르게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곧잘 타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지요. 그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 마음이 점점 시궁창이 되어가는데도 우리는 전혀 무감각하지요.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분노하고 슬프고 짜증스러운 건 모조리 '그들 탓'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참으로 간편한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입은 옷이 우의라면 비가 아무리 와도 젖지 않을 터인데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가랑비가 온다고 비를 두고는 난리를 치는 셈입니다. 비는 때가 되면 내립니다. 우리가 그 비에 대비를 해야지요. 우산을 쓰던, 우의를 입던, 아님 집에서 나오지를 않던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나와서 비를 맞고 있으면 그 비를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해야지요. 비를 두고 소리소리를 질러봐야 아무 소용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나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난리쳐봐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우리 내면을 바꿔야 합니다. 스스로를 잘 살피고 어두움이 없도록 주의해야지요. 타인의 모습에서 배움을 이끌어 내십시오. 그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그가 좋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고요히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고 우리 스스로의 꼬락서니를 잘 아는 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만 타인을 향해 비난하는 시선을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들입니다. 


성소

'거룩한 부르심'(聖召)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요? 성소의 시작은 어디이며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사실 모든 이는 '거룩함'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응답이 필요한 셈이지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데 성소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 안에서 이든 저든 하느님의 부르심을 접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을 걷는 이는 모두가 이 첫번째 '부르심'을 접한 이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전 인류를 단 하나도 빠짐없이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면 저마다 이 부르심에 적절히 응답을 시작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누구는 나날이 더욱 잘 응답하여 자신 안에 '신앙'을 키워 나가고 또 다른 누구는 이런 부르심들을 내팽겨치고는 세상의 것들에만 시선을 두고 살아가지요. 이렇게 여러 종류의 나무가 갈리는 셈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우리들을 모두 지켜보고 계시지요. 그러다가 당신이 도구로 쓰고 싶은 이들을 선별하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번째 부르심, 보다 특별한 길을 걷도록 새로운 부르심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는 '성소(聖召)'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이들이 사제와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는 셈이지요.

부르심은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만일 그분이 진정 바라신다면 심지어는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시도해도 불가능한 때도 있습니다. 요나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지요. 정말 예언자로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온갖 투덜거림에 반항을 하지만 일단 한 번 작정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으셨으니 우리가 멋대로 하더라도 될 건 된다는 위험한 생각은 하면 안됩니다. 만일에 요나가 자신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더라면 보다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를 '투덜쟁이 예언자'의 예시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다른 이사야 예언자나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수많은 감동을 받는 것이구요.

이런 성소를 키우려면 많은 이들의 부단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 인간이 홀로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이어받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초대도 필요하고 그렇게 선별되고 초대받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신자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모쪼록 많은 '성인 사제들', '성인 수도자들'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 맛있는 무엇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고 나면 그 뒤에 더 맛깔스러운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밥을 늘상 먹을 때에 더 맛난 무언가가 생각이 나는 것이지 지금 열흘을 굶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그 와중에 더 맛있는 무언가를 떠올릴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인간관계도 그러하고 심지어는 거룩한 것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만남을 절제하면 비로소 모든 인간적 만남이 더욱 본질적인 것이 되고 소중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늘상 만나기 시작하면 그 만남 가운데 더 나은 만남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신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갈망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거룩한 것을 접하기 때문에 이미 거룩한 행위들의 본질적 의미를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한국의 신앙 선조들이 1년에 겨우 한 번 사제를 볼까 말까 할 때에는 사제가 어떤 모습이건 어떤 말을 하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이룰 수 있는 '신적인 일', '거룩한 일'이 더욱 소중했지요. 세례를 받고,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기쁨에 온 영혼이 충만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이런 것들이 너무 상투화 되어서 더 맛깔스러운 신앙을 찾고 있습니다. 더 맛난 무언가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기본적인게 충분히 충족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더 좋은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겸손이 필요한 셈입니다.



상처와 치유

힘겨운 일이 있을 때에 곁에 누군가가 위로해 주는 이가 있다면 그 힘겨움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로의 기억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면서 알게 되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은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중요한 사건들만이 마음에 남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로는 부모님과의 관계를 마음에 많이 남기는데 그 가운데에서 현재의 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상처는 분명히 치유 받아야 합니다. 상처를 내버려두면 결국엔 곪아 터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났던 어두운 기억들은 빛으로 꺼내 와야 하고 그리고 신앙 안에서 해석을 해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하지요.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랑할 여지가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픈 기억들은 우리의 지금의 '사랑'을 필요로 하니까요.

가능하다면 주변에 힘겨워하는 이들을 많이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성마른 이들,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자기들에게로만 이끌어 들이려 하고 치유가 아니라 더 많은 애정의 탐욕으로 나아가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헌신

캄캄한 밤에 방에 앉아서 불을 끄세요. 그리고 눈마저 감은 채로 손을 눈 앞으로 내밀어 보세요. 여러분은 '손'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그것이 거기 있다는 걸 증명할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합니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손이 그 방향으로 거기에 있다는 건 알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어느 상대가 나와 그 캄캄한 방 속에 마주앉아 있다면 그는 내가 손을 어디로 움직였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그의 눈 앞으로 손가락을 찌르듯이 가져가도 그는 그 어떤 위험성도 느끼지 못하겠지요.

인지되지 않음으로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참으로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너무 빨라도, 또 너무 느려도 인지하지 못하니까요.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마주앉은 상대에게 '손'을 인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무언가를 접촉해서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끼려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우리 신앙을 가져가야 합니다. 결국 신앙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체험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하등의 이유가 없는 자리에 우리가 사랑으로 나서서 그들을 돕고 보듬을 때에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하느님의 자리를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더 발견해 나가는 것이지요.

아들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는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우리가 하느님에게 얼마나 헌신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크기가 가늠되는 셈입니다.



종교 소유자들

여전히 종교를 '소유'한 수많은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언제라도 '수틀리면' 종교부터 내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사실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흉내를 내고 있는 '세상의 자녀들'인 셈이지요. 우리는 부모를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은 자기 재산은 꼭 쥐면서 '하느님'은 가차없이 버리는 걸 서슴지 않지요. 이런 이들이 어찌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종교 껍데기를 버렸지 신앙을 버린 건 아니다.' 네 참 합리적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잊고 있는 것은 하느님은 애시당초부터 완벽한 교회를 만드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헌데 그런 교회를 떠나서 자기 혼자 잘난줄 아는 수많은 이들은 결국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 수많은 분파들이 갈라지고 있고, 수많은 이단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톨릭 내부에서도 새로운 갈라섬이 목격되는 중입니다. 지상 교회는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순례자들이고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지향하고 걸어가는 방향에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소위 '종교 껍데기'를 버린 분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자기만의 바른 길을 찾아나갈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로서는 그런 가능성은 거의 0%라고 봅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길을 잃게 될 것이고 그들의 말로는 비참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신앙의 여정
(짧은 글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소위 어느 정도 철이 들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할 무렵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내 집, 내 물건, 내 친구들이 즐비하지요. 그런 수많은 소유 가운데에서 '종교'도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첫 시작에서 '종교생활'을 소유합니다.

이런 '소유'의 관계 안에서 종교는 그 흥미거리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 올인하고 만인을 구원하겠노라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종교 내 인간관계'나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그 종교에 다가서게 되는 셈입니다. 뭔가 세상적인 것을 바탕으로 그 종교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혼기가 찬 젊은이들이 청년회에 나오는 것이나, 답답하고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이 사제를 찾아오는 것과 같은 일련의 세상적 '매력'들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는 중에 우리는 종교 안에서 보다 본질적인 가르침들을 접하게 됩니다. 반모임을 하던지, 교리교사생활을 하던지, 하다못해 주일 강론을 꾸준히 듣던지 하면서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가르침들을 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예전에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갑니다. 종교라는 것이 하나의 옵션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우리의 근본 선택이며, 우리의 실제 온 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나아가서 '영원'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 부분이 '믿음'입니다. 이 찰나에 우리의 이성에 비쳐오는 믿음이라는 빛은 우리의 여정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올바르게 얻고(엉망인 가르침도 많으니까) 점점 심화되어 갈수록 이제 우리는 정반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셈입니다. 첫 시작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소유하고' 있던 것들을 이제는 내려놓고 버리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습니다'를 세 번 외치고 머리에 물을 부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셈입니다. 나 스스로의 의지로 보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현세적인 것들을 하나씩 둘씩 포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희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더 이상 현세를 바라보지 않고 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을 '희망'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포기'를 이룰 수 있는 용기가 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 포기에는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이도 있고, 이미 꾸려진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와 사회 안에서 자신을 조금씩 포기해 나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 포기의 행위를 한 마디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자신의 생명을 바쳐 남을 살리는 사랑인 셈이지요.

이 사랑이 극에 달해 가면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더욱더 커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모든 미련을 깨끗이 정돈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의 육신의 죽음이 다가오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이미 나아가신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길, 진리, 생명을 통해 영원으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목소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소리의 진폭을 그려낼 순 있지만 그 시각적 정보와 실제로 우리가 '귀'라는 감각 기관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전혀 딴판이다. 그 진동하는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 본다고 해서 우리가 그 소리를 상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느님을 설명하려는 이는 이런 난점에 빠지는 셈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분이시라고 말은 하지만 그 순간 그 설명은 이미 하느님이 아닌 셈이다. 하느님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분이시다.

'믿음' 역시도 모호하다. 언제 우리는 '믿는' 것이고 언제 우리는 '믿지 않는' 것일까? 그에 대해 확고히 정해진 규정 따위는 없다. 어느 정도를 헌신해야 이 사람은 '믿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복음은 '모든 걸 버리면' 이라는 단서를 남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모든 걸 버려야' 겨우 일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말인지 모른다. 소유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는데 이제 모두 버리라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토록 추종하던 이들도 하나둘씩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다.

종교를 통해서 무언가 '얻으러' 왔던 이들이 믿음의 가장 근거지에서 이 확고한 가르침을 받고 나니 이제는 더 얻을 게 없어진 셈이다. 도리어 가진걸 모두 내던지라고 하니 자신들이 지금껏 추구해 온 방향과는 정반대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신앙생활이라는 세상 안에서의 한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많이도 소유해 온 셈이다. 교리지식을 소유하고 기도생활을 소유하고 성직자와의 친분을 소유하고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소유해 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것을 버릴 때' 알게 된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려놓는 과정이다. 가지고 있다고 믿는 만큼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면 사실 우리는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을 떠올려보시라.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돈도, 명예도, 권력도, 둘도 없을 것 같던 폐쇄적 교우관계도 모두 내려 놓아야 한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전혀 감각되지 않는 분이시다. 그런 그분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법으로 다가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암흑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하느님 앞에 맞서서
(연중 23주 주일)

우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책상 위를 기어다니는 개미는 내 손가락 하나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좀 크기가 있는 강아지라면 제 팔 하나의 힘을 써야 하겠지요. 하지만 행여 호랑이나 곰을 만난다면 도망치는 게 상책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분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은 누구이실까요?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시지요. 참 간단하고 쉬운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쓰고 있는 컴퓨터를 분해해서 조립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은 배터리를 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 하찮은 현세의 미물도 분해 조립이 어려운 마당에 천지의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조화로이 가꾸신 분을 마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계획을 우리는 '섭리'라고 부르며 신성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하느님에게 대적하는 철없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신 걸 이룬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서 늘상 그분 앞에서 투덜거리기만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다.'라는 것 뿐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없고 모든 게 편하게 흘러가기만 바랬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우리의 온갖 어두움을 참아 견디시고 심지어는 외아들까지 보내어 우리가 그를 죽여 버렸는데고 참고 계시거늘 우리는 사소한 고통 하나에 몸부림을 치며 투정을 부리는 것입니다. 실컷 보살피고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머리가 굵어져서는 부모 앞에서 '이럴 거면 왜 나를 낳았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폐륜아 같은 모습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맞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의 오묘하신 섭리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그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손에 쥐시고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그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 앞에 봉헌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부터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밀과 가라지

세상 끝날까지 밀과 가라지는 함께 나아갈 것이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 분별을 이룰 수 없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경우도 많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에 '중독'되어 있고 세상이 알려주는 메뉴얼을 따른다. 오늘 아침에도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부엌에 가서 서성거렸다. 내가 정말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저 모든 게 습관이었던 것이다. '아침먹기'라는 습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세상의 '습관' 속에서 정작 자기 자신은 돌아 보지도 못한 채로 살다가 사라져간다. 사금을 캐는 사람들은 강에서 모래를 한 줌 퍼다가 금가루가 나올 때까지 고르고 또 고른다. 나머지 모래들은 지나가 버리는 셈이다. 우리 내면에 짠 맛이 없으면 우리 역시도 그렇게 쓸모없는 모래마냥 흘러가 버리고 마는 셈이다.

무언가를 분별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신적 지혜를 청하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드러내는 행위 속에 숨겨진 본심을 파악해 내는 것,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 '다스림'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이런 지혜를 청해야 한다. 즉,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제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 모든 어긋남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들이 너무나 많다. 단순히 기도문을 들고 줄줄 외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한 기도는 마음을 언제나 하느님 손에 맡기려고 노력하는 것, 즉 우리 의지의 봉헌이다.

기도하는 사제는 힘이 있고 권위가 있다. 그에게 주어진 사제직은 신적 권위이고 그 사제는 기도를 통해서만이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셈이다. 때로 '권위'만을 들고 있는 사제가 있으니 예수님 말씀처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 어떤 사제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죄를 지으라'고 명할 순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마땅히 그의 장상에게 보고 드리는 것이 도리이다. 하지만 죄를 지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단지 제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온갖 비방이 담긴 헛된 투서를 올리는 철없는 신자들도 많다.

밀과 가라지는 세상 끝날까지 알 수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올바르게 분별하실 것이다. 그러니 '기도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수단 외에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 현명하고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더는 없어 보인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 사람
(연중 23주 주일)

가진 걸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자 그럼 하나씩 던져 봅시다. 내가 가진 물건들을 밖에다 다 내버리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 그냥 내가 아예 다른 곳으로 여행을 훌쩍 떠나 버리면 되는 것일까요? 내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가족과의 관계도 끊고 그야말로 산 속에 들어가 굴이라도 하나 파고 살면 되는 걸까요? 저런… 그 와중에도 굴을 팠으니 그 굴은 내 것인 셈이네요.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도망가야 가진 걸 온전히 다 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가진 걸 진정으로 버리기 위해서는 외면에 집착할 게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물과 기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둘은 같은 병에 담겨져 있습니다. 한껏 흔들면 그 둘이 언뜻 뒤섞이는 듯이 보이지요. 하지만 결국 기름은 떠오르고 물은 가라앉게 됩니다. 절대로 섞이는 법이 없지요.

바로 이러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진정 자기 소유를 다 버린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진정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자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보게 되면 손에 뭘 쥐고 있든 무슨 옷을 입고 있든 어떤 집에 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내 마음이 그러한 것들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지요. 같은 병에 담겨 있기에 서로 마주치고는 있지만 아무리 뒤섞어 놓아고 결국 분리되는 물과 기름과 같은 상태로 우리는 세상 사물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계 전체에는 하느님의 권능이 숨쉬고 있지만 그 자체로 하느님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 안의 그 어떤 존재에라도 마음을 두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소유를 다 버린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온전히 들어높여져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뜻 때문에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참 멋들어진 표현인 것 같기는 한데 실제로 세상에 섞여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처럼 느껴지는 말마디입니다. 왜냐면 마치 지금까지 추구해오던 것들에서 마음을 모조리 떼어내어야 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승진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제가 하는 말은 마치 모든 노력을 그치라는 말처럼 들리고, 어디 수도원에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마련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물건들이 오고가는 일들에 관한 우리의 걱정은 그대로 두십시오. 다만 여러분들의 영혼을 하느님 앞으로 들어높이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욕구를 정돈시켜 주실 것입니다.

축구를 하는 사람을 떠올려봅시다. 한 사람은 엄청난 승부욕에 사로잡혀 축구를 합니다. 정말 열심히 합니다. 왜냐면 '이겨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이가 어느 피정을 가서 '승부욕'이라는 것의 허상에 대해서 알게 되고 모든 이가 형제이며 어느 순간에서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 사람이 다시 축구장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사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정말 열심히 축구를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에는 '승부욕'은 없고 진정 주변에 모인 사람들과 어울려 축구를 즐기기 위해서 축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과 직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내가 치뤄야 할 승진 시험도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세상 안에서의 어떤 목표가 있었다면 이제는 '하느님'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던 일을 계속 하십시오.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영적 갈망'으로 그 모든 일을 하십시오. 엄청난 '영적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매 순간이 은총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치유 방법

'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기본 바탕이 필요합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닌 이 '자유의지'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한편 하느님의 모상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뽑아내 버리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요? 인간은 하나의 정교한 '생체 컴퓨터'에 불과합니다. 뇌의 작용은 전기적으로 이루어지고 뇌세포는 하나의 칩 역할을 해서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계산을 해 내고 그 정보를 기억하는 것 뿐입니다. 그 결과는 두 가지 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고, 또 '사랑'을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컴퓨터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컴퓨터는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계산을 해서 최적의 정보를 뽑아낼 뿐인걸요. 그래서 로봇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산업용 로봇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그 로봇이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그 산업용 로봇은 자신 앞에 주어진 정보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행여 파리가 회로에 꼬여들어 오류가 생겼다면 그것은 '우연'일 뿐 그 로봇의 '죄'는 아닌 셈입니다.

결국 죄는 의지의 작용이고 따라서 인간만이 완전한 의미의 '죄'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뚜렷하면 주변에서 때로 일어나는 많은 어리석은 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죄는 없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죄의 경향을 띄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의지를 통해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강압을 해서 억지로 뭘 하게 시켰을 경우에도 이는 적용이 됩니다. 그야말로 내 손에 칼을 억지로 쥐게 하고 그 손을 강압해서 누군가를 찌른다면 그 일을 한 사람의 죄이지 나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셈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저항을 해야 하겠지요.

달리 말해서, 누군가의 죄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내가 어느정도 의지적으로 동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친구가 나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여자친구가 낙태를 한다고 할 때에 우리는 분명히 그러지 말라고 신중하게 충고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가 그대로 실행한다면 그건 그의 책임이지만 행여 우리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동조를 한다면 그가 저지르는 범행에 우리도 참여를 하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모종의 죄악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면 그 개개인의 구성원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의 경중 여부에 따라서 그 죄악에 참여한 셈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부패한 공동체의 죄악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누구의 '뇌물'도 수여한 적이 없고 '뇌물'을 내민 적도 없다면 그 죄악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 각자는 어느정도 오늘날의 사회적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셈입니다. 하다못해 신호 체계를 어기거나 '이정도야 뭐'라고 하는 생각에 아주 사소한 것을 무시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두움은 우리 공동체 구성원 스스로에게 얼마간의 책임이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저 우리 죄를 자책하고 있는 걸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쓰레기가 있다면 줍는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동안 저질러온 소홀함을 지금부터 의지적으로 메꾸면 되는 셈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행위를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 죄를 저질렀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의 행위는 공동체의 죄를 조금씩 치유해 나가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랑의 가장 근본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향해서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죄악을 예수님이 온전히 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셈이지요. 우리는 바로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그러니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언뜻 굉장히 이지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그건 '난 예수님따위는 몰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우리더러 따라 하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게 하셨지요. 우리 역시 그분을 따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발을 씻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세상의 더럽혀진 발을 씻으러 나서야 합니다.




가계치유 반박

그날이 오면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죽을 사람은 죄지은 그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예레미야 31장 29-30절)

가계치유 이론의 허구를 밝혀주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입니다.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아니면 조상이 죄를 지었다고 그 죄 자체가 대물림되지는 않습니다. 그 죄의 결과들은 그럴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내가 못된 마음으로 방에 똥칠을 해 놓으면 그 똥칠한 방을 이어받을 사람은 그 냄새에 시달리긴 하지만, '똥칠한 죄'는 그 사람에게 없는 셈입니다. 혹시 주변의 누군가가 '조상의 죄'를 사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가만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오시기 바랍니다. 행여 여러분이 올바른 정보를 알려줄 책임이 있는 사람(반장, 레지오 단장, 교리교사 등등)이면 위의 성경 구절을 통해서 잘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우리 성교회 안의 양들을 홀려내려는 이리떼와 같은 이론과 그 추종자에 놀아나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식과 욕구

밥을 굶어본 사람은 누구나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밥을 굶는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밥때가 다가올 때까지 '배고픔'이 극심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중에 맛있는 냄새라도 풍기기 시작하면 온가지 밥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가 일쑤입니다.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이 순간을 견뎌내기가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식욕'이 사라지는 걸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극심하던 식욕이 어느새 안정되고 그닥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추구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오히려 세상 욕구가 극심해집니다. 차라리 세상에 섞여 살면 아무런 욕구도 없을 것을 괜히 하느님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이러한 욕구들이 판을 치는 셈입니다.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던 텔레비전이고, 가족과의 대화인데 홀로 고요히 방에서 기도를 드리려는 순간부터 그러한 것들이 어찌 그리 재미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세상을 향한 욕구가 극에 달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단식에서 느껴지는 배고픔처럼 '거룩함을 향한 추구'에 있어서도 한바탕 욕구의 쓰나미가 휩쓸고 나면 어느덧 잠잠해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어둠의 영은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걸 지독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해지겠다'고 작심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온갖 미끼를 던지는 셈입니다. 어둠의 영은 과연 우리가 어디에 걸려 넘어질런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이기에 온갖 미끼들을 다 던져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순간을 인내로이 잘 견딜 수 있다면 우리는 한 걸음 진보하게 되는 셈입니다. '인내'를 한껏 발휘해 보시길 바랍니다. 욕구의 쓰나미는 크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쓰나미가 지나가면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 찾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모자람

'모자람'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가운데에 사람은 곧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쾌락'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암에 걸리던지 풍에 걸리던지 하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히 '돈'만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건강'을 되살려보려고 기를 쓰는 안타까운 이들도 있습니다.

'모자람' 가운데 진정한 신앙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자람'은 우리를 '충만'으로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그 모자람은 여러가지 양태로 다가옵니다. 물질적인 부족, 정서적인 부족, 사랑의 부족… 그 모든 부족함은 우리에게 이 땅에 산다는 것의 '한계'를 가르치고 '영원'을 일깨우는 셈입니다.

또한 이 '모자람'으로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시작합니다. 내가 배가 고플 때에 우리보다 더 배고픈 이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는 셈입니다. 내가 굶주려보지 않으면 이웃의 고통은 그저 '이미지'에 불과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전혀 실제가 아닌 것이 되지요.

교황님께서 시리아를 위한 단식을 요구하셨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단식하며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 불편함과 굶주림의 체험을 통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곳 사람들의 '부족함'을 간접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대화

신학교 식탁 자리에서 제 최고의 고민은 '대화'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재간이 뛰어난 친구들은 식탁 자리에 곧잘 세상의 소식들과 온갖 주변의 소식들을 들고 와서는 화기애애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반면 저는 언제나 수동적으로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나마도 그런 친구가 없는 자리면 저는 소위 '공황상태'에 빠져 들곤 했습니다. 이든 저든 대화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주제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생긴 버릇이 밥만 쳐다보고 먹다가 식사 속도가 엄청 빨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야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진솔하지 못한 수많은 말마디들을 서로 주고 받는 동안에 결국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저는 여전히 실제로 만났을 경우에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게 '미사강론'이나 '성경강의'의 자리를 주면 제 모습은 너무나도 달라집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들에 우리는 지나치게 관심을 쏟아붓고는 말을 키워 나갑니다. 그러면서 마치 그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면 정말 큰일이나 날 듯이 이야기를 하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과연 그들이 정말 알지 못하면 큰일나는 '진리'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일상적인 대화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녀들이 겪은 것들을 쏟아내게 도와줄 필요가 있지요. 부모님이 소위 영성생활을 한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면 한창 말을 배워야 할 자녀들로서는 합당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리 분별이 가능한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상 세상의 주제만을 꺼내어 공허한 말잔치를 벌이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런 자리를 가능하다면 조금씩 가지치기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단 맛

우리의 수덕 생활은 무언가를 참아 받아 현세에서 돌려받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의 수덕 생활은 고3 수험생이나 취직을 준비하는 예비 직장인들, 승진 시험을 치르려는 이들이 모두 이미 하고 있는 '현세적' 수덕생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그 자체를 사랑하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물론 이는 표현이 쉬울 뿐 실제로 저부터도 문제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곧잘 신앙생활 안에서도 모종의 현세적 '보상'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지금 제가 하는 선교생활도 그런 '보상 시스템'에 종속될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이 정도 해외에서 봉사를 했으니 앞으로 국내에 들어가면 좋은 자리를 주시겠지'라는 유치한 생각에 빠져 지금의 삶을 참아 견디는 거라면 이는 참으로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수덕생활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희망' 따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 '세속 안에' 살아가던 우리로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당신의 잔을 마시게 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단맛을 섞어서 주시다가 조금씩 우리 영혼이 성장해 나아감에 따라서 단 맛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될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단 맛이나 위로도 없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지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글을 쓰는 저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은 오게 될 것이고 그때에 우리의 내면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세 가지 덕만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충만은 모조리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영성지도

처음 신학교에 입학해서 준주성범을 읽으면서 저는 그야말로 '맑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닥 가진 것도 없었고 주어진 삶 속에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읽는 '준주성범'은 그야말로 단 꿀과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짐이 늘어나고 맡은 직분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명예와 권력도 늘어난 셈이었습니다. 갈수록 거룩한 것에 다가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를 버림'이라는 주제는 듣기에도 거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는 또다른 느낌으로 준주 성범을 대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순수함은 아니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의 결의와 실천 안에서 그 가르침들을 접하고 있지요. 처음의 머리로 받아들인 가르침을 삶으로 조금이나마 이루려고 노력하는 데에 십여년이 지난 셈이네요.

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영적 지도자'가 있었다면 상황은 참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저의 삶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그 순간순간 새로운 비전으로 바라볼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저의 영적 성장은 더욱 빨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저에게는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저를 달리 쓰실데가 있으셨나 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무절제하게 수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시고 그 가운데 여러분들이 할 바를 찾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겪을 필요가 없는 과오들은 예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책들을 구해서 읽으십시오. 영성의 고전으로 알려진 저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책으로 만남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많은 지혜를 깨우쳐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모든 성인들의 기본 텍스트였으니까요. 교과서와 같은 셈입니다.

길을 찾는 이는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초대하시고 길을 알려주시고 도움을 주신 분이십니다. 늘상 문제가 된 것은 우리의 고집이었지요.



'하느님'이라는 이름의 도구

하느님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강한 의지를 내면 깊숙한 곳에 숨기고 하느님을 찾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하느님을 통해 찾습니다. 즉 하느님이 '도구'이고 자신들의 욕구가 '주인'인 셈이지요. 이론만 이야기하면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구원받고 싶어요."
적지 않은 이들이 '구원'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 말마디의 핵심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요? 이들의 구원은 '안락, 평화, 안정'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안락, 평화, 안정'의 앞머리에는 늘 '세상의' 라는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들은 지극히 세상적인 차원인 셈이지요. 그러니 이들이 하는 신앙생활 가운데 아주 작은 '도전'거리만 주어져도 이들은 금새 실망을 하고 신앙생활 모두를 내던지려고 애를 씁니다. 처음에 교리교사나 반장으로 일을 하면서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관심을 가져주고 일이 잘 되어갈 때에는 마치 세상을 구원할 듯이 나서다가 지극히 작은 문제거리를 만나거나 신부님에게 섭섭한 말을 듣거나 함께 일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불화가 생기거나 하면 금새 토라져서 심지어는 성당도 나오지 않으려 합니다. 얼마나 유치한 수준의 신앙생활을 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셈입니다. 결국 이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추구해 온 바는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자신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 '명예'로워지고 싶은 욕구와 같은 것들을 '교회'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채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결국 이들에게 '하느님'은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조금은 느낌이 오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감사'드려야 할 일인데 우리는 당장 눈 앞에 그분께서 놓아주신 '훈련거리'들을 두고서 투덜거리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사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련 거리들이 더욱 가혹하고 잔혹한데도 사람들은 거기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단 맛'을 체험하고 매달리기가 일쑤입니다. 세상은 참 교묘하지요, 그 단 맛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들고 그칠만 하면 또 다른 단 맛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영혼을 점점 잠식해 들어갑니다.

다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돌아와서 하느님을 도구로 삼던 어리석은 행위를 그만두고 그분을 중심에 두고 우리가 그분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들을 다듬기 위해 마련하신 시련을 참아 견뎌내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점점 더 다듬어진 도구가 되고 더욱 훌륭히 그분의 뜻에 함께하며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혜

젊은 분들, 주변을 보고 배우세요. 한 사람이 일생에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을 나의 내면에 품고 성찰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지혜는 불쑥불쑥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한 사람은 거기에서 온갖 잡다한 정보들만을 얻어내고 공허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다른 누구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진가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렇게 같은 정보를 통해서 두 사람이 겪는 체험이 서로 다른 이유는 바로 그 각자의 내면에 무엇을 '중심'으로 두고 있으며, 분별 기준을 무엇으로 잡는가 하는 데에 달린 셈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아이는 주변을 바라보면서 '돈'에 관한 정보만을 캐치해 냅니다. 주변의 친구들과 친척들 속에서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사람들을 고르고 그들에게 다가서곤 합니다. 심지어 이런 아이들은 '부모'마저도 경제의 대상으로 취습해서 쓸모가 있을 때는 섬기는 척을 하다가 나중에 늙고 병들면 가차없이 내던집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세상인 셈이지요.

'사랑'을 찾는 아이는 주변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가진 '사랑'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거기에서 정보를 얻어냅니다. 이들은 주변의 친구들과 친척들 속에서 '사랑이 가득한' 이들을 분별해 낼 줄 압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쥐어준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그 어떤 '사랑'도 읽어낼 수 없다면 이 아이의 마음은 그리로 가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랑'을 바탕으로 그 정보를 수집해 나갑니다. 싸우는 두 사람을 보고 '이해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 집중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요.

젊은 사람이지만 '지혜'가 뛰어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근본 핵심에 무엇을 두고 주변에서 배우고 익히는가에 따라 달린 셈입니다. 그러니 젊은이 여러분 지금 부터라도 여러분의 내면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기준점을 두시고 주변을 분별하세요. 정말 많은 것들을 단시간에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주님께서는 그 영혼이 마음에 들어 그를 악의 한가운데에서 서둘러 데려가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 일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곧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죽은 의인이 악인들을, 일찍 죽은 젊은이가 불의하게 오래 산 자들을 단죄한다." (지혜서 4장 13-16절)



그 날

그 날,
사람들은 은총을 찾아 헤메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될 것은
그 동안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총의 기회를
너무나도 소홀히 내쳐버린 자신의 모습일 것입니다.

맡은 책임감이 더 컸던 이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심판의 엄중함에 더욱 놀라게 될 것입니다.
양들을 먹이고 다스려야 했던 그들은
오히려 양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젖을 짜 먹고 털로 옷을 해 입는 데에만
전념을 해 온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에게 봉헌되었던 이들은
그 봉헌이 단순히 외적인 삶의 봉헌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내밀한 곳으로의 초대였음을 뒤늦게 알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최고의 환경 속에서도 늘 내면으로 세상을 탐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미사의 은총을 갈구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미사를 너무나 소홀히 해 왔던 그들은
자신에게 자비를 갈구할 자격과 능력마저 없음을 보고
크나큰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늘 세상이 모두 끝장나기를 바라왔던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끝장난 그 날에
이 세상의 남은 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이 자신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단 한 번의 기도와 선행이 세상을 떠난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이 모든 것들은 일어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지금부터 분주히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가 세상에서 신경써온 그 모든 것들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고
결국 우리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지시문

1) 문으로 들어가시오.

2) 앞으로 가세요. 문을 여세요. 들어가세요.

3) (오른발부터) 앞으로 가세요.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붙들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문을 여세요. (고개를 들고 얼굴에는 미소를 띄우고) 들어가세요.

더욱 더 상세한 설명을 할 수록 우리가 선택할 옵션은 작아집니다. 지시문이 많은 사회, 메뉴얼이 더욱 상세한 사회일수록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할 여지는 없어지는 셈입니다. 물론 '안전'하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너도 나도 이 지시문을 따르면 그 사회는 참으로 안전한 사회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 한 명이라도 이 지시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지시문을 따르는 이들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런' 일이 생기는 셈입니다.

요즘 연예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가 느껴야 할 것마저 지시해줍니다. 저는 사실 그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점점 싫어지고 있습니다. 웃어야 할 자리에 웃음 소리와 함께 그게 왜 웃긴지를 자막으로 설명해주는 프로그램들, 우리는 그에 따라 함께 웃지만 우리의 마음은 공허할 뿐입니다. 저는 이를 '무섭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치 로보트처럼 모두가 '와하하'하고 웃기는 하는데 정작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자기 안에 든 게 하나도 없는 공갈빵입니다. 외모는 깔끔하고 단정하고 직업도 있고 돈도 벌고, 사회적인 직분도 꽤나 높은데 이 사람의 가슴에는 바람이 휑하니 붑니다. 나이가 지긋한 50대 아저씨를 만나 대화를 나눠보아도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3살짜리 꼬마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의 원초적인 욕구라는 것은 참으로 유치할 지경입니다.

한날은 보좌로 있던 옛 본당에서 저에게 자기 차를 자랑하던 중요 사목 위원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이게 3억짜리인데요… 뭐 별 거 아닙니다. 회사에서 주니까 어쩔 수 없이 타긴 하지요. 한번 타보세요." 유치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그 놀이에 동조를 해 주었습니다. 타면서 "와~ 좋으네요. 참 별 스위치가 다 있네요. 등받이, 허리, 다 움직이네요. 와~ 신기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얼마나 가련한 영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이 하는 '사목회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뻔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가련한 영혼들에게는 하나에서 열까지 '지시'를 내려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지시'로 가득합니다.

- 주일 미사 참례
- 교무금 내기
- 금육재와 단식재 지키기
- 판공성사 보기

뭐 이런 온갖 지시문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들은 저 지시문을 지킨다고 신앙의 기쁨 따위는 벌써 잊어버린 지가 오래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미사를 나가는지보다 미사 중의 동작에 신경을 쓰고 자기를 거슬리게 하는 남의 동작을 살피기 일쑤입니다. 중심히 하나도 없고 지시문만을 습득해서 또 그걸 남에게도 적용 시키는 지시문 적용 장치가 되어 버린 셈이지요.

지시하는 분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그분이 원하시는 걸 뭐든 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미 내린 지시와 세부적인 면이 좀 달라도 별 상관 없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지시문에 종속되지 않게 되시길 바랍니다. 오직 그분이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따라 가십시오. 그 지시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리키는 방향에는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 없으면 안된다

이 착각 만큼 보편적이고도 꾸준한 착각이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하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이든 저것이든 계속 챙겨야 하고 신경을 쓰다보니 일이 점점 늘어가는 셈입니다. 그렇게 잡고 있는 일이 결국 나 스스로를 점점 죽여가는 셈입니다. '죽음'이라는 건 다름이 아니라 '현재'를 잃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현재'가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사람이지요. 우리도 두 가지 의미로 죽습니다. 이 현재를 과거에 갖다 바치거나 '걱정'이라고 불리는 미래에 갖다 바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죽어가는 셈이지요.

나 없어도 될 일들이 수도없이 많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입니다. 저 없어도 본당은 돌아갑니다. 저는 그 가운데에서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을 돕고 있는 것이지 제가 이 본당의 핵심 엔진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 하나 없어도 가정은 돌아갑니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홀연히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 가족은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을 찾습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대놓고 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 제 살길을 찾아 나가게 마련입니다.

내가 머무는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참 많이 경험한 바인데, 저 하나 없어도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 많던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제가 속해있던 사회에서 제가 일순간 떠나온 경험이 많지만 그들에게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가 많이 몸담아 왔던 곳이라면 살짝 술렁임이 있었을 뿐, 그 뒤로는 또 자기들의 역사를 새로이 만들어 왔습니다. 섭섭해 할 것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유일한 자리는 바로 우리의 내밀한 공간입니다. 나는 나의 결정권을 쥐고 있어서 이 자리에 내가 없으면 큰일납니다. 헌데 많은 현대인들은 이 내밀한 자리에 '세상'을 잔뜩 집어 넣어 두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할 줄 모릅니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 지 몰라서 세상이 좋아하라고 하는 걸 좋아합니다. 스타벅스커피, 루이비똥, 스포츠카… 심지어는 그 좋아하는 이유도 아주 찬란하게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내면에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 정말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건가?"

절대로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스스로에게 이런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재물, 명예, 권력의 춤사위에서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게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 나갑니다. 그러다가 '답'을 만나게 되지요. 바로 '하느님'입니다.

네, 수많은 분들이 여기까지 읽다가 "에이… 그래도 그렇지…"라고 생각하실 걸 압니다. 충분히 상상되는 일이지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을 무너뜨리는 셈이니까요. 지금까지 이 직장을 얻고, 이 명성을 얻고, 이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그리고 앞으로 설정해 놓은 곳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가서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하는 이런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건 패배자의 길로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제시하는 새로운 길은 '뒷걸음'치는 게 아닙니다.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키고 있기에 너무나 생소하고 두렵고 공포스러울 뿐입니다. 마치 물 위의 배 안에서 풍랑을 만나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이 배를 어떻게 저을지, 배가 잠기면 헤엄을 칠 수는 있을지, 물에서 잡을 지푸라기라도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는' 꼴이니 공포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은 여러분들이 지금 노력하는 것을 잃고 얻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하는 고민은 전혀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지요. 왜냐면 일단은 지속하던 추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의 환상은 치명적입니다. 이 조금만 더를 위해서 '내가 없으면 안되는' 상황인 것이지요. ㅎㅎㅎ 조금만 더 하면 우리 가족이 경제적 안정을 얻고 행복해질텐데… 헌데 그러다가 덜컥 암에 걸리게 되면서 모든 게 파탄나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지금 아이들 얼굴을 마주하고 뽀뽀라도 한 번 더 해 주었다면 나았을 것을. 우리는 '나 없으면 안되'라는 헛된 공상 속에서 오늘도 하루를 살아갑니다. 우울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믿음 안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한 미친 아버지일 뿐입니다. 자기 자식을 희생제물로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아버지, 그것도 그 아들을 불사를 장작을 아들 등에 지운 채로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올라가는 내내 내면으로 울고 또 매달렸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손에 칼을 쥐고 누워 있는 아들을 향해 내리치려는 그 순간마저도 극심한 고뇌에 사로잡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눈 앞에서 놀라 버둥거리는 아들보다도 더 극명한 현실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었습니다.

'믿음'이라는 시선 안에서 아브라함을 바라볼 때에 비로소 그가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와 그 아들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이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선물을 기꺼이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 그 선물을 다시 거두어 가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아브라함의 시련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 시대상에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연로한 나이에 낳게 된 외아들처럼 소중한 것을 내어바칠만한 믿음을 지닌 이들을 오늘날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일미사 때마다 내 지갑에 든 '아들'을 걱정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고르고 골라서 나의 '탐욕'이 허용하는 선의 것을 꺼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그 수준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비록 포도밭에 늦게 들어왔지만 같은 상급을 받게 될 테니까요. 우리가 가진 그릇들은 그분의 나라에서 충만히 채워질 것입니다. '충만함'에는 그 누구도 차이가 없습니다. 소주잔이 가득 차는 것이나, 맥주잔이 가득 차는 것이나 용적의 차이만 있을뿐, '가득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쁨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잃었던 아들과 하느님에 대한 더욱 큰 믿음에 불타오른 그의 기쁨을 우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아버지이신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길이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내면의 소중함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기도를 바치고, 식사 전에 식사기도, 식사 후에도 감사기도를 바치고, 저녁에는 미사 참례를 하고 돌아와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럼 이 사람에게는 '구원'이 보장된 것일까요?

신앙은 '외적인 것'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올바로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한 사람이 영적 지도자 앞에 온전히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그 영적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분별로 그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선에서 우리가 주변 사람들이 드러내는 행실 만으로는 그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세속에서 늘 아침마다 빵 5개씩을 먹다가 수도원에 와서 빵 2개를 먹는 사람과, 세속에서 단식을 늘 일삼다가 수도원에 와서 빵 1개를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 속사정을 아는 하느님은 빵 2개를 먹는 그의 희생을 더 어여삐 여기실 것입니다. 물론 일을 지극히 단순히 보았을 때에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의 '신앙상태'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가 어떤 내면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신앙생활의 투철함 속에서 스스로의 교만의 탑을 쌓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종의 특징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곧잘 남들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가하거나 수근댄다는 특징입니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 말할 시간도 없이 스스로를 살피는데 바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꺼내는 순간 우리는 '심판자'의 자리를 자처하는 셈이지요.

한걸음 한걸음 신중히 스스로를 살피고 걸어 나가시갈 바랍니다.



인간의 노력이 신적 지혜를 만날 때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나이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호숫가에 살면서 꾸준히 어부 생활을 해 왔겠지요. 그는 베테랑 어부였던 셈입니다. 그런 그가 밤새도록 노력해서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전혀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방법을 다 써 보았겠지요. 하지만 고기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간의 지혜가 도달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셈이지요.

바로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는 도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다 짜내었는데 실패한 일에 어부도 아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명령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저하게 되지요. 어찌보면 나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실행하는 그 자체로 나는 그의 권위를 수용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참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행하게 되고 엄청난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삶에서 반복됩니다. 우리는 때로 심각한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고기잡이'로 묘사되지만 우리들에게는 여러가지 다른 정황으로 다가옵니다. 직장문제, 자녀문제, 가정문제… 우리로서는 나름의 지혜를 다 짜내서 해결을 보려고 작정을 하고 달려들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공허한 마음'을 쥐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을 마주하고 그 신앙이 전해오는 '엉뚱한' 명령을 듣게 되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모든 욕구를 내려 놓으시고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기도하세요.' 여기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도전에 직면하는 셈입니다. 그 말을 듣고 실행하던지 아니면 우리의 남은 지혜를 더 짜내어 아둥바둥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는 참으로 단순하지만 명료합니다. 그리고 실천하기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항하고 또 저항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한계에 다다르면 그에 굴복하곤 하지요.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의 겸손이 그를 가장 으뜸가는 사도로 만든 셈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경박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적 결함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런 결함은 주님의 권능 앞에서는 아무런 하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훌륭히 이끌었고,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자신의 죽음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 도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많으신가요? 주님 앞에 힘을 좀 빼시는 게 어떨까요?


이성과 사랑

이성적으로 따져서 우리가 상대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경우가 있다. 그가 사랑스럽지도 않고 더군다나 죄인이라면 더욱 최악이다. 우리의 이성은 전혀 '사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은 이성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고작해야 사랑할 합당한 이유를 찾는 데에 쓰일 뿐이다. 귀여운 꼬마 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사랑을 해 주고, 노약자는 '보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사랑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해야 했는지를 이성으로 성찰하려고 들면 결국 우리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셈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논리에 따라'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하찮은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는 '신적 사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분의 드높은 사랑을 본받고자 하는 셈이다.

나아가 한 가지 더 재미난 사실은, 그렇게 초월적인 사랑을 하고 나면 '이성'도 그에 합당한 '거룩한 이유'들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언뜻 뚜렷한 논거를 바탕으로 수립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일단 사랑에 빠지고 나면 우리의 이성도 들어높여져서 그에 합당한 '거룩한' 초월적 논거를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마치 한 꼬마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사탕의 갯수만을 헤아리면서 10개 중에 하나를 겨우 친구에게 줄 수 있었다면, 이 꼬마가 부모님의 사랑을 절절히 체험하면서 결국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손에 쥔 사탕을 모조리 다른 친구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러면서 이 꼬마는 다시 그 수십배의 사탕을 부모로부터 받는다는 약속에 부풀어오르는 셈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부모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고 이성적으로도 동의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손에 쥐어진 것만을 바라보고 아까워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이들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밝혀지는 셈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현세의 자녀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법과 사랑

제가 제일 꺼려하는 부분이 '사무적인 일'입니다. 주임 신부로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교회법적인 일'이 있습니다. 가장 자주 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혼인'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에는 혼배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혼배 관계를 살피고 필요한 수순에 따라 도와주면 됩니다. 모든 데이터가 전국적으로 공유되기 때문에 큰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세례를 받은 본당이 폐쇄되거나 화재가 나거나 가지고 있던 서류를 잃어버리게 되면서 그의 '세례'를 입증할 수단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또 그 본당이 아직 존재한다고 해도 이들이 거기에 방문을 해서 '세례 증명서'를 떼기에는 너무나 곤란한 상황이 번번이 일어납니다. 전에 살던 곳으로 갈 시간과 경제적 여력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실 '영성적으로' 봤을 때 세례를 받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증언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세례 증명서'를 토해서 '새로운 신분증'이 발급된다는 특이한 현실에 있습니다. 예컨대, 마약 거래를 하는 이들이 두 가지의 신분증이 필요할 때에 이런 방법을 종종 쓴다는 것이지요.

한국적인 상황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분증과 세례 증명서가 어떻게 연계가 될 수 있는지 말이지요. 동사무소만 가도 언제나 데이터가 있고 금새 신분증을 만들 수 있는데 왜 굳이 교회의 세례 증명서가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는 아직도 신분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워낙 오지에 살고 거기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면서 행정적인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들인 셈이지요. 그런 이들이 도심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등록절차'가 없던 그 시절이지만 가톨릭 사제는 그 오지에까지 가서 사람들과 함께 머물면서 '세례'를 준 셈이지요. 그래서 바로 '세례 증명서'가 그의 출생 신분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고, 그것이 아직도 행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국가는 여전히 그런 그들의 세례 증명서를 통해서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충 하다가는 감방에 끌려갈 판인 것이지요.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마는 교회는 주임 사제들에게 주의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래서 그런 '세례증명서'를 신경쓰다보면 정작 '혼인'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자녀들의 기를 꺾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깐깐한 주임 사제라도 만나는 날에는 그냥 차라리 '혼인'을 포기하는 게 나을 정도니까요. 죽어도 세례 증명서를 떼어와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 셈입니다. 이러한 일은 적용 분야가 다를 뿐 한국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런 저런 혼배 문제로 고심하는 부부들을 대하면서 주임 사제는 가능한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하지요. 좀 복잡하다 싶은 케이스가 오면 '안된다'고만 하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셈입니다. 

이러한 '절차'에 대한 것과 '행정적'인 요인들을 고심하다보면 결국 왜 이러고 있는지 곧잘 까먹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이 세상의 '규율'과 '법'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고자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 셈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의 법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주님의 법은 정말 우리를 살리기 위한 법이니까요.

우리는 곧잘 법적인 것으로 서로 다투면서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사실 법으로 따져서 그 모든 올가미를 통과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숨막히는 일이지요. 사회의 기초를 다지는 법은 필요하지만 세밀한 세칙을 일일이 적용시키는 데에 있어서 행여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도 혼배 면담을 몇 건이나 치르면서 행여 제 마음이 그런 '법적 절차'에만 사로잡히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주임사제의 자리는 행여 자칫 잘못하면 '심판관'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목자입니다. 그것도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자 하는 목자입니다. 잊지 않도록 합시다.


존재

하느님은 '존재'를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존재는 먼저는 우리 육신의 존재입니다. 그저 단순히 뼈와 살을 형성하셨다는 게 아니라 우리 '물질계' 자체를 이루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야말로 원소 하나가 스스로 붕괴되지 않고 머물게끔 유지시키는 분이시지요.

다름으로 이 존재는 우리 영혼의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숨결로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고 이 영혼 안에 당신의 '모상'을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절대적인' 자유의지입니다. 이 자유로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창조주마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엇나가는 것을 막고자 '한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우리의 육신이 스러지는 때이지요.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상태에 있던 인간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죽음은 우리의 '교만과 죄'로 인해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인간들입니다.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존재하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존재', 즉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그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자체로 그 존재를 부여하신 하느님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셈이지요.

하지만 마치 이 '존재'를 자기 자신이 부여하기라도 한 듯이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가 붕괴되는 날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영혼이라는 존재가 죽음 이후에 얼마나 지속되는 것인지 지금의 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가 걱정할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지금 이 현세에서 하느님께 열심히 마음을 들어 바치고 그 사랑을 받아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임무인 것 같습니다. 


과학과 신앙

과학 시간에 다들 배우셨을겁니다. 원자의 구조에 대해서, 사실 원자는 알갱이가 아니라 그 중심에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엄청나게 활동적인 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정적이고 고요한 '돌맹이'를 하나 바라보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셈이지요. 학자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 양성자와 중성자 안에 '쿼크'가 있다는 걸 알아내었고,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마다의 이론으로 갈라서 있지요. 가장 작은 알갱이를 찾아 나선 자리에 엄청나게 복잡하고도 알길없는 이론들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셈입니다. 다들 수학적으로 진리이지만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개의 진리가 난립해 있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대책없는 상황 속에서 '과학자'들은 점점 '철학자'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이 모든 걸 '입증'할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설과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신념의 싸움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갈라진 '끈이론'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헌데 이처럼 하나도 정돈되지 않은 가장 최소의 입자의 난국을 바탕으로 과학은 튼튼하게 서서 여전히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화성에 로봇을 보내고, 실생활에 쓰이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지요.

많은 이들이 과학과 신앙은 절대로 함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과학은 하느님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향한 신앙을 바탕으로 그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인간들의 호기심과 욕구로만 이루어지는 과학은 곧잘 그 어두운 면모를 드러내기 쉽상입니다.

하느님은 과학을 심판한 적이 없습니다. '기술'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지적 능력의 총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만을 100% 신뢰하려고 할 때에 거기에서 많은 문제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네, 원자의 더욱 작은 구조에서 과학은 '미스터리'를 만난 셈입니다. 그리고 저는 과감히 그것을 '하느님'의 손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모든 것들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신 분의 손길을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지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태양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는 그 질서의 신비 속에서 저는 하느님을 느낍니다. 원자 내부의 그 신비로운 구조 속에서도 하느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넣어 놓으셨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하느님께서 원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기를 멈추신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그대로 붕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태양에서 지구를 조금만 떼어 놓으신데도 지구는 얼음의 별이 될 것이고, 조금만 가까이 놓으셔도 지구는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서로 더 가지지 못해,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해 욕심을 부리고 있는 셈이지요.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자비이며, 또한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그러이 보아 주시고 또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이지요. 하지만 마지막 날에 그분의 정의 역시도 숨김없이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태양계 말고 다른 항성계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우리가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자만하지요. 이 자만이 언제까지 갈런지요? 


두 종류의 병자들

어제 성경강의에 왔던 한 아주머니가 오늘 오전에 자기 남편 병자 성사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준비해서 갔습니다. 그 집에는 다리 저는 딸이 하나 있는데 가는 길에 같이 데리고 갔지요.

들어서니 집 마당에 아저씨가 소변 주머니를 차고 앉아 있었습니다. 먼저 고해 성사를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아저씨의 어두운 과거를 스스로 드러내는 순간이었지요. 아저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병자성사가 이어졌고 죽음을 앞에 둔 분이었기에 전대사와 성체를 모시는 것도 허락했습니다. 병자 성사가 끝나고 나서 아저씨가 갑자기 무엇이 무척이나 답답한듯이 얼굴을 감싸쥐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연거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입 주변이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지요. 글쎄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딱히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지요. 그저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나를 다시 부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본당에 돌아왔습니다. 다른 환자 한 명이 본당으로 찾아 왔습니다. 자기 집을 찾아올 수 있겠느냐며 말을 꺼내더군요.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환자이고 제대로 보행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도움'도 요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술비가 5000달러가 드는데 일단 반을 내면 수술을 시작할 수 있다고 의사가 매몰차게 거절해서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말을 시작했습니다.

"자매님, 교회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네, 물론 필요한 돈은 돕기도 합니다. 방금도 저는 가난한 정말 가난한 집에 가서 병자성사를 주고 물질적 도움도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가게 되어 있어요. 저도 죽을 거고 당신 옆에 있는 저 청년도 죽을 거예요(그 아줌마의 아들). 그러니 우리가 신경써야 하는 것은 영혼의 평화와 안정인 셈이지요.

고통에는 언제나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나의 잘못으로 시작되는 것인데, 담배를 피지 말라는데도 고집을 계속 피우면서 피다가는 결국 그 결과를 얻게 되지요. 다른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요. 이 각각의 고통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고통을 지고 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사제로서 자매님의 영혼을 돌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일을 실제로 하고 있지요. 미사와 성사를 드리고 병자를 방문해요. 그리고 정말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지금 자매님이 원하시는 건 저로서는 도와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지금 고해성사를 원하시면 당장 드리지요. 어때요? 성사를 보시겠어요?"

그러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줌마를 데리고 제의방으로 갔습니다. 고해 성사를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제 남편과도 같이 살고 있지 않고…"

"잠깐, 잠깐만요. 자매님, 죄가 없으면 고해를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싶으세요?"

자기는 죄가 없답니다. 집에 성상들도 종류별로 다 있고 나름 '껍데기'로 열심한 신자인 건 틀림없나봅니다. 아주머니에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도구일 뿐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건 하느님이지 제가 아니예요. 자매님은 저를 휴대폰처럼 쓰셔서 하느님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랑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자매님의 내면을 다 알고 계세요. 근데 죄가 없으시다니 자매님은 '성녀'이시고 고해성사를 보실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묻는 거구요. 성사 보고 싶으세요?"

우물쭈물합니다. 뭔가 캥기는 게 있지만 사제 앞에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거지요. 그래서 저는 영대를 벗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더 준비되거든 새로 고해를 청하세요. 제가 봤을 때에는 아직 자매님은 준비되지 않았어요. 하느님 앞에 겸손하시길 바래요. 그리고 상태가 악화되어서 더 이상 집 밖으로 나다닐 수 없게 되면 언제라도 아드님을 보내세요. 제가 찾아갈 테니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로서는 성경의 바리사이와 죄인의 구절을 실제로 체험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같은 병자이면서 한 명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다른 한 명은 하느님 앞에 서기도 부끄러운 죄인으로 있었지요. 누가 더 많은 은총을 받았을 지 저로서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허함과 충만함

많은 말을 쏟아내는 만큼 우리의 마음은 더욱 공허해지게 마련입니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고(그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올곧다고 생각하는 일에 헌신한다 하지만 결국 그 자리는 우리의 내면을 부산하게 만들게 됩니다.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는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분짓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정 반대이죠, 이들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을 하고 그 밖의 것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주어진 직분 안에서의 일을 합니다. 미사를 거행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립니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거의 모든 활동과 자신의 그릇된 욕구를, 심지어 때로는 스스로의 정당한 욕구 마저도 자제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해야 할 것'들을 잔뜩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실체를 가만히 살펴보면 '허무'가 숨어있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최신 흥행 영화를 보아야 해!"라고 하고 "저 옷은 사야 해!", "저 물건은 구입해야 해!", "이런 운동에는 마땅히 동참해야지!", "이건 좋은 일이야!", "이런 걸 빠뜨릴 순 없지!"라고 서로서로에게 할 일들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한 것들을 모조리 챙기려다보니 시간이 부족해지고, 부족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서 기술을 개발합니다. 그러다가 "위대한 침묵"의 다큐 속에 나오는 수도자의 삶을 만나거나 하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막연히 그들의 '충만함'을 부러워하곤 하지요.

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무시 당하고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께 헌신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헌데 정작 이는 철저히 무시당한 채로 우리는 소중한 시간과 노력들을 '하느님 아닌 것', 즉 새로운 시대의 '우상'들에게 갖다 바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경배 행위를 하고도 전혀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셈이지요.

먼저는 좀 쉬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조용한 곳으로 가서 좀 쉬십시오.' 그리고 나서 정말 해야 할 일을 골라내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하십시오.



자신과의 싸움

탄생의 순간 우리가 싸우게 되는 대상은 '환경'이다. 태어 나면서부터 엄마의 양수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엄마 뱃속이 아닌 모든 환경과 싸우는 셈이다. 우리의 유일한 반격은 '울음'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욕구의 충족을 위해 싸워야 했다. 배가 고프고, 뒤가 추적추적하고 이든 저든 내 욕구에 어긋나는 것을 채우기 위해 싸워야 했던 것이다.

다음의 전투대상은 '문화'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끊임없이 가르쳐주는 '올바름'을 습득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고, 말도 배워 나가야 했다.

그리고는 '상대'와 싸워야 했다. 사회화의 과정인 셈이다. 내 주변에 몰려드는 이들과 맞서서 서로의 욕구를 조절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는 한동안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싸움이다. 다시 돌아가서 욕구의 충족을 원하고, 모르던 걸 배우고,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참 치열한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짐에도 지칠 줄을 몰랐다. 똑같은 상대와 싸우면서도 전혀 똑같은 줄 모르는 것은 상대가 늘 다른 얼굴을 하고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탕을 더 원하는 거나 돈을 더 원하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국어를 배우는 거나, 영어를 배우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친구와 사소하게 다투는 거나, 어른이 되어 상대와 소송을 거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몸만 커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전혀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주체가 되어서 힘을 서로 공유하며 함께 싸워온 바로 '나 자신'이 싸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욕구'들은 당연한 것이고 마땅히 충족 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바로 나의 싸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셈이다. 이런 싸움의 자리로 나를 이끌어 준 것은 바로 나의 '신앙'이었다. 내 속에는 사실 '세상에서 길들여져 온 나 행세를 하는 무엇'이 들어 있었던 셈이었다. 신앙은 나를 참 행복에로 이끌어갔고 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이 껍데기에 불과한 나와의 전투가 불가피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는 중이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싸워 나가고 있다. 이 싸움은 아직 진행중이라 그 뒤가 어떻게 될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운 건 있으니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매일 매일 뿌리깊히 박혀 있는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허상과 실상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 놓여있는 사물들은 사실 그 고유한 가치에 '인간의 욕망'이 덮씌워져 있는 형태를 취합니다. 예를 들어서 연필을 한 자루 사는 것은 과거에는 글씨를 쓰기 위함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연필의 생산국과 외견, 그리고 연필 나무의 수입국과 상표에 의해서 분별이 되고 그러한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후자의 것들은 사실 '허상'입니다.

이 사물들의 '허상'이 우리를 힘들고 지치게 합니다. 그냥 사서 읽는 책은 책 그대로의 가치로 우리가 접할 수 있고 조금 더럽혀지더라도 별 상관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빌린 책은 여전히 빌려준 이의 책에 대한 '욕구와 관심'이 살아 있어서 행여 책을 더럽히기라도 하면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특히나 고가의 '가격표'가 붙은 것들에는 수많은 이들의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그걸 팔고 사고 들고 다니면서 실상 그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거기에 붙어 있는 인간들의 탐욕을 들고 다니는 셈이지요. 유럽의 유명 메이커 제품의 핸드백을을 들고 다니는 여성이나 그 제품에 관심을 집중 조명하는 여성이나 그 둘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다만 한 명은 그 탐욕 덩어리를 소유했고 다른 한 명은 소유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만일 원숭이 앞에 그 물건을 들고 왔다면 그 원숭이는 안에 음식이 있나 보고는 휙 던져 버리겠지요. 그리고는 바나나를 먹으러 갈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탐욕이 집중되는 것들은 시대마다 달리 변해 왔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책' 그 자체가 참으로 비싸고 귀한 상품이었지만 오늘날에 책을 귀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반대로 과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물건들이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집중 조명을 받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인간들의 욕구에 맞추어 그 탐욕을 충족시킬 희망을 주는 물건들을 개발해 낸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놀음에 놀아나고 있지요.

본질적인 가치를 가진 물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송사리가 뛰노는 도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온통 썩은 물이 흐르고 있지요. 숲을 거닐려면 도시를 벗어나야 합니다. 남은 동물이라고는 온 천지에 똥을 싸대는 비둘기와 빌딩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쥐들이지요.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사물의 원래 형태를 볼 기회조차도 상실한 채로 살아가기가 일쑤입니다. 집에서 시켜먹는 치킨의 원래 형태가 닭인 걸 아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소의 맑은 눈망울을 아는 친구가 있을까요? 말이라는 건 아예 상상도 못하는 미지의 동물일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물은 가격표가 달린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게 천만원 짜리다 하면 '우와~'라고 하고 이건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이라고 하면 '그래서 뭐?'라고 합니다. 자연물에 대한 경탄이 점점 사라져가고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물질적 가치로 바뀌는 시대,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인간적 존재감마저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는 중입니다. 사건 사고의 위험도는 '인간 사망자 수치'로 분별이 됩니다. 인간은 세상 속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셈이지요. 한 100명이나 죽으면 눈이라도 깜짝할까 그 이전에는 각 인간의 생명은 '수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지요. 의학기술과 보험이 모든 걸 '보장'하는 듯한 사회 안에서 살다가 행여 '암'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미친듯이 광분합니다.

사물의 본래적 가치의 회복,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회복이 참으로 시급한 시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업이 우리 신앙인들의 '영성의 회복'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참된 길을 걸어나갈 때에 그에 발맞추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세상 안에서 뭔가를 붙들고 아무리 애써봐야 제 꼬리를 쫓아가는 강아지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장 근본에 우리 인간성의 내면, 즉 영혼의 자리를 회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광기와 신앙

세속의 자녀들이 이해못하는 부류가 2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인이다.

미친 사람은 정상적인 루트를 벗어나 있다. 똥을 집어 향기롭다고 하고 양말을 손에 끼고 다닌다. 소위 정상인들은 이런 이들을 만나면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식'을 모조리 파괴하는 사람이기에 어떤 일을 어떻게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신앙인인데 이들도 사실 현대인들에게는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다. 예컨대 자기들은 모두 한 방향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이 '신앙인'은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네들이 돈을 벌 동안 이들은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고, 자기네들이 명예로워지려고 하는 동안 이들은 잊혀지려고 한다. 또 자기네들이 다른 이를 쥐고 흔들려고 하는 동안 이들은 그들을 위해 봉사하니 말이다. 그러니 때로는 이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관을 파괴한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죽었고, 그렇게 참 신앙인들이 박해를 당한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세계를 전복할 의도가 전혀 없다. 그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따르려는 것이지 그들이 가진 돈을 빼앗고 명예를 더럽히고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구성원으로서 더욱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게 도와줄 것이고, 자신들 스스로 명예로운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그들은 더욱 명예롭게 될 것이고, 그리고 세상의 권좌 아래에서는 그 역시 하느님이 세우신 권위이기에 순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 권력이 '양심'에 정면으로 위배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신앙과 광기는 외적으로는 비슷하지만 내면은 전혀 다르다. 광기에는 논리나 이성이 작용할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신앙은 그 안에 굉장한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지닌다. 다만 '하느님'이라는 튼튼한 토대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시작하기에 세상 사람들이 바탕하는 돈과 명예, 권력이라는 것이 전혀 '상관없을' 뿐이다.

믿는 이들을 향해 믿지 못하는 이들이 어처구니 없어 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고 공격하려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게 신앙인의 운명이다.

하지만 그거 아시는지 모르겠다. '신앙인'이라는 탈을 쓴 세상의 친구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다는 것 말이다. 이들은 세상의 친구이면서 '신앙인'인 척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실 '신앙'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하는 선행은 계산된 것이며 그들이 하는 희생도 그 이면에 '현세적 축복'에 대한 욕구를 한껏 지니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에게도 최면을 걸어 자기 자신이 신앙인인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믿음이 없으며 '믿음'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다.



지식과 영혼

언뜻 한국 사람들은 기본 소양이 무척이나 뛰어난 듯이 보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도 '문맹'은 거의 없고 제 이름 석자는 쓸 줄 아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두뇌 지식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관찰 결과로는 오히려 반비례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지식의 축적도 일종의 재산 축적에 비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그래서 '교육'에 대한 집중도가 여느 선진국에 못지 않습니다. 아니 월등히 뛰어납니다. 아이의 학업 시간을 객관적으로 따지면 선진국 아이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입니다. 그에 반해 성취도나 만족도는 훨씬 떨어지지요. 그야말로 엄마 아빠가 시키니 하는 것이고, 좀 더 커서는 사회가 시키니 하는 겁니다. 안했다가는 고립될 것 같으니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다 갑니다. 훅 가버리지요. ㅎㅎㅎ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지식을 뽐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오히려 우리는 가지고 있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게 너무나 미천해 그분 앞에서 더욱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동안 일자 무식이라고 무시하던 동네 박스 줍는 할머니가 그 내면의 영혼 안에 엄청난 보화를 들고 와서 하느님 앞에 갖다 바치고 칭찬을 듣고 더욱 드높은 곳에 들어높여지는 걸 보고는 더욱 더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도리어 교만합니다. 이는 수많은 '교수'들의 행태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많이 안다고 안하무인인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자기 전문 분야에서 좀 더 많이 알 뿐이면서 마치 세상을 다 샅샅이 읽고 있다고 혼자 착각하면서 그렇게 못배운 이들을 깔아 뭉개려 드니 그 영혼이 얼마나 천박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히려 겸손한 이들이 좋습니다. 제가 진솔한 마음으로 충고를 했을 때에 그걸 받아들이는 이곳 볼리비아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때로 만나게 되는 '학식이 높으신 분들'은 오히려 저에게 거부감을 줍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가진 '이성'의 도구로 저의 '진실성'이라는 영적인 부분을 재어 보려고 하거든요. 이는 마치 소금이 필요한 곳에 설탕을 뿌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많은 학적 권위자 분들이 스스로의 자리에서 내려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대전을 저술한 토마스 아퀴나스도 자신의 저작에 대해서 말년에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했을 정도니 우리가 알면 얼마나 더 알 것이며, 지닌 지식이 위대해봐야 얼마나 위대할 것입니까? 하느님 앞에 겸손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도리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내면이 미치는 영향

성경을 앱으로 만들어도 읽지 않는 건 똑같다. '접근성'을 더 쉽게 한다면 '접근하려던' 사람에게는 환영할 일이지만 원래부터 접근할 의도가 없는 사람에게는 매한가지다. 목이 마르지 않은데 컵에 물을 담고 컵받침을 하고, 꽃장식을 해도 그는 마시지 않는다. 결국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 하등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은 마로 이런 뜻이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사람들이 착해지는 것은 아니다. 착한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선을 행하고, 악한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악을 행한다. 그런 고로 우리 내면을 '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들, 컴퓨터, 스마트폰, 기술, 과학, 문명, 재능 등등등 모든 것들이 선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의 경우가 되고 우리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을 믿고 찾는 선한 이들보다 하느님 반대편에 서서 자기 욕구를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류의 운명'을 단축시키는 셈이다.




인터뷰

한 여자애가 찾아왔다. 대학생이라는데 보기에는 '초등학생' 같아 보인다. 목에 묵주도 보란듯이 떡하니 걸고 나왔다. 교수가 한 질문에 답변을 해 달란다.

"예수 그리스도나 교회에 일어난 일들 중에 중요한 규정은 무엇인가요?"

언뜻 이렇게 해석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되물었다. 이 질문을 이해하느냐고… 그러자 이 아이 우물쭈물대면서 '교수가 이 질문 그대로 질문하라고 했어요.'라고 한다. 한 마디로 질문을 본인 스스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냐고 알았다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 가자고 했다.

"가톨릭 교회의 숨겨진 저서는 무엇이 있나요?"

이 무슨 개뼉다귀같은 질문인가 싶었다. 그래서 교회는 숨기는 게 없고, 계시된 내용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러고선 도대체 무슨 과목을 배우느냐고 교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앞에 있는 아이가 상당히 당황한 것 같다.

"좋아. 하나만 설명할께. 우리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세상을 사랑으로 만들었다는 걸 믿고 그걸 공공연하게 가르쳐. 숨긴 책 따위는 없어. 너 지금 쥐고 있는 그 연필의 용도가 뭐야? (글씨 쓰는 거요.) 맞아. 연필은 글씨 쓰는 데에 쓰지. 그럼 인간은 왜 있을까? 돈벌려고 있지 그치? (애가 아무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니야! 지금 내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도 이해 못하고 있구나. 인간은 돈벌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점수를 따려고, 지식을 머릿속에 채워 넣으려고 있는게 아니야. 그렇게 대학교수가 되어 교만해 지려는 것도 아니지. 인간은 단 하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을 향해서 헌신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거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지. 네가 지금 이 질문을 들고 와서 하는 것도 나은 점수를 얻어서 인정 받아 '행복'해지려는 거잖아. 안그래? 하지만 '행복'과 '쾌락'을 착각하지는 말아. 쾌락은 일시적인 거지만 행복은 영원한 거니까.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나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오는 거야. 알겠니? 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거룩한 땅은 어디인가요?"

"거룩한 땅은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이 살았던 곳이지. 베들레헴, 갈릴레아, 유다 온 지방과 예루살렘이야.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구. 거룩한 땅은 단순히 그곳만이 아니야. 사실 거룩함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은 '거룩한 땅'이야. 따지고 보면 네 몸도 거룩한 땅이지. 그런 몸을 잘 가꾸고 보살피지 않고 성적 쾌락에 내맡기고 임신을 해서 낙태를 한다면 '거룩한 땅'이 '저주받은 땅'으로 변하는 셈이지. 사실 하느님은 이 '지구'를 거룩한 땅으로 만드셨어.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은 온 우주가 '거룩한 땅'이 되어야 해. 안그러니?"

"베드로는 언제 죽었나요?"

"베드로는 에수님의 부활 후에 신앙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 죽었어."

그리고는 차분한 어조로 아이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봐봐 꼬맹아. 질문을 하려면 먼저 본인이 질문을 올바로 이해하고 나서 하는 게 순서야. 그러니 돌아가서 네가 하려는 질문을 먼저 이해하고나서 나에게 돌아오도록 해. 나는 항상 열려 있으니까 말야. 휴대폰을 달라고 하면 휴대폰을 주지만 뭘 달라고 하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내어줄 수는 없는 거니까 말이지. 알겠니?"

알겠다며 감사하단다. 모르긴 해도 그런 질문을 내어준 교수 자체도 좀 얼빵한 사람일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셈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신앙의 위력

너나 나나 모르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박사도 '죽음' 이후의 사건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무시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높이려고 들지요.

클래식에 전혀 무심한 사람에게는 첼리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나 비올리스트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 똑같은 악기일 뿐이지요. 그러니 그들이 서로의 전문성을 들고 나서서 서로 어느 악기의 위대성을 입증하려고 드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할 일일 뿐입니다. 지금 울 집 앞마당의 강아지 순둥이가 새끼를 배어 낳으려고 하는 와중에 옆집에서 벌어지는 재산분쟁이 뭐이 그리 중요하단 말입니까?

그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종교는 결국 무엇이란 말입니까? 너도 나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는데 우리는 왜 이토록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고 그분의 사랑을 알리고자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갈리는 것입니다. 모르는 건 매한가지인 상황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도' 또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유니콘이라는 것을 한 꼬마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유니콘을 믿는 순간 그 아이는 유니콘을 언젠가는 만나리라는 희망 속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니콘이 아이의 삶의 행동양식을 뒤바꾸진 못하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역시도 '유니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마치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제시하는 듯 보이니까요. 하지만 하느님이 '유니콘' 따위와 절대로 비유될 수 없는 것은 그분이 지니신 실제적 힘이 '믿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결코 추상적인 무언가를 내면으로 인지하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분명한 '현존'과 함께 살아갑니다. 내면에 굳은 신앙이 생겨난 이는 세상의 그 어떤 유혹으로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마음 속에 유니콘을 지니고 사는 셈입니다. 그들은 '돈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그 환상은 보다 실제적인 무언가가 다가왔을 때에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음이 드러납니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가족이 모두 행복해지는 게 아니더란 말이지요. 하지만 '신앙'을 제대로 지닌 이는(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나 멋대로 믿는 척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보다 참되고 복된 삶을 유지합니다. 이는 제 자신의 체험으로도 그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바탕으로 보다 안정적이고 완성된 인간상을 드러냅니다.

반면 세상에 빠져 사는 이들, 믿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불안'과 '걱정'과 '증오'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이는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로서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에서 모든 걸 누려야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가진 걸 나눌 줄도 모르고 빼앗길까봐서 덜덜 떠는 셈이지요. 이들이 하는 자선은 절대로 자선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 자선을 통해서 '이름을 내던지' 누군가의 '인정을 받던지' 하는 모종의 만족감을 취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성당에 봉헌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낼까봐 노심초사합니다. 행여 5000원 낼 자리에 착각을 해서 50000원이라도 내고 나면 아주 난리가 납니다. 그러면서 10만원이 넘는 자기 옷을 사는 건 절대로 아까워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때는 더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신앙은 어찌보면 이런 모든 '어리석음'을 초탈하게 도와줍니다. 클래식에 관심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비유를 '클래식'으로 들어서 마치 클래식에 관심이 없으면 생활의 풍요로움이 사라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을 지닌 이가 현세에 관심을 덜 두면 둘수록 오히려 내면이 충만해지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경험만 봐도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더 두기 시작했을 때에 괜시리 생겨나는 그 욕구들과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은 나의 현재를 더욱 어둡게 만들 뿐이니까요.

우리는 관심사를 다시 영원으로 높이고 또다시 들어높여야 합니다. 오직 거기에 우리의 온전한 행복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밥과 신앙

죽어도 밥 안 먹겠다는 놈은 굶기는 게 상책일 수도 있다.
굶어서 배가 고프면 먹을 테니까 말이다.
안먹겠다는 놈을 붙들고 억지로 먹인다고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 놈은 굶어 죽던지 굶다 지쳐 밥을 찾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놈이 굶어죽을 걸 지레 걱정해서 난리를 피운다.
밥의 소중함에 대해서 가르쳐 줄 만큼 충분히 가르쳐 줬으면 자기가 알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우리로서는 할 도리를 다 한 것이고, 그 먹기 싫다는 인간을 붙들고 실랑이를 할 시간 동안에
차라리 먹고 싶어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밥을 권하는 노력을 쏟는 게 낫다.
거 참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
따끈한 향기가 풍겨나오는 밥을 보고도 지가 옛날에 먹던 사탕이 맛나다고 그것만 찾으니 말이다.
헌데 이걸 어쩌나 그래, 그 사탕 개미다 우루루 몰려붙어서 엉망이 되어 버린 걸...

소박한 비유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




유다의 자유

신부님 성경강의 공부중 궁금증 . 열두사도 선발에 제가 알고 있는 유다는 이미 예수님의 수난의 도구로 쓰이기 위함이 아니였는지요? 마음을 바꿀 자유 마져도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이 부분이 전 영 아리까리 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속박되어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셈입니다.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미 '종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해서 상황을 뒤바꾸어 볼 수는 있겠지만 종료된 사건은 종료된 것이지요. 그래서 '유다'는 참으로 비극적인 인물로 드러나고 사도들도 공공연히 그 '배신자'의 처참한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 (사도행전 1장, 17-18) 하느님은 유다의 배반을 알고 있었을까요? 네, 어느 순간부터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그 마음을 작심한 순간부터인 셈이지요. 그 일이 아직 벌어지진 않았지만 유다의 선택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도 제자 중의 하나의 배반을 알게 된 셈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누차 노력합니다. 제자를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함께 식사를 나누던 '성찬례'의 밤에 예수님은 대놓고 경고를 하십니다.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사실 그 말은 그러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유다의 자유는 살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었지요. 유다가 죽음의 순간에 어떤 일을 겪였을지는 모릅니다. 그건 하느님의 영역이지요. 하지만 유다의 자유는 전혀 상쇄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하였듯이 유다도 회개할 가능성이 충분히 주어졌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우리는 훗날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그의 최종 운명에 대해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저지른 오류는 되새기고 그런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지요. 하지만 수많은 신자들이 유다와 마찬가지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해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도 다시 세상을, 은화 30냥을 선택하는 오류입니다. 우리도 지금 베드로와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는 행위를 밥먹듯이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또 기회는 주어지고 있지요. 다시 하느님을 선택할 기회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 기회를 잡았고, 그리고 기꺼이 순교를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 기회를 어찌 했을런지요. 성경은 다만 유다의 처참한 죽음의 모습만을 묘사할 뿐이니까요.

하느님은 그 어떤 인간에게서도 생명을 되찾아 가실 순 있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자유와 더불어 살아가는 셈이지요. 유다의 자유는 살아 있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변경할 수는 없지만 만일 유다가 배반하지 않았더라도 만일 12사도 중의 하나가 배반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의 배반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반이 '유다'로 끝났다고 착각해서도 안됩니다. 그 배반은 우리를 통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니까요.

우리는 유다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그가 '이용된' 건 아닌지,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닌지 타진하려 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십니다. 심지어는 당신 외아들도 수난의 잔을 거부할 기회가 있었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우리 선택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생생히 살아 있으니까요.


새로운 기술

TED 강연을 종종 보는데, 한번은 '구글 글래스'에 관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구글 글래스의 화려한 용도를 보여 주면서 언뜻 신세계로 초대하는 듯 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 안의 숨은 면이 더 뚜렷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안쓰지만 이렇게 좋은 것이니 나중에 나오면 꼭 하나씩 구입하세요."라는 식이었지요.

'새로운 기술'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우리의 관심사를 끌어당깁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들은 어느새 우리 생활 공간을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이 글을 보게 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어주는 컴퓨터만 해도 나온지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실생활에서 쓰고 있고 그것이 없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생각합니다. 네, 이미 물들어 있는 이상은 없으면 큰일이 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우리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세계는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거품을 엄청 키워 놓았습니다. 마치 뭐가 새로 하나 나오면 이전의 모든 '불편함'이 싸그리 사라지는 듯한 환상을 심습니다. 저 역시 그 희생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컴퓨터 쪽으로 그러했는데 뭔가 새로운 기술이 있는 컴퓨터가 나오면 얼마나 사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오로지 그 '새로운 기술'에만 집중한 셈이지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데 저는 그 놀음에 놀아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숨어있던 '고급 기계의 관리'라는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나마 저는 다행입니다. 그래도 제 팔은 제가 흔들 정도니까요. 하지만 무책임한 수많은 이들은 자신이 관리하지도 못할 컴퓨터를 사들고 와서는 고장이 나기만 하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제가 그렇게 떠맡아 고쳐준 컴퓨터만 장장 수십대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고쳤다고 해야, 포맷을 하고 운영체제와 기타 프로그램을 재설치 한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마는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새로운 기술'의 이면에는 '새로운 난점'이 늘 존재합니다. 없던 차가 생기면 참으로 편해지는 한편, 차를 수리하고, 보험을 들고, 기름값을 충당하고, 유지 관리를 하는 비용이 부수적으로 생겨납니다. 하지만 자동차 광고에서 이런 부수적인 것들을 소개하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 차량을 보여주고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이용하는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비춰줍니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좀비처럼 그 광고를 접하고는 그저 그걸 '사고 싶다'는 막연한 욕구에 사로잡히는 셈입니다.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인데 허울좋게 꾸며놓은 기술의 환상에 사로잡혀 '욕구'를 키우는 셈이지요. 만일 광고들에서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감수해야 할 책임을 함께 내보냈다면 소비자들은 보다 신중히 자신의 필요와 그 필요에 뒤따르는 책임마저 함께 가늠해 보았을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환상 뒤에는 '극단적인 환경 오염'이라는 죽음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야 절절하게 체험하는 중입니다. 그 밖의 다른 신기술도 그러합니다. 혹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이야기를 곧잘 하는데 그런게 나오면 우리는 그 이면에 하늘을 뒤덮는 매연과 스모그를 감수해야 하고 보다 치명적인 사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저 먼 거리를 간단하게 날라 다니는 것이 절대 전부가 될 수는 없지요.

'새로운 기술'은 현대 사회의 핑크빛 환상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입니다.



어느 영성 강좌

신앙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이런 반응들이 있습니다.
"예, 신부님. 옳으신 말씀이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네, 그 말씀도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쉽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이 쉽다면 누군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니 가치가 있는 거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쉽게 잊는 부분은 이것이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임에도 그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하기 싫다'고 선택하는 셈이지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현세 사정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라는 것을 제대로 접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지금 쥐고 있는 현세 사정에 손상이 갈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실 언뜻 들으면 성가시기도 합니다. 지금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키고 있는데 우리가 가진 신앙이라는 것은 정반대로 '이제 그만하라'고 해대니 말입니다. 이게 참 사람 미치게 만드는 노릇인 셈이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발만 걸치는' 신앙생활을 하는 셈입니다. 온 몸은 세상 안에 푹 잠겨서 '발만' 아니면 '귀만' 아니면 '눈만' 걸쳐놓은 셈입니다. 살짝 성당에 가서 허울좋은 말씀을 듣고는 세상으로 돌아오면 '세속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포장지'가 싸여 있는 '새로운 계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누구하나 뜯어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뜯고 싶어 하지도 않지요.

사실 수많은 신앙인들에게 신앙은 '옵션'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큰 상관은 없는 것이지요. 필요할 때에는 하느님 좀 찾다가 필요 없거나 오히려 자기를 성가시게 하면 가차없이 던져 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부가 맘에 안들고, 수도자가 맘에 안들고, 다른 신자가 맘에 안들고… 이든 저든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가차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화를 던져 버리는 셈이지요. 그 말인즉슨 자신에게는 전혀 '보화'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뭐가 좀 성가시고 귀찮다고 보화를 내던지는 정신나간 사람은 없지요. 그는 그저 싸구려 옷핀 하나 꽂아 두었다가 그게 가슴팍을 찌르니 던져버린 셈입니다. 절대로 그 옷핀 안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셈이지요. '미사'를 집어 던지는 수많은 '쉬는 교우분'들… 그분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사실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을 향한 시야를 열어줍니다. 우리의 생이 이 현세 생명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요. 미사에 조금이라도 집중해보신 분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미사 전례의 기도문은 모두 천상의 가치를 담고 있지요. '우리 신앙인들이 돈 벌게 해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기도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쩐답니까, 우리 스스로 거부하는 걸 누군들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세상이라는 '단 맛'이 너무나 좋은걸요.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힘이 세어지고… 이 돈과 명예와 권력의 단맛은 정말 강력한 것이라 한번 제대로 맛을 보고 나면 그 놀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답답해 하고만 있어서는 답이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구하려면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지요. 하루 가운데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의 '사명'인 셈입니다. 그냥 만나게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하루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더 높은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면 창 밖으로 아래 동네가 보입니다. 그러면 한 차량이 길 위에서 가는 모습이 보이지요. 만일 그대로 머물러서 그 모습을 계속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차량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고 그 차량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도 알 수 있습니다.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헌데 많은 이들은 이 넓은 시야를 '세상 안에서'만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넓은 시야를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돈이 어디로 들어오고 어디로 나가는지, 어느 상권이 유력한지, 부동산을 어디를 구입하면 장차 돈이 될는지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똑똑한 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노력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숱한 체험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의 움직임을 곧잘 읽어내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도토기 키재기를 하는 동안 '차원을 건너뛰어'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바로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할 때 표현된 높은 곳이지요. 물론 예수님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지만 우리로서는 그렇게까지는 안되고 그럼에도 '영적으로'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육신의 욕구를 극복한 이들은 욕구를 가진 이들의 운명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각자의 욕구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도래할 지 아는 셈이지요. 돈 욕심을 내는 사람은 분명 그 욕심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될 것이 눈에 보이게 되는 셈입니다. 명예를 탐하는 사람도 그렇고 권력을 쥐려는 이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들은 이미 부동산 자리가 어디가 나은지, 무슨 방법이 돈을 쉽게 빨리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그 근본부터 부정하고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지는 원칙이란 "필요한 만큼만 지니기"라는 것이고 심지어는 필요한 것도 더 소중한 영적인 가치를 위해서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별종'일 뿐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요. 모래성을 쌓아두고 그 위에 깃발을 꽂으면 이기는 게임을 시작했는데, 이 '초탈한' 인간들은 깃발 자체를 넘겨주고는 혹시 다른 더 필요한 건 없는지를 묻고 있는 상황이니까 이 게임을 시작한 이들은 그들에게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셈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 '초탈한' 이들을 시험하고자 하기도 합니다. 괜히 시기가 생겨난 셈이지요. 그들이 별 것 없이도 행복해하는 걸 보고 질투와 시기에 사로잡혀서는 "그래 너희들이 얼마나 잘났는지 한 번 볼까?"하고 붉게 달궈진 쇠꼬챙이로 자꾸 쑤시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 초탈한 이들의 현세적 고통은 더욱 가중되기가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드높아진 마음은 그로 인해서 더욱 더 높이 올라가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하지만 이를 어쩐답니까? 사실 이런 이들은 거의 없고, 많은 '신앙인'들은 그저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그들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신 분의 말대로 였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사라지던 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은 아니었지요. 그들은 다시 모여들었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을 바탕으로 하나의 지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요.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셔야 합니다. 더 넓은 곳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세상 안에서 얻은 것들이 모조리 사라질 날이 올 터이니 여러분은 천상의 보화를 찾으셔야 합니다. 올라가십시오. 눈을 뜨십시오. 깨어 나십시오.



교회 일치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같은 성령'으로 묶어 주십니다. 우리는 서로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고 행여 미흡한 부분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지요. 온전히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같은 노력'을 품고 있는 형제 교회의 사람들을 무시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셨지요. 사실 첫 갈라섬 이후에 아픈 역사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에게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영역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형제 교회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그 활력은 이미 일찍부터 문화적으로 우리 가톨릭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생활 성가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개신교' 형제들의 곡입니다. 물론 이제는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도 많은 문화적인 활력이 살아나고 있지요. 반대의 경우도 그러하니 오직 말씀으로 이끌어가던 저 교회에서 하나씩 둘씩 나름의 '전통'이 생겨나서 심각하게 엇나가서 엉뚱한 교의를 가르치는 이단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려는 자정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아직도 좀 분파가 많긴 해서 안타깝긴 합니다.

첫 신앙의 뿌리를 어디에서 얻어서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누구는 가톨릭이 되어 있고 누구는 동방 정교회가, 또 누구는 개신교가 되어 있는 셈이지요. 우리는 모두 같은 뿌리를 두고 있으니 가장 근본에 집중할 수 있다면 언제라도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막연한 적대감'의 장막을 걷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힐난하는 삿대질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아직도 많은 개신교 형제들이 가톨릭을 단순히 '성모님교'라고 그릇되이 알고 있는 부분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고, 심지어 '성모님'을 비난하려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톨릭이 지닌 거룩한 전통 속에서의 성모님의 모습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그 아름다운 분을 아직 모를 수는 있지만 나서서 그분을 '비난'할 이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 탐욕과 죄악의 장막을 걷어내고 말씀과 신앙의 본질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언제고 성령으로 다시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천상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지리적인 특성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세속적인 해석입니다. 천상에서의 동서남북은 '거룩한 양심에 따라 절대자를 추구해온 모든 이들'이 불려오는 터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소위 거룩하다고 착각하던 이들은 정작 문 밖에 있고,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이웃 형제들이 그 안에 있음을 보고 우리는 훗날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천지 신명의 뜻을 받들어 삶을 거룩하게 가꾸어 온 불교 신자가 하느님과 함께 친교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서로가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의 내밀한 영역을 존중하고 함께 살 길을 찾아 나갔으면 합니다.



과대평가

우리는 때로 우리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곤 합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착하거나 신심 깊거나 겸손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상상 속에서 그러할 뿐이지요.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들의 일상 안에서 여러분들이 수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내면적으로 꺼리는 일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아무리 궁리를 해도 그런 적 자체가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성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셈입니다.

가난한 이를 만났을 때에 우리는 정말 '기뻐'할까요? 아닙니다. 먼저 부담감을 갖고 그들을 마주 대하기가 일쑤입니다. 그 말인즉슨,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의 현현'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 돈을 가져가는 이들'로 보는 셈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날더러 선하다고 하느냐?'고 돈많은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지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한 분만이 선한 분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육을 지닌 이상 하느님의 온전한 선함을 닮을 수 없습니다.

기도 생활은 어떠할까요? 솔직히 여전히 기도 대신에 하고 싶은 활동이 너무 많습니다. 누구는 악기를 배우고 싶어하고, 누구는 운동을 배우고 싶어하고, 누구는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하고, 또 누구는 기도 대신에 그냥 쉬고 싶어합니다. 수도원에서 수녀님들이 수사님들이 거룩한 목소리로 기도하지만 그 가운데 모두가 기도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너무나 큰 착각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어떻게든 기도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내면을 간직하고 있거나 온갖 분심을 잔뜩 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은 이미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해지기 위해서 훈련하고자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닥 신심이 깊지도 않습니다.

겸손은 또 어떨까요? 단 한마디의 모욕적인 언사에 우리는 곧잘 발끈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낮아지는 것'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내 의견이 묵살당하는 걸 참지 못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상대도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느 문제에서 어떻게든 내 의견을 관철 시키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그저 무시하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고 난리를 칩니다. 무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시의 부주의로 신경을 써 주지 못하기만 해도 섭섭하다고 난리가 나지요. 우리는 생각만큼 겸손하지 않습니다. 아니, 여전히 교만하기만 합니다.

스스로의 역량을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영성 서적을 잃거나 좋은 글을 읽을 때에 늘상 일어나는 착각 중의 하나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단지 생각을 움직여 이 글들을 쓰는 것이지 제가 이 가운데에서 실천하고 있는 일들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직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고 저는 여전히 그분 앞의 죄인입니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고 바라는 게 많은 제 올바른 꼬락서니를 깨닫지 못하는 죄인이지요.

"허무로 돌아가라 인간아."하고 하느님이 입김 한 번 부시면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절대로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어르신들을 보필하기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굳어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쌩쌩하던 몸이 점차로 굳어가고, 나아가 정신도 굳어갑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언제나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누군가가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육체적 보살핌도 보살핌이지만 '정신적 보살핌'에 있어서는 모든 이의 노력이 함께 필요한 부분입니다. 특히 교회 인구의 연령대는 갈수록 증가해 갈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눈에 띄게 줄고, 어른들은 그래도 자신의 신앙을 진득하게 간직하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성당에 가면 어르신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참으로 곱게 늙으신 분들이 있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게 마련이고 고집이 있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르신들과는 논쟁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분들 앞에서 '듣기'를 많이 훈련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당신이 살아오신 역사를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그걸 수십번은 반복하면서도 전혀 지치지 않으시는 분들입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기억' 뿐이니까요. 이제는 육과 정신이 낡아지면서 다른 욕구나 희망들이 갈수록 사라져가는 셈이고, 그저 영혼의 욕구만이 살아서 '관심과 애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정말 신심 깊은 분들은 하느님과 고요히 머물줄을 알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당은 또다른 양로원이고 인간적인 애정을 구하러 오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제는 그 분들에게는 '스타'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참한 젊은이가 어르신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따스한 말을 건네는 경우가 '전무'하다 시피 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네들끼리 관심을 끌고 놀러다닌다고 바쁘거나 더 어린 아이들에게 교리교육을 한다고 바쁘지 어느 누가 어르신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사제나 수도자는 당연 그분들에게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이들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팬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연예인들도 자기들 팬은 아끼는데 때로 지나치게 매정한 사제들이 있곤 합니다. 딴에는 '편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기본 상식에도 맞지 않는 언행을 하곤 하는 것입니다. "할매, 밥 묵었나?" 하는 식입니다. 그것도 소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피가 마르면 죽지요 ㅋㅋㅋ)' 젊은 신부가 말입니다. 물론 그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지만 돌아서서는 섭섭하다고 다시는 성당에 안나간다고 하는 '상처받은'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모쪼록 '부모에게 공경하라'라는 계명을 더욱 확대해서 '어르신들을 공경하라'라는 인식이 교회 전반에 박혔으면 합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그 쓰임새에 있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앞장서 이끌어오신 분들이지요. 젊은 날의 힘을 이든 저든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소진한 분들이고 우리 젊은이들은 그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어르신을 잘 공경했으면 합니다. 하다못해 우리 부모님이라도 잘 공경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만한 불효자는 없네요. ㅎㅎㅎ 코빼기를 보이기는 커녕 지구 반대쪽에 있으니 말입니다. 

불효자는 웁니다가 아니라 지금 밥먹고 쉬는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ㅋ




모두 같은 사람

때로 이곳 남미 볼리비아 현지인을 엄청 무시하는 외국인들(우리나라 사람들을 포함해서)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낮은 문명화 수준에 질려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차도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국민 의식이 있고, 법과 질서를 아는 곳에서 살다가 이 곳에 와 보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물론 저 자신에게도 초반에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겉으로 보고 판단하는 그 이면에는 전혀 다른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 외국인들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잠시 와서 머물다가 가는 이들은 더욱 그러하지요. 그들은 자신의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여기 잠시 발만 담그다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저는 5년의 선교 생활을 거치면서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말이지요. 이러한 분명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제는 이곳 현지의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셈입니다. 왜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지, 왜 거짓말을 곧잘 해대는지, 왜 경찰들이 그토록 부패하게 된 것인지, 왜 국민 의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은 것인지에 대해서 과거 나의 교만했던 생각을 많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나은 것이 있다면 물려 받은 것이 나은 셈입니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인 문명이 있고, 그리고 부모 세대가 일구어 놓은 물질적 혜택도 물려받은 셈입니다. 반면 이곳에는 '식민 생활'을 수백년간(우리나라가 고작 50여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들은 수백년의 식민 문화에서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온 셈입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새로운 식민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지요. 지금은 허울좋은 '자본주의'의 속국이 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이는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형국입니다. 부자 나라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요.

사람이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여기서도 한국에서도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모든 마음을 하느님께로 들어 높이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러기에 섣불리 돈을 주려고 하지 않고, 또 부자 나라에 섣불리 필요하지도 않은 돈을 청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실험해 볼 수는 없겠지만, 외국의 소위 '선진 문명'에서 이런 나라들을 비판하는 사람을 지금 이 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생활 환경에서 자라게 한다면 이들보다 더 엇나가면 엇나갔지 덜할 건 없다고 봅니다. 물론 실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아무도 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는 생각 안에서 충분히 그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불평'하는 아이는 여기에서 자라더라도 '불평'을 합니다. 한국에서 '감사'하는 아이는 여기에서 자라더라도 '감사'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여기 이 환경에서도 더 가난한 이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것만 바라보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곧 여러분들의 이웃 형제 자매입니다. 이들도 따뜻한 가슴이 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이들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서 기다리시고 있지요.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잘 사는 나라에 사는 이들의 사명은 더욱 큰 셈입니다. 그러니 그 사명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것들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쓰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포와 교훈

교회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 한 가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공포'를 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하고 있는 아이를 고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두드려 패는 것입니다. 이 후자의 방법은 참으로 쉽고 간단합니다. 잘못한 아이를 후들겨 패고 나면 아이는 그 죄에 대한 결과를 '각인'시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좀처럼 반복하지 않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아이 안에 새겨지는 '공포'입니다.

우리는 이 '공포'라는 것을 경시합니다. 일단 겉으로 보니 조용하고 침착해 보이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별하지만 실제로 내면은 서서히 상해가는 과일과도 같습니다. '공포'을 지닌 아이는 그 밖의 다른 죄의 결과물들을 쉽게 양산해 냅니다. '공포'로 이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공포'로 인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인격성'을 지니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이들이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 타인을 향해서 내던지는 '반격'의 정도는 자신이 유년시절 겪은 '공포'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대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서로가 가진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는 길을 놓을 수 있지요. 바로 이러한 수단을 통해서 앞서 아이를 고치는 첫 번째 방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에 때리기보다 그 아이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스스로 성찰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의 것을 가지려는 아이에게 만일 그렇게 했을 때의 결과와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에 일어나는 결과를 차분한 어조로 생각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는 시간과 노력이 엄청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 그 아이를 돕는 행위이고 그 아이가 사회의 한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게끔 도와주는 일입니다.

사실 제가 여러분과 하고 있는 작업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사제의 권위로서 "…하지 마세요. 천벌 받습니다. 지옥갑니다 지옥. 그거 대죄예요. 대죄는 아니더라도 중죄입니다. 구원을 빼앗길 거예요. 영원히 죽을지도 몰라요…" 라는 식의 멘트를 일삼는 것은 빠르고 강력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순간을 가로막는다고 그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 각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교육'하는 작업이 필요한 셈이지요.

저는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순진무구하던 청소년 시절 '자위행위'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분별력 없는 신부님이 그걸 '대죄'라고 하면서 '공포'를 심어주는 바람에 지옥 언저리까지 떨어진 기분이었고, 그 뒤로도 아픈 가슴을 어찌할 수 없어 고해성사를 수도없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것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었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는 것이 인간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무엇임을 알게 되었고 오직 더 높은 가치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승'의 작업은 각 사람마다 달린 것이라서 우리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탕'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멀어지고 보다 높은 가치의 물건들을 추구하듯이 인간은 보다 고귀하고 거룩한 가치에 눈을 뜨면서 자연 예전의 가치들을 멀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알려드릴께요.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말입니다. 축복 가득한 밤 되십시오.



봉헌된 삶

수도원을 '도피처'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전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교구 사제로 일하면서도 때로는 수도 성소를 꿈꿨습니다. 특히나 영적인 서적을 읽을 때면 그런 바램이 더욱 간절해지곤 했지요. 그야말로 온전히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봉헌된 삶의 이상향을 꿈꾼 셈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가진 바램의 보다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에 대한 추구였지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싫었던 겁니다. 분주하게 사람을 만나고 세상의 일을 신경써야 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런 삶이 싫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저는 '도피처'로 수도원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수도원의 이상향에 대한 갈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그런 '인간적 바램'은 많이 정화된 상태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삶 속에서도 나머지 시간을 '봉헌된 삶'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중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할 수 없고 하느님께 헌신할 수 없다는 건 핑계일 뿐입니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과 지내는 선교사 사제가 이러하다면 한국에서 많은 교구 신부님들도 원하면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바쁜 일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사제에게는 얼마든지 '기도할' 시간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수도원 생활에 대한 면도 어렴풋이 이해를 합니다. 언뜻 고요하고 조용하고 적막해 보이지만 봉헌된 이들은 그 안에서 더 세밀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만큼의 외적 고난은 없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직면한 이들이지요. 그래서 그런 의미라면 사제나 평신도나 수도자나 하느님 앞에 선 인간으로서 자신을 이겨내어야 하는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 셈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구 사제인 이대로 부르심을 받았고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은 지금의 이 길인 셈이지요. 이제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허황한 생각은 않지만 수도자로서의 이상향, 즉 하느님께 봉헌된 삶은 여전히 꿈꾸고 생활 안에서 실천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수도자의 이상은 단순히 '수도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거룩한' 사람, '봉헌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잊지 마시고 같은 길을 걸어 나갔으면 합니다. 가정 안에서의 봉헌된 삶, 직장 안에서의 봉헌된 삶을 꾸려 나가시길...


사랑과 시련

오늘 아침에도 샤워를 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물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 전기가 들어와서 이 새벽에 빛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감사드릴 일입니다. 큰 문제없이 아침에 일어났다는 것,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도 감사드릴 일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성가신 일들은 그 각각 안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묵상거리가 있는 셈입니다.

그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가 오직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 일상의 훈련 속에서 심지어는 '적의'가 가득한 상대를 만나더라도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순간순간을 오직 이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아무리 고귀해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그 어떤 것 보다도 우리의 '사랑'에 목말라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에게 때때로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커졌나 알아 보시려는 것입니다. 자녀가 '고통'받는 걸 즐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학교에 보내고 주사를 맞히는 것은 그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공부를 하면서 투덜대고 주사를 맞으면서는 비명을 지르겠지요. 하지만 그런 투덜거림과 비명소리 속에서도 부모는 꿋꿋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도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투덜거림과 비명소리를 들으시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탓으로 일어난 일을 하느님에게 돌리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탐욕스런 욕구에서 빚어진 고통을 하느님의 탓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엄연한 우리 죄의 결과입니다. 독물이 든 약병을 마시지 말라고 말라고 수도없이 떼어 말렸지만 결국 그걸 마시고 아프기 시작하는 아이는 달리 어찌할 수 없는 법입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부모님은 아이를 보살피고 하느님도 당신의 자녀를 보살핍니다. 그래서 '대죄' 중에 있는 영혼도 '생명'을 유지하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셈이지요.

여러분 많이 사랑하시고, 시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꾸준히 운동을 하는 아이는 심장이 튼튼해지듯이 시련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찬미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신앙 Q&A

신부님 질문요~~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알겠는데요 더 확실하게 머리에 쏙 박히게 설명 좀 해주세요. 근데 왜 저는 꼭 금전적인, 경제적인것만 생각날까요? 말씀의 비유가 미나라서 그럴까요??? ㅋㅋㅋ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먼저는 그 전 구절에서 도움을 얻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줄 수도 있는 것이랍니다. 그럼 이어지는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가질 수 있고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어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손쉽게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돈'입니다. 네, 그것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에만 집중하면 다른 많은 것을 놓치는 셈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고, 건강을 가지고 있고, 힘과 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돈'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오늘날 세상의 그 수많은 가치들이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지요. 이든 저든 우리가 '가진 것'에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다음으로 이 구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주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누가 주었는가?'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두 가지 노선이 갈라집니다. 먼저는 모든 인간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대표적인 생각을 살펴봅시다.

"우리 자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이루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 직장도 내가, 내 경력도 내가, 내 월급도 내가, 내 집도 내가, 내 차도, 가족도, 뭐도 뭐도… 이든 저든 다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동전이 '데나리온'은 '황제'가 발급했으니 '황제'에게 돌려야 마땅한 것이었지요. 그러니 '내'가 만든 것들은 나에게 돌리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
하지만 우리가 철저히 무시하려고 드는 핵심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선물'된 것이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르지요. 절대자이자 천지의 창조주이신 분입니다. 그분은 공간상의 모든 것과 더불어 '시간'마저도 창조하신 분이시지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은 타인에게 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 것'이니까 '내'가 온전히 다 써야 하고 그렇게 써도 아까울 지경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내어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것', '임무로 맡겨진 것'은 그 목적에 맞게 써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 자체는 하느님께서 뭔가를 바라시고 우리에게 선물하신 것이지요. 하느님은 도대체 왜 이 생명을 선물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은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스스로 대답하십시오.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이름을 날리기 위해' 여러분들의 대답에 따라 갈 길이 정해질 것입니다. 다만 제 대답을 넌지시 알려 드리지요. '하느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이 저에게 바라는 것을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먼 훗날 저 위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충만히 지니고 있고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뭔가를 이루라고 맡기신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 도구를 들고 '아무것도' 벌어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도구'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일찍부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그 무엇'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은 훗날 만든 것의 수십배, 수천배를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일부러 다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귀 있는 분은 들으십시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들고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성찰하십시오.

많은 이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들 몇 가지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 더 가지려고 노력하기
- 외모 가꾸기
- 자신의 이름 드높이기
- 권력 쟁취하기
- 건강하게 살기
- 내 집 마련하기
- 아이 우등생 만들기
- 분노하고 싸우기

이쯤 할까요? ^^




성경의 진실성

우리가 하는 말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늘상 '진지한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과 관련된 말도 해야 하고, 때로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간단한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늘 마음 속의 깊은 영혼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니지는 않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방향성은 쉽사리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의 또는 악의를 꾸준히 유지합니다.

선한 사람도 자신의 의지 속에서 여러가지 수준의 말들을 꺼냅니다. 반대로 악한 사람도 그렇지요. 선한 사람이라고 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게 아니고 악한 이들도 늘 나쁜 욕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말마디들 속에서 우리는 그 '방향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인들의 남을 보살피려는 마음, 보듬어주려는 마음, 챙기려는 마음 속에서 나오는 인사, 일상적인 발언, 일에 관련된 발언이 있고, 반대로 악인들이 남을 해치려는 마음, 깎아 내리려는 마음, 무시하려는 마음 속에서 나오는 인사, 일상적인 발언, 일에 관련된 발언이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바로 이런 근본 의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는 사람은 참으로 얻을 것이 많습니다. 아니, 단순히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하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요모조모 문장 구조와 단어와 그 밖의 요소요소들로 뜯어보려고 한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 안에 숨어 있던 성령은 사라지고 오로지 껍데기만이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우리가 말하려는 '본의'는 무시한 채로 우리의 말마디들의 구조만 살펴서 지극히 도식적인 무언가를 제시하기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 안에서 2000년 전, 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법 구조와 언어 습관, 문화, 관습만을 떼어오게 되는 셈입니다. 이런 류의 독서는 성경학자나 할 일이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진실함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뢰' 안에서 성경의 구절 구절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말씀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문 기사를 읽은 사람이 삶의 노선이 바뀌는 법은 좀처럼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살아있는 '지지와 응원' 또는 '훈계와 교훈'을 바로 곁에서 듣게 되면 그 말마디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이에 대한 신뢰로 삶이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유익한 몇 가지 절제

영적인 사정에 눈을 떠 가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도전 가운데 아마도 가장 힘들고 크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욕구'를 다스리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리로 다가갈려니 내 앞에 나의 '욕구'라는 놈이 떡하니 서서 길을 막고 있는 상태가 대부분입니다.

도대체 이 놈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이겨낼 수 있는 걸까요? 우리 안의 다양한 욕구는 사실 우리 육의 '생명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친구입니다. 그러니 이놈들을 '죽이려고' 들면 곧 내가 죽게 되는 꼴입니다. 그렇다고 '살려두자'니 곧잘 그 크기를 뻥튀기를 해서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기가 일쑤입니다.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은 가장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삶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 가운데 '쓸데없는' 일들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셔야 합니다. 그런 것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건 각자의 자리마다 다양하게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가장 시급한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잡다한 정보의 절제
텔레비전으로 신문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인터넷으로 우리가 접하게 되는 소식들은 우리의 영혼의 흥미를 빼앗아 우리를 정신나가게 합니다. 세상은 이런 소식들을 접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우리를 닥달합니다. 제가 곧잘 듣는 소리가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신부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남자라면 이 정도는, 대구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뭐 이런 저런 '알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거기 시선을 두기 시작하면 그와 연계된 잡다한 정보들이 점점 더 우리의 머리를 파고들고 그렇게 우리의 기억에 남겨진 것들은 우리가 간만에 취하게 되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한시도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기억에서 다시 떠올라 우리를 괴롭히는 셈입니다. 사실 철수 할아버지의 강아지가 새끼를 5마리를 놓았다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농담이지만 우리가 알고 싶어하고 알려고 드는 수많은 정보들이 이런 수준인 셈입니다. 먼저는 이러한 정보들을 끊어야 합니다.

잡다한 관계의 절제
우리가 맺는 수많은 '인간관계'들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외로움'을 극도로 싫어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을 굉장히 불안해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관계 속에 어떻게든 우리의 '족적'을 남겨두려고 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그 관계를 잘 선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의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범위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제 페이스북 <친구>가 900명을 육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온라인상의 인간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온라인상의 관계'일 뿐입니다. 많은 경우 저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적 콘텐츠의 생산자이고 그들은 소비자인 셈이지요. 사실이 그러하니 하다못해 '좋아요'나 댓글을 남기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슬쩍 와서 자기 흥미거리만 흘끗 보고 지나가는 '눈팅족'들에 불과합니다. 만일 제가 이 모든 900여명과의 <친구>관계를 어떻게든 진정한 <친구>관계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면 아마도 저에게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사는 것 말고 다른 활동을 할 시간은 '제로'일 것입니다. 인터넷은 인터넷이고 저는 실제로 저와 숨쉬고 살아가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지요. 저는 볼리비아 현지의 주임 사제이고 제가 돌봐야 할 양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과 삶을 나누고 살아가지요. 이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일상 안에서 막연히 '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든 유지해야해'라는 미련을 지니고 있는 인간관계를 살펴보시고 과감히 정돈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꾸준히 마주치는 몇몇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잡다한 물건의 절제
소비사회 안에서 우리는 '재어 놓으려' 합니다. 이 막연한 불안증은 도를 넘어선 수준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늘 무언가를 더 사고 또 사려 하지요. 옷과 구두와 가방은 늘어만 가고 그런 움직임은 삶의 모든 곳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물건을 재어놓은 만큼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할 영역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모든 걸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의 도움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재화'를 절제해야 합니다. 저는 다행히 무언가를 정리하려고만 하면 그것을 받을 사람이 즐비한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필요치 않은 티셔츠나 옷가지가 생겨 사람들에게 내어주면 그들은 기뻐하며 받아 입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자선'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냥 나와 그의 편의가 맞아 떨어진 것 뿐입니다. 한국은 남는 물건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들 저마다 한뭉텅이씩 재어놓고는 이제 내어주려고 해도 받을 사람이 없는 지경입니다. 다들 '새것'을 받으려 하지 '쓰던것'을 받으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간혹 소위 잘 사는 나라에서 그러한 것들을 끌어 모으다가 '가난한 나라'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필요하면 청하겠지만 여기는 쓰레기통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실컷 쓰고 남은 것들을 내어주고는 '자선'이라고 착각하지도 마십시오. 진정한 자선은 식당 바닥에 기어다니는 개들에게 '남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그의 필요를 보고 그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이런 실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땅히 즐길 수 있는 많은 재화들을 지금부터 아껴서 그렇게 모인 '돈'을 필요한 가난한 나라에 보내십시오. 수많은 선교 사제들이 유용하게 쓸 것입니다. 그제서야 여러분은 비로소 '자선'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여러분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니까요.

일단은 이 정도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제시하렵니다. 그렇게 불필요한것들을 하나씩 절제하다보면 여러분의 욕구가 점차적으로 안정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쓸데없는 노력이 줄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비로소 평화가 깃들어 그 다음 작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생각이 있으신 분들은 이 길을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늘 반복하셨지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입니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들


내 주변에 모두 '사랑스런'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정작 내 안의 '사랑'이 하나도 크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두고는 스스로 '나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왜냐면 '참아야 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우리 신앙의 본질은 '도전거리'가 존재할 때에 보다 빛을 발합니다. 그것이 수많은 성인들의 주변에 시끄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은 이유이고, 때로는 성인들의 몸이 질병에 시달린 이유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해보지 않고는 우리 안에 참을성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물론 쓸데없는 것들은 끊어내어야 합니다. 일부러 내가 다가가서 스스로 안에 잠자고 있던 본성을 일깨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차분하고 조용한 환경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겠노라고 누군가가 '분노'를 일으킬 짓을 공공연히 저지른다면 이는 원래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셈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행태 가운데 불상을 넘어뜨리고, 탱화에 페인트를 칠하고, 불당에 대소변을 보고 하는 듯의 짓거리들이 바로 그러한 일입니다. 그들은 어둠을 쫓겠다는 엉뚱한 사명감으로 도리어 자기 스스로 '어둠'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장님들의 내면 안에는 지극한 '교만'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 눈에 선합니다. 내면에 '하느님'을 모신 게 아니라 '종교 껍데기를 입은 자기자신'을 모신 이들입니다.

가톨릭 신자 여러분, 주변의 이웃과 평화로이 지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자체로 '악'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누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교리에 어긋나는 삶의 양태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함부로 심판하지 말고 '인내로이' 견디며 그들과 '평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십시오.

하지만 '그 무엇'이 또는 '그 누군가'가 가난하고 약한 이의 생명을 담보로 그러한 짓들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거기에 맞서 싸우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싸우는 방법은 잘 선택해야 합니다. 재떨이에 난 불을 끄겠다고 나머지 집안 살림을 '미리 다 태우겠다'고 하는 건 해결책이 아닌 셈이지요. 재떨이에 불이 나면 거기다 물을 부으면 됩니다. 과연 이 '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여 여러분의 마음이 그들과 똑같은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치아와 성인

우리가 치아를 가꾸는 것 만큼만 우리 영혼을 가꾼다면 우리는 보다 성덕에 가까이 나아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를 밥을 먹고 나면 반드시 이를 닦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치과에도 가고 아픈 데가 없어도 정기적으로 스케일링을 받지요. 그리고 상한 곳이 있으면 치료도 받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아프지 않은데도 늘 이가 상할까 걱정을 하고 만일에 상하게 되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회복시키려 합니다.

세속적인 음식을 먹어 치우는 이를 위해서 이토록 애정을 쏟는 만큼, 영적인 음식을 받아들일 영혼을 돌볼다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이라도 지저분한 것이 묻었다 싶을 때에 늘 양심성찰이라는 칫솔질을 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가꾸고 정기적으로 사제를 찾아가 작은 허물로 인한 탓들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는 스케일링을 하고, 또 어두움이 다가올 때도 마찬가지로 영혼의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전혀 아프지 않음에도 행여 어둠에 젖을까 염려를 하고, 일단 큰 해악을 입었을 때에는 그 어떤 노력과 시간도 아끼지 않고서 영혼을 회복시키는 데에 노력할 수 있다면, 아마 우리는 그 자체로 성인일 것입니다.


성무일도 연중 22주일 월요일 아침기도 찬미가 해설

눈부신 하늘의빛 만드신주님
기난긴 어둠밤이 지나간뒤에
누리를 비추시는 태양광채로
새날도 어김없이 밝혀주시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빛'을 표현되는 태양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태양의 특성에 대해서 이어지는 몇 구절로 설명을 합니다. '기나긴 어둔밤'을 통해서 비춰지는 빛, 이러한 표현으로 우리의 어둔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다가오는 빛을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셈이지요. '누리를 비추시는' 그 빛은 말 그대로 온 세상을 빠짐없이 비추는 것이고, '새날도 어김없이' 밝힌다는 의미를 통해서 당신께서 하는 일에는 전혀 그르침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누리의 참빛이시라
새벽에 희미하게 빛을발하며
떠오를 다른빛을 미리알리는
작다란 그런별빛 아니오이다

이어지는 연에서 앞서의 연을 보충설명하면서 그 본질적 의미를 되새겨줍니다. 마치 어둔 밤을 밝히고 온누리를 비추는 태양처럼 주님께서도 만물을 그렇게 비추고 계신다는 보다 직접적인 설명이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빛들, 단순히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빛들이 아니라 보다 영적인 의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희미한 빛이 있지만 주님의 빛에 비하면 그러한 빛들은 '작다란 별빛'에 불과한 셈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여러 도덕적 가치들은 주님의 참된 광명 앞에서 빛을 잃습니다. 주님의 빛은 모든 별빛들을 잠재우는 진정한 광채인 셈입니다.

한낮의 태양처럼 빛자체시니
밝기는 태양보다 더하시옵고
우리맘 깊은곳도 밝혀주시며
은밀한 생각까지 알고계시네

주님의 빛은 태양보다 더 밝습니다. 우리는 한낮의 태양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밝히는 주님의 빛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으면서도 마치 장님처럼 빛을 보지 못하는듯이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그 빛을 수용할 능력이 아직 없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그 빛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비추어 내어 우리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깊은 그 내면 조차도 환히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의 앞에서 살아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한 일입니다.

육신의 탐욕스런 온갖불결을
마음의 정덕으로 씻어버리고
우리의 육신마저 깨끗이하여
성령의 궁전으로 바쳐드리세

빛이신 하느님 앞에 선 우리들이니 그 빛이 투과하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맑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가꿈을 이루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 이루는 여러가지 덕들이니 우리는 이러한 덕들로 마음을 씻어내고 나아가서 우리의 육신도 소중히 가꾸어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는 궁전으로 만들어 내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임금이신 독생성자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드리세
위로자 성령께도 언제나항상
세세에 무궁토록 영광드리세.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드리는 영광으로 찬미가는 마감됩니다. 무엇보다 우리 독생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우리의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성령은 이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을 빼놓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세세에 무궁토록' 즉 영원히 존재하실 분들이며 찬양 받으실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멘'으로 이 모든 것들이 진실됨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셈이지요.

아멘. 아멘.



열리는 시야

커피를 모를 때에는 커피는 커피 다른 음료는 다른 음료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커피에 맛들여가면서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카페모카, 프라푸치노, 카페 꼬르따도, 카페 꼰 레체… 등등의 각종 커피의 종류를 알게되고 거기에서 더 나가면 원두를 고르고 볶고 드립하는 각종 기술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면 영적인 것들을 싸잡아 '영성'이라고 묶고는 그러려니 하고 쳐다보고만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영혼의 진보 단계, 인간 내면의 각 특성에 대한 영적인 의미, 세상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 삶의 진정한 의미, 거룩한 말씀에 숨겨진 보화… 등등의 각종 영적 사정에 대한 일들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단순히 그런 사정들을 듣고 배우는 것만이 아니고 스스로 그런 사정에 헌신해서 수련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커피나 자동차와 같은 그 분야 만의 전문성은 알아도 괜찮고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것이지만 이 영적인 분야는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지향성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이를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판이 돌아가는 것이나 경제 사정이나 세속적 사물에 대해서는 굳은 확신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어쩌면 가장 소중한 '영혼'에 관해서는 무지한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문명화'라는 것은 이를 더욱 부추겨 우리에게서 영적인 사정에 대한 관심을 제거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과학'은 우리의 관심사를 더욱 세속화시켜 그나마 남아 있던 마음의 공허함도 애써 지우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휴대폰을 하나 사면 마음이 채워진다고 착각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지요.

이 영적 사정을 연구하는 것에 더욱 매진할수록 이런 시야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연 '여러분들'도 초대하고 싶은 것이지요. 왜냐면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야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선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용된 쾌락

우리 사회에는 '허용된 쾌락'이 많습니다. 양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치고 나면 몇 가지 종류의 양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목자의 목소리를 찾아 모여 다니는 양들, 울타리 밖으로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양들, 울타리 근처에서 울타리 밖의 풀을 탐내는 양들, 그리고 울타리를 뛰쳐 나오는 양들입니다.

울타리라는 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의미하고 그걸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위험과 죽음'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울타리가 우리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규율들입니다. 하지만 이 울타리 근처에서도 얼마든지 탐낼 수 있는 것들이 있어 양들의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음식을 훔치는 건 안되지만 자기 재량껏 음식을 먹는 건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드러난 죄는 짓지 않지만 허용된 쾌락을 채우려고 합니다. 한 끼를 먹는 것을, 전식을 먹고 본식을 먹고 후식을 먹고, 그리고 2차를 가고, 또 남은 공간을 음식으로 채워넣습니다. 허용된 선 안에서 최대한의 쾌락을 누려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헌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물론 이런 근사한 식사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기쁜 날이나 소중한 날, 친구가 방문한 날이면 이런 근사한 식사를 얼마든지 준비해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너무 자주 반복하는 셈입니다. 그것을 삼시 세끼 다 채우려고 하고 매일같이 채우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건 '허용된 쾌락'이니까요. 그 결과물이 우리들의 늘어가는 몸무게인 셈입니다. 그렇게 먹었으니 이제는 또 값비싼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살을 빼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종류의 허용된 쾌락 근처에서 노는 신자들, 즉 울타리 근처에서 밖의 풀들에 관심을 가지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목자의 목소리에 관심은 없고 어떻게든 울타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탐스런 풀들을 맛보고 싶어하는 양들인 셈이지요. 어찌어찌 아직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기는 합니다만 훗날 늑대가 내미는 풀을 맛보려고 하다가 일순간에 늑대에게 잡아먹히게 될 운명입니다.

저는 '음식' 하나를 예로 들었지만 실제로 이런 '허용된 쾌락'은 비일비재하게 많은 셈입니다. 피부의 건강을 위해서 얼굴을 가꾸고 단아한 이미지를 위해서 화장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외모 가꾸기'에 거의 모든 정신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역시 일종의 허용된 쾌락이지요. 술을 한 잔 하는 것을 두고 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걸 매일 밤마다 하려고 들고 아슬아슬하게 타락의 선을 유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라서 언뜻 '건강을 지키는 것'이라면 무조건 선한 일이고 덕인 듯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허용된 쾌락'을 건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루고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용된 쾌락'을 최대치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절제'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절제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더욱 '온전하게' 가꾸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울타리에서 멀어져 목자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위해 지나치게 신경쓰던 것을 돌이켜 '거룩한 즐거움'에 맛들여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한동안 있고 보면 자연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사가 점점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놀이

어른은 놀 수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어른은 놀 수 있고 놀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의 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주변을 살펴봅시다. 어른들은 뭘 하고 노나요? 젊은이들은 술집에서 만나고, 좀 나이가 들면 고급 주점을 가고, 조금 방탕할라 치면 아가씨가 있는 집으로 가기도 하고, 아줌마들은 찻집이나 찜질방을 가고, 즐비한 가요방과 안마방, 섹스 산업의 결과물들인 모텔들이 거리거리마다 늘어서 있고, 각자 자기 취미가 있는 사람은 그 취미에 돈과 노력을 쏟아가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게 오늘날 한국 사회의 '놀이문화'인가 봅니다.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해서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 '쾌락'을 채우는 것, 그리고 '하고싶은 것을 하는 것'이 어른들의 놀이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놀이'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린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의 놀이들을 떠올려봅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진중한 사회화 훈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룰을 정하고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진지하게 놀이에 임하고 있는 셈입니다. 놀이에 빠져든 순간만큼은 진정한 그 놀이의 세계를 살아가는 셈입니다. 엄마를 괴물로 정하고 도망 다니는 아이는 그 순간 정말 괴물을 피해서 도망다니는 셈이지요.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 놀이의 규정을 깨어 버리면 그만 놀이 자체가 허물어지게 됩니다. 숨바꼭질을 하는데 숨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면 그런 사람은 놀이 자체에 끼이질 못하는 셈이지요. 

놀이는 영역별로 다양하기도 했습니다. 숨고 찾기를 즐기는 숨바꼭질, 규칙 안에서 잡고 잡히는 걸 피하는 잡기놀이, 각자의 역할을 연출하는 소꿉놀이, 서로의 능력을 경쟁하는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아이들의 이 다양하면서도 순간순간의 진지함이 놀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몸을 씻고 밥을 먹고 숙제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찰나의 진지함의 순간은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셈이지요.

어른들은 여전히 실제 삶 안에서 아이들이 하던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를 설정해서 서로 도망치고 잡으려고 하고, 돈이라는 가치를 정해서 그걸 많이 모으는 걸로 힘을 경쟁하려고 하고, 각자의 '학위'나 '명예', '직위'를 바탕으로 제 역할을 연기하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아이들이 하는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군요. 거기다 마지막까지 같습니다. 모두가 '끝'이 있지요. 하느님이 부르면 우리는 이 모든 걸 내려놓고는 하늘나라에 가서 씻고 은총을 받아모시고 그분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헌데 이걸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네요.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놀이'를 절대적인 무언가로 생각해 버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놀이, 쾌락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셈입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셈이지요. 주인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종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놀고 있을까요? 놀고는 있는데 진정한 놀이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실제 삶 안에서 필요한 천상의 가치와 규율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세상적인 속임과 비정함으로 살아가는 듯 합니다. 이제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듯 합니다.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린 어쩌면 놀고들 있는 게 아닐까요?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진흙뻘에서 마냥 시간을 더 보내려고만 하는 건 아닐런지요?


양과 늑대

양들이 없는 곳을 늑대가 습격하지는 않습니다.

악마는 타락시킬 '의인'을 찾습니다.
그래서 의인들의 주변에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고통'들이 상존합니다. 아무런 탓이 없는데도 어찌 그리 어지러운 일들이 많은지요.

양들이 없는 곳을 늑대가 습격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양들이 있는 곳 주변에는 언제나 늑대가 어슬렁 거리지요.

아, 걱정마세요. 늑대도 생각이 있어서 같은 동족을 해치지는 않으니까요.
양의 탈을 쓴 늑대분들은 늑대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늑대는 늑대고기를 먹지 않으니까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은 오히려 '양치기'를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곧 신분이 드러나는 날 목자의 지팡이에 사정없이 두들겨맞아 쫓겨나게 될 테니까요.



낮은 곳의 장점

선교지에서 생활하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은 '아무도 이 곳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ㅎㅎㅎ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괴로움, 그리고 이곳 환경의 열악함은 섣불리 다가오기 힘들게 만드는 장벽이 되는 셈이지요. 만일에 누군가가 그런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탐을 낸다면 주교님께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교님이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적절한 곳에다 당장 파견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선뜻 그러는 사람이 없지요. 한 마디로 이곳 선교지는 그 자체로 '낮은 곳'에 위치한 셈입니다.

제가 군대를 갓 제대했을 때에 저는 그야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건축 현장에서 '노가다'를 뛰어 본 적이 있는데 만일 군대를 가기 전이었다면 그런 생활이 죽을 것 같이 힘들었겠지만 군대를 금방 제대해서는 군대와 별반 다를 게 없고 오히려 군대보다 밥도 맛있고 일을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와 쉴 수도 있는 데다가 일당까지 주니 그런 노동이 크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바닥을 치고 나면 그 뒤로는 어디에든 머물 수 있습니다. 노숙을 해 본 사람에게는 모든 잠자리는 '감사'가 됩니다. 최악의 음식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도 '감동'입니다. 신자들이 미사 때에 와서 하느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고 하는 말의 이면에는 이미 신자들이 받은 은총이 어마어마한데도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낮은 곳에 가 보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산 정상 부근에 살면서 가장 꼭대기를 점령하지 못해 투덜대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 아래 계곡에 다녀온 사람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셈이지요.

한국에서 어디로 파견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든지 '감사'의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지요. 한국에 각 본당에 급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선호도에 따라서 생겨난 것이지요. 하지만 그 선호도라는 것이 '영성이나 거룩함'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분별들로 나누어지는 셈이지요. 차라리 각 본당마다 '영성의 급'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본당은 비록 소박하고 재정 형편이 어렵지만 거룩한 신자들이 많고 모든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있으니 A급, 이 본당은 어느 정도 지낼만 하지만 신자들의 마음이 조금 어지러운 상태이니 B급, 이 본당은 드넓은 성전에 재정이 빵빵하지만 신자들이 미친듯이 서로 증오하고 있으니 C급. 그럼 참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성공의 산

삼각형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성공의 산'이라고 이름 짓도록 하지요. 하지만 실제로 이 산은 다른 이름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미모'의 산, '장수'의 산, '명예'의 산, '권력'의 산... 수많은 이들이 그 삼각형의 꼭대기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 삼각형 언저리에 붙어 있자니 자꾸 밀려 내려갈 것 같은 기분이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는 그치지 않아 끊임없이 위로 위로 올라갑니다.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온 세상이 그 자리를 넘보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방하고 욕을 해 댑니다. 그러면서 눈 앞에서는 살살 웃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산의 '공공연한 비밀'을 깨닫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저 깨달음을 얻은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것을 꿈을 꿉니다. 필요하다면 도리어 올라선 그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아래에는 자리가 많습니다. 그리고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높은 곳에서 떨어질 위험이 적고 가장 바닥에 부딪힌다고 해도 그 충격이 덜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요.

그런 가운데 가장 바닥에 내려선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닥에서 무언가 강렬한 체험을 하지요. 전혀 다른 차원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오로지 삼각형의 꼭대기로만 오르려 했던 수직적 움직임 속에서 '외길'을 달려왔다면 이제는 바닥에서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수많은 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삼각형에서는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가치로 분별되었지만 이제 내려선 이 마당에서는 모든 것이 가치로운 것으로 드러납니다. 단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셈입니다.

이 사람은 느긋하게 그 산을 관망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사제'라는 특별한 소명을 받아들고 다시 그 산으로 다가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친듯이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려는 이들에게 '적어도 이제 올라서려고 짓밟는 건 그만하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함께 산을 내려와서 바닥에 머무는 '수도자'라는 이들은 다시 산으로 올라간 그들을 위해 아낌없는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들을 구하러 성공의 산으로 돌아가 다시 그 '성공'의 유혹에 빠져든 사제들이여...
불행하여라, 가장 낮은 곳에서 봉헌 생활을 하지 않고 수도원 안에서 '성공'의 새로운 삼각형을 구축하는 수도자들이여...
불행하여라, 그만두라는 말을 듣고도 미련 때문에 여전히 남을 짓밟으려 하는 평신도들이여...
그들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에 셈을 해야 할 터이니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로 그 삼각형에 머물러 있던 이들이 매를 훨씬 덜 맞을 것이다.


욕구의 순서

1차적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늘 2차적인 욕구들이 눈을 뜬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명품 핸드백을 찾는 사람이 없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인데 성욕을 구하려는 이도 없다. 많은 성인들이 '금욕'을 실천한 이유에는 1차적인 욕구의 절제를 통해서 그 밖의 다른 욕구들을 원천봉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늘 '절제'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이는 그것을 통해 얻는 영적 유익이 엄청날 것이다.

헌데... 이 미친 한국은 2차적 욕구를 위해 1차적 욕구를 희생하는 판이다. 즉, 몸매를 위해 일부로 굶는 미친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우리의 '허영'은 어디까지 갈 판인가? 그 마음 속에서 어떤 결과가 드러날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가 무너뜨린 질서의 결과를 고스란히 되받게 될 날이 다가올 것이다. 그때에 허영심에 가득찬 이들은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좋다. 그 거품이 다 빠지고 나면 정말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사람에게서 배우기

내 옆에는 물이 담긴 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또 시간이 흘러 그것을 다시 바라보지만 변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닥 배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 곁의 사람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또 다릅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도 다르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도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정말로 배울 것이 많습니다.

물론 그가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영향력을 꾸준히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무관심한 사람, 부족한 사람이 가득가득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울 자료들을 가득 지닌 셈입니다. 어쩌면 우리를 자극하는 나쁜 사람들이나 '오류'가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교육자료를 제공합니다. 우리에게 잘 대해주고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은 그저 한때 좋은 느낌을 주고 사라져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내면입니다. '상대'를 통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내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분 좋아했다가 기분 나빠했다가 슬퍼했다가 분노했다가 하는 그 와중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이는 마치 몸의 신경계가 두뇌에 말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어깨가 결리면 거기를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고, 발가락이 아프면 거기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말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성찰'로 초대합니다.

내가 슬퍼하는 일과 짜증내는 일들에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고 왜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지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에 숨어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부정적인 것을 거부하는 어린아이. 우리는 그 아이를 꺼내와서 구슬리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 아이의 지혜가 자라도록 말이지요. 그렇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 아이는 아마 평생을 어린아이로 살면서 끊임없이 투정과 불평을 할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험담하는 것이 싫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왜 싫은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낮은자'로 취급받는 것이 싫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아는 이상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낮아지기를 싫어하는지, 왜 높아져야 하는 것인지,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는지, 낮아지기를 즐길 방법은 없는지, 예수님은 뭐라고 가르치시는지, 영원한 생명 속에 낮은 자리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러한 일련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주고 받으면서 올바른 길을 찾아 나가는 셈이지요. 그러면 빛이 비춰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 내면의 성장을 이루고 나면 비로소 남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꾸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나를 희생하면서도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우리에게 악의를 지닌 '원수'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의 사랑이 그에게 미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가장 첫 작업은 사람 사이에 살면서 그들로부터 나의 모습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화살을 돌리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불안한 소식들

최근 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문자나 카톡 메세지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주로는 종교적 기현상에 관한 것이거나 다가오는 불안한 일에 대해서 대비하라는 메세지입니다. 무슨 성인의 모습이 드러난 사진이 찍혔다는 내용도 있고 곧 전쟁이 있으니 기도하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펴도록 합시다. 13장 5절부터 이런 구절이 시작됩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마르코 13,5-7)

이런 류의 소식을 들으면서 두 부류의 사람이 생겨납니다. 

하나는 기현상을 보고 호들갑을 떨거나 불안한 소식에 걱정에 빠져드는 한 부류입니다. 바로 '죽음'이 여전히 두려운 세상의 자녀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보고도 제자리에서 할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부류들, 곧 '영원'을 기다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비싼 옷에 뭐가 묻었다고 그 옷의 물질적 가치에 집착해서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과 '집에가서 빨면 되지'라고 옷을 그 원래의 용도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차이와 같습니다. 신앙인에게 이 세상은 이든 저든 지나가는 곳이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자녀들에게는 이 세상 뿐이기 때문에 불안증이 수십배로 증폭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메세지를 받고 자기 딴에는 하느님의 메세지를 퍼뜨리는 것이라며 남에게 다시 퍼뜨리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메세지는 카톡 메세지나 문자 따위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페이스북의 제 글로도 오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메세지는 바로 내가 살아가는 하루라는 삶 안에서 내가 만나는 이들과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예언자의 영'을 부어 주셨다면 여러분은 그걸 주체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방방곡곡에 알릴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메세지를 다시 설파하면서 하느님의 메세지를 전한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의지하고 있는 '영적 지도자'에게 문의하십시오. 그가 분별하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순명하십시오. 예수님의 무덤에도 사랑하는 제자가 먼저 도착하였지만 늦게 온 베드로에게 먼저 들어갈 자리를 양보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분별자를 자청해서 엇나간 길에 들어서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소비 사회의 계략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당연히 제품을 과잉 생산하고 그것들을 다 팔아치울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많이 팔면 장땡입니다. 어떻게든 많이 팔아치워 이윤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부추겨야' 합니다. 이든 저든 사라고 말이지요. 밥을 먹는 데에는 밥과 국, 그리고 몇가지 반찬이면 거뜬합니다. 하지만 이 음식은 몸에 좋고 저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하면서 좋은 음식을 광고하고 그것을 소비하도록 합니다. 사막에 온풍기를 팔고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팔고 전기도 없는 아프리카에 에어컨을 팔아 치운다는 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사람들을 선동해서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던 과일을 다른 나라에서 산더미로 들여와서는 '건강에 꼭 필요한 것'이라며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나니 어느 순간 우리가 가진 걸 주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가진걸 보관하고 처리하는 걸 또 사야지요. 몸도 이미 들어온 영양분을 처치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병증이 생깁니다. 사실 우리의 질병의 거의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셈입니다. 너끈히 먹는 것도 한두번이어야 몸이 그에 대응해서 각종 효소와 호르몬을 준비하는데 이건 삼시 세끼를 들이밀어대니 몸도 자신의 시스템을 돌리다돌리다 결국 고장이 나는 셈입니다. 이런 의미로 병은 바로 우리 탐욕이라는 죄악의 결과인 셈입니다. 

그렇게 고장난 몸이 모여드니 당연히 병원이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또 생산자들이 난리가 나는 셈입니다. 이제는 몸을 치유해야 한다고 하면서 또 각종 약품을 개발하고 만들어 몸에다 집어 넣습니다. 이것들이 과연 몸을 치유할까요? 네, 눈에 보이는 증세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 '화학약품'이 이면에 어떤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 발맞추어 불안증이 커지고 그걸 커버하기 위해서 '보험'이라는 허울좋은 상품을 개발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돈'으로 액운을 막으라는 것이지요. '사망보험'이라는 게 제일 웃깁니다. "니가 죽으면 가족이라도 잘 살게 하라"면서 너도나도 보험을 들게 합니다. 죽으면 저 자신의 영혼부터 걱정해야 할 판에 여전히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런 저런 계략에 휘말립니다.

소비사회는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한바탕 게임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돈벌이 수단'일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사방에서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좋다고 그 안에서 퍼질러 놀고 있는 셈이지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제자들과 그것을 한탄하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한 지금의 모습에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주님의 기도는 왜 바치는지 모르겠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않을 때가 올 것이다." 여러분, 그만 탈출하세요.



심판의 눈길

우리는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로 단순히 '외적'으로 일어난 일만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기가 쉽상입니다. 교회내 대표적인 케이스로 길을 벗어난 신학생과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신학교'와 '수도회'를 나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곤 합니다. 참 단순한 논리입니다. 그들의 짧은 분별로는 '신학교'에 머무름이 무조건 진리가 되고 '수도회'에 머무름이 무조건 진리인 셈이지요. 그래서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과거 '신학교' 또는 '수도원'에 있었다고 하면 기본 색안경을 끼고 그를 바라봅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겠거니'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판단은 우리가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부분이지요. 게다가 그러는 동안 우리는 정작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신학교나 수도원에 우리 스스로가 머물렀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그들보다 더 일찍 뛰쳐 나왔을지도 모를 우리 자신은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막연히 그들에게 '심판의 눈길'을 던지는 셈입니다. 참으로 '교만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길을 가면서 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이 남아있는 동안 우리는 여러가지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신학교'나 '수도원'이라는 좀 더 직진성을 드러내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길이 있지만 그 길만이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고 있고 그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쳐다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응답은 그들 자신의 내밀한 곳에 남겨두고 우리는 우리 길이나 바로 쳐다보도록 합시다. 남들이 가는 길을 바라보면서 궁시렁대는 사람치고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합당한 장상이 아닌 이상은 그들에게 '충고'하려 들지말고 우리로서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셈입니다.



행복의 바다와 쾌락의 산

바다를 보러 간다면서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어리석다'고 합니다.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행복'의 바다를 찾으러 간다고 하면서 '쾌락'의 산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전혀 다른 방향인데 기어코 거기서 찾겠답니다. 뭐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쾌락의 산꼭대기에서 비로소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다시 내려와 바다로 걸어가려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셈입니다. 그러니 애시당초 바다로 방향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 훨씬 쉬운 편이지요.

바다는 낮은 곳에 있습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강을 따라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가야 하지요. 반대로 산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오직 인간의 욕구만이 산의 정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비유적인 내용이지만 충분히 알아들으셨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그 흐름은 자연스레 우리를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대양으로 이끌어주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대양에 몸을 섞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투쟁해야 합니다. 다리에 잔뜩 힘을 기르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야 하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힘은 더욱 더 필요합니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간 뒤에는… 결국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거기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살 자리는 거기가 아닌 셈입니다.

다른 이보다 한 켠 높아지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미모를 가꾸던지, 돈을 벌던지, 기술을 연마하던지, 인간관계를 더 폭넓게 가지던지, 이름을 내세우던지… 심지어는 기도도 더 많이 하려 하고, '거룩함'에서도 '이기려고' 합니다. 하하하. 정말 어처구니 없지요.

성당에 나아오는 그 수많은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찾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천만에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철들기 전까지 싸웠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하고 말이지요. 그 수많은 자매들의 주임신부 사랑 쟁취 전략 속에서 하느님이 얼마나 기가 찰는지요. 그 수많은 형제님들의 교회 내부 권력 다툼에서 하느님은 은근 화가 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애정을 품고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시겠지요. '낮아지라'고 말이예요.

사람의 아들은 수난당하고 죽고 그리고 나서 사흘 뒤에 부활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고 주고 또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왜냐면 여전히 우리들은 마냥 높아지고만 싶으니까요. 더 많이 벌고, 더 가지고, 더 이쁘고, 더 날씬하고, 더 성공하고, 더 알고, 더 뻐기고, 더더더…. 이제 이 미친 '등산'을 그만둬야 할 때가 아닐까요?


허상들

물질이라는 것의 실체를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금처럼 사랑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물질의 근본 안에는 하느님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고 있는 형상과 그것에 부여된 가치는 인간들이 상정한 것일 뿐이다. 결국 물질세계 전체는 그 안에서 영적인 가치들을 배우지 못하는 이상은 '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가 잘 그려진 그림을 보자. 우리는 그 그림의 사과를 보면서 감탄을 하지만 정작 사과 그 자체를 보면서 감탄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그림에 쏟아진 작가의 노력과 섬세함을 감탄하면서 정작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실제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인지하지 못하는 셈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것들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감각을 키울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된다. 음식은 우리 육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을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과장'이 들어가고 그만큼 마음을 빼앗기는 셈이다. 결국 그런 음식들을 먹을 수 없게 될 때의 고통도 가중되는 셈이다. 선교지에 나와서 벌써 5년이 흘렀지만 내 안에 여전히 고국의 음식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그 때가 덜 벗겨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에 수십년동안 훈련되어 온 셈이고 따라서 지금 이 선교지에서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에 감사하기보다는 한국의 음식과 비교하며 투정을 부리는 일이 더 잦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것의 허상에 대해서도 잘 성찰해 보아야 한다. 높디 높은 산꼭대기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길 바라고 그리로 올라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는 동안 있고 있는 셈이다. 그 높은 자리가 무엇을 바탕으로 솟아 있는지 말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는 늘 낮은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더 높이만 솟으려 하니 서로 짖밟는 행위들이 연달아 연출되는 셈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정치 권력의 판도이다.

육신의 쾌락이라는 것과 세상이 정한 높은 자리라는 것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도록 하자. 그리고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구하도록 노력하자. 나아가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구해야 하는 가치들을 잊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영혼'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의 유혹들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셨나보다.



영과 육

사람이 영적인 가치와 그 기쁨에 물들어가면 육적인 쾌락에서 서서히 멀어져갈 수 있다. 영적인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 그는 제 쾌락의 종일 뿐이다. 결국 그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그의 영적 진보를 알 수 있게 된다.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

신부를 자주 찾게 되는 일 중에 늘 빠질 수 없는 것이 '죽음'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죽고나면 너도나도 당황을 하게 되지요. 그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울고 슬퍼하면서도 그 반대급부로 '위안거리'를 찾아 헤멥니다. 그러다가 사제를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로 알고 있고 때가 되면 사제를 미리미리 찾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도 찾아가지만 '병자 봉성체'와 '병자성사'도 잊지 않지요. 하지만 이곳 볼리비아는 '세례'만 받고서는 성당 코빼기에도 나오지 않다가 누군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사제를 찾는 이들이 수두룩빽빽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저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인 셈이지요.

아까도 전화가 와서 누가 죽었다고 좀 와 달라고 합니다. '알았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는 중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가면 또 수많은 [이교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무늬만 가톨릭이고 실제로는 제 '욕구'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돈'을 그 우상으로 내세우지요. 참으로 좋은 교리교육의 기회입니다. 교보재는 '망자'인 셈이지요. 눈 앞에 드러난 삶의 현실 앞에서 그들은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일하게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지요.

저는 그런 자리에 가면 할 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꼬락서니를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 주려고 노력하지요. 돈을 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런 일들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짚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한 번의 '빛의 비추임'일 뿐이지만 그 효과는 대단합니다. 자기가 뜨끈하고 부드럽다고 만지고 있던 게 똥인 줄 알면 그 뒤로는 당연히 뒤로 물러서게 되지요. 그야말로 한 번의 제 강론으로 그들에게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을 골라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고나면 그들은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전히 미망에 빠져 세상의 욕구 속에 헤엄을 치고 불안하게 살아가던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늘 그렇게 사람들을 마주하고 같은 걸 가르치는데도 지치지도 않고 저를 찾는 걸 보면 저도 신기합니다. 축복을 해 달라는 곳에 가서 그들이 바라는 물질적 축복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도리어 고심할 거리만 잔뜩 갖다 주기만 일쑤인데도 그래도 사람들은 좋다고 저를 찾네요. 마치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괴로워 하면서도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도리어 즐겨 조언을 구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예언자의 목을 벨 것을 말이지요.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가던 길을 가야지요. 그들은 그들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세상 곳곳에 빠짐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나갑니다. 다녀오겠습니당~ ^^


욕구를 제자리로 돌이키기

모든 불화와 걱정의 시작점은 대부분 '나의 원의'에서 비롯됩니다. 만일 제일 첫 시작점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신경쓸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라면 세상은 그걸 가로막는 일은 없습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는 이를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맛있는 걸 두고 이걸 먹느냐 저걸 먹느냐 하다가 서로 욕구가 충돌해 부딪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욕구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이런 욕구들을 더욱 극대화하여 꾸미려고 작정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저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과한 욕구를 '정당화' 하고 '상품화' 합니다.

한동안 신부님들 사이에서 '산악 자전거'가 유행했습니다. 사실 저는 수백만원 심지어는 수천만원짜리 자전거를 구입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뭐 각자 나름의 이유는 다 있었지요. 좋은 물건이 제 값을 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저에게는 '과한 욕구의 정당화'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살을 빼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너도나도 달려드는데 과연 그렇게나 과한 자전거가 필요했을까요?

만일 치료의 목적으로 의사가 자전거 타기를 권했고, 그런 자전거를 고르는 중에 보다 몸에 맞는 걸 찾아서 전문적인 자전거를 고른다면 모르겠지만 유행처럼 번지는 그 세태에서 우리는 '자전거'라는 이유 때문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만일에 수백만원짜리 금목걸이를 걸고 다녔다면 적지 않은 신자들은 당장에 속으로 비난했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신부 월급이라는 게 빤한데 연차가 있는 주임 사제도 아닌 젊은 보좌 신부가 그 수백만원짜리 자전거를 구입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돈은 모두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의 욕구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시를 하나의 특정 주제로 들어서 그렇지 사실 이러한 '욕구의 과대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기본 베이스로 깔려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나 많은 옷가지들과, 음식들과,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번 옷장을 그득그득 채우는 옷들을 바라보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 일년을 보내면서 단 한 번도 입지 않는 옷이 있다면 그 옷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닌 셈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제 자리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낮은 자리

신학교때 한 고민 가운데에는 오늘 복음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거든 낮은 자리를 고르라는 것이었지요. 그럼 나중에 ‘주인’에 의해서 들어높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높아지려는 의도’를 가지고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의문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그런 의도를 가진다고 해도 ‘낮은 자리’로 스스로 찾아가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일상 안에서 늘 낮은 곳에 머물기로 작심을 하고 처신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어느 주임 신부가 어느 잔치 자리에서 멀쩡히 자신에게 유보된 자리가 있는데도 말도 안되게 자신의 자리를 낮추려는 것은 ‘거짓 겸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대놓고 자신을 높이는 행위이지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신자분들이 난리가 날 것인데 그걸 은근히 즐기는 것입니다.

주임 신부로서 실제로 낮은 자리는 신자들과 일을 해 나가면서 의견을 양보해야 할 때입니다. 귀 기울여 그들의 의견을 더 많이 듣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사목에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낮춤의 자리인 셈이지요. 그러면 그 보상이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위선’과 ‘겸손’은 다릅니다. 겸손에 대해서는 제가 누차 설명을 했지만, 참된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그분 앞에 선 우리의 존재의 허무함을 자각하고 그분의 섭리와 거룩한 뜻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입니다. ‘위선’은 자신의 내면에 한껏 교만을 간직하고 스스로 겸손한 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천해 보시면 압니다.


달란트의 비유 - 시간의 허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의 순간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삶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찾아오는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충실히 응답을 하면서 이 시간을 메꿔 나갑니다.

결과물을 많이 생산해내는 무언가를 많이 한다고 생을 충실히 보낸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삶은 생을 허비하기가 일쑤입니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향해 추구하고 나아가긴 하는데 내면이 더욱 공허해질 뿐이지요.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을 잡는다고 그 삶이 충만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의 충만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마냥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도전 거리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최고의 응답을 해야 하는 셈입니다.

미사에 가면 온 정성으로 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식구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봉사하고, 사회 안에서 주어진 역할 속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가난한 이를 도우고, 병자와 약자를 돌보고, 어른을 섬기고, 밥 먹을때 먹고, 쉴 때 쉬는 그야말로 매 순간을 충실히 보내는 데에 노력해야 합니다.

적지않은 현대인은 이 순환고리를 파괴시켜서 전혀 엉뚱한 삶을 살아갑니다. 미사 때에 세상 걱정을 하고, 집에서는 직장 걱정을 하며, 직장에서는 놀 생각만 하고, 가난한 이는 무시하고, 병자와 약자는 수용소에 넣어 버리고, 어른은 무시하면서 지 새끼만 사랑하고, 밥 먹으면서는 더 맛있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쉴 때는 몸을 혹사시킵니다. 그러니 자연 마음이 공허해지는 걸 느끼지요. 돈도 엄청 벌어대고 뭔가 엄청나게 많은 걸 해 대는 듯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셈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달란트에서 많은 ‘영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걸까요?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중략)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어쩌면 하느님의 뜻에 사는 이들은 악한 이들의 남은 생을 더 선물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