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은 원합니다.
그렇지만 독자 이사악을 바치는 것은 거부합니다.
요셉처럼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꿈을 꾸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배신당하고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영적 권세, 영적 권능은 원하지만
지독한 외로움과 우상을 파하기 위한
목숨을 건 도전은 원치 않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계시의 말씀과 지혜를 원하지만
하느님만 예배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광야의 눈물의 예배는 원치 않습니다.
에스터와 같은 왕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원하지만
목숨을 건 금식과 기도는 거부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카리스마는 원하지만
약대 털옷과 메뚜기와 석청은 싫어합니다.
베드로처럼 하루에 5천명을 회개시키기 원하지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는 싫습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은 위대한 사도는 되고 싶지만
그가 매일 매일 숨쉬듯 경험해야 했던
고난과 위협은 거부합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채워줄 하늘의 축복은 원하지만,
그 축복을 상상도 못하는 민족들에게
우리가 이미 받은 축복을 나눠주는 선교는
거부합니다.
이 땅을 흔들 부흥은 원하지만
그 부흥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원하지만 십자가는 거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모순>이라는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시대 교회의 모습, 우리들의 자화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으로 보여주시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라는 파스카 신비에서
나타난 복음의 본질에서 너무나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무죄하신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대속(대신 보속)의
십자가의 희생과 수난, 고통과 죽음 없이
어떻게 부활과 영광과 천상 상급이 가능한 것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는 분명 오상(五傷)의 상흔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왜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속한 우리는 망각하는가?
그러면서 왜 복음의 핵심과 본질이 자꾸 변질되어 가는 데에 대해서
침묵하며 동조하고 속화(俗化)의 길을 걸어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뿌리 깊은 신앙을
이 시대의 교회가 되찾지 않는 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터전에는
주님께서 역사(役事)하지 않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임 이스마엘, 인터콥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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