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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2014.09.17. 복음과 묵상 ~

2014년9월17일 연중 제 2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

당시 유대인들을 보시며 안타까움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하고 슬픈 이야깁니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해 마음이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데도 말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인간으로서 갖추고 지켜야 할 당연한 것들이 낯선 풍경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세상은 욕망이라는 병으로 심하게 앓고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통의 단절, 공감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힘들고 지친 이들, 다양한 소외계층들은 그분과 소통을 했고 그분의 말씀에 공감을 했지만, 소위 힘을 가진 자들은 소통을 거부했고 공감의 기회조차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향한 소통과 공감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사랑과 용서 그리고 나눔도 결국 공감에서 가능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소통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작년 12월에 떠오른 생각을 메모처럼 옮겨놓았던 묵상 글입니다.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고, 웃어야 할 때 함께 웃을 수 있고, 누군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할 수 있고, 누군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고 건강한 가족이고 건강한 개인이다.
이것이 안 되기에 우리는 서로 이질감이라는 벽을 만들고, 선긋기를 하며 온갖 종류의 소외와 차별을 만들어낸다.
이는 획일화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구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이기에 모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더욱 굳어지는 생각입니다.
온갖 종류의 이기심들과 기득권들은 이기적인 소통만을 원합니다.
공감이 아닌 자기 편 만들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불행한 인간들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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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014년9월17일 연중 제 2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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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대인들을 보시며 안타까움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하고 슬픈 이야깁니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해 마음이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데도 말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인간으로서 갖추고 지켜야 할 당연한 것들이 낯선 풍경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세상은 욕망이라는 병으로 심하게 앓고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통의 단절, 공감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힘들고 지친 이들, 다양한 소외계층들은 그분과 소통을 했고 그분의 말씀에 공감을 했지만, 소위 힘을 가진 자들은 소통을 거부했고 공감의 기회조차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향한 소통과 공감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사랑과 용서 그리고 나눔도 결국 공감에서 가능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소통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작년 12월에 떠오른 생각을 메모처럼 옮겨놓았던 묵상 글입니다.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고, 웃어야 할 때 함께 웃을 수 있고, 누군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할 수 있고, 누군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고 건강한 가족이고 건강한 개인이다.
이것이 안 되기에 우리는 서로 이질감이라는 벽을 만들고, 선긋기를 하며 온갖 종류의 소외와 차별을 만들어낸다.
이는 획일화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구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이기에 모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더욱 굳어지는 생각입니다.
온갖 종류의 이기심들과 기득권들은 이기적인 소통만을 원합니다.
공감이 아닌 자기 편 만들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불행한 인간들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