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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미사 강론 / 북산 성당 부주임 이균태(안드레아) 신부님 ~



 

 

축일:10월1일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작은 여왕’, ’소화데레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리우는

데레사 성녀는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과 젤리 궤렝의 딸로 태어났으며

그녀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 테레즈(1873-1897년)였다.

 

1888년 아직 어린 데레사는 노르망디의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이미 이곳에는 그녀의 두 언니도 수녀로 있었다.

 

9년 동안의 가르멜 생활은 다른 자매들과 견주어 볼 때 독특한 면은 거의 없고, 그저 평범한 생활이었다.

 

일상적인 기도와 일, 자만심에서 기인한 과오, 극복해야 했던

고집스런 성격 및 내외적인 갖가지 시련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 ’작은 길’

용감하게 개척하며 전진해갔던 것이다.

 

데레사는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익히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 같은 덕행을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데레사 성녀는 죽기까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선교 지역에서 신앙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녀는 24세의 일기로 많은 고통을 당한 후 선종하였다.

 

1895년 초,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한 글을

쓰도록 지시를 받았고, 그후에 또 다른 생활 기록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한 영혼의 이야기’는 데레사가 비범한 한 거인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사실은 이 책이 리지외의 데레사 공경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녀는 1925년에 시성되었으며,

봉쇄구역 안에서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쇄신 그리고

선교지역을 위한 놀라운 기도로 지낸 생애를 기리기 위해

교회는 그녀를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모시고

특별한 공경을 드리고 있다.

 

 

 

 


찬미예수님!

 

오늘의 미사강론
 

 

10월 1일 수요일 예수 아기의 데레사 대축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부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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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詩月)의 첫날,


교회는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을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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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소화, 작은 꽃으로 불리는 분이다.


그런데 소화 데레사는 「포교(선교)사업의 수호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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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이분은 외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 정말 「작고 조용한」


삶을 살고 가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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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 성녀는 겨우 24년의 삶을 사셨다.


그것도 마지막 9년은 프랑스 리지유(lisieux)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살다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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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으로 볼 때「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만한 것을 남겨놓으신 것도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분을 교회는 (1925년에 비오11세 교황 때)


「포교(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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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좁은 공간 속에 사셨지만 세계를 끌어안는


성녀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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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들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하여「사랑」의 삶을 살며,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신 그분의「사랑」 때문에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셨으리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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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분은 「사랑」이야말로 모든 선교활동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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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의 삶을 사셨지만,


외적으로는「작고 조용한」삶을 사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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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소화 데레사 대축일을 맞이하며, 교회는 말씀의 전례


특히 복음을 통해, 「작은 사람들」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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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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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가르침이고,

둘째,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받아 들여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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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받아들여라」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 보자. 「어린이」는 문맥 전체를 볼 때,「보잘 것 없는 이들」(작은 이들)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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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공동체에 관한 설교」인 마태오 18장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그 전반부는 공동체 안에 있는「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태도에 관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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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라는 표현이

세 번(6. 10. 14절)이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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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한편으로는「이 보잘 것 없는 이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손과 발이 있으면 그것들을 찍어 던져 버려라」는

표현까지 사용하시면서 강력히 경고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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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그냥 놓아두면 죽게 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는

목자의 비유를 드시면서, 공동체 안에 있는「보잘 것 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라고 격려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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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보잘 것 없는 이들」에 관한

이 일련의 말씀의 제일 앞자리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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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심으로써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당신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직접 보여주시고, 또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예수를 온전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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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어린아이를 받아들여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공동체에서 만나게 되는「보잘 것 없는 이들」,

곧 어린이처럼 다른 사람의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자신보다 약하고

작은 사람들을 섬기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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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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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우선 『겸손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항상 더 크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본연의 처지를

깨달을 줄 아는 겸손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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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하여도 겸손하게 만든다.

하지만,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이 단지「겸손하게 살라」

또는「어린이와 같이 약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라」는 뜻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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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어린이처럼「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도 들어 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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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첫날이라고, 지인 한 분이 나에게 글을 보내 주셨다.

10월 한달 내내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는 것으로 강론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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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0월의 달력으로 바뀌었습니다!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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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습니다.

 

9월 마지막 날 별고 없이 잘 지내셨는지요?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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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변함에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느껴 봅니다.

 

세상에 내 삶을 염려하며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안부를 물어 보고픈 사람들이 또한 많이 있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럽고 큰 힘이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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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람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의 안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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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모두 잘 되시길 바라며,

 

가을의 길목에서 안부를 띄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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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도 건강하시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 님의 뜻이 - 임석수 신부님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