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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마 하 바 라 ~



마하비라

“금욕-고행 통해 선업 쌓아야만 해탈 가능”
공기 속 벌레까지도 보호하는 자비의 극치
해탈은 오직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
‘아힘사’ 가르침, 간디·슈바이처에 큰영향

31세에 출가한 마하비라는 고행의 삶을 시작한 13년째 되던 해, 해가 기우는 저녁무렵 깊은 선정에 들어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뤘다.인도의 주요 종교는 인도인 절대다수가 받들고 있는 힌두교(Hinduism)와 교도 수는 적지만 영향력이 큰 자이나교(Jainism), 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화해시킬 목적으로 생긴 시크교(Sikhism)가 있다. 마하비라(Mahāvīra·기원전 약 599-527)는 자이나교의 창시자였다.

 

거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와 마찬가지로 마하비라의 삶에 대해서도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밝혀낼 수는 없다. 자이나교의 전통에 의하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599년에서 527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학자들 중에는 549년에서 477년이라 보는 이도 있다. 부처님의 생몰연대를 기원전 563~483년으로 본다면 둘은 적어도 몇 십 년을 같은 기간에 살았던 동시대의 인물들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 두 스승의 삶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비슷한 시대 뿐 아니라, 비슷한 가문, 비슷한 지역에서 비슷한 삶을 살았다.

 

‘붓다(부처)’가 ‘깨달은 이’라는 뜻의 호칭인 것처럼, ‘마하비라’라는 말도 호칭으로서 ‘위대한 영웅(大雄)’이라는 뜻이다. 그의 본명은 바르다마나(Vardhamāna)로서 ‘불어남’이란 뜻이다. 자이나교의 전통에 따르면 그는 제24대이자 마지막 티르탄카라(Tirthankara)였다. 티르탄카라란 ‘개울을 건넌 사람’이라는 뜻으로 깨침을 이룬 위대한 스승을 의미한다. 불교 팔리어 경전에는 그를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ātaputta)’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다.

 

붓다와 유사한 동시대 성자

 

마하비라는 불교의 제2결집이 있었던 바이살리, 현재 인도의 비하르(Bihar)에서 싯다르타 왕과 트리샬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태중에 있으면서 벌써 그 나라에 번영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에게 ‘불어남’을 뜻하는 이름이 주어졌다.

 

왕비는 여러 가지 길조의 태몽을 꾸고 아기를 낳았다. 태어난 아기는 인드라 신이 직접 천상의 우유로 목욕을 시켰다. 앞으로 티르탄카라가 될 인물에게 주어지는 예식이었다. 어린 마하비라는 ‘기저귀 갈아주는 유모, 목욕시키는 유모, 옷 입히는 유모, 놀아주는 유모, 어디 갈 때 데리고 가는 유모’ 등 다섯 명의 유모를 두고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다. 어린 왕자로 살면서도 명상이나 선정(禪定)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자라서 결혼을 하고 딸도 얻었지만 왕자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왕궁 밖에는 ‘속박에서 벗어남’이라는 이름의 금욕주의적 수도 단이 있었는데, 마하비라는 이들의 생활방식을 동경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부모님이 살아 계실 동안에는 출가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기다렸다.

 

마하비라가 30세가 되는 해 부모가 돌아가셨다. 그는 왕궁을 떠날 준비가 되었지만, 형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1년을 더 기다렸는데, 기다리는 동안 ‘금과 은과 군대와 전차’ 등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자로 태어나 출가해 깨달아

 

왕궁을 떠나 처음에는 궁 밖에 있던 일단의 수도자들에 합류했다. 규정에 따라 손으로 머리 양 쪽에 있는 머리카락 ‘다섯 줌’을 뽑았다. 그리고는 “나는 내 몸을 돌보지 않겠다. 나는 신의 힘이나 인간이나 동물들로부터 오는 어떤 어려움이든 평상심을 가지고 참고 견디겠다.”고 하는 서원을 했다.

 

이들 수도승들과 몇 달을 지낸 다음 마하비라는 자기 혼자 수행하기로 했다. 한 벌 걸쳤던 옷을 던져버리고 완전 나체가 된 상태에서 걸식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며, 윤회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 천하를 주유(周遊)했다. 4개월간의 우기를 제외하면 한 마을에서 하룻밤 이상 머물지 않았고, 한 도시에서 5일을 넘기지 않았다.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날씨에도 옷을 입거나 피할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여름 더운 날에도 땡볕을 피하지 않았다. 잠도 최소한으로 자고 몸에 기름을 바른다거나 머리를 감는다거나 이빨을 닦는 일도 하지 않았다. 정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또 모든 것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불살생(不殺生, ahimsa)의 원칙에 철저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자기 앞으로 사방 사람의 키 높이 정도의 땅을 찬찬히 살피고, 자기 옆으로도, 뒤로도 살피면서 생명체를 밟지 않도록 했다.

 

몸에 이 같은 것이 들끓어도 이를 잡거나 몸을 긁는 일을 하지 않았다. 빗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길에 있는 벌레들을 쫓고, 땅에 앉아 쉬거나 잘 때도 벌레들이 깔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다. 샘에서 물을 마실 때도 벌레를 마시는 일이 없도록 얇은 천으로 물을 걸러서 마시고, 숨 쉴 때도 벌레를 들어 마실 위험을 없애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드디어 고행의 삶을 시작한지 13년 되던 해 어느 날, 해가 기우는 저녁 무렵 깊은 선정에 들어가 완전한 깨침에 이르렀다. 이제 문자 그대로 ‘이긴 이(Jina)’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위해 모여 들었다. 이후 30년 간 부처님을 후원하던 같은 왕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그가 깨달은 진리를 가르쳤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자이나’라 부르고 그가 전파한 종교가 바로 자이나교였다.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가 창시자가 아니라 자기가 물러 받은 자이나교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널리 가르친 이라 믿는다.

 

그는 72세가 되던 해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라하(王舍城) 부근 파바라는 곳에서 자의적으로 식음을 전패하는 의식(sallakhana)를 통해 열반에 들었다. 자이나교에서는 이 날을 그가 목샤(해탈)를 얻은 날로 기념하고 있다.

 

마하비라의 가르침은 세 가지 형이상학적 가르침과 다섯 가지 윤리 강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세 가지는 형이상학적 가르침은 첫째, 진리를 찾는데 한 가지 절대적인 길은 없다는 것(anekantavada), 둘째, 모든 견해는 보는 시각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상대적이라는 것(syadvada, 여기에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 群盲撫象라는 우화가 나왔다), 셋째, 인간은 영원부터 축적된 카르마(karma, 업)의 결과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특히 카르마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는데, 인간은 이런 업장이 가져다주는 미망 때문에 이 물질 세계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고, 이로 인해 탐진치나 기타 악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계속 악업을 쌓게 되므로 끝없는 악순환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하비라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가 고행을 통해 선업을 쌓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지혜’, ‘바른 행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때 바른 행동은 다시 1) 모든 생명체에 해를 주지 않겠다(ahimsa), 2) 진실만을 말하겠다(satya), 3) 훔치지 않겠다(asteya), 4) 성적쾌락을 추구하지 않겠다(brahmacharya), 5) 사람이나 장소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겠다(aparigraha)고 하는 ‘다섯 가지 서원(panchavrats)’을 하고 이를 성실히 실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붓다 ‘극단적 고행자’ 비판

 

마하비라는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고 있기에 인간의 노력을 대신하거나 도와줄 수는 없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 심지어 베다경에 의지할 수도 없다.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해방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했다. 인간 구원에 관한 한 마하비라는 무신론자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하비라는 우주 자체는 영원하지만 그 우주가 끊임없이 진화와 괴멸의 주기적 순환운동을 계속 한다고 보았다. 각 주기 동안에는 24명의 티르탄카라, 12명의 전륜왕, 63명의 대인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주기 중 최고 시기에는 사람들의 몸집도 크고 수명도 길었다고 한다. 소유도 필요 없었는데,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가 있어서 무엇이나 소원을 말하기만하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괴멸의 시기로 이 주기의 마지막 티르탄카라인 마하비라가 입멸한 후 급속히 기울어지고 있고, 결국은 정법(正法)도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이 괴멸의 과정이 4만년 동안 계속될 터인데, 나중에 가면 사람들이 모두 난쟁이처럼 되고 수명도 20년 정도, 동굴에서 불을 사용하는 법도 잊은 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후 다시 진화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마하비라의 입멸 이후 조금 지나 승단(sangha)은 나체로 지낼 것인가, 옷을 입을 것인가 하는 사소한 문제로 파가 갈라졌다. 남쪽 출신들은 하늘이 옷인데 왜 또 옷을 입는가 하며 나체로 지낼 것을 주장하고, 북쪽 지방에서는 흰 옷을 입어도 좋다고 했다. 나체를 주장하는 파를 디감바라(天衣派)라 하고, 옷을 입어도 좋다는 파를 스베탐바라(白衣派)라 한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달리 그 발상지 인도에서 몇 천 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마하비라와 자이나교에서 강조하는 아힘사의 가르침은 힌두교 등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슈바이처 박사의 ‘생명 경외’ 사상도 연원을 따지면 자이나교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이나교가 성행하는 구자라트 지방 출신인 간디는 ‘다섯 가지 서원’ 등 자이나교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받아 실천에 옮겼다. 간디의 어머니가 자이나교도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그 지방에서는 실제로 자이나교도와 쉬바 신을 따르는 힌두교도들 사이에 많은 가르침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이나교도들은 모두 5백20만 정도로, 주로 붐바이(봄베이)와 콜카타(칼카타) 등 인도 주요 도시에 살고 있다. 그들은 불살생의 원칙 때문에 땅 속의 벌레를 죽이지 않으려고 농사를 짓기를 그만 두고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데, 그 덕택으로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층을 이루고 있다. 현재 인도 인구의 0.42퍼센트에 불과한 자이나교도들이 인도 세금의 24퍼센트를 내고 있다. 이들은 반전 운동과 동물보호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가끔씩 부자 자이나교인이 시장에 나가 양이나 닭을 모두 사서 방생하는 일도 있다.

 

며칠 전 이곳 밴쿠버에서 Jain이라는 이름의 부부 심장 전문의를 만났는데, 부부 다 자이나 교인이지만, 각각 다른 파에 속한다고 했다. 둘 다 옷을 입고 있었다. 디감바라 파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옷을 입는다고 한다. 더구나 캐나다 같이 추운 지방에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마하비라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2천5백 년 전 마하비라의 가르침이 이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