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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명상은 삶에서 얻을수 있는 최고의 예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인도 대표 사상가 및 저술가
명상·강연으로 일평생 보내
“마음 작용 관조로 문제 해결”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가 지금껏 가치있고 필요하다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1895~1986)는 그의 책 중 40여권이 한국말로 번역되어 나와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인도 출신의 이 사상가, 저술가, 연사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5월 12일 인도 마드라스에서 브라만 계급에 속하는 부모 밑에서 여덟 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당시 영국 식민지 정부에서 관리로 일했다. 그가 무척 따르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때 죽었다. 집안은 계란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실천했고, 영국인의 그림자라도 스쳐간 음식은 버렸다고 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버지는 1907년 정부 관리 자리에서 물러나고, 생활이 궁핍해지게 되자, 그 당시 마드라스 신지학회(神智學會, Theosophist Society) 책임자였던 아니 비산트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드디어 일자리를 얻고 1909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신지학회 본부 근처에 있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신지학회에 의해 구루로 발탁

그 해 4월 크리슈나무르티가 14세 때 신지학회 부근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우연히 신지학회의 지도자 중 하나인 리드비터와 만나게 되었다.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에게서 티끌만큼의 이기심도 보이지 않는 특별한 ‘후광(aura)’을 보았다. 그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초라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가 앞으로 위대한 스승이 되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 이후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회의 특별 배려 아래 여러 분야에 걸친 특수 교육을 받았다. 6개월 내에 영어로 말하고 쓰는데도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신지학회 최고 책임자 비산트의 양아들로 입양되었다. 1911년 신지학회 지도자들은 장차 올 ‘세계의 스승’을 위한 조직으로 ‘동방의 별 교단(the Order of the Star in the East)’을 결성하고 크리슈나무르티를 수장으로 삼았다.

 

크리슈나무르티 스스로도 자기가 특별히 훈련을 받으면 ‘세계의 스승’이 될 수 있으리라 믿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인 것에 별다른 적성이나 취미가 없었다. 대학도 여러 군데 입학만 하고 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훈련을 통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배우고 기독교 성서나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셀리 등 서양 고전에도 접할 수 있었다.


1911년 크리슈나무르티는 자기 동생 니탸(Nitya)와 함께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4년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동방의 별 교단의 수장 자격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강연을 했다.

 

1922년 시드니에서 스위스로 가는 길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들려, 로스엔젤리스 북쪽 산타바바라 부근 한적한 마을 오하이(Ojai) 벨리에 있는 어느 별장에서 얼마를 보냈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그 별장과 주위 땅을 사들이고 그 이후 죽을 때까지 이곳이 그의 공식적인 주거지가 되었다. 그해 8월 17일 그는 이곳 오하이에서 특별한 신비적 경험을 하고 ‘무한한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는데, 이런 경험은 그 때 이후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나타났다. 이 경험으로 그의 삶은 일대 변혁을 겪게 되었다. 그 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맑고 순수한 물에서 마시고, 나의 목마름은 만족을 얻었다. 나는 빛을 보았다. 나는 모든 슬픔과 아픔을 고쳐주는 자비에 접할 수 있었다. 그 자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사랑은 그 모든 영광으로 나의 가슴을 취하게 하고, 나의 가슴은 결코 닫혀 질 수 없었다. 나는 기쁨과 영원한 아름다움의 샘에서 마신 것이다. 나는 신으로 취한 사람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회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던 데서 어느 정도 해방되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기의 독자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5년 11월 그와 언제나 같이 다니던 동생이 폐결핵으로 죽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신지학회와 그 가르침에 대한 그의 믿음이 결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간 그의 영적 안목은 더욱 깊어졌다.

 

특별한 체험 뒤 독자 길 걸어

드디어 1929년 8월 3일 네덜란드 옴만에서 열린 동방의 별 교단 전체 모임에서 크리슈나무르티는 자기가 메시아도 아니고 구루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자기의 근본 관심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선언과 함께 그는 그를 키워 준 신지학회와 결별하고 동방의 별 교단도 해체했다. 그는 독지가들이 교단에 보낸 돈이나 성채나 토지 등을 모두 되돌려주었다.

 

이제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30년 이후 크리슈나무르티는 오하이에 있는 아랴 비하라(Arya Vihara)라는 집에 본부를 두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강연을 했다. 잡무는 그의 동료들에게 맡기고 그는 명상과 강연과 저술에 집중했다. 1930년대에는 주로 유럽, 남미, 인도, 호주, 미국 등지를 다니며 강연하였다.

 

1937년에는 영국에서 온 유명한 사상가 올더스 헉슬리를 만나 오래 동안 친구로 사귀면서 민족주의의 위험과 이로 인해 유럽에서 일어날 분쟁에 대해 함께 염려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의 평화주의적 입지 때문에 FBI의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주로 오하이 농장에서 지낼 뿐 대중 강연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47년 가을부터 인도로 가서 강연하기 시작했는데, 젊은 지식층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 때 메타라는 두 인도 자매를 만났고, 이후 이들은 그의 뒷바라지에 헌신하게 되었다. 인도 여행 중, 젊은 달라이 라마, 네루 수상 등을 만나기도 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960년 경 유명한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을 만나 물리학 분야에서 뿐 아니라,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와 생각이 같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당시 인도 수상 인드라 간디 여사를 만나기도 했다. 1984년과 85년에는 유엔 산하 평화단체의 초청으로 유엔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달라이라마·네루 등과 교우

1985년 11월 인도로 초청되어 가서 1986년 1월까지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다. 1986년 1월 4일에 마드라스에서 실질적으로 ‘고별’ 강연을 하고, 오하이로 돌아와 2월 17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장하여 재는 미국, 영국, 인도에 세 나라에 뿌려졌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 기본 가르침을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진리관이다. 진리는 ‘길 없는 땅(a pathless land)‘으로서 조직이나, 교리나, 신조나, 예식, 혹은 철학적 지식이나 심리적 기술이나 이성적 분석 같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깨달음을 얻을 때만이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안정감이라는 신화에 현혹되어 종교적, 정치적, 개인적 특수 이미지를 구축하고, 이것이 개별적인 상징이나, 관념이나 신앙체계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인간관계에서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꼬이게 하는 원인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의 교육관도 특이하다. 그는 여러 곳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참된 교육은 직업을 얻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알아내고 우리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계발하는 창조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진정한 만족감과 열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성공’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의 저서 『이런 일을 생각하라』에서 명예, 돈, 성공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것을 바라는 욕심이 우리를 괴로움과 슬픔으로 내몬다고 역설한다. 누구나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지만 바로 이런 욕심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교육은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사물을 선입견이나 종파주의적 안목에서 벗어나 통전적인 관점에서 보게 하는 것,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고 보호하도록 하는 것, 이웃이나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종교적 심성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크리슈나무르티는 명상(meditation)이야말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명상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몸이나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관조하고 그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이나 질투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우리 마음 전체를 조망하면 그 속에 욕망이나 질투심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 결과 자연히 이런 것과 구별되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욕망이나 질투심은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묵조선을 연상케 한다.

 

넷째, 그는 현 세계가 당면한 많은 문제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우리 각자는 개인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고집한다. 이런 것 때문에 세계는 갈라져 서로 싸우게 된다. 따라서 모든 정치적, 종교적 아집에서 해방되어 우리 스스로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안녕을 위해 힘쓰게 된다고 했다.

 

관념 벗어난 창조적 삶 가르쳐

그는 스스로도 어느 국가, 어느 계급, 어느 철학, 어느 종교에도 예속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강연을 듣는 모두에게 그들 자신이 자신의 스승이 되고 그들 자신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지금껏 가치 있고 필요하다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보아야 한다고도 했다. 자기는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 친구’처럼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공식 기구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 개의 재단을 만들어 지금도 계속해서 그의 저술을 배포하고, 미국, 영국, 인도 등지에서 그의 사상에 기초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열매로 세상이 더 좋아지게 되기 빌 뿐이다.(그가 쓴 『이런 일을 생각하라』에 대한 해설은 톰 버틀러-보던 지음, 오강남 옮김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흐름출판, 2009) 87-96쪽을 참조할 수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