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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순수한 마음 / 토마스 머튼 ~

    

                     순수한 마음-토머스 머튼

시간 안에 존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애착과 관심 그리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어떤 의식적 노력 없이는 내적 은거를 절대로 얻지 못합니다. 소란함과 인간사를 피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십시오. 사람들이 모여 서로 속이고 모욕하고 서로를 이용하고 또는 친한 척하며 거짓 몸짓으로 서로 조롱하는 곳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피하십시오. 그들의 라디오까지도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갈 수 있으면 기뻐하십시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노래에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그들의 광고도 읽지 마십시오.

관상 생활이 일반 사람들의 서로 다름과 습관을 멸시하는 독선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은거를 통해 해방과 빛을 추구하는 사람, 영성적 자유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판매, 광고 그리고 소비사회의 호소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어떤 정당한 쾌락도 누리지 않으며 인간의 기본 수준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제시되는 모든 쾌락이다.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타고난 쾌락과 판매원의 끈덕진 강요에 의해 만족해하는 자연적이 아닌 쾌락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자기가 타고난 육체적 욕망에 때로는 "아니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건전하고 성실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적이며 윤리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먹고 마시는 사람,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언제나 담뱃불을 붙이는 사람, 자극을 받으면 언제나 호기심과 관능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를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영성적 자유를 포기하고 육체적 충동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과 의지는 전적으로 그의 자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욕망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매개로 해서 그들은 자기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들의 통제를 받습니다. 이 술보다는 다른 술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다고 스스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포악한 자기 습관의 충직한 종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한 병을 사서 집으로 가져가 포장을 풀고 친구에게 한잔 따라 주고 텔레비전을 봅니다. 기분이 좋아 정신없이 주책을 부리고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싸웁니다. 그러고는 자신과 세상에 진저리를 내며 잠자리에 듭니다. 그는 일종의 발작증을 갖게 돼 발작하지 않으면 자기가 정말 살아 있는지 , '자기의 인생을 정말 잘 이루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를 바보로 만들고, 충동이 자기를 진정한 인격의 환영(幻影)으로 축소시킬 때에 그것이 자신의 실체라고 자신을 속입니다. 일반적으로 관상의 생활은 수덕(修德)하는 자기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는 습관을 만드는 쾌락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통제 못할 욕구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흡연과 음주가 극기의 초보 단계의 것임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극기 없는 기도생활은 순수한 환상입니다.

나는 텔레비전을 전혀 보지 않기 때문에 텔레비전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상업 텔레비전이 저속하고 실속이 없으며 불합리하다는 데에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관상에 대해 어떤 인위적 대용물이 될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저속한 그림에 아무 반항 없이 완전히 맡기고, 이해와 사랑에 대한 적극적 인내를 고무하기보다는 평상적 수동성 이하에로 격하될 것입니다. 영성 생활(정신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텔레비전을 아주 신중하고 분별 있게 사용해야 될 것 같습니다.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공기를 호흡하십시오. 가능하면 하나님의 하늘 아래에서 일하십시오. 그러나 도시에서 살며 기계들 가운데에서 일하고, 지하철을 타야하며, 범람하는 라디오 뉴스가 귀를 멀게 하고, 음식도 건강을 해치는 곳에서 먹어야 하며, 주변 사람들의 정서가 권태로 마음을 병들게 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잃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당신 영혼에 심어진 은거의 씨앗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런 일들로 진저리가 나더라도 당신은 묵상의 치유하는 침묵에 대한 열망을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은거의 참뜻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도 계속 가지십시오. 은거는 끝내 존재하며 그것이 평화와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런 기쁨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제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가려 하거나 몹시 싫어서 세상에서 도망가려 한다면 평화도 찾지 못하고 은거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은거를 찾으려 하면 세상과 세상의 이기심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혼자 있게 해줄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은거에 있어 절대로 중요한 한 측면은 정덕(貞德)을 기초로 한 친밀한 상호 의존입니다. 정덕은 성(性)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위대한 종교 대부분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성행위를 결혼 생활에 한정하는 것이며 결혼을 했어도 어떤 규범에 따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의 분야에서보다 자제력을 더 중하게 여기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성욕이 타고난 욕망 중에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며, 무절제한 만족은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내적 모든 빛에 대해서 완전히 눈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을 결코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은 본래 좋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 있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성이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적 쾌락에 무절제하게 빠지는 것은, 특히 혼외(婚外) 정사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가장 불행한 약점들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고, 보통 사람은 성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고 믿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성에 대한 병리적 죄책감은 욕정을 통제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제력은 바람직할 뿐 아니라 가능하며 관상 생활에는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상당한 노력과 경계심, 인내와 겸손,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요구합니다. 정덕을 지키기 위한 분투(奮鬪)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힘보다는 보다 높은 영성적인 힘에 의존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내적 기도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더구나 정덕은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금욕적 자기 회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의 단식도 필요하고 대단히 절제하고 질서 있는 생활, 정숙하고 호기심을 자제하는 생활, 공격적 성격의 자제, 그리고도 다른 많은 덕을 요구합니다. 완전한 정덕은 영성적 은거 생활의 상태, 평화와 평온, 명확함과 부드러움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람은 묵상하고 관상의 기도를 바치고 싶어집니다.

새 관상의 씨/ 토머스 머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