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 조욱현 신부님 ~

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조욱현 신부-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써 전례력을 마치는 날이다. 교회가 전례주년 마지막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전례적으로 영성적으로 전례주년 전체를 종합하면서 총체적인 묵상자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진정으로 우리가 모두 우리의 ‘전부’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며, 우리의 생활이 종합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제1독서: 에제 34,11-12.15-17: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통치권과 지배권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긍정이며,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시키는’ 그분의 의지이다. 즉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참여적’ 왕권이시다.

제1독서에서 ‘목자’라는 개념은 ‘왕의’ 품위로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의 의미나 착취의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길 잃은 양떼를 찾으러 가시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요한 19,11-18)로 제시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의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과 헌신을 통하여 ‘왕권’을 행사하신 그분의 모습을 내다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왕권이라 하여 ‘심판’의 왕권마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마지막 구절에 나타나고 있다(17절). 왕권에의 참여라는 구원을 위한 왕권이지만, 단죄할 수도 있는 왕권이다.

제2독서: 1고린 15,20-26.28: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는 하느님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긴장과 싸움을 통하여 확보된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다고 한다. 그분은 ‘죽음’을 쳐 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인 머리이시다(21-22절).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의 왕권의 승리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부활한 첫 사람”(20절)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듯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종말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이기신 후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 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있는 것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복음: 마태 25,31-46: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의 행위-최후의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왕’으로서 동시에 ‘심판관’으로서 드러내신다. 여기서 심판관이 주시는 ‘나라’는 당신을 충실히 섬긴 보상이며, 당신이 다스리시는 ‘왕권’이 있음을 의미한다(34절).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역사 내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또 인간이 그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나타나듯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위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35-36.40절).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구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록들이다(이사 58,7; 토비 4,16 참조). 이제 예수께서는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다루신다고 하신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상생활에서 예수께서도 가난하셨고 당시 사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신 분으로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그래서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 편에 항상 가까이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통해서이다. 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분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과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왕권’을 인간들에게도 참여하게끔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고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