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방향착오를 하며 산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원하는 길을 추구하려고 공을 들이고 열성을 다한다 해도 엉뚱한 길을 선택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어떤 이는 무엇을 하고 성취하고 소유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삶의 이유를 두기에 사랑하고 나누며 사는 이들도 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최대의 존경심을 드러내면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0,17)라고 묻는다. 그 부자는 하느님 나라(마르 9,43-47 참조) 곧 종말 구원을 원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하느님의 계명 외에 다른 조건을 내세운다(10,19-21). 곧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먼저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어야 한다.
예수의 이 요구는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보충이나 보완이 아니라 그 부자에게 하느님의 뜻을 열어주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곧 소유의 포기는 그 부자가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제시된다(마태 6,19-21; 25-34 참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계명을 실천하는 것(행위)만으로는 부족하며, 가진 것을 다 팔아(무소유의 상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다음에야 가능함을 가르치신다.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은 스스로 가난해져서 지상의 소유에 위안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예수 자신과의 인격적인 유대를 뜻한다(8,34-38 참조). 그런데 그 부자는 예수를 추종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소유하느냐의 갈등 속에서 결국 추종을 거부하고 재물을 택했다(10,22). 이리하여 그 부자는 물욕 곧 재물의 마력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그의 선택은 명백히 방향착오였다. 그는 존재가 아닌 소유를 선택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되고 이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거듭 강조하신다(10,23-24). 예수님께서는 재물 속에 구원을 가로막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신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도 더 불가능하다고 하신다. 물론 재물 말고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많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신다(10,27). 이런 구원의 길이 다름 아닌 예수 추종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잘 보여주듯이 영원 생명, 곧 행복에 이르려면 무엇을 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하느님 앞에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부자 청년과 같은 방향착오를 해서는 안 되리라!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 구원, 행복은 무엇을 행하여 얻는 것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 앞에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은 곧 성취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만 의존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행복으로 가는 디딤돌은 소유없는 가난한 자 되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의탁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과 친교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내가 지니고자 애쓰는 것들이 나를 넘어뜨려 행복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됨을 명심했으면 한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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