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9주 토 마르 12,38-44(15.6.6)
♣ 돈이 말하는 사회에서 전부를 바치는 사랑 ♣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자 그분의 재창조에 참여하도록 불린 존재이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하며 살아가고 움직인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물량과 업적, 효율과 성과를 중요시한다.
우리의 영성생활과 교회생활도 이런 세태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적지 않다.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수한 정신과 올바른 지향이 아닐까? 특히 명예욕(12,38-39)과 소유욕(12,40)에 관해 비판하시며 그들을 조심하라고 권고하신다.
그들은 예복을 즐겨 입어 자기 신분을 드러내며 인사받기를 바라고, 회당이나 잔칫상에서는 윗자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과부들(탈출 22,21 참조)의 가산마저도 등쳐먹으면서 기도하는 척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거짓 신앙을 일삼는 그들은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고하신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지적하신다.
율법학자들은 경건한 체하면서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에 비해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자 참으로 자기 자신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준다. 과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았다. (11,32; 12,12; 14,1-2 참조).
율법학자들은 참 신앙인의 귀감으로 소개되는 가난한 과부(12,41-44)와도 대조된다.
한마디로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언행은 거짓 신앙인의 표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참 신앙인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추종해야만 함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아낌없이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참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보였다.
율법학자와 대조되는 과부에게 있어 헌금의 액수가 문제될 수는 없으며, 재물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난 내적인 자유가 헌금행위를 가치 있게 해준 것도 아니었다.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까지도 모두 바친 것은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 전인적 사랑의 표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 온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그 사랑이 곧 예수님을 추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과부는 이렇게 남김없이 하느님께 자신의 모두를 되돌려드렸다.
그것은 포기 이상의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행위였다.
나의 하느님을 향한 태도는 어떠한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나의 삶을 그분께 봉헌하고 있는가? 가난한 과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녀가 봉헌한 하찮은 렙톤 두 닢이 아니라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었다.
이 순수하고 넓은 마음은 그녀의 생활전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는 틀림없이 친절한 사람으로 비단 모든 것을 성전 헌금궤에다 털어 넣었을 뿐 아니라 틈을 내서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를 내주신 예수님의 표상이다.
내가 이 사회에서 순수한 마음과 올바른 지향으로 그런 예수님의 표상이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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