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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2015. 11.02. 위령의 날 복음 묵상 / 기경호 신부님 ~

                         



위령의 날 마태  5,1-12ㄱ(15.11.2)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기 19,27)



All soul's day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


떨어진 잎새들,

말라비틀어진 채 달려 있는 나뭇잎들을 보면 쓸쓸함이 밀려들기도 합니다.

 생명의 끝자락을 보는 것 같아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생명의 다른 얼굴일 뿐

결코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위령성월을 모든 성인대축일로 시작하고

 바로 다음 날인 위령의 날에 죽은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은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의 확인일 뿐 아니라

죽음과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죽음은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2티모 4,6-8. 18).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죽음을 넘어선 상호 소통과 연대성 안에서

 죄와 영혼의 어두움과 온갖 고통을 안고 죽어간 이들의 속죄를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가 나약함과 한계를 안고 죄 중에 죽어간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간 이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전쟁과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

고문과 억압, 사회적 차별 등으로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제 죽음을 건너 영원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고통에 대해 하소연합니다

(욥기 19,23).


그러나 그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며’

(19,25),


살갗이 벗겨진 뒤에라도(19,26)


자신의 눈으로‘기어이 그분을 뵙고야 말리라’(19,27)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끝까지 죽음을 넘어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희망이시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은 희망의 존재이며,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고

그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명확히 드러났기에(로마 5,6-8)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 5,5)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견뎌내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곧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고통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것이 종말을 맞는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려면 잘 죽고, 잘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의 일치를 통해 그분을 차지하고

그분 안에 머물 때 현세에 살 때나 육신의 죽음을 맞은 이후에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靈)으로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과 용서로써 평화를 이루며,

 정의이신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이들이야말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도 사랑의 마음으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나아가 희망이신 하느님 안에서 연대와 투신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일상의 고통을 사랑으로 견디어내는 ‘죽음 연습’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