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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연중 제 1주간 화요일 / 기경호 신부님 ~



연중 1주 화,

 마르 1,21ㄴ-28(16.1.12)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마르 1,22)






권위 있는 신앙인의 삶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어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이라며 몹시 놀랍니다

(1,22.27).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22).

예수님의 권위는 율법학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직업적인 권위였으나

 예수님의 권위는 신적이며 영적인 권위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기 위한

 수많은 세부지침을 만든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하느님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들을 내세우기 위한 권위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현세적인 권위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들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버렸고,

 결국 율법의 본질인 하느님의 자비와 해방이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율법주의의 늪에서 헤맸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적인 권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까닭은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처신은 사람을 살리고 고치며, 해방을 가져다주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의 권위는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와

생명의 힘을 드러내는 영적인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삶이 새로운 권위를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롭다는 것은 그 가르침이 이전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을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 권위 있으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로

 더러운 영을 꾸짖어 쫓아내셨듯이(1,26)

 내 힘과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능력에 의탁하여 말하고 처신해야 합니다.


 삶의 출발점과 원동력 모두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어야 권위 있게 됩니다.


나를 드러낸다면 세상 명예는 얻을지 몰라도

 참 권위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권위는 세속적인 권위와 달리 사랑의 권위,

생명과 창조와 해방의 권위여야 합니다.


 참 권위는 철저히 타자(他者)를 향하고 이롭게 하고 살리며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할 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권위는 늘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모두가 더불어 성장하고

 행복하기 위한 사랑의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언행이 일치되는 삶이야말로 권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의 홍수와 공허함, 언어유희에 빠져

 실없는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신 그대로 목숨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심으로써 율법을 재해석하셨습니다.

내 삶은 권위가 있는지 돌아보고, 복음을 사랑의 삶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이들을 살리는 말씀선포를 통해 권위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telegram.me/kif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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