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불결한 곳으로 알려진
이방인 지역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어(5,1. 20)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곳은 더러운 영들이 출몰하는 무덤들이 산재했고(5,2-5),
방목하는 돼지 떼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까지 가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했습니다
(5,4-5).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고통과 시달림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5,9).
군대처럼 많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상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뒤틀리고 자아가 심하게 분열되었으며
그 결과 이웃과의 관계 또한 어긋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태가 곧
자기소외를 체험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이 사람은
예수님께 더러운 영을 내쫓아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그에 맞서 스스로 물리칠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떠나가게 해주시자
그는 그분께 “함께 있게 해달라”(5,18)고 청합니다.
분열되고 뒤틀렸던 그의 자아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회복되고 통합된 것입니다.
자아회복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며 영적 성숙입니다.
자아통합은 예수님께로 돌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나에게도 뒤틀림과 무사 안일함이 깊이 스며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안에서
뒤틀림은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내 삶의 주인이요 삶의 길이며
목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야 이런 뒤틀림이 없이
자아가 통합되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원의식을 뚜렷이 지녀야겠지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행동하면
자아는 분열되고 영혼에 어둠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의 결핍인 ‘대충주의’는
‘뒤틀림’의 한 양상입니다.
무엇이든 기도 안에서 헌신적으로 하지 않고
적당히 편의 위주로 처리하고, 형식적이고
무사 안일한 태도로 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뿐 아니라 실천 없이 모든 것을 영성이라는 말로
함축시켜버리는 ‘순영성주의’도 뒤틀린 삶의 모습입니다.
그 밖에 세속주의, 복음 가치의 상대화,
물질주의, 혼합주의 등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뒤틀림의 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뒤틀림을 극복하려면 우선 목수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일치하지 않고서는
자아통합과 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지역 가운데서도 변방의 불결한 곳을
직접 ‘찾아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뒤틀림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현장은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으며 사회공동체일 수도 있겠지요.
오늘도 나 자신과 세상 안의 뒤틀림을 회복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멈추어 갈라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과 시선을 고르며, 하느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아통합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