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7일 수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신명 7,6b. 8-9
너희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집트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알아야 한다. 너희 주 하느님 그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다.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맺은 계약을 한결같이 지켜 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응송
◎ 사냥꾼의 올무에서 * 주께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 모진 괴질에서
<청원기도>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고,
―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 주여, 당신 성령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루카 11,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영적 독서>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 이연행 옮김
7. 교회 안에서의 생활
개인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에 눈을 뜨면서부터 그의 책임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개인의 책임과 다른 공동체의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또 사실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은, 책임을 질만한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집니다. 다시 말해서 고유한 삶에 눈을 뜬 사람들 그리고 첫 번째로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지게 됩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에 대한 견해와 판단은 대략 사람들이 생각하고 얘기하는 바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런 견해와 판단은 가장 강력한 영향력 중의 하나를 발휘합니다.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기란 매우 힘듭니다. 견해와 판단은 틀림없이 개인들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로 각 개인의 정신 속에서 주위의 영향 아래 다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을 인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자유로운 행위들이란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완수해야 히는 그 무엇이며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식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어떤 태도들을 취할 때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혼자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호적인 책임은, 정말로 공동체적이 될 수 있는 모든 인생 경험보다도 더욱 가장 높은 수준으로 공동체를 이룩하는 책임입니다. 이 책임 위에 교회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575)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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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수요 강좌>
교회사 강좌
세계 교회사
고대 그리스도교
제1기 1-311년
제7절 내적 위기: 분열과 이단
그노시스척 체계: 그노시스적인 여러 체계는 종교 혼합주의의 소산으로서, 기원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46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의 그노시스적 문헌의 발견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 혼란한 사상과 본질을 좀 더 명백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의 종교철학과 동방-그리스적 밀의종교의 구원 약속이 그노시스주의에서 이승과 저승에 대한 관념의 독특한 혼합으로 결합되었는데 이에 대한 통찰은 성별자만이 할 수 있었다.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기원과 목표, 우주의 기원, 이 세상의 악과 재해의 의미에 대한 인류의 궁극적인 큰 문제에 관하여 신봉자들에게 신비적인 해명을 약속하였다. 그들이 중재하던 “참된 인식(Gnosis)은, 이성적인 인식이나 객관적인 지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신비적인 몰두나 일정한 종교적 실천에 의하여 획득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별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숨은 지식을 포함하는 비밀의 계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계시 성격 때문에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바오로는 결정적으로 그들을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1디모1.4: 4,7: 6,4: 6.20: 골로 2.8 이하; 묵시 2.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교의 계시설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자신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저지할 수 없었다. 성서에 대한 그들의 공상적이고 우의적인 해석은, 플라톤적이고 피타고라스적인 사변을, 이교적인 신비의 구속사상과 또한 고대 동방의 신화적인 우주 개벽설이나 점성술과 결합시킬 줄 알았다.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를 통한 구속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 교리는 유출설과 에온설에 융해되어, 서로 투쟁 상태에 있는 선과 악이란 두 개의 궁극적인 원리가 존재하게 된다는, 이원론적인 관념들과 혼합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그노시스 체계에서 공통된 기본 견해로 다음 사상들을 주시할 수 있다. 즉, 근접할 수 없는 빛 안에 사는 숨어 있는 최고의 하느님으로부터 세계가 유출의 방법으로 창조되었고, 이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영-365개나 되는 에온 - 들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자신들의 신적 기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 거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 본질에서 작아지고, 그만큼 빛을 적게 소유하게 된다. 마지막 최하위 단계에서 그것들은 암혹과 악의 나라에 속하는 물질과 혼합한다. 이 최하위층에서 우리의 대지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작은 데미우르고스Demiurgos의 작품이다. 이 데미우르고스 또는 “세계 형성자’는 구약의 하느님인 야훼와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암흑의 물질로부터 최고신의 빛의 충만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하느님의 불꽃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인 것과의 혼합이 시작된다. 그리스도가 그러한 영적 존재 - 에온 - 로 나타난다. 그의 사명은, 인간에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최고신을 알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물질을 떠나고 암흑을 극복하여 하느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나자렛의 예수에게서 가상의 육체를 취하였다. 그는 가현적으로 활동하고 수난하였다. 그는 결코 실제로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었다. 상당수의 그노시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 로고스가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때 인간 예수에게 내려와 그를 메시아로 만들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수난 전에 그리스도가 다시 예수에게서 떠났으므로 십자가에서는 다만 나자렛의 예수가 순수한 인간으로서 죽었다.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에는 구원의 의미가 주어질 수 없고, 다만 예수의 가르침의 활동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른 자들만이 참으로 “구원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내용은 물질을 극복히는 것이다. 참된 “그노시스주의자’이거나 “영적인간’만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고, 일반적인 사람이나 이교인들은 “물적 인간‘으로서 물질과 더불어 영원한 암흑에서 멸망한다. 또한 일반 그리스도인은 더 높은 인식을 할 수 없는 ‘심적 인간’으로서, 더 적은 구원과 한정된 영복만이 인정된다. 그리스도는 이중의 계시를 남겨놓았는데, 더 낮은 것은 성서에 포함되어 교회가 전하게 되어 있다.
58 제 1 부: 고대 그리스도교
반면에 더 높고 숨져져 있는 것은 약간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맡겨졌는데, 이제 그것을 그노시스주의자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의 주요 대표자들은, 안티오키아의 사토르닐(2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데스(120∼145년경), 로마의 발렌티노(130∼160년경) 등이었다.
그노시스는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것처럼,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절대적으로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위험한 혼합주의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 매력은 무엇보다도, 불가사의하고 사이비 신비주의적인 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매혹에 있었다.
나아가서는 우주관에 대한 사변들과 새로운 세계 이해와 구원 이해에 관한 종교의식의 형식들과 결합된 폭로에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는 실제로는 비그리스도교적이고 이원론적인, 세계 부정과 육체 경멸에서 생긴 대단히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 형성에 있었다. 종교적인 소설이나 경건한 찬송가나 위경적인 “성서” 안에 표현되고, 또한 자칭 그때까지 숨겨져 있던 그리스도의 말씀의 특별 계시와 비밀 전통에 의거한다고 하는 광범위한 선전을 통하여 그노시스는, 대부분이 갓 영세한 이교 출신의 개종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신생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많은 피해를 야기시켰다. 그것은 마니교를 거쳐 바울로치아누스파, 보고밀파, 카타리파로 이어짐으로써 중세까지 지속되었고, 근세에와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심령신앙, 신지학, 인지학 등) 본래 그것은 완전히 극복된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그노시스가 어떤 방법에서는 더 깊은 인간의 욕구에 응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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