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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성 주간 수요일 / 기경호 신부님 ~



성주간 수 마태 26,14-25(16.3.23)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The betrayal by Judas




 내 안에 있는 유다의 얼굴을 보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행적을 목격하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유다가 수석사제들을 찾아가 겨우 종 한 명 값인

(탈출 21,32 참조) 은전 서른 닢에 그분을 팔아넘기기로 거래합니다

(26,14-15).

과월절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6,2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유월절 잔치에

 어둡고 슬픈 그림자를 던집니다.


우정과 평화의 표시이며 확고한 동지애의 상징인 식탁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26,24)

배반자의 죄악이 극에 이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팔아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되는

위기와 슬픈 상황을 앞에 두고,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합니다

(26,22).


한심하게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이지요.


 배반 당사자인 유다는 한술 더 떠서 뻔뻔스럽게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여쭙니다

(26,25).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나아가 슬픔과 답답함,

 그리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 장면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거기에 유다와 같은 나 자신이 있음을 봅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유다의 근본적인 죄는

 예수님을 돈으로 저울질한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적 욕구를 충족하려고 예수님보다는 돈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다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꿈틀거리며

 나의 눈을 흐리게 하며 영혼을 뒤흔들곤 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의 태도는

영적 무감각과 무사안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저 예수님과 무관하게 내 뜻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요?’라고 스스로 후한 평가를 하며

흡족해 하는 모습 안에 유다가 있습니다.


 관계단절이 곧 죄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삶만을 추구하며 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함께 십자가를 지지 않는 태도 안에 유다의 얼굴이 있습니다.


 제자란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 받고 병든 이들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처럼 십자가를 함께 지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편의를 누리는 도구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느님을 망각해버립니다.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안에 유다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좀 더 겸손하게 내 안의 유다,

곧 이기심과 탐욕,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온갖 우상,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

내 편의 때문에 주님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보고 인정해야겠습니다.


하찮은 물질과 욕구 충족을 위해 예수님께 소홀하거나

그분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내 안의 유다의 얼굴을 보며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6,25)라는 말 대신

 “주님, 맞습니다. 제가 배반하였습니다. 제자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을 회복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분처럼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지고 가는 진실한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쁨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telegram.me/kif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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