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전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시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는, 한없는 사랑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병고와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사 53,4).
의로운 주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의롭게 해주시려고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고(53,11),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 5,8-9).
요한복음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임금이시며 구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의 죄와 영혼의 어두움,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모습,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태도가 정직하게 바라보라는 촉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시려고 적대자들의 손에 기꺼이 당신 자신을 넘겨주십니다.
하느님을 자신들의 고정된 틀 안에 가두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빌라도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유다 지도자들, 그에 동조한 무기력한 빌라도, 세상 가치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한 19,15)고 외치는 유다인들은 스스로 어둠의 길을 달려갑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대신 세상 기존 통치 방법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폭력의 상징인 바라빠를 놓아주기로 결정합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나무 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어, 그분을 거짓 왕으로 꾸미고 조롱합니다 (19,2).
예수님 가까이에서 모든 것을 보고 배운 베드로마저 세 번씩이나 그분을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결코 분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연민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증오와 폭력, 거짓과 탐욕, 이기심과 헛된 야망, 배신에 이르는 나약함 등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측은히 여기시는 사랑 앞에 힘을 잃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 왕권을 행사하시는 사랑의 옥좌가 되었고,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는 예수님이 바로 인류와 맺으시는 사랑의 성사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심으로써 십자가는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의 죽음 안에서 완성되었고,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을 떠올리며 내 안에 숨어 있는 유다 지도자들, 군중들과 군사들, 빌라도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난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매일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가기로 다짐해야겠지요.
십자가는 사랑으로 자신 전부를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행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telegram.me/kifr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