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내 화, 요한 20,11-18(16.3.29)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The appearance to Mary of Magdala
♣ 신앙의 위기에서 만나는 주님의 사랑 ♣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의 크기만큼 큰 상실감과 슬픔 속에 예수의 주검이라도 보고 싶어서 무덤을 찾아갑니다. 시신이 사라져버린 빈 무덤을 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주님’(20,13)을 더 이상 뵐 수 없음에 슬퍼하며 웁니다. 삶의 전부였던 주님이 감각의 세계에서 사라져버린 이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고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며, 사회적 약자들과 죄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신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녀의 삶의 모든 여정에 의미였고 목표였습니다. 삶의 의미와 살아갈 희망을 상실해버립니다. 그분의 육신의 사라짐을 사랑이신 분과의 단절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부재 상황을 접하며 실존의 위기를 맞은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슬픔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거기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으나 그녀는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20,14-15). 삶이 고달프고 외롭고 슬플 때, 고통이 극을 달릴 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 속에 있을 때 그 현실에 정신이 쏠리고 이는 감정에 마음이 머물러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부인하며 멀리하기도 하지요. 구조적 사회악과 부조리, 법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인권 탄압과 사생활 침해,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되어버린 언론, 자본의 우상화에 따른 비인간화 등을 보며 무기력함을 넘어선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곤 합니다. 바로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해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으며, 우리가 그 어떤 못난 모습을 보여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부재는 주님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나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사랑이신 그분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삶이 고달프고 절망적일 때 그분만이 나의 희망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마저 소용없다고 여겨질 때 그래도 내 삶의 중심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 안에서 의미를 찾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해주심을 믿으며 부활의 기쁨을 노래합시다. 감각의 세계와 ‘지금 여기’를 넘어 언제 어디서나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삶의 의미가 되어주시는 주님을 알아보도록 영의 눈을 떠야겠습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20,15) 하고 사랑을 건네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도 서로에게 주님을 보여주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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