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해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S.Th., III, q. 65, a.1 ad 1) 즉 성체성사는 “선교활동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근원적인 힘이요, 또한 표현 양식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제2독서: 1코린 11,23-26: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너희를 위하여’ 즉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의 신비,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키는 것이다. ‘피’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24.2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 행하신 것을 그분이 부여하시는 의미와 더불어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원의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위를 반복해서 되풀이 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정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이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 하겠다.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봉헌과 부활로 이루어진 시기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26절) 여기서 ‘전하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거행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즉 성체성사는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충만함 속에서 다시 임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마르 14,2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 루카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성체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16절)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로 하여금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 사제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 가운데서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 뿐이다. 여기서 사도들의 행위는 외적행위 뿐 아니라, 자신도 성체가 되어야 하는 의미가 있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 주신 무상적이고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성체성사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에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행위가 지금의 나를 통하여 계속 선포되고 전해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과 나눔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며 그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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