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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름 그륀

~ 영적인 자극을 통하여 유년기 상처 치료하기 / 안셀름 그륀 신부님 ~






영적인 자극을 통하여 유년기 상처 치료하기/안셀름 그륀 /

마리아-M. 로벤 지음 모명숙 옮김


Finde deine Lebensspur. Die Wunden der Kindheit heilen - Spirituelle Impulse
안셀름 그륀은 1945년생이고 성베네딕도회 신부이며, 세계적인 영성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마리아-M. 로벤은 1958년생이고 사회교육학을 공부했으며, 피정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서언

이 책의 저자인 우리 두 사람은 교회의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테마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이런 개별 대화들을 관리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부모로 인한 상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고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우리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얻게 된 경험들을 서로 논의하고, 이런 테마와 관련되는 서적들을 읽으면서 성찰을 보다 깊게 했으며, 우리 자신의 부모 관계 역시 좀 더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일에 착수했다.

이와 같은 공동의 논쟁을 통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자녀의 상처를 다루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책을 쓰고 각각의 경험과 통찰을 드러내는 게 중요했다. 남자가 여자들에 대해 쓰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늘 까다롭고 흔히 불만족스럽기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에 관해 글을 쓴다 하더라도, 늘 우리 자신이 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 일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또 우리가 지녀온 자신의 상처 때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해낸 변화와 치유의 경험들을 갖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사실이라 하겠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다음 문장을 이 책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부모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갖지 않은 아이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 또 그 사이에 자녀를 갖게 된 사람들도 아들 아니면 딸이다. 우리 모두 가족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인간들의 역사를 이루는 부분이다. 우리를 처음부터 자신의 부모와 연결하는 역사는 언제나 긍정적인 면과 고통스런 면의 양면을 갖는 역사이기도 하다.

부모-자녀 관계의 고통스런 측면, 부모로 인한 상처의 아픔, 그리고 이런 것들을 다룰 수 있는 치유의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 장들이 다룰 것이다. 이것이 대단히 중심적인 삶의 주제라는 게 우리의 신조다. 우리 자신의 삶의 흔적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우리 자신의 인생사에 의해 규정될 수 있을까?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미 형성된 자신의 존재와 화해하는 사람만이 자신 안에 어떤 가능성들이 숨어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삶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점에 대해 더 이상 부모의 탓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상처들을, 자기 인격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길 수 있다. 부모와의 관계가 어떠했고, 부모와의 관계에서 유익한 것과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의식적으로 지각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지닌 가장 은밀한 비밀이 머리에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상처들을 바라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그 상처들을 통해, 부모로부터 함께 물려받은 긍정적인 뿌리에도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부모는 상처만이 아니라 그밖의 많은 것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모의 역사, 부모의 재능, 부모의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평생 부모를 비난만 하는 사람은, 부모의 긍정적인 뿌리도 차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공중에 떠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상처들을 통해 본래의 본질에 접근할 것이다. 온갖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이 본질은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이 본질을 발견한다면, 부모를 비난하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상처들에 머물지 않고 그 상처들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본질, 즉 본래의 자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령 어렸을 때 가졌던 꿈들을 바라보고 원했던 직업을 분석한다면, 진짜로 순수한 우리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벽돌공이나 빵집 주인이 되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의 꿈에는 어떤 삶의 흔적이 들어있을까? 벽돌공이 되고 싶은 소망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집을 세워주고 뭔가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빵집 주인의 이미지는 남들의 삶을 달콤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념을 표현한다.

자신의 삶의 흔적을 발견하는 또 다른 방법은, 어렸을 때 늘 했던 놀이를 회상하는 것이다. 여자아이는 인형을 갖고 놀면서 예쁘게 단장해주고 돌보았을 것이다. 어릴 때 했던 이런 놀이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보호하고 돌보는 삶의 흔적이 드러난다. 어렸을 때 즐겨 들었던 아주 좋아하던 동화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심취해서 읽었던 이야기들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도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어떤 여성은 소녀 시절에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을 수 있다. 그녀의 삶의 흔적은, 즉 그녀의 가장 본래적인 본질에 이르는 길은 소외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이 책의 목적은 유년기에 고통을 받았던 정신적인 상처들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고 가장 본래적인 삶의 흔적을 찾는 데 있다. 압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기의 상처를 유념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자기도 모르게 그 상처들에 의해 규정된다. 상처들은 삶의 흔적을 왜곡한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자기 나름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는 유년기의 상처들을 반복할 따름인데 말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상처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긍정적인 재원, 우리의 영혼이 유년기부터 들이마셨을 샘, 그리고 진정한 자아의 형태가 표현된 꿈들도 중요하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기대했던 대로 우리가 자신의 본질과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는 번성할 것이고 우리 안에 새로운 에너지가 흐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한 살아볼 만하다고 느낄 것이고, 이 유일한 삶에 대한 의욕도 생긴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자기의 삶의 흔적을 발견했는가의 기준은 항상 자기 안에 생명이 흐르고 자기로부터 생명이 흘러 넘치는 것이다. 예컨대 나의 삶의 흔적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의욕이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도 유익하다. 그러나 오직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느끼지 않기 위해, 어쩌면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내 자신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면, 대단히 빨리 과중한 부담을 느끼고 지칠대로 지치며 녹초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부모와 화해하는 것이다. 가족 시스템에 얽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게 되는 것에 관해 많이 숙고해온 심리치료사 베르트 헬링어는, 부모에 대한 분노를 허용하고 표현함으로써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다. 헬링어는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렇다고 부모를 장밋빛으로 멋지게 변용시키고 부모의 모든 점을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부모에게도 명백히 한계가 있다. 부모라고 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언제나 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를 비난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정말로 긍정적인 것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것도 있다.

부모는 오늘 우리 모습의 뿌리를 형성한다. 이 뿌리가 없으면 우리의 생명의 나무는 말라죽을 것이다. 부모가 우리에게 준 것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 비옥하게 될 수 있도록, 부모의 한계성과 고유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것을 이해하면 부모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특한 가정사에 얽혀있는 부모를 볼 수 있다. 또한 부모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고 또 그 상처가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도, 인생을 부모를 비난하는 데 허비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미루기만 하고 자기 삶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내적․외적인 참모습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고, 생명으로 이끄는 삶의 흔적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바라보고 이 상처와 연관된 감정들을 대면하는 것을, 쓸데없이 ‘자기 주위를 맴도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차라리 현재에 관심을 쏟고 현안이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 자기의 상처들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이 오늘날 확실히 많은 것 같다. 때로는 과거로부터 매번 새로운 상처를 끄집어내는 데 집착하기도 한다.

이러한 병적인 태도는 분명코 생명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것은 일상의 갈등들에 선입견 없이 다가간다는 착각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일상에서 갈등만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일반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전에 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가령 우리는 권위를 어떻게 체험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체험한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연관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였으면 하는 사람들의 표현이나 시선을 언제나 고통스런 경험에 비추어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까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가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표현이나 시선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를 바라보지 않고 그 상처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계속 전해줄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우리가 취하는 태도의 원칙이란, 우리가 삶에 통합시키지 못한 상처들을 반복한다는 데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아니면 스스로 상처를 입거나, 또 유년기 때 마음을 다치게 한 장면과 같은 상황들을 찾음으로써 상처들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와 연관하여 반복의 필연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버지보다 더 잘 하려고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정신외상적인 경험을 똑같이 반복한다. 어머니에 대해 실망했던 경험이 있는 남자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좌절의 경험을 한 것처럼 아내에 대해서도 똑같이 실망하게 된다.

아내나 남편 또는 상관에게서, 또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에게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똑같은 상황들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유년기에 상처받은 인간이 그 상처를 평생 남들에게 어떻게 드러내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역사를 일별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독재자나 폭력적인 범죄자의 삶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처를 종종 잔인한 방법으로 계속 전해주면서도,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유형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어렸을 때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또는 계속 자신을 아프게 하고, 희생자의 역할을 오히려 좋다고 느끼는 ‘희생양들’도 있다. 그러나 희생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희생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주변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부합되는 삶을 편안히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자극들

이 책에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의 심리학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도 중요하게 다루고자 한다. 심리학적인 인식들은 물론 진지하게 여겨져야 한다.그러나 우리는 심리학적인 인식에 그대로 머물고 싶지는 않다. 영적인 차원의 성찰에서는 무엇보다도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과의 만남이 우리의 영적인 상처들을 얼마나 치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서는 성서가 기술하고 있는 관계에 관한 고전적인 이야기 네 가지를 살펴보고 설명할 것이다.

즉, 마르코 복음서 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 마르코 복음서 7장에 나오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 마르코 복음서 9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루가 복음서 7장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보고자 한다. 관계에 관한 이 네 가지 이야기에서 예수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딸과 아들도 돌보는 치료사로 등장한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다른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치유 이야기의 묵상은 우리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예수의 치유하는 힘을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심리치료와 영적인 동행을 구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치료사에게 가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에게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까?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고 본래의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예수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가? C. G. 융이 예수를 자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원형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상처로부터 가능한 한 고통 없이 벗어나기 위해, 예수를 그저 건드리기만 하면 되는 마법사처럼 악용해서는 안 된다. 예수가 치료사로서 그 중심에 있는 성서의 치유 이야기들은 오히려, 우리의 상처가 어떻게 변화되고 우리가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는 이 이야기들에서 경험이 있는 노련한 치료사로 행동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 동시에 하느님과의 내적인 결속이 있는 존재로 행동한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이 구원과 치유의 본래적 근원이 된다.

성서의 이야기들에서 예수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에게 관심을 보이는 방식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우리 자신의 상처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치유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치유의 가능성과 신뢰할만한 삶으로 내딛는 걸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통찰이 있다. 즉, 우리가 자력으로는 치유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성서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우리 자신의 관계들을 바라보며 다듬을 때이다. 또한 우리의 상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치유하는 성령이 우리를 접촉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며, 우리가 본래의 소명을 발견하여 왜곡되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자아를 꽃 피우는 길로 가게 될 때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의 상처와 치유가 지닌 영적인 차원은 그러나 또 다른 측면도 갖고 있다. 부모와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 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하느님 상을 이론적으로 숙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선 이런 문제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 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벌을 주는 하느님, 전제군주 같은 하느님, 통제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왜 무의식적으로 항상 고수하고 있을까? 죄나 성과를 장부에나 기록하는 하느님이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과연 얼마나 진정한 어머니나 아버지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는 우리 자신의 부모 경험에 달려있다. 우리의 영적인 길도 유년기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영적인 길에서도 부모의 소망이나 신적인 기대가 채워지는 것만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 기대에 부응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종교 생활에서 모든 일을 종교적 틀에 완벽하게 들어맞게 하고 싶어한다. 그 결과 그들의 영성은 생명과 자유, 사랑과 넓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좁음과 불안과 능력 만능주의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을 야기한다.

영적인 상처들은 고통만 주는 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우리가 종교적으로 성장할 기회도 준다. 상처를 입으면, 완벽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자신을 더는 숨길 수가 없다. 상처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도 나 자신을 가려주던 가면을 부순다. 대단히 깊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 또한 열리게 된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환기시킨다.

그 상처는 우리가 스스로를 도울 수 없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다른 인간들의 도움에만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도움에도 의지하고 있다. 이때 가능한 한 빨리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상처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열리는 게 중요하다. 상처는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관문이 될 수 있다. 내가 나의 상처와 화해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치유하는 사랑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연다면, 부모가 내게 애정을 거의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내 상처를 받아들인 게 되기 때문이다.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해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활기차게 될 수 있다. 내적인 허기는 나로 하여금 다시는 인간들에게 종속되지 않을 사랑을 찾게 할 것이다. 나의 허기와 갈증은 결국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서만 달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서 나타나는 유년기 상처의 영향

누군가가 가정과 공동체와 직장에서, 그리고 동료나 친구들과의 교제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원인을 유년기 경험에서 찾을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버팀목이 되어주고 지원해주는 아버지의 경험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원칙적으로 권위에 대해 힘들어할 것이다. 어떤 권위에서나, 자신을 억압하고 삶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을 느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의 버팀목이 없기 때문에 갈등을 대면할 수 없다. 자신을 계속 남들과 비교하고는 그냥 순응한다. 그리고 막상 그 자신이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 때에는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하곤 한다. 마음 깊이 갈망했지만 어머니에게서 보호를 받지 못한 여자는 평생 어머니의 대용품을 찾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안간힘을 다해 매달리게 된다.

그들의 따뜻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말이다. 그런 여자는 어머니 교회를 위해, 또는 학교나 대학 또는 회사라는 기관을 위해 모든 힘을 쏟음으로써, 어렸을 때 받지 못해 아쉬워했던 사랑을 드디어 경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자신과 남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요구를 하여, 외로움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간절히 원하던 따뜻한 관심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갈망이 끝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여자는 늘 실망하게 된다.

부모의 상처를 바라보는 게 어떤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나는 다르게 될 수 없어. 그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바로 그 이유에서 내 삶은 성공할 수 없는 거야."이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이것은 또한 어렸을 때 겪은 상처들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상처들은 생명의 샘이 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상처는 값진 진주가 될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자신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처들에 너무 민감하고, 또 쉽게 마음이 상할 수 있으며, 권위를 대단히 두려워한다는 점을 납득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가 되면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내 상처에서 나의 재능을, 그러니까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진주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상처에는 항상 기회도 있다. 예컨대 애정을 거의 받지 못했다면, 사랑의 결핍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민감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갈망과 가까이 있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인 길을 갈 것이다.

현실에 잘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활기가 넘치게 된다. 삶의 흔적을 바로 나 자신의 상처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상처들은 이렇게 나 자신의 카리스마를 인식하고 그것을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것이 변화하여,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축복의 샘이 된다.

부모-자녀 관계의 얽힘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대단히 복합적이라는 것은 놀랄만한 통찰이 아니다. 자녀와의 관계가 대단히 좋다 하더라도, 부모는 자기들의 고유한 유년기 체험들을 아들과 딸에게 전해준다. 가령 언니나 여동생이 더 예뻐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 때문에 고통을 겪은 여자가 그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채 어머니가 되면, 자기의 딸을 시기하면서 통제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 어머니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따뜻한 관심을 딸이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딸에게서 딸을 보는 게 아니라, 평생 경쟁자로 여겼던 여자형제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은 어머니의 경쟁자가 된다. 또는 딸에게서 어머니 자신의 한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어머니는 딸의 아름다움을 통해 이 영역에서 자신의 실패를 보상하고 싶어한다. 딸은 어머니에게 불가능했던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대리인이 된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는 무척 다양하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녀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대리인을 볼 수도 있다. 가령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잘못 대우받았다고 느낀 딸은 어머니가 되어 똑같은 잘못을 자신의 딸에게 다시 저지를 수 있다. 혹은 사랑을 찾기 위해 딸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딸은 어머니가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선사해야 한다. 어머니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딸로부터 무한히 사랑 받겠다는 의도를 갖고 딸을 사랑한다. 자신의 무한한 욕구를 위해 딸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는 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딸로부터 받기만 함으로써 딸에게 과중한 부담이 된다. 그런 예는 다음에서 보듯이 수도 없이 많다.

아버지가 딸을, 또는 어머니가 아들을 결혼 상대자의 대용품으로 여기면 정서적이고 성적인 면에서 대단히 강한 유대가 형성되어, 아들이나 딸은 자신들에게 맞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부모는 자신들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위해 자녀를 이용한다. 때로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자아의 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한 이상적인 자아를 투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부모에게 불가능했던 삶을 대신해서 살아야 한다. 또는 자아의 부정적인 모습을 아이에게 투영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부모들이 무의식적으로 끌고 다니는 짐 전부를 짊어지는 속죄양이 된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괴로워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그런 부모들은 자기 자신들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아들이나 딸을 통해 그 갈등을 끝장낸다.

그런 식으로 부모는 자기 내면의 진실을 대면해야 하는 짐을 벗는다. 그렇지만 부모들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나 억압된 충동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속죄양이 되는 아이는, 흔히 방치 상태에 놓이거나 신경질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또 다른 방식의 상처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동지나 친구 또는 친지로 이용될 때 생겨난다. 어머니는 자녀를 남편에 대항하는 무기로 여길 수 있고, 또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므로,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구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놀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