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셀름 그륀

~ 관상이 아닌것 - 토마스 머튼 / 안셀름 그륀 신부님 ~

                                       

관상이 아닌 것 - 토마스머튼 / 안셀름그륀

관상이 아닌 것 관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없애 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관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큰 변화의 성격과 새로운 수준의 실재에 대한 일깨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관상에 대해서 이미 말한 모든 사항으로 인해 오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관상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상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관상은 빗대어 말하거나 변죽을 울리거나 멀리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관상을 분석하려 하면 할수록 관상의 진정한 내용은 없어집니다.

이런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성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상의 체험을 과학적이랍시고 정의하는 것보다 더 불쾌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를 시도하는 사람은 심리학적 방법을 쓰는데 아직은 관상에 대한 적절한 '심리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응'과 '느낌'을 설명하는 것은 관상을 있지도 않는 곳에, 반성을 통해서만 통찰되는 피상적 관상에 자리 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성과 의식은 외적(外的) 자아의 한 부분으로 관상에 대한 순수한 일깨움이 이루어지면 없어지고 더러운 음과 같이 한편에 버려지게 됩니다.

관상은 이런 외적 자아의 기능이 아니며 또 기능일 수도 없습니다. 관상에서만 깨어나는 초월적 깊은 자아와 일반적으로 단수 일인칭으로 불리는 피상적인 외적 자아는 정반대입니다. 이런 피상적인 '나'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체성'이며 우리의 '경험적 자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우리의 참으로 숨겨져 있는 신비로운 인격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일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며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는 진정한 '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우리 대부분이 죽기 전에는 찾지 못하는 신비스럽고도 알려지지 않은 '자기'의 흔적, 가면, 위장(僞裝)에 지나지 않습니다.

1) 우리의 외적이며 피상적인 자아는 영원하지도 않고 영성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자아는 결국에 굴뚝에서 나는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대단히 연약하고 덧없는 것입니다. 관상은 이런 '나'는 진정으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관찰과 반성의 법주를 넘는, 설명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나'에 대한 일깨움입니다. 말이 많은 사회에서 그것은 본래 숨겨져 있고 이름도 없으며 알려지지도 않기 때문에 감히 자신 있게 '나'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정한 '나' 는 뚜렷하게 말로 할 수도 없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할 말이 너무 많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보다 관상에 더 낮선 것은 없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자기의 정신적 근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유리된 존재, '생각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얻으려 애쓰는 소외된 존재의 선언입니다. 그의 생각이 자기 존재의 개념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그는 사실 진정한 자기의 존재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한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존재의 신비를 직접 또는 즉각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을 하나의 개념으로 축소시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어떤 직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객관적 실체인 양 자기의 존재에 이릅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와 다른 그 무엇으로서 자기에 대해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물' 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는 무한하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유한하고 한정된 사물들과 같은 '사물'이며 '객체'라고 확신합니다.

반대로 관상은 실체를 '주관적인' 것으로서 경험을 통해 파악하는 것입니다.( '외적 자아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상징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실존적 신비 안에 있는 '나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관상은 연역(演繹)을 통해 실존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실체가 실존적 심원(深原)에서 생동하며 하나님의 신비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직관적 인식으로 인해 현실화합니다.

관상은 '나는 생각한다(eogito)'도 '그렇기 때문(ergo)'도 아니고 다만 '나는 존재한다(sun, l Am)' 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개체성을 최종적 실체라고 쓸데없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인격으로서 우리의 신비로운 존재를 무한한 기쁨과 양보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겸손되이 깨닫는 것입니다.

관상은 분명히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품에 관계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태(懶怠)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무위(無爲)나 정신적 평화로 기우는 경향도 아닙니다. 관상하는 사람은 그저 앉아서 생각이나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더구나 초점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관상은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반성(反省)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깊은 상념에 빠지거나 반성하는 것이 생각 없이 행동하고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무시당할 것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관상에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관상은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니요, 전례를 통해 평화와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 역시 훌륭한 것들입니다. 이들은 관상을 체험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거의 필수적입니다. 그들이 저절로 그런 체험을 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관상의 직관은 성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성품이 조용한 사람이 관상가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매우 수동적인 성격은 일반적으로 혁신적이며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내적 몸부림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활동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 별다른 노력 없이 갑자기 관상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격의 활동가는 관상에 맞지 않아 대단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절대로 관상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그들은 관상에 대한 생각도 시도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들은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는 어리석은 수고로 지치고 상처를 입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상과 열정 그리고 정복욕에 사로잡혀 관상이 마치 물질적 부나 정치적 권력 혹은 교수직이나 고위 성직인 양. 어떤 물건처럼 생각하여 그것을 차지하려고 온힘을 다 기울입니다. 관상은 우리가 실천적 추론(推論)을 통해 얻으려고 계획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사냥꾼에게 쫓긴 사슴이 황무지에서 물을 찾듯 목말라하는 영혼의 생활한 물입니다.

우리를 일깨우려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관상은 황홀이나 무아지경도 아니고 갑자기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듣는 것도 아니고 상상력도 아닙니다. 관상은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오는 열정이나 감미로움이 아닙니다. 어떤 절대적인 힘의 포로가 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광란으로 해방감을 느끼는 감격이나 열광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평상적 의식과 경험적 자아에 의한 통제를 정지시키는 한 어떤 면에서는 관상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심연의 자아'가 하는 일이 아니고 다만 감정과 육체적 무의식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들은 디오니소스적 'id'의 영향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물론 깊고 순수한 종교적 경험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제가 여기에서 말하는 관상은 아닙니다.

관상은 예언의 은사도 아니며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관상에 따라오는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관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들을 관상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경험적이며 외적 자아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관상 같기는 하지만 실은 관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전체주의 집회에서 집단적 열광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잃는 체험, 양심을 눈멀게 하고 계급, 국가, 당, 인종 또는 파벌의 이름으로 모든 범죄행위를 용인하는 경향이 있고 당에 충성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무리의 급작스런 출현 등은 국가와 계급에 대한 잘못된 신비감과 매력은 틀림없이 어떤 깊은 정신적 욕구나 수수한 정신적 욕구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준다고 유혹하며 만족을 주는 척 가장합니다. 집단 사회에 대한 그릇된 신비주의는 자신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사로잡아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순수한 영적체험을 할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깊고 개인적 욕구에 대한 의식을 마비시키고 진정한 자아로부터 소외시키며 야심과 인격을 잠들게 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을 정치권력의 수동적도구로 만드는 아편과도 같은 열광의 또 다른 형태의 대용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도 갈등과 번민 그리고 회의(懷疑)로부터의 도피를 관상에서 찾으려는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관상 체험에 대한 깊고 표현할 수 없는 확신감은 심한 번민을 인식하고 지혈이 되지 않는 상처와 같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많은 의문들을 열어 놓습니다. 깊은 확신감에서 얻는 모든 것은 피상적 의혹에 상응하는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혹은 어떤 형태로도 순수한 신앙에 반대되지 않고 도리어 일상생활의 겉치레의 '신앙' 틀에 박힌 의견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인간적 신앙을 무자비하게 검증하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이런 거짓 '신앙', 우리의 '종교'와 혼동하기까지 하는 거짓 신앙은 냉혹한 질문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고통은 불로 단련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관상의 어둠 속의 섬광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신앙의 빛으로 아직까지 교의인양 받아들인 모든 선입관과 전통을 검증하고 의심해 보고 마침내는 거절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관상은 자기만족과 편견을 독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것은 '있는 그곳에서' 마지못해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상을 정신적 마취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관상은 진통제가 아닙니다. 낡아빠진 옛말, 판에 박은 문구, 구호, 그리고 이론(理論)이 서서히 타서 재가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과연 어떤 희생의 번제(燔祭)입니까! 극악의 경우는 '거룩한 수태(受胎)마저도 다른 모든 것과 함께 확실히 소실(燒失)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의 무서운 파괴요, 불사름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비워 놓으라고 하신 곳을 어떤 명기(銘記)된 것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있다'는 것이 중심이요 실존적 제단입니다.

끝에 가서는 관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결국에는 이것이 위대한 얻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다행히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말해서 관상 체험의 본질적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있는 '무엇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도 아니고 '것'도 아니며 순수한 '누구'2)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이시며 그분 앞에서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나'는 의식권으로 솟아오릅니다. 그분은 '나는 있다'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장 진실하고 나만의 소리로 "나는 있다" 하고 공명합니다.

새 관상의 씨/ 토머스 머튼

1) 지옥은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신, 우리의 참 존재로부터의 영원한 소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이것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올바른 개념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관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개념들이 사랑에 근거한 '인격체'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구체적 직관, 사랑의 대상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연구나 소유욕의 대상으로서 '본성'이나 법'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