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셀름 그륀

~ 시간 밖에 게시는 하느님 / 안셀름 그륀 신부님 ~



시간 밖에 계시는 하느님 /

안셀름 그륀

시간의 해체

묵상은 시간의 해체(사라짐)이다. 수도승 작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묵상을 말이 없는, 상상이 없는, 생각이 없는 기도라 한다. 우리의 생각은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말은 시간이 필요하다. 묵상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경험, 즉 내가 하느님과 하나라는 경험이고, 내가 나 자신과 하나라는 경험이다. 하나가 되는 그 순간에 모든 대립적인 것들이 붕괴된다. 이것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15세기)이 말하는 ‘대립의 붕괴coincidentia oppositorum’이고, 하느님의 본질이다.

묵상을 하는 순간에는 과거와 미래가 무너진다. 묵상은 현재 그 자체의 순간이다. 나는 지나간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미래의 것을 계획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걱정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묵상을 하는 순간에는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그때 나는 고유하고 본질적인 것을, 하느님을 만진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을 상상하지 않는다. 묵상은 한마디로 ‘하나되기’의 경험이다. 나는 정해진 그 무엇을 보지 않는다. 나는 관통하여 보고, 바닥을 본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모든 것이 해명된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의 심연에서는,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그리고 지금 내가 내 안에서 혼돈을 느끼고 있지만, 깊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좋다.

하느님은 시간 밖에 실재하신다. 내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나는 무시간성無時間性, 즉 영원에 속하게 된다. 수도승들은 성경의 말씀 내지 예수 기도(수도승들의 독특한 신비적 기도법)를 숨과 결합시키면서 묵상을 연습한다. 묵상 또는 수도승들이 부르는 대로 ‘내적인 기도’ 즉 개인적인 기도 시간에 연습하는 끊임없는 기도는 공동으로 하는 시도時禱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때의 말씀은 내적인 기도의 표현이고, 수도승이 사랑으로 갈망하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하지만 내적인 기도는 명상 내지 기도 시간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도승은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하고, 지금 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해 있어야 한다. 그가 완전히 순간에 실재하면, 즉 방금 일어난 그 일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면 그의 시간에 끊임없이 ‘영원’이 들어온다.

비밀


인간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은 인간 안에 있다. 그러나 시간은 인간보다 많다. 인간은 시간을 피해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이 그를 이 시간에서 빼내어 하느님의 시간으로, 영원으로 데려가길 갈망한다. 그곳에서 인간은 시간에서 벗어난다. 그곳에서 시간은 그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비밀이다. 모두가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에 대해 좀더 정확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질문한다. “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 나는 막연히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설명하려고 하자 비로소, 난 대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와 미래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러나 현재는 정의 내릴 수가 없다. 현재는 계속해서 과거로 넘어간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시간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그 무엇이다. 시간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곳에서 작용한다. 심리학자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이해를, “현재는 본래 영혼의 경험이고, 과거는 영혼 속에 있는 회상의 이미지이고, 미래는 영혼의 기대 안에서만 산다. 이와 반대로 일상적인 시간은 의미가 없고 무상하며,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사라진다”라고 설명한다. 시간은 영혼의 경험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세 가지의 시간이 있는데,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현재이다. 오직 영혼에만(다른 곳에는 없다) 이 세 가지 시간이 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관조이고, 미래의 현재는 기대이다.”

영혼은 시간을 경험한다. 하지만 영혼은 시간 밖에 계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이 시간도 뛰어 넘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사신다. 그분은 우리 자신보다 더 깊은 우리의 내면에 계신다. 이 깊은 내면에는 시간이 없다. 그곳에는 현재 그 자체가 있고, 그곳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신에 이르게 하신다.

번역 / 이온화(이화여대 독문과 강사)

작가 소개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베네딕도 수도회 신부. 1945년 독일에서 출생한 그는 현재 소속 수도회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지도를 하는 한편, 영적 갈증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2001년 5월 월간 《들숨날숨》 초청으로 국내에서 강연을 가진 바 있다. 저서로 《아래로부터의 영성》 《올해 만날 50천사》 《50가지 성탄 축제 이야기》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성서에서 만난 변화의 표징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