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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보는 것을 배우기 **







보는 것을 배우기

      세상의 눈은 교회 문이 닫혔을 때,
      나의 눈이 벽 그이상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상의 삶, 그 이상을 더 멀리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눈은 영원 깊숙이 들여다보는 눈이다.

      - 아르스의 본당신부 성 요한 비안네

      “죽는 것을 배우기”로 행복으로 가는 길에 있어 마지막 부분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생각해보면, 우리 지상의 여정이 끝나는 곳도 죽음이다. “나머지”는 햄릿이 말한 것처럼 “침묵”이다. 그러나 성인들은 우리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남았다. 그들의 눈에는 삶이나 행복에의 소명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상의 삶이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의 목적은 더 큰 행복을 향하여 우리를 이끄는 것이고, 우리의 갈망, 행위, 그리고 고통들을 그것들의 참다운 가치에 따라 행복의 빛 안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우리의 마지막 행복이 성취되는 그 목표를 보는 행위, 진복의 비전이라고 서술하여 왔으며,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고 했다. 이 진복의 비전은 무엇보다도 어떤 중재 없이 받게되는 빛, 명료함이 특징이다. 바오로사도가 썼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Ⅰ고린토 13,12) 이다. 그 비전은 또한 우리를 변화시켜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재조정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의 참된 가치를 볼 수 있게 한다.

      단테는 지옥의 심연으로부터 연옥의 산까지, 그리고 마침내 천상낙원의 황홀경에 이르기까지 상상에 의한 순례 여정을 「신곡」에서 묘사한다. 시인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 그는 삼위일체를 응시할 수 있게 인도된다. 삼위일체는 마치도 세 개의 무지개가 서로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이 이 신비를 꿰뚫어보려고 할 때 갑자기 마음 속에 “거대한 이해의 섬광”을 받게 되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완전한 균형을 갖춘 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나는 나의 의지와 욕망이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단테가 사용했던 그런 말들로 그리스도교 예술가들은 결단코 다 표현될 수 없는 진복의 상태를 묘사하려고 애썼다. 단테 이후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 시, 영화 등으로 시도하고 있다. 한편 현대물리학도 외계에 대한 연구로 “해와 별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나 예술이 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는다. 완전한 행복이란 것이 참으로 있는가? 있다면, 그러한 궁극적인 행복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이 지상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들과 단테의 상상 속에서 등장하는 그 진복의 비전이 연결되는 것을 지금 보게 해 주는 길이 있는가?

      대부분의 성인들은 진복의 비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그들은 가장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상황 속에서도 특별한 차원을 알아보았다. 어거스틴 성인은 모든 참되고 사랑스러우며 선한 것들은 우리를 그것들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이끌어 당기는 촉매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 방향에 대한 이런 인식 ­원천을 향하여 아무리 희미하게 인식된다 하더라도­ 이 성인들의 특징이다. 원천을 향하는 이런 자세가 우리들에게도 역사, 상업, 그리고 자연의 칙칙하고 우울한 표면을 넘어 제라드 맨리 홉킨스가 칭했던 것처럼, “사물의 심연 속에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신선함”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진복의 비전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장소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다른 눈으로,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어거스틴 성인은,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느님이 계시는 우리 마음의 눈을 건강하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성인들은 건강한 마음의 눈을 가졌고, 행복으로 가는 그들의 모든 가르침과 안내에서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인들은 신앙의 눈으로 보면서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 즉 그들의 일, 사랑, 침묵, 슬픔 등에 목표를 부여한 더 포괄적인 실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이 그들의 행복에 원천이었고, 만일 우리가 그들의 모범에서 배울 마음이 있다면 우리 행복의 원천도 될 수 있다.

      모든 길은 천국으로

      많은 신학자들, 설교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천국에 있는 성인들의 행복을 상상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지상에서 누리는 성인들의 행복에 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았다. 실제도 어떤 사람들은 지상의 삶에서 참다운 행복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원할 수 있는 목표인가 하며 회의를 품었다. 많은 가톨릭인들은 이젠 소수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직도 교리문답서의 시작구절을 암기할 수 있다:

      누가 너를 지었느뇨? 하느님이 지으셨도다.

      왜 하느님이 너를 만들었느뇨? 이 세상에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내세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기 위하여 만드셨도다. 만일 전통적인 교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무시했다면, 그건 큰 실수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을 단지 수단으로,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매우 오래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 이라는 목적은 결코 죽음을 겪는 존재들이 도달할 수 없는 목적이 되고 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이 질문에 많은 설명을 할애했는데, 주로 행복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정수를 보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물, 명예, 명성, 권력, 건강, 쾌락 등 일시적인 재화들을 재고한 후, 아퀴나스는 이런 것들이 완전한 행복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완전한” 행복에 너무나 단호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 목적에 미달하는 모든 것은 거명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 목적에 초점을 둔다는 의미에서 아퀴나스는 오랜 전통의 상속자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지상의 삶은 우리의 지정한 나라에서 “외롭게 유배된 추방”의 상태일 뿐이다. 마리아를 흥숭하는 중세 때의 찬송가 “살베 레지나”의 가사를 보면, 우리는 “가난하고, 쫓겨난 에와의 자녀들이며 눈물의 골짜기에서 울며 슬퍼하는” 자들이다. 지상의 삶에서 행복해 보려는 노력은 헛될 뿐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 사람인가를 잊게 할 수 있으므로 꽤 해롭기조차 하다.

      어거스틴 성인에 따르면, 모든 것은 우리가 마지막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만큼만 선하고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지나친 행복은 우리가 “수단”에 고착하게 되고 참다운 목표를 잃어버리게 할 위험을 갖고 있다.

      물론 어거스틴의 이런 경고에는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이 확실히 있다. 이 지상의 삶에서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집을 구할 수 없으므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완전한 행복”을 지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경고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경고인가? 우리가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유일한 경고인가?

      고통과 시련 한 가운데에서 모든 슬픔이 위안을 받고, 모든 눈물이 씻어질 미래의 삶에 우리의 희망을 두는 것은 격려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다가올 어떤 이상적인 낙원을 선호하여 지상의 삶이 지니고 있는 모든 축복, “여정의 즐거움”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영적인 처방에 대해서는 의심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한 태도는 무관심과 소극적인 경향을 키울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냉정한 광신주의를 발생시킨다. 아무리 영향이 적다해도 은총을 망각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도 독방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이런 유혹에 저항했다. “나는 우리가 이 지상의 삶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보낸 모든 좋은 것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가 오면 그분께 사랑, 신뢰, 그리고 즐거움을 갖고 갈 수 있도록”

      비록 천국이 우리 행복의 완성이요 완전함을 나타낸다고 해도,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은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룩함에 의해서이다. 그렇게 성인들은 가르쳤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천국을 준비하는 길은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한결같이 순응하는 것뿐이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삶이 단지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지상의 삶에도 참다운 달콤함이 있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고 인정할 수만 있다면, 그 달콤함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축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인들은 천국의 완전한 행복과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보이는 그늘진 행복사이에 깊은 틈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많은 성인들은 대부분 지상의 참다운 행복과 천상의 행복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퀴나스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상의 어떤 행복이 천상의 참다운 행복을 어느 의미에서 닮아있다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가 다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일리가 있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그 연결점이 관상이라고 생각했다. 관상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의 정수에 더 가까이 이끌린다. 다른 한편 아일랜드의 6세기 수녀원장이었던 브리지드 성인은 지상의 거룩함을 강조했던 사람으로 연결점을 환대의 실천이라고 본다. 성인은 천국을 맥주호수 주변에 둘러앉은 거대한 가족이라고 비유했다. 성인들마다 제각기 다른 길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인들의 삶을 보면, “여기”와 “다음” 세상 사이에서 보이는 틈이 사라지는 통찰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은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이 썼던 것처럼, “모든 천국으로 가는 길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지는 순간이다.

      태양처럼 빛나며

      토마스 머튼은 자서전, 「칠층산」으로 일찍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 명성은 그에게 부담이 되었다. 대중의 마음 속에 그는 영원히 고깔 수도복으로 머리를 깊숙이 가리고 엄격한 수도공동체로 들어가며 행복하게 확신하는 젊은 수도승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은 머튼의 수도여정에서 오직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가 무척 어려웠다. 후에 머튼은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칠층산은 내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한 남자의 작품이다.”

      이 책에 대해 특히 그가 후회하고 있는 측면은 “세상”과 그곳의 운이 없는 시민들에 대한 맹신적 경멸의 태도가 표현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책에서 그는 수도원이 저주받을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천국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수도원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수도원에 살면서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투쟁에 나의 참다운 역할을 한다”고 썼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그의 저서들은 연민이 풍부해지고 범교파적인 작품이 되어 갔다.

      출간된 일기들 중의 한 부분에서 그는 수도생활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신비스러운 깨우침의 순간을 묘사한다. 깨우침은 수도원에서 가까운 루이스빌에 심부름을 하러 갔을 때 일어났다. “쇼핑구역의 중심인 4번가와 월낫가의 모퉁이에서 나는 갑자기 내가 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은 나에게 속하고 나는 그들에게 속하며, 우리는 전혀 낯선 사람들이지만 결코 서로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압도되었다. 마치도 특별한 세계, 이탈과 소위 거룩함의 특별한 세계 속에 겉치레로 고립되어 있다는 꿈, 격리되어 있다는 꿈으로부터 잠이 깨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머튼은 인류와 연대감을 발견하였다. 단지 죄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은총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참다운 행복에의 깨우침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에게 그들 모두가 태양처럼 빛나며 돌아다니고 있다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라고 그는 썼다. “아무도 이방인은 없었다... 천국의 문은 모든 곳에 있다.”

      머튼은 이 통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편협한 종교적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었다. 루이스빌에서 일어났던 이 체험은 매일의 실제가 “변모되어” 영원히 그의 비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순간이었다.

      그는 이 변모된 실제를 “순수진리점”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존재의 중심에 놓여있으며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부분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 순수진리점은 지복의 비전인데 머튼은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존재 안에 새겨진 지점이라고 묘사하였다. “그것은 순수다이아몬드와 같다. 또한 볼 수 없는 천국의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있어서 만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수천만 개의 빛이 마치 정면의 태양이 보내는 광채처럼 함께 다가와 모든 어두움과 삶의 잔인함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변모

      이러한 머튼의 체험은 수많은 성인들과 신비가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 노르위치의 쥴리안은 세계를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소중한 개암나무열매라는 비전을 받았으며, 12세기 독일의 신비가인 빙겐의 힐데가르트 성인도 다음과 같이 비전의 체험을 표현한다. “강렬한 빛이 열려진 천국의 창공에서 번쩍였다. 그 빛은 나의 머리를 관통하였고 나의 마음과 온 가슴을 덥혔는데, 태우지 않고 따스한 불길로 그렇게 하였다, 마치도 태양이 그 빛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을 따스하게 데우듯이.” 이런 체험들을 통하여 신비가들은 공통적으로 성서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 우주의 운명, 혹은 단순히 일상의 빛나는 마음에 대한 깨우침을 말한다. 그들이 나누는 것은 실제의 바깥 장막이 잠시동안이라도 옆으로 걷어져서 그 안에 참으로 있는 것이 드러나도록 해주는 섬광 같은 통찰이다.

      이 체험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 때 예수님은 세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갑자기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마태오 17,2). 성서에서 가장 특별한 이야기들 중 하나이며, 제자들이 비유로서가 아니라 상황 그 자체를 직접 흘낏 볼 수 있었던 경우였다. 미래의 영광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 실제의 더 깊은 핵심에 대한 영감? 베드로는 두려움과 충격 속에서 겨우 말한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갑자기 그 순간은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제자들은 산을 내려오며 본 것에 대하여, 그 의미에 대하여 서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현현은 자주 일어나지 않거나, 거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태양을 똑바로 바로 볼 수 없는 것만큼이나 어떤 노골적인 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더 최상이다. 죠르쥬 베르나노스가 쓴 것처럼,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가 선과 악 모두에 있어 서로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다면,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의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어떤 순간들을 경험하며 기억한다. 어떤 결정적인 만남이나,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깊은 대화가 그런 경우이다. 갑자기 모든 일상의 베일이 걷어지고 거룩한 땅에 서 있는 우리자신을 느낀다.

      이런 경험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대부분의 경우는 그것들을 지워버리거나 내쳐버린다. 우리가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일상의 계획과 일들을 그것이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성인들에게 그러한 경험은 실제의 진정한 시금석이었으며, 삶의 여정을 제대로 방향 잡게 해주는 별자리였다.

      이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단순한 것일 수 있다. 부활의 로렌조 수사는 불란서군대에 오랫동안 복무하고 있을 때 그런 순간을 경험했다. 백년전쟁의 노련한 군인으로 그는 무엇이 공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잎이 하나도 없는 마른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이 봄이 되면 다시 잎으로 덮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하느님의 섭리와 권능에 대한 깊은 영감”을 얻었다. 후에 그는 이 통찰에 의해 파리의 가르멜 수도원으로 곧장 갔고 그곳에서 일생 “하느님의 현존”을 실천하며 살았다. 또한 깨우침의 순간은 도덕적인 도전이나, 인간 고통과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혹은 다른 성인과의 만남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4세기의 주교였던 뚜르의 성마르띠노는 한 가난한 걸인과의 만남에서, 에디뜨 슈타인 성인은 아빌라의 대데레사 성인의 자서전을 읽고 그런 순간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발견의 순간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된다.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도 짧은 순간 진리를 만나게 된다해도, 우리가 더 깊고 넓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초월

      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그러한 순간을 묘사한다. 그가 회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또한 어머니 모니카가 죽기 며칠 전, 두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런 체험이 일어났다. 수년동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고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 왔다. 모니카는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 살았다. 아들이 세례 받는 것이었다. 이 목적이 성취된 지금, 어머니와 아들은 어느 날 오후 성인들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들을 수 없으며, 어떤 인간의 마음도 알 수 없는 삶, 성인들의 영원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의 입술을 그분의 샘,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의 샘에서 흐르는 천상의 시내에 대고 그 생명수의 세례를 받으며 할 수 있는 껏, 이 위대한 신비를 이해하고자 한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들은 그 어떤 신체적 쾌락이나 지상의 기쁨도 “성인들의 삶이 가지는 행복”과 비교할 만한 가치가 없고,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사랑의 불길이 점점 더 강렬하게 타오르면서” 그들을 더 높이 고양시키고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게 해준다. 그들의 생각은 “다양한 모든 물질세계 위에 펼쳐지고 천국까지 올라가는데, 그곳에서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를 비추고 있다.”

      시간을 잊어버리고 모자는 상승을 계속한다. “아직도 더 높이 올라가며, 우리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우리의 영혼에 다가오시어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진리의 음식으로 영원히 배불리 먹이고 계시는 영원의 풍요로움이 깃든 그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끊어질 줄 모르고 더 높이 상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지혜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우리 마음의 온 힘을 다해 끌어안을 때, 찰라의 순간, 그것에 도달하고 만져본다.”

      그것은 짧은 산꼭대기 체험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그것을 움켜쥐려고 할 때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체험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영원한 빛과 아름다움의 영역을 만지려고 갈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삶에는 아직도 그들이 무엇인가 경이롭고 두려우며 초월적인 어떤 것을 경험했던 때, 자신들만이라도 “이것이 진리다!” 라고 말하도록 하는 어떤 것을 느꼈던 때가 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해 말하면서 도로시 데이는 어렸을 때 시카고에서 경험했던 그런 사건을 포함시킨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옆집에 사는 작은 소녀 캐트린 바렛트를 보러 갔다. 현관, 부엌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도로시는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캐트린의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도로시의 침입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 모습으로 바렛트 부인은 도로시를 돌아보며, 자기 딸과 다른 아이들이 가게에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기도를 계속했다.

      도로시는 “난 바렛트 부인에 대해 사랑의 충동을 느꼈지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 평범한 만남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도로시가 후에 가난과 불의의 문제에 시달려도 “비참함과 계급투쟁 한가운데에서도 삶의 영광이 빛났던 순간들이 있었다. 바렛트 부인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아침 10시쯤 설겆이를 끝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런 작은 사건들이 도로시의 장차 올 회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한 사건은 딸 타말의 출생이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체험만이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서 부족한 것에 대한 두려움, 이웃들, 그가 열렬하게 지지했던 가난한 이민자들의 결핍 역시 도로시의 회심에 영향을 끼쳤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충실한 가톨릭인들 이었으며, 그들은 물질적인 고통을 넘어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는 진리와 가치들을 새기며 살고 있었다.

      회심한 후, 그는 몇 년 사이에 피터 모린의 도움을 받으며 가톨릭일꾼운동을 소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데이는 아직껏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다. 그는 “인간운명의 몹시 비참한 시련에 대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는 모든 것 안의 거룩함에 대한 깊은 직관을 결코 잃은 적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육화에 의해 모든 생명들은 그것이 아름답든 추하든, 은총으로 만져지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과 자연 속의 모든 것들­밤에 짐승의 울부짖음, 바닷가의 미풍 등­은 도로시에게 하느님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불안전 속에서도 공동체 삶이 천국잔치를 일별케하고 미리 알려준다는 믿음을 견지했다. 일과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물었을 때, 도로시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진복의 비전

      어거스틴 성인은 그의 책 「신국론」을 천국에 있는 성인들의 활동에 대한 긴 성찰로 마무리한다. 그는 특히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 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약속에 관심을 두었다. 직접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거스틴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성인들은 우리가 지상에서 모든 것을 보듯이, 신체의 눈으로 하느님을 본다는 말인가? 어거스틴은 쉬운 질문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어거스틴은 이렇게 제안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게될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 몸의 눈이 닫히면, 영적인 눈으로 보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심”을 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사실인가? 그러한 행복이 가능한가? 그러한 행복은 우리의 현재 삶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지금 행복하고 싶은 욕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 각자는 천국에 대해 생각할 때 제각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린다. 취향도 다르고, 궁극적인 행복이 성취되는 상태에 대한 개념도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양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즉, 우리는 천국을 우주의 지도에 배치할 수 없다. 천국의 실제를 인간 이성으로 증명해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이 실제인가? 이것은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과학이나 논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복음에 나타나는 진리는 객관적인 검증이 아니라, 개인적인 결단에 호소하고 있다. 복음서의 진리는 논리적인 삼단논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경험에 의하여 입증될 뿐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머무십니까?” 라는 일반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초대하시며 대답하신다, “와서 보라”(요한 1,39).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아는 길들이 있다. 이 시점에서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서술했던 것처럼, 신앙이 대두된다. “사물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근거, 증거를 갈망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성인들의 체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의 증언에 주의할 수는 있다. 그들은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을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와 그 안의 평범한 삶을 다른 빛으로 인식했다고 증언한다. 쟝 삐에르 드 꼬사드가 성찰한 것처럼, “신앙은 지구를 낙원으로 변화시킨다. 신앙에 의하여 우리 마음은 천국 가까이 있다는 기쁨으로 고양된다.”

      “하느님이 계신 곳은 어느 곳이나 천국이다”라고 아빌라의 데레사는 말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이 참으로 천국에 이르는 길, 우리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보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그만큼 마지막 행복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행복을 어거스틴은 「신국론」의 끝 찬미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침잠하며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게 될 것이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게 될 것이고, 찬미할 것이다.”

      신앙의 삶이란 반드시 수도원이나 교회에서만 지내야 하는 생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인들은 체계화된 종교적 실천과정을 거치며 살았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고, 일찍 일어나 성서를 묵상하고, 묵주신공, 정기적인 양심성찰, 영적 지도자나 수도회 장상들의 충고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신앙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다. 또한 단식, 쇄신, 축일 등 전례력을 충실히 따랐다. 성인들의 삶을 연구하고, 성지를 순례하며, 성사생활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깨어있는 신앙의 눈을 훈련시키기 위한 도구들, 습관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실천하는데 있어 더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떼어놓는 삶의 모든 산만함을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오래된 교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다음 세상에서 하느님과 영원히 행복하기 위해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가르침에 대하여 당황스럽고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인과관계를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측면이다. 즉 천국, 행복이 이 지상에서 거룩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 이라고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이외에 다른 관계나 연결은 없는 것인가? 만일 거룩함의 길이 또한 행복의 길이며, 영원이란 이 지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취했고 추구했던 선택의 봉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교리가 훨씬 더 타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빅토리아시대의 저명한 신학자인 죤 헨리 뉴먼 추기경은 한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왜 거룩해져야 하는가를 물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함을 고려하여 또 다른 쉬운 기준을 만드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뉴먼은 이런 질문에 대답한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 애써 들어갔다 해도 그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하느님의 현존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이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어떤 압제적인 승리의 티켓이 아니다. “천국은 거룩한 사람들에게만 천국이며 행복한 자리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천국이 될 수 없다” 라고 뉴먼은 말한다.

      천국은 거룩한 사람들 이외에는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거룩함의 여정을 걸으면서 성인들은 토마스 머튼과 함께 “천국의 문은 어느 곳에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빛 속에서 우리는 이 지상의 삶 역시 우리가 거룩해지는 만큼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기를 배우는 만큼, “행복의 자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도스토예브스키의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거룩한 죠시마 신부의 통찰이었다. “사람들이여, 당신들 주변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보라!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부드러운 풀들, 새들을. 자연은 아름답고 무죄한데 우리들, 오직 우리 사람들만이 죄가 많고 어리석다. 우리는 삶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삶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에만 삶은 우리에게 그 온갖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며,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게 될 것이다.”

      성인들은 죽음의 경고에 대하여 말하고 영적인 긴박함에 대한 감각을 높여준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자각은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때에 양성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네덜란드의 가르멜회 사제였던 티투스 브랜스마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다가 나치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다카오 수용소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온다. “나는 그분의 손이 하시는 일 속에서 하느님을 뵙고 모든 보일 수 있는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의 흔적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기쁨을 넘어서는 최고의 기쁨에 사로잡힌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각이 우리세계에 너무나 필요하다. 이 자각은 삶이 그 모든 불합리함과 잔인함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선하다는 확신을 고무시킨다. 또한 노르위치의 쥴리안이 말했듯이 이 자각은, “모든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의 모습이 좋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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