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콘]신약 성서의 삼위일체. 그리이스. 19세기초. 50 x 41cm
러시아의 모스크바 교회회의에서는 서방에서 묘사하는 것 처럼 성부를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했다.
따라서 화면의 것과 같은 그림은 상당히 후대에, 그리고 숱한 진통 끝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제시된 이콘은 독생자 그리스도가 구름 위에 앉아서 그의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다.
그의 왼손은 그와 성부 사이에 떠 있는 지구의 위에 얹혀 있다.
그 오른편에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성부는 그의 왼손으로 홀을 들고 계신다.
그리고 중앙 상단에는 육각의 별 안에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보인다.
거룩하신 주여
당신은 높은 곳에서 겸손한 자들을 굽어 보소서.
모든 것을 살펴 보시는 당신의 눈은 만물을 살피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주님 앞에 굽히고 기도하나이다.
당신은 당신의 거룩한 곳에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손을 펴시어
우리를 강복하소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이세상에서와 다음 세상에서의 온갖 복을 주옵소서.
주님은 선하시고 자애로우시나이다.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이시여.
불쌍히 여기힘과 구원하심이 당신께 달렸사오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광이 있어지이다.
주일 조과 중.
(이콘.신비의 미.209-210쪽에서.장긍선신부편저.)
축일:5월13일
노르위치의 복녀 율리안나
Beata Giuliana di Norwich
Bl. Juliana
Bl. JULIAN of Norwich
Blessed Juliana of Norwich, OSB Hermit (PC)
Born:c.1342
Died:c.1423 of natural causes
Beatified:never formally beatified,
but considered "blessed" due to popular devotion
성녀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못한 문맹자이었으나, 그래서 그녀가 쓴 저서는 속어로 된 신비서적이 많다.
이것은 언어학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반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신비가로서 교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함은 참으로 기억할만 하다.
그녀가 잉글랜드 노르위치의 성 율리안 성당벽 외곽에서 은수자가 될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373년, 그녀는 16 차례나 계시를 경험하였는데,
이때마다 탈혼 중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삼위에 대한 계시를 경험하였는데,
이때마다 탈혼 중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삼위에 대한 계시를 받았으며,
그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위의 두 신비를 묵상하였다.
그 결과는 "하느님의 사랑, 강생, 구속, 죄, 보속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 등에 관한 계시록이다.
이것은 영문학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글들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
-Julian of Norwich
[icon] Crucifixion - XV c., Andrej Rublev Museum, Moscow
노리치의 줄리안의 靈性
韓 順 熙
(修女, 聖心修女會, 가톨릭大 宗敎學科 客員敎授)
목 차
I. 서론
II. 줄리안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IV. 오늘을 위한 줄리안의 영성적 지혜
1.줄리안의 생애 1.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의 초대
2.줄리안이 살았던 시대상황 2. 풍요의 영성: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3.중세의 은수자의 삶 V. 결론
4. 작품의 배경
III. 줄리안의 영성
1. 줄리안의 환시 체험
2. 줄리안의 하느님 표상
I. 서 론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은 14세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신비가이다. 때마침 영국에는 흑사병이 나돌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희망이 없이 보였던 암울한 시대였다. 줄리안은 고통 가운데서도, 환시 속에서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이렇게 되풀이 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잘 되게 하겠고 나는 모든 것이 잘 되게 할 것이고, 또 나는 모든 것을 잘 되게 할 수가 있다." 이 표현은 삶에 대한 그녀의 태도와 영성을 말해준다. 이는 단지 피상적인 낙관론을 피력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희망이 주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음으로 어떠한 절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긍정적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는 깊은 믿음을 엿보게 한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녀가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일치의 체험에서 퍼내는 기쁨을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나누기를 갈망하는 태도는 인간의 미래가 오직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강한 믿음을 표명하는 삶이었다고 보인다. 줄리안은 그 당시 유럽과 영국을 휩쓸고 있던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처참하게 고통하며 절망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의 신비를 살았던 영성가이다.
그녀는 몇 차례에 걸쳐 하느님의 환시를 받았고 그 환시를 바탕으로 일상의 삶을 깊은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살았던 신비주의자이다. 특히 줄리안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그 속에서 작용할 수 있게 하도록 살고 증거했기에 가톨릭 영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토마스 머톤은 줄리안이 '영국의 위대한 신비가'라고 했으며 뉴만과 함께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의 반열에 자리 매김 했다.
이 논문에서는 줄리안의 신비주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는 몇 가지 관점만을 다루고자 한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어 여러 영성 작품 안에 부분적으로 언급된 그녀의 생애를 바탕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줄리안의 영성은 그녀의 작품,『계시, Showings』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또한 줄리안의 영성적 지혜가 현대인에게 주는 가르침을 조명해 보려한다.
II. 줄리안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줄리안의 생애
영국의 최초의 신비주의 여류작가요 영성 지도자로 활약했던 줄리안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대하게 영향을 미친 신비주의 영성가 이지만, 우리가 줄리안의 내력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미미하다. 단지 그녀의 작품과 시청에 남아 있는 유언장을 통해 그녀의 생애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줄리안은 1342년 12 월에 노리치 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리치는 당시에 런던 다음으로 번창했던 큰 항구도시였다. 줄리안은 그 당시 흔히 열심한 신자가 택했던 은수자들을 위한 제 3 회원 수도생활의 양식을 살며 신앙을 증거했던 평신자이다. 줄리안은 수도 명으로 그녀가 정착하여 살았던 노리치의 줄리안 교회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무도 그녀의 정식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줄리안은 칼로우(Carrow)지역에 있던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교육받은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쓰고 있으니 이는 라틴어를 모르던가 아니면 조금 밖에 모른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당대의 관습으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을 한다.
1373년 5월 8일 심하게 아팠는데 그 때 주님으로부터 16 번의 "환시"를 보는 체험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후 줄리안은 노리치 교회의 여성 은수자(anchoress)가 되어 죽는 날까지 교회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줄리안 교회는 그 당시 4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랜 전통의 교회였다. 그녀의 은둔소에는 두 개의 창이 나 있었는데, 하나는 교회를 향해 있어 미사 참여와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창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넓은 신작로를 향해 있어서 영적인 담화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창으로 사용했다. 그녀의 집은 큰 길 가로 나 있어 때때로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영적 지도나 조언을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줄리안은 노리치 교회에 붙어 있는 작은 "기도 집"으로 쓰이는 은둔소에 기거했으나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줄리안의 은둔소는 단순한 구조로 지어진 집으로서, 그녀는 살림을 도와주는 여자와 함께 살며 때로는 손님이 와서 잠시 머물다 가기도 했다. 쥴리안은 높은 담을 쌓고 약간의 가축을 길렀던 것으로 보아 약간의 사유재산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의 생활은 대부분 기도와 관상으로 짜여진 단순한 삶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극심한 고행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저리 캠프(Margery Kempe)란 여성은 그녀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그녀는 줄리안보다 한 세대 젊은 영국 신비가이며 전기 작가로서 줄리안을 방문하고 며칠 동안 그 곳에 머물면서 줄리안으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그 기록에서 줄리안이 거룩하고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마저리는 줄리안을 존경하여 줄리안 부인(Dame Julian)이라고 불렀다.
줄리안은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계시』라는 한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 집필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길이가 짧은 텍스트(short text)로 알려진 첫 번 째 작품과 긴 텍스트로 알려진(long text) 두 번 째 쓴 작품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텍스트는 『계시』(Showings)라는 제목으로 1373년 5월 8 일에 그녀가 하느님께 받은 환시에 기초하여 쓴 것이다. 두 번째 텍스트는 줄리안이 환시를 받은 후 20년간 줄리안 교회의 은둔소에서 기도와 성찰, 신학화 작업을 거친 뒤에 그녀가 체험한 환시의 의미를 더 깊게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첫 번째 텍스트의 네 배의 길이로, 신학적 주석을 붙여 완성시킨 것이다. 당시의 추상적이었던 신비가들의 용어보다는 덜 난해하고 덜 조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관상적인 통찰로서, 초기의 환시 체험에서 받은 영적 강렬함과 감정을 되살려내는 다이나믹한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신비적인 그녀의 신학적 역량을 높이 평가한 주석가들은 줄리안을 아빌라의 데레사, 시에나의 가타리나에 뒤이어 교회의 세 번째 여성박사로까지 추천하였다. 또한 이 책은 영국 여성이 최초로 영어로 쓴 작품으로서 세계 영성 문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간주된다.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그 신학적 깊이로나 연민의 폭에 있어서 언어의 아름다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작품이다.
줄리안은 이 두 텍스트를 통해서 하느님을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줄리안의 사후 거의 2세기 동안이나 그녀의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잊혀진 채 무시되었고 17세기에 와서야 최초로 출간되었다.
1413년 그녀의 첫 텍스트『계시』의 편집자는 줄리안이 노리치 교회의 은수자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녀의 유언장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녀가 사라(Sara)와 알리스(Alice)라는 2 명의 하녀와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416 년 그녀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그녀가 소유했던 유산은 20 실링이었다.
1768년의 역사가 부름힐드(Blomefield)는 그의 역사책에서 줄리안을 가장 거룩하고 존경받는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사망한 날짜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녀가 80 세까지 살았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당시의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산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무덤은 추적할 수가 없다. 그녀의 부모와 탄생에 대한 정확한 내력도 알 수가 없다.
2.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상황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는 흑사병(1348년부터)이 창궐하고, 백년 전쟁 (1337-1453)과 농민 혁명(1381)으로 영국 전체가 혼란했던 시기였다. 영국 역사상으로는 에드워드(Edward) 3세와 리차드(Richard) 2세가 다스렸던 시기였지만, 리차드 왕이 전쟁에서 패한 후, 퇴위 당하고 이내 사형에 처해진다. 헨리 (Henry) 4세(1399-1413)가 왕위를 강탈하고, 헨리 5세의 집권이 시작되면서 극도로 혼란한 시국을 살면서도 그녀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정국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비치고 있지 않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줄리안은 영국의 왕과 귀족들, 왕과 교황 사이의 주권 다툼 등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줄리안은 그녀가 살았던, 상업 중심지이며 주교좌 성당이 있었던 노리치 시에 대해서도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다. 증대된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의회의원들과 제국 군인들을 유지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과 중간 계층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던 당대의 격증하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당시 교황들은 불란서 아비뇽(Avignon)에서 1309년부터 감금생활을 하다가 1377년이 되서야 로마로 돌아 왔다. 동시대에 살던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교황이 로마로 귀환하도록 돕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마침내 이를 성사시켰다. 줄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교황의 포로생활에 대한 비판도, 로마로 돌아온 데 대한 기쁨도 표시하지 않았다. 교회가 커다란 분열의 위기(1378-1417)를 겪었으나 줄리안은 그 모든 사건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지역 교회 책임자들의 부패 상황에 대하여도 아무 말이 없다. 그렇다고 줄리안이 무감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이 다를 뿐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무엇을 알리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3. 중세의 은수자의 삶
영어의 은수자를 칭하는 용어로 남성 은수자 (anchorite)와 여성 은수자 (anchoress)는 그리스 동사 '물러가다, 은퇴하다 (to retire)'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서 세상을 떠나서 은둔소의 봉쇄 구역에 철저하게 머무는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러한 삶은 4세기에 사막에서 은둔하며 살던 교부들에게서 유래한다. 그 목적은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4세기의 은수자들이 사막의 교부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일에 연계되어 살았다는 것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다는 점이다.
중세에 은둔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헨리 5세가 자신의 통치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성당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은수자에게 자문하고 조언을 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리치 시에는 은수자가 많이 살았고, 이런 은수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 도시를 위해서 축복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기꺼이 거룩한 남녀 은수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은수자들의 역할은 단지 영적인 도움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기도와 영적 지도는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되었다. 때로는 은수자들이 기도 이외에도 다리를 점검한다던가 수리하는 일을 하였고 길을 고치고 공공 사무를 보는 등 실생활에서 도움을 주었다.
은수자로서의 줄리안의 소명을 이해하는 데는 당대 어떤 사람들이 은수자의 길을 걸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은수자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은수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원자는 우선 주교나 수도회 장상에게 그 뜻을 알려서, 은수자로서의 소명을 식별하기 위해 주교나 수도회 장상의 면접을 받아야했다. 지원자는 무엇보다 물질적인 협조를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했고 자세한 조사를 받은 후에 공적 승인과 함께 은둔소에 들어가서 엄격한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은수자들은 일생 동안 은수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공식서약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하기를 권장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은수자는 협정 규칙(Ancrene Riwle)에 따라 은수자로서 사는데 필요한 단련과 영적 지도를 받도록 했고 이 규칙은 은수자의 삶에 필요한 통찰력을 제시하기도 했다.
은수자들은 두 명의 하인을 둘 수 있었는데 이는 사치가 아니라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둔 생활을 방해하는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며 생활 전반에 걸쳐 필요한 일을 거들고 협력했다. 줄리안도 그녀의 은수자 생활을 도와주는 여성과 함께 살았다. 오늘 날 에는 이들을 관리인이라고 부른다. 은수자는 우선적으로 독신과 정결의 삶을 살고자 서원한 사람이다. 갈멜 수도자와 같은 당대 수도자들은 수도원 내에서 살았으나 평신도로서 은수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수도원이나 교회에 인접해 있는 은둔처에서 살도록 허용되었다.
줄리안의 은둔소에는 두 개의 방이 딸려있었는데, 이 집은 줄리안 교회의 종탑 근처에 있어서 교회의 벽과 인접해 있었다. 이 집은 두 개의 창문이 나 있어 하나는 사제가 제대 위에서 미사 집전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용이하게 미사에 참석하며 일 개월에 한 번 정도로 성체를 모셨던 것 같다. 외부 손님들의 출입은 제한되었고 무질서하게 대화하는 것을 규칙으로 금하고 있었다.
줄리안이 살던 시대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50명 내지 그 이상의 은수자들이 노리치 시의 다른 장소나 교회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6세기까지 5명의 은수자들이 줄리안이 살았던 은둔소에서 줄곧 살고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현대인에게는 기도하는 소명이 특수한 부르심으로 예외적인 삶처럼 보일 수가 있겠으나 줄리안이 살던 당시에는 기도와 관상으로 일생을 헌신하며 사는 삶이란 그 어떤 형태의 삶보다도 으뜸가는 소명으로 보았다.
대교구 참사 위원이었던 올킨(A. M. Allckin)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주교좌 성당을 중심부가 되게 했던 한 시민이었다. 이 성당은 예술적인 작품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고 기도와 예배를 인간의 활동 중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필요한 인간의 활동으로 생각했던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당대의 은수자들은 현실적인 면에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에 참여했다. 은수자들에게는 세상을 향한 창구가 열려있어서, 그들은 오늘날의 사회사업가, 결혼 상담가, 정신과의사, 사제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의 일부분을 맡아서 했다.
4. 작품의 배경
영국의 신비주의는 14세기 말경에 절정에 달한다. 리챠드 롤(Richard Rolle, AD. 1290-1391)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적었고 특히 시로 썼던 신비가이다. 그의 『사랑의 불』은 쥴리안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워터 힐톤(Walter Hilton, 1395-1896)은 쥴리안과 같은 시대의 가장 영향이 컸던 수도승으로 심오한 내용을 담은 영적 담론을 썼다. 쥴리안의 책 이외에 당대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또 하나의 영적 서적으로는 저자 미상의『무지의 구름』이 있다.
영국에서 14 세기에 신비주의가 성행하고 환영받았던 이유를 질의하고 숙고해 본다면, 이는 역사적 질문이기 보다 수사학적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영어가 크게 발달했다. 초서(Geoffrey Chaucer)는 줄리안과 동시대 사람으로 영어로 글을 발표했다. 줄리안은 단 하나의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녀의 문장은 매우 우아하고 명료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시대는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것이 성행했고 종교적 사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특히 줄리안이 살던 놀포크는 반 교회적 움직임이 대단히 활발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교회의 권위자들은 신자들의 요청에 성의 없고 더디게 응답했다. 이 지역 갈멜회의 토마스 네터(Thomas Netter)는 콘스탄쓰 공의회에 참석하며 죤 휴스(John Huss)가 불에 타죽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는 공의회에서 교회 땅에 나쁜 씨가 자라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가 줄리안의 『계시』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줄리안이 계속해서 글을 쓰도록 허용했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줄리안이 안고 있는 위험을 경고했는데 네터(Netter)가 줄리안을 파문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존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고 그들 중에 몇몇 사람은 줄리안의 은둔소 앞 큰길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비록 줄리안이 담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러한 위기의 사태를 모두 감지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III. 줄리안 노리치의 영성
줄리안은 신비가이다. 신비가란 하느님에 대한 높은 지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메시지를 직접 받은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신비가들을 보통 사람과 분리시켜서 특수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상한 사람, 초월적인 인간들이 아니다. 신비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해 있어서 이를 민감하게 지각하고 주의 깊게 의식한다면 누구나 모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에 접할 수 있는 신비체험에 불림을 받게 될 것이다.
줄리안의 하느님 체험은 시간적으로 즉각적이고 공간적으로 밀착하여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줄리안은 스스로 자신의 종교 체험의 권위를 주장한다. 여기서 참된 종교체험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에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평가기준을 들어보기로 하자. 종교체험은 우선 자기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신앙전통 안에서 발생하고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종교체험은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기심이 없는 행동을 하도록 사랑스럽게 마음의 권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며,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내적인 권위로부터 흘러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1. 줄리안의 환시 체험
줄리안이 환시를 본 것은 교회의 전통에서 신비가들이 하느님 체험을 했던 다음의 세 가지 방법에 의해서이다.
첫째, 신체의 비전을 통해서 보는 환시이다,
즉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알았다. 즉 보고 듣고 때로는 냄새로 알았다.
둘째, 영적 비전을 통해 보는 환시이다.
영적 비전이라는 것은 그녀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말 해주는 환시이다.
셋째, 지적 조명을 통해서 보는 환시이다.
그녀의 지성이 빛에 의해 조명되어 하느님을 이해하는 환시이다.
신비가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체험을 알리는 일을 절실하게 열망한다. 줄리안의 경우 자신의 체험을 알리고자 하는 강박관념이 그 체험의 본질처럼 보인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녀가 받은 환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줄리안은 자신의 환시를 기록하면서 계속하여 메시지의 절박성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그녀의 말이 한 번에 전달되기를 열망했는데도 그 말들이 깨지고 부셔져나가면 그녀는 그 말들이 주게 되는 무게를 인내심을 가지고 이겨내야만 했다.
환시를 받기 이전에 줄리안은 하느님께 세 가지의 은혜를 선물로서 주실 것을 청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실제로 동참하여 그 고통에 깊이 참여할 수 있는 은혜였다. 줄리안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고통을 증거하기를 원했다. 둘째로 죽기까지 신체적인 병을 앓을 수 있는 것으로, 줄리안은 신체적 병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신체적 영적 고통을 청했다. 이런 태도는 당대에 유행했던 일반적인 신심행위 중의 하나였다. 셋째로 하느님의 선물로써 세 가지의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 은혜였다. 세 가지의 상처란 줄리안이 일생동안 느끼게 될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갈망하는 지향으로부터 느끼게 될 상처였다. 그녀는 처음 두개의 은혜는 조건적으로 청원했고 세 번째의 은혜는 조건 없이 청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신심 생활이 극도로 진지했음을 알 수 있다. 줄리안의 이러한 청원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는 은혜를 소망했다고 보여진다.
1373 년 5월 8일, 부활 제 3주일은 그녀가 삼십살 육 개월 되던 해로 그토록 소원하던 기도의 청이 들어졌다. 그녀는 칠일 동안 심한 병으로 죽도록 아팠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다시 소생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 또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안은 젊은 여성으로 하느님께 더 잘 봉사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 없이, "나는 마음을 다하여 내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렸다"고 적고 있다. 줄리안이 본당 신부님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는 순간,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그녀에게 십자가를 보도록 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당신의 창조주이며 구원자의 상징을 당신께 가져왔으니 이것을 보고 힘을 얻으십시오." 줄리안이 한 동안 죽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으나 그녀의 생명은 놀랍게도 회복되었다. "별안간 나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나는 전보다 좋아졌다."
새벽 4시, 새벽의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 첫 번째 환시를 체험했다. 죽어가던 줄리안은 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뜻밖에 예수의 가시관에서 흘러나오는 성혈을 보았다.
같은 환시에서, 갑자기 성삼위께서 내 마음을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면 거기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끝없는 기쁨을 체험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삼위일체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우리의 끝없는 축복이자 기쁨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이후 새벽 4시부터 오후 3시까지 15차례의 환시를 보았으며 낮에는 정지되었다. 그 날 밤에 1차례의 환시를 또 보았다. 이 환시는 그녀가 주님께 요청한 대로 선물로서 받았고, 그녀가 기도한 대로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것같이, 즉 그녀가 꼭 받아야 하는 하느님의 뜻인 것같이 주어졌다.
줄리안의 글에서 기록하기를 그녀가 고통을 당할 때 그녀의 어머니가 침대 곁에 있었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거기에 있었고, 그녀의 손을 들어 나의 눈을 감겨 주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 마치 내가 이미 죽었거나 또는 죽어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슬픔을 더 크게 하였다. 이러한 나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위한 나의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 줄리안이 환시를 받는 순간 의식이 깨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어둠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십자가상이 보였고 희미한 불빛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5시간 동안이나 탈혼 상태에서 15차례의 환시를 보았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다가오심과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환시였다. 그 때 그녀의 의식은 깨어있었고 자신이 병고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 밤, 그녀가 본 다른 환시 속에서 이미 본 환시들에 대한 의미가 상세히 설명되어 명확하게 해주었다. 이 16 차례의 환시를 기록한 것이 오늘 날 우리에게 알려진 『짧은 텍스트』이다. 이 환시는 주로 성 삼위와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 할 점은 줄리안이 은수자로서 기도하며 고독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 언제였나 하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줄리안이 환시를 본 후에 주님이 보여주신 엄청난 신비를 묵상하면서, 일생동안 주님과 친밀한 영적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 같다.
2. 줄리안의 하느님 표상
줄리안의 작품을 해설하는 학자들은, 신학자로서의 줄리안의 특성은 뛰어난 상상력에 있음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줄리안은 그녀의 영성에서 이와 같은 특징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줄리안은 삼위일체에 관한 상징에서 어머니이신 하느님, 예수의 모성을 현저히 드러내는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현대 신학의 쟁점이기도하다. 또한 그녀의 창조신학의 감성은 교회 안에서 소홀하게 다루어 온 생태신학의 감수성을 일깨워 주고 있어 환경이 날로 피폐해 가고 있는 지구의 보존을 염려하는 현대인들에게 생명을 낳고 보존하며 양육하는 모성적인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다.
1) 어머니이신 하느님과 어머니이신 예수님의 표상
남녀평등의 움직임이 활발해져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줄리안은 하느님의 아버지 표상에 대한 패러다임을 재고해 보도록 하는 초대를 하고 있다. 줄리안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놀랍게도 하느님의 여성성에 대한 강조로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의 모성 통찰에서 선구적이었던 줄리안은, 모성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개념으로 규정한다. 그녀에게 있어 하느님의 모성은 감싸고, 안고, 반기고, 포용하고, 우주적이고, 확장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중세 문화 전통에서 가정 안에서의 아버지는 권위, 벌, 두려움의 상징이며, 어머니는 친절, 온순, 자비, 보호의 상징으로서, 먹이고, 옷을 입혀주는 자의 대명사와 직결되었다. 줄리안은 전통적인 가르침의 폭을 넓혀서 하느님의 모성적인 표상을 당당하게 표현하였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모성적 표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줄리안은 창조 영성의 신비가 중에서 모성적 개념을 가장 풍요롭게 개발한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다정한 가슴으로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다. 이러한 비유는 구약과 신약 성서에도 가끔 나오는 표현이다. 예수 자신도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누룩을 넣어 빵을 만드는 여자라든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의 이야기로 여성을 비유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아서 품고 있는 암탉으로까지 표현하였다. 가부장적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은유들이 계속하여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줄리안은 이런 표상들을 통해 우리의 영적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삼위 일체적 속성에 대한 줄리안의 신학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에게 새롭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줄리안은 하느님의 모성을 삼위일체의 속성의 일부로 보고 있다. 여성성은 하느님의 부성을 조화롭게 보완해주며 모성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하느님의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표상은 성서만이 아니라 오랜 유대교 전통의 일부였다. 또한 가부장적인 중세 신학자들도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을 가끔 언급했지만 줄리안은 특별히 성체를 통하여 성자의 모성적(母性的)인 측면을 그 어떤 신학자들보다도 더욱 풍요롭게 발전시켰다. 성체는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고 새로 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모성과 결부된다. 긴 책의 52장에서 62장까지 11 개의 장에서 그녀는 하느님 안에 있는 부성, 모성, 주권이 하나로 합일되어 이루는 삼위일체의 일치에 관해 다루고 있다. 긴 책 58장과 59장에서 하느님의 모성성과 예수의 모성성의 표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 넘치는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지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스런 어머니가 되시며, 성령의 사랑과 전선하심이 융합하여 이 모두가 어우러져 한 분이신 하느님,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더욱이 나는 우리의 두 번째 위격에서 우리의 어머니이신 사랑스런 어머니의 실체를 보았고 이제 그 위격은 감각적으로도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실체로서, 또 감각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우리의 실체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이 실체를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위격은 본성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우리의 실체를 창조하는데 기초와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우리의 감각을 취하게 해주신 자비로운 어머니이시다. 그러므로 이 어머니는 우리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며, 그 분 안에서 우리가 부분들로 나누이지 않고 온전하게 존재한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큰 덕을 입고 성장한다. 그 분은 자비로 우리를 변혁시키고 회복시키며, 그 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실체와 하나 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이 자비로운 어머니는 우리의 실체 안에 머물며, 그의 사랑을 받으며 순종하는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악과 대치하는 선하신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원형을 지니고 있으며, 영원히 지속될 모든 감미로운 사랑과 더불어 그곳에서 모든 모성성의 기반이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로즈매리 류터는 하느님의 모성에 대한 줄리안의 탐구가 그녀의 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 특히 삼위일체의 위격적 하느님은 상호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인간과 더불어서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인간은 창조되었고 구원되었으며,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신 주 하느님과의 상호관계 안에서 온전하게 인간성을 회복했다. 이 두 번째 위격과 줄리안이 지혜로써 동일화되는 순간을 성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여성적 상징과 결부시키고 있다, 줄리안은 그리스도를 우리가 다시 낳음을 받아 새롭게 탄생하고 양육될 표본으로 본다. 그녀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자궁으로부터 출산한 아이를 자신의 몸으로 키워내는 어머니로 바라보기 위하여 그리스도 교의 전통적인 세례와 성체 성사를 인용한다.
줄리안이 하느님을 아버지이며 어머니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에 대해 깊이 있고 폭 넓은 이해를 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게 한다"(에페 3,18). 노리치의 줄리안이 모성을 통해 얻게 된 결론은 '섬김'에 있다. "어머니의 섬김은 가장 가깝고 가장 즐거우며 가장 확실하다. 모성적 섬김이 자연스럽기에 가장 가깝고, 사랑스럽기에 가장 즐거우며, 진실하기에 가장 확실하다." 그것은 여성의 출산에서 오는 고통과 모험과 용기를 내포하고 있다. 줄리안이 말하는 섬김은 자비의 섬김으로 모성의 '자비와 은총'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의 모성적 측면으로 돌아감은 바로 삶의 길인 자비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러기에 어머니이신 하느님은‘모든 지혜의 원천'이므로 현대인의 영적 목마름과 메마름을 풀어주고 살릴 수 있는 길은 모성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어머니의 섬김을 맛보는 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요, 이웃을 살리고 더 나아가 지구를 살리고 우주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2) 창조의 전일적인 영성: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의 표현
줄리안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만물이야말로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임을 이해했다."하늘과 땅과 만물이 위대하고 넉넉하며 아름답고 선하다.... 하느님의 선하심이 만물과 모든 복된 일을 가득 채우며 끝없이 흘러 넘친다... 하느님은 모든 선이고 모든 것 안에 있는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실체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도 보지 못한다. 이를테면 모두가 하느님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실체는 하느님 안의 피조물이다."
줄리안은 인류와 창조계, 몸과 영혼, 하느님과 감성의 경이로운 결합을 '직조'라는 말로 표현한다. 땅스러운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 몸과 혼의 '영광스러운 결합'에 대해 말하며, 우리의 거룩한 감성이 바로 창조의 순간에 시작된다고 밝힌다. "우리의 감성은 자연과 자비와 은총에 바탕하고 있고 우리의 감성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실체와 감성이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결합되어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차단되기는커녕 '우리의 감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과 땅스러움을 온정 깊게 대하고 조화시키며, 하느님은 실제로 피조물인 우리의 온전함을 회복하도록 구원해주고 지켜주는 힘이다. 줄리안은 우리의 땅스러움이 곧 거룩함이라고 명명하면서 거룩함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목욕과 같은 '우리 몸의 극히 단순한 자연적 움직임'이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게 되는 온전함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이 당신을 닮도록 창조해주신 우리 넋을 사랑하시므로 우리 몸의 어떤 단순한 자연적 기능 안에서나마 우리를 섬기기를 천시하시지 않는다." 중세의 이원론적인 사고에 젖어 살면서도 영과 몸을 분리시키지 않는 전일적(全一的)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줄리안에게서 현대인은 통합된 세계관을 배우게 되고 그녀의 진취적인 의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줄리안은 "우리는 땅에 속해 있기보다 더욱 하늘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이 지상에서는 우리가 그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대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는 그녀의 기록에서 하늘과 땅을 가르는 중세의 이원론적 영성을 드러내는 일면이 없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의 종말론적 기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보다는 하늘에 있기를 원하신다고 보았고 이 세상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다. 관상가들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본다고도 쓰고 있다.
줄리안의 저서는 작은 호도(hazelnet)의 비전을 담고 있다. 줄리안은 그녀의 환시에서 하느님의 표상으로 '친밀함', '집과 같은 느낌', '공손함'을 들었고, 강렬한 개인적인 사랑을 체험하였다. 동시에 줄리안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보존하시는 호도의 은유에서 창조물의 선함을 관상했다. 즉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나의 손바닥에 공같이 둥글고 호도보다 크지 않은 작은 것을 놓아 주셨다. 나는 그것을 쳐다보며, '이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다. 하느님께로부터 '그것은 피조물이다'라고 대답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너무 작아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호도가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같은 방법으로 존재한다... 이 작은 호도는 세 개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첫째 하느님이 그것을 만드셨으며, 둘째 하느님이 그것을 사랑하고 계시고, 셋째, 하느님께서 그것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드신 분, 돌보시는 분, 사랑하는 분은 내게 참으로 어떤 분인가? 내가 그분과 하나의 실체로 합일될 때까지, 내가 완전한 안식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는 내가 하느님과 너무도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어서 하느님과 나 사이에 어떤 피조물도 끼어 들 수 없을 것이다.
이 비전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신비가들이 이미 체험했던 내용을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은 창조된 피조물의 아주 작은 알갱이까지도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무한한 갈망에 의해서만 만족해하신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창조된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고 어느 것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아주 작은 것 안에서도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모든 것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다고 확신해야만 한다. 줄리안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은혜로운 비전에 의해 압도당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줄리안은 만물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관상했다."하느님은 자연의 참 아버지요 어머니이시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요 전지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이시다".
이러한 이유에서 줄리안의 창조 영성이 제시하고 있는, 우리 자신 안에 잠재해 있는 하느님을 닮은 보석과 같은 모성을 발전시킬 중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영성 신학자들은 역설하고 있다.
IV . 오늘을 위한 줄리안의 영성적 지혜
1.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에로의 초대
극도로 물질적이고 회의적이며 무신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줄리안과 같은 신비가에게 끌리는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 안에 내재하고 있던 깊은 갈망으로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모성으로써 이웃에게 봉사하려는 강렬하고도 무한히 확산되는 열망이 우리에게 전수되기 때문이 아닐까? 줄리안에게 있어 예수의 수난에 동참한다 함은 단지 수난사의 구절을 읽으며 회상하는 차디차고 추상적인 묵상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 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갈망하는 사랑이다. 창검에 찔린 예수의 마음과 그 분이 선호하는 관심에 애정을 가지고 일치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그리스도 교 역사상, 삶의 증거를 통해서, 순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소원했듯이, 줄리안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기를 청했다.
고통을 없애는 약들이 범람하는 시대, 아픔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약물을 남용하는 약물중독의 시대에, 줄리안이 죽을 때까지 신체적 병을 간절히 소망했던 태도는 현대인을 아연케 하며 혼란스럽게 하는 논지이다.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는 상반된 어리석음의 지혜일지 모른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리석음의 지혜와 같은 논리이다. 그녀는 몸소 어리석음의 지혜를 체험함으로써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려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줄리안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의 일상성 안에서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감으로써 일상의 지평을 넘어서려는 용기,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깊이 느끼고 더 풍성하게 나누고 사랑하려는 용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는 용기에 도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을 닮는 용기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줄리안은 환시를 본 후 20년 동안이나 그 신비에 대하여 묵상하였고 은수자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사는 용기를 보여주며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2. 풍요의 영성 :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줄리안이 살던 중세는 죄, 저주,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주제에 강박 되어 묶여 있었다. 줄리안은 이 비관론에 대해 하느님의 선하심, 사랑, 자비로 대응했다. 줄리안은 수년간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심판이나 영원한 벌이라는 두려움이 야기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용맹스럽게도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전적인 신앙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갈등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하느님에 대한 줄리안의 신뢰는 절대적 믿음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녀의 영성의 핵심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 메시지로 집약 될 수 있다. 그녀는 삶의 태도와 신앙의 전망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자유로운 자세를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이 모든 악들 위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집약되고 있다.
죄에 대한 줄리안의 태도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너무 강박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죄가 은총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강박관념은 은총보다 오히려 죄에 큰 비중을 두는 경향 마저 있다.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줄리안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이다. 우리가 우리의 결핍이나 죄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특히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큰 신뢰와 희망을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풍요의 영성이라고 해서 세계 공동체와 개인의 삶이 직면하고 있는 어두운 측면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삶을 충만하게 살려면 우선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난무하는 사회악에 나도 몸을 담그고 있고 내 안의 상처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시인해야만 한다. 현실 속의 초라한 나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가득히 채워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V. 결 론
역사는 중세를 암흑의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중세는 우리가 빛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만 했던 어둠의 과정이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풍성한 영성적 가치들을 발굴해 내었던 많은 위대한 신비가들이 바로 이 어둠의 세기에 살았다는 사실이 그 좋은 증거이다. 특히 노리치의 줄리안이 체험했던 환시를 담고 있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오늘 날의 현대인에게 밝고 따뜻한 빛을 선사하고 있다.
중세의 영성의 특성 중의 하나는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이원론의 대립으로 몸과 마음을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 남성과 여성을 분리시키며 상하의 체계를 구별하는 구조적인 폐단이 당대의 모든 가치체계를 지배했다. 이런 가부장적 가치관의 전통 속에서 줄리안은 어머니이신 하느님과 어머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거론했다.
'신은 죽었다'고 체념하며 스스로 신이 되기를 자처하는 현대인들, '감싸줄 사람'이 없이 혼자 자립하고자 발버둥치는 오만하고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줄리안은 하느님의 모성을 명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모성을 일깨워 하느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임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시대는 삶의 의미를 찾는데 목말라한다. 또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갈구하고 있다. 그런데 줄리안은 하느님 사랑의 『계시』를 통해 현대 인류에게 삶의 의미는 사랑에 있다고 가르친다. 줄리안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되돌아감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온전성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온전성을 회복하는 길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잘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믿음과 희망, 기도와 관상, 회심과 연민을 생활화하는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있다.
출처 : http://songsim.catholic.ac.kr/~cwrik/lab1.html
축일:5월13일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 Beata Vergine Maria di Fatima Blessed Virgin Mary Our Lady of Fatima
파티마의 성모 파티마의 어린이들에게 동정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것은 세계 제1차 대전 중인 1917년 여름이었다. 레이리아 교구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대개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또 소농이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들과 가축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도양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비록 가난했으나 순진했고 티없이 맑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루치아 도스 산토스는 10세이었고, 그녀의 나이어린 사촌 동생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가 곧 그들이다. 그들은 루치아의 책임아래 양을 쳤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즐겨 바쳤다고 한다. 1916년 여름에는 한 천사가 몇 차례 발현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1917년 5월 13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정오경, 한줄기 밝은 빛이 아이들을 비추었는데, 그들은 코바 다 이리아의 나무 위에서 찬란한모습의 어떤 부인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 첫 발현때, 그 부인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시면서, 매달 13일에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발현은 6월 13일과 7월 13일에도 일어났다. 네 번째 발현일인 8월 13일에는 어린이들이 지방 당국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코바 다이리아로 가지 못했으나, 19일에는 그 부인을 만났다. 9월 13일,부인은 전쟁이 끝나도록 로사리오를 바치라고 이르셨다. 끝으로, 10월 13일, 그 "부인"은 당신을 "로사리오의 모후"라고 알려 주시고,기도하고 보속하라고 다시금 이르셨다. 그날, 놀라운 천상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태양이 빙빙 돌면서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쳐박히는 듯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린이들은 첫 발현날인 5월 13일처럼 일찍이 그 곳을 향하였다. 약 3만 명의 대군중들이 어린이주변에 몰려 있다가 신비로운 이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코바 다 이리아에서 본 환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1930년 10월 13일이다. 레이리아의 주교는 오랜동안 조사 검토한 뒤에 고바 다 이리아에서 로사리오 성모 공경을 허가했던 것이다. 발현 얼마뒤에 두 어린이는 선종하였다. 발현은 보았으나 말씀은 듣지못했던 프란치스꼬는 1919년 4월 4일 선종했고, 동생 히야친따는 1920년 2월 20일에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유일한 생존자인 루치아는 수녀가 되었다.
1. 파티마의 메시지 파티마의 공적인 메시지는 루르드의 메시지와 거의 같다. 어린 아이들을 통하여 마리아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와 로사리오 기도 그리고 보속행위를 하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10월 13일의 말씀은 이렇다. "나는 생활을 개선하고, 죄로 인하여 우리 주님을 슬프게 하지말며,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도록 신자들을 권고하기 위하여 왔다. 나는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원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태도를 개선한다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비밀"도 일러 주셨는데, 루치아가 이중의 몇 가지를 전달하였다. 아마도 추측하건데, 머지 않은 장래에 또 다른 전쟁이 있으리라는 예언과 함께,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에 관한 공경이 주 내용인 듯하다. 그러나 루치아가 받은 마지막 비밀은 요한 23세 교황님께 맡겼다.
루르드에서처럼, 파티마의 "발현"은 수많은 순례자가 몰려들게 하였다. 1917년 여름부터 시작된 순례는 놀라운 숫자에 달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포르투갈인들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도 많았다. 1931년 5월 13일, 발현에 대한 교회의 공식 인정이 있은 다름부터는 순례자들이 수백만에 이른 것이다. 교황님들도 파티마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비오 12세, 바오로 6세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티마를 순례하고 기도하였다. 교황님들의 이런 관심이 순례자의 수를 더욱 많게 하였고, 발현 장소에 성전을 짓게 된 계기가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 한적한 곳에서, 마리아께서 어린이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금 묵상하며 마리아 어머니의 말씀을 실행하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2. 파티마와 교황
비오 12세 : 세상을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심. 1942년 10월 31일, 비오 12세는 파티마의 성모 발현 25주년을 기하여 모여든 순례자들에게 라디오 - 메시지를 보냈다. 성모님께 감사와 충성을 드리고 기도하라고 권하신 뒤, 교황은 세상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봉헌하신 것이다.파티마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1946년 5월 13일, 비오 12세 교황은 파티마 성모상 대관을 위하여 라디오 - 메시지를 보냈다. 여기서 교황은 "파티마의 장관"은 "티없이 깨끗하신 여왕이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인 자애로운 성심의 활동"이라고 하시고, 마리아의 끊임없는 보호 포르투갈에 내릴 것이라고 하셨다. 또 교황은 마리아가 천상적이며 우주적인 여왕이심을 찬양하시며, 파티마 발현의 중요성을 역설하셨다.
바오로 6세 : 인간 가족을 성모님께 봉헌하심.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제 3 회기 폐막식에서, 바오로 6세는 마리아께서 만국 공의회와 교회를 축복해 주시며, 이 세상의 끝없는 수평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복되신 동정녀께 열렬히 기도하자고 말씀하시고, 이 천상 어머니께 전 인간 가족을 봉헌하셨다. 마리아께 대한 봉헌의 쇄신을 당부하셨다 : 1967년 5월 13일, 코바 다이리아의 성모 발현 50주년을 기하여, 바오로 6세는 파티마로 가서 기도와 평화의 순례를 하셨다. 그때 교황은 복되신 동정녀 공경과 본받음에 대한 권고를 전 교회에 보내셨는데, 이 권고의 제목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이다. 여기서 교황은 어머니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에 대한 봉헌을 새롭게 하라고 모든 신자들에게 촉구하셨다.
요한 바오로 2세 : 파티마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된다. 1982년 5월 1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티마를 순례하시고, 성모 발현 65주년을 기념하였다. 이때 교황은 동정 마리아의 중재하심에 감사드리고, 세상의 만백성을 마리아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께 새롭게 봉헌하셨다. 1982년 5월 13일, 파티마의 성모 첫 발현을 즈음하여 교황은 발현장소에서 미사를 거행하신 후, 75세의 가르멜 수녀이며, 발현을 증언했던 세 어린이 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루치아에게 성체를 영하여주셨다. 이때, 교황은 파티마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된다고 역설하였다.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 1차 세계대전으로 온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때인 1917년, 포르투칼에서 루치아를 비롯한 3명의 어린이들에게 성모께서 6차례 발현하셨다.
찬란한 빛에 둘러싸여 나타난 성모 마리아, 죄인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의 기도를 많이 바쳐야 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남겼으며, 전쟁을 곧 끝내게 하겠다는 예언을 주셨다.(1년 뒤인 1918년에 예언대로 종전(終戰)이 됐다).
그런데 이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는 ’비밀의 메시지’로 유명하다. 제1의 비밀은 어린이들에게 지옥의 현장을 보여준 것으로 이는 곧 공표(公表)되엇으나, 제2의 비밀은 25년 뒤인 1942년 발표됐다. 내용은 "인류의 죄악이 계속된다면, 더 가혹한 전쟁(2차대전을 의미함)이 터질 것"이라는 예언과 "내 요청(신자들이 기도와 보속을 해야함)이 실천되지 않으면, 러시아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교회를 박해하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해 주신 것이다. 한편, 제3의 비밀은 성모의 요청으로 후대의 교황이 재량으로 공표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내용이 엄청나서인지 아직 비밀에 싸여 있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은, 이외에 ’태양의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발현시 7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10분단 태양이 기기묘묘하게 변하는 등, 광선의 잔치가 연출되었다. 1930년 10월 13일 교회는 공식적으로 발현 사실과 기적을 인정하였다.
파티마 성모상의 특징 양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하고 있으며, 합장한 손에 묵주가 걸려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했던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포르투칼 레이리아 교구의 작은 마을 파티마(fatima)에서 순박한 목동인 10세의 루치아(Lucia)와 루치아의 사촌 동생들인 7세의 히야친타(Jacinta)와 9세의 프란치스코(Frnacisco)에게 발현하였습니다.
발현 때마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흰옷에 흰 망토를 걸치고 묵주를 든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맨발로 구름을 밟고 선 모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로사리오의 여왕’이라고 칭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파티마 성모 발현 당시, 세계는 서방의 물질주의와 동방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대두로 인류는 큰 위험을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를 당신 성심에게 봉헌하고 매월 첫 토요일에 영성체 할 것을 요청하면서,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과 보속을 통해서만 세계 평화와 러시아의 회개 및 교회의 안정과 평온이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1917년 10월에 소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며, 1942년 10월에 교황 비오 12세는 전세계, 특히 러시아를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에게 봉헌하였습니다.
죄인들의 회개와 특히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보속할 것을 당부한 파티마 성모발현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지혜라 아니할 수 없고, 1991년 8월 소련공산당의 붕괴는 이 발현의 의미를 더해준다고 하겠다.
세 어린이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루치아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데 가르멜회 수녀님으로 지금도 세상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며 살고 있다.
2000년 5월 세 목동 중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가 교회에 의해 시복되었다.
*파티마의 복자 프란치스코 축일:4월4일. *파티마의 복녀 히야친따 축일:2월20일.
사적 계시와 성모 발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성모 발현은 성모 마리아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을 초월한 특이한 방법으로 어떤 특정인에게 나타난 현상으로 교회에서는 여러 곳의 성모 발현과 그 발현 때 이루어진 사적(私的 )계시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사적(私的) 계시는 공적(公的) 계시의 진설성을 확인하고 재조명할 뿐만 아니라 변천하는 시대의 특수 상황에서 신앙이나 윤리에 관한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조적인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적 계시가 진실한 것이 되려면 언제나 성서와 전승 및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하고, 또 그것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주고 하느님의 영광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사적 계시 및 이에 결부된 신비 현상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때 흔히 오류나 기만에 빠져 신앙 생활에 큰 해독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때 전해지는 메시지가 바로 사적 계시에 해당합니다.
이 사적 계시의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흔히 기적이나 신비 현상 등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들이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교회 역시 그 메시지들이 복음을 대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의 어떠한 메시지라도 그것이 공식적인 교도권의 교의에 부합되어야만 진정한 사적 계시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 CONSTITUTIO DOGMATICA DE DIVINA REVELATIONE DEI VERBUM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완성하시다 4.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신 후, “마지막 이 시대에 와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브 1,1-2).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인간 가운데 사시며 인간에게 하느님의 내면을 알려 주심으로(요한 1,1-18 참조) 모든 인간을 비추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인간들에게 파견되신 인간”3)이시고, 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며”(요한 3,34),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신 분이시다(요한 5,36; 17,4 참조). 그래서 그분을 보는 이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9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현존과 출현으로 말씀과 업적, 표징과 기적으로 특별히 당신의 돌아가심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심, 마침내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계시를 완수하시고 하느님의 증거로 확고하게 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암흑에서 구원하시며 영원한 삶으로 부활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인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1디모 6,14; 디도 2,13 참조) 어떠한 새로운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다 5.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을(로마 16,26; 로마 1,5; 2고린 10,5-6 참조)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4)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그분께 자유로이 맡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이로써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 회개시키시고 마음의 눈을 여시며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 같은 성령께서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항구히 신앙을 완성시켜 주신다.
계시 啓示 영어 divine revelation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인류를 위한 당신의 구원계획을 드러내시는 것.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된 진리의 몸체(’신적 계시’)와 특히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계시하신 과정을 구분하기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를 완성하시고, 계시가 선포하는 것을 하느님의 증거로 확고하게 하셨다."(「계시헌장」 4항) 이 하느님의 계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특별히 교도권을 통하여 계시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에 전수하는 일이다. (교리서 74-79)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저자: 요제프 라칭거(신앙교리성 장관.추기경)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2000년 6월 26일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에 관한 ’파티마 메시지’(The Message of Fatima)"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작성한 ’신학적 해설’ 부분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신학적 위치 그리고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에 관한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파티마 메시지’에 실린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에 관한 내용을 널리 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 신학적 위치 교회의 가르침은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를 구분한다. 이 두 가지는 차원과 본질이 다른 것이다. ’공적 계시’라는 말은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행위를 일컬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모두 그 문학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계시’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점차적으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시며, 마침내는 직접 사람이 되시어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당신께 이끄시고 결합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적 통교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생명수여 과정의 문제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하느님 신비에 대한 사고와 이해에 관계되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이는 인간의 이성은 물론 인간 전체를 포함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역사 또한 하나이다. 계시는 언제나 유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곧 당신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신약성서에 선포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가 완성됨으로써 끝이 났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계시의 궁극성과 완전성을 설명하려는 뜻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을 인용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실 다른 말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 아드님 전체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예언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당신 아드님 안에서는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유일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그리고 한 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다시 그분의 말씀을 문제시하려고 하거나 또는 어떤 환시나 계시를 바란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 눈을 돌리지 않고 그분과는 다른 것이나 어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가 그리스도와 신약성서에 기록된 그분께 대한 증언으로 완성되었으므로, 교회는 교회 역사의 이 특별한 사건과 그것을 보장하고 해석하는 성서 말씀에 의지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회가 이제 과거만을 바라보며 단조로운 되풀이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계시가 완결되었다고는 하여도 그것이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이다."(66항). 사건의 유일성과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 교회가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하신 고별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는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이끄시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6, 12-14)하고 말씀하셨다. 한편 성령께서는, 이전에는 전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밝혀 주시는 안내자로 활동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무한한 넓이와 깊이이다. 다른 한편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에서 그 무한한 깊이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 무한한 깊이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 대 그레고리오의 심오한 말을 인용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읽는 사람은 더불어 성장한다."(94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고 이로써 말씀이 성장하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지적한다. 이는 곧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로써,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식을 통하여 쌓이는 경험으로써, "주교직 계승을 통하여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사적 계시’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적 계시란, 신약성서의 완성 이후에 있었던 모든 환시와 계시를 일컫는다. 파티마의 메시지도 이렇나 사적 계시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가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불과한 것이다."(67항). 이로써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여진다.
1. 사적 계시의 권위는 결정적인 공적 계시의 권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다. 공적 계시는 신앙을 요구하며, 사실 하느님께서는 공적 계시 안에서 인간의 언어와 활기찬 교회 공동체의 중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믿음이나 신뢰나 소신과는 다르다.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확신은 내가 진리 자체와 접하고 있음을 보장해 준다. 이것은 인간적인 이해 방식을 통한 입증을 초월하는 확신을 주며, 나는 이러한 확신 위에 생을 설계하고 죽을 때에도 나 자신을 맡기게 된다.
2. 사적 계시는 이러한 신앙을 돕는 것이며, 결정적인 공적 계시로 나를 이끌어 줄 때 그 신빙성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된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 추기경은 뒤에 시복식과 시성식의 규범이 된 그의 고전적인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톨릭 신앙의 동의는 이렇게 승인된 사적 계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이러한 계시는 신중함이 요청되는 인간적인 동의를 추구한다. 이는 이러한 계시를 가능하고 신빙성 있는 신심으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플랑드르의 신학자 E. 다니스는 사적 계시에 대한 교회의 승인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간단히 진술한다. 그것은 신앙이나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메시지, 합법적 공표, 신자들이 그 계시를 신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교회 권위의 허가이다. 그러한 메시지는 복음을 이해하고 특별한 시점에서 복음을 더 잘 실천하는 데 참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계시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사적 계시는 도움이 되라고 제공하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적 계시의 진실성과 유용성의 기준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지향하는가이다. 사적 계시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또 다른 더 나은 구원 계획으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시는 분이지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말은 사적 계시가 새로운 강조점을 제시하지도, 새로운 신심 형태를 탄생시키지도, 오랜 신심 형태를 심화하거나 전파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변함 없는 구원의 길인 믿음과 바람과 사랑이 커 가야 한다. 사적 계시는 흔히 대중 신심에 길을 열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성체 성혈 대축일과 예수 성심 대축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적 계시가 전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관례가 전례와 대중 신심의 관계 안에서 나타난다. 전례는 기준이며 교회 전체의 살아 있는 예법으로서, 복음에서 직접 자양분을 얻는다. 대중 신심은 하나의 표징이다. 곧 신앙이 일상 생활 속에 파고듦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징인 것이다. 대중 신심은 신앙 ’토착화’의 가장 우선적이고 근원적인 형태이다. 대중 신심은 언제나 전례에서 갈 길을 찾고 방향을 잡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신앙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적 계시에 대하여 처음에는 불가피한 다소 부정적인 설명에서 시작하여 점차 긍정적인 경위로 넘어 왔다. 사적 계시를 성서와 관련하여 올바르게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적 계시는 어떠한 신학적 범주에 드는가? 보존된 성 바오로의 평지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 곧 신약성서 본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1데살 5, 19-21)하고 말한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예언의 은사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조사하여야 하지만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성서적 의미의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하는 사람은 미래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뿐이다. 진정한 예언자는 의지와 이성을 일깨우고자 호소하며, 하느님의 뜻을 현재에 대한 암시와 요구로서 선포한다. 이러한 경우에 미래에 대한 예언은 이차적인 중요성을 띤다. 중요한 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결정적인 계시의 실현이다. 예언의 말씀은 경고나 위로 또는 두 가지 모습을 다 띤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와 ’시대의 징표’의 범주 사이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새롭게 조명한 어떠한 연계성이 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루가 12, 56)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시대의 징표’ 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로 이해되어 한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의 빛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는 것은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승인한 사적 계시에서 - 파티마의 계시도 마찬가지이지만 - 핵심은 이것이다. 곧 그러한 사적 계시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르게 부응하도록 도와 준다는 것이다.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 이 성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사적 계시의 신학적 위치를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파티마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심리학적) 특징을 간단하게마나 설명은 할 필요가 있다. 이 영역에서 신학적 인간학은 자각 또는 ’환시’ 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곧 의식이 있는 환시로서 신체적인 외적 지각, 내적 지각 그리고 영적 환시(visio sensibilisimaginativa - intellectualis)이다. 루르드, 파티마, 그 외 여러 곳의 환시에서 그것은 일반적이고 외적인 의식 지각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보이는 모습과 형태는 예를 들어 나무와 집처럼 어떠한 공간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파티마의 첫째 ’비밀’에 묘사된) 지옥의 환시나 셋째 ’비밀’에 묘사된 환시와 관련하여 볼 때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다른 환시들에서도 매우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같이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본 것이 아니고 ’환시를 본 사람들’ 만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더욱 고차원적인 신비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영상이 없는 마음속의 ’환시’와 관련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중간 범주, 곧 내적인 지각이다. 환시를 보는 사람에게는 이 지각도 물론 감각의 외적인 현현과 맞먹는 현존의 힘을 가지고 있다. 내적 환시는 주관적인 상상의 표현에 불과한 환상과는 다르다. 내적 환시는 영혼이, 감각을 초월하는 것,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내적 감각’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내적 환시는 영혼에 와 닿는 실제적인 ’대상’과 관계가 있다. 물론 이 ’대상’이 우리의 평소 감각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적인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 깨어 있음은 외적인 실재와 영혼을 채우고 있는 오만가지 생각과 표상(image)들의 강한 압력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인간은 순전히 외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에 이끌리며 실재의 더 깊은 차원과 접하고,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이러한 발현의 주된 수신자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혼은 아직 혼란을 겪지 않았으며, 그들의 내적 지각 능력은 아직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호산나!"하고 외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3절)라는 시편 8의 말씀으로써 대응하셨다(마태 21. 16참조)
’내적 환시’는 환상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되고 유효한 확인 수단이다. 그러나 내적 환시 또한 한계가 있다. 외적 환시에서도 주관적인 요소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해석 작용을 하는 감각이라는 여과기를 통하여 보게 된다. 이것은 내적 환시의 경우에 더욱 분명하다. 특히 그 자체가 우리의 지평을 초월하는 실재인 경우에 그러하다. 환시를 보는 주체는 더욱 강력히 몰입하게 된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 안에서, 그에게 가능한 표상과 인식의 형태로 본다. 내적 환시의 경우에 해석 과정은 외적 환시에 비하여 훨씬 더 광범위하다. 발현하는 것의 형상을 만드는 데 본질적으로 그 주체가 가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능력과 가능성의 한도 안에서만 그 표상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시는 다른 세계에 대한 단순한 ’사진’이 아니며, 지각하는 주체의 잠재 능력과 한계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성인들의 모든 위대한 환시에서도 입증되며, 물론 파티마 어린이들의 환시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묘사하는 표상은 결코 단순한 환상의 표현이 아니라, 더욱 높고 내적인 기원을 실제적으로 지각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시를, 마치 다른 셰계에 드리워진 베일이 일순간 벗겨져서, 우리가 어느 날 하느님과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될 때 보게 되기를 희망하는 그 하늘나라가 순수한 실체로 나타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표상들은, 말하자면, 높은 곳에서 오는 자극과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 곧 환시를 본 어린이들의 능력이 종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시를 묘사하는 언어는 상징적이다. 이에 대하여 소다노 추기경은 "(환시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의 세부 사항을 사진처럼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게 연속되고 지속되는 시간을 통하여 펼져치는 사건들을 한 가지 배경을 두고 종합하고 집약한다."하고 말하였다. 한 가지 표상 안에 시간과 장소를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환시의 모든 요소가 틀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환시이며, 세부 사항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진 표상을 바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표상의 중심적인 요소는 그것이 그리스도교 ’예언’의 초점인 것과 일치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그 핵심은 환시가 하느님의 뜻에 대한 권고와 길잡이가 되는 곳에서 발견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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