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4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2021.06.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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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정체성에 맞갖는 생활 태도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적잖이 도전이 되는 말씀들이지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38)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지켜온 규범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정도로 벌을 주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공동체적 징벌 방식입니다.(탈출 21,24-25 참조)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39)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익숙한 체벌 방식에 도전장을 던지심으로써, 당한 만큼 갚아주어야 공평하고 정의롭다는 의식에 균열을 일으키십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과 대립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의"에 "용서"를 입히고 "희생"을 더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강화하자는 격려입니다.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 겉옷까지 내주어라. ...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 주고 ...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지향은 참 근사하고 멋지긴 한데, 제자들이나 우리 입장에서는 갈수록 태산처럼 무겁습니다. 완전히 바보로 전락하라는 뜻일까요? 안 그래도 호시탐탐 발목을 잡으려 노리는 세상의 올가미에 그냥 호구가 되라는 뜻일까요?
하지만 원래 그리스도인은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은 4세기 초 이전까지 신앙은 박해와 죽음의 전주곡이었지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믿는다는 것'은 스승 예수님이 그러셨듯 목숨까지 내놓는 투신이었습니다. 실제로 무수한 이들이 순교로 신앙을 증언하였지요.
그리스도인은 가난했고 힘도 권력도 없었으며 공격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모함을 받아 변두리로 밀려나고 숨어서 신앙을 지켰지요. 예수님께서 그러셨기에 그분을 흠모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모든 멸시와 가난, 모욕과 무시를 견디고 하느님 나라를 꿈꾸면서 지금 여기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 애쓴 이들이 바로 우리 신앙의 뿌리지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바로 그런 처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2코린 6,1)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2코린 6,4)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일행을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이라 칭합니다. 멋진 호칭이고 매력적인 정체성이지요. 이 신원은 스스로 지어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인정하셔야 하고, 그 자신도 뼛속까지 수용하고 투신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환난, 재난, 역경, 매질, 옥살이, 폭동, 수고, 밤샘, 단식"(2코린 6,4-5)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이 겪는 일상은 이렇습니다. 듣기에도 불편한 이 현실이 그들과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몸소 실현하신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영광과 모욕, 중상과 칭찬이 매한가지입니다.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
당시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들, 그리고 용기 내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옵니다. 그들은 사실, 세상 눈에는 모든 걸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는 비참한 신세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소유한 이들이지요. 이 말씀은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라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를 떠올려 줍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이에게는 사람 사이에서 바보가 되건 호구가 되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해서 따지고 경계하고 방어하려 든다면 받아들이기 참 어려운 상황이지만, 사랑의 길을 가는 중에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면 감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토당토 불편하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너무 멀어진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정받고 대접받는 데 익숙하다면, 더 많은 걸 탐하고 누리고 있다면, 가난한 형제들이 불편해서 피하고 싶다면, 타인 위에 군림하고 멸시하는 우월감이 습관이 되어버렸다면 아무래도 더 많이 불편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그리스도인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으라고 우리를 흔드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섬기며 나눔과 희생으로 스승의 뒤를 따르고 있다면 자신이 받은 세례가 적어도 인생의 장식품이 아니라는 증거일 겁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족하나마 우리의 진실한 선택과 겸손한 헌신이 우리가 누구인지 증언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증거할 겁니다.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며 주님을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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