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8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1.06.2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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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맺는 관계성의 척도를 알려 주십니다.
"스승님,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 8,19)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씀드립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나름 감동을 받은 걸까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욕이 가득해 보이지요. 예수님의 율법 준수 여부를 날 세워 살피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좀 달라보이기도 하고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하지만 용기와 결기 충만한 그의 고백은 아직 말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지요. 지식 위주로 살아오며 기득권이 몸에 밴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는 일의 실상을 미리 알려 주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상과 감상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만, 주님을 따르는 일은 아무말 잔치가 아닌 치열한 투신이니까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좀 모호합니다.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이에게 "따름의 순간은 지금!"이라고 강조하신다는 건 알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주체와 대상을 "죽은 이들"이라 규정하고 계시니까요.
그 제자의 아버지가 당장 세상을 떠나 장례가 시급한 상황일 수도 있고,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마지막 예를 치른 뒤 제자단에 합류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일이 그 모든 인간적 도리보다 우선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
이미 죽어 묻힌 이들, 그리고 육으로는 살아 있으나 죽을 운명을 지니고 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살아 있을 때 미처 하느님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 무지에서건 고의건 영원한 생명을 거부한 이들이지요. "죽은 이들의 장사"는 구원의 길 바깥에 머무르길 고수하는 이들끼리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 주님께 간청하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려 줍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주님은 당신에게까지 들려온 소돔과 고모라의 원성을 "알아보아야겠다"(창세 18,20-21)고 하셨을 뿐인데, 아브라함이 먼저 심판의 의도를 넘겨짚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읽은 걸까요? 아브라함은 겸손을 잃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주님을 만류합니다. 아브라함과 주님의 대화는 흡사 흥정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
의인 쉰 명의 존재를 가정해서 시작된 이 대화는 열 명이 될 때까지 핑퐁게임처럼 반복적으로 오갑니다. 감히 주님께 "공정"을 운운하는 아브라함의 용기도 놀랍거니와 주님의 인내와 겸손 또한 경이롭습니다. 주님이 '아브라함보다 더,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고 싶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징벌 앞에서 누가 말려주길 간절히 바라시는 마지막 사랑과 자비가 느껴집니다.
아브라함과 주님의 대화는 매우 상호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심판자와 인간이 서로에게 자신의 뜻을 개방하고, 간청하고, 수락하며 영향을 주고 받으니까요. 심지어 말이 자꾸 바뀌어도 역정내시지 않지요. 우리의 전구 기도가 진솔하고 겸손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 염려와 방향을 같이할 때, 이처럼 주님의 마음도 돌려세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단순한 말을 넘어 그분 마음과 상호적으로 통하고 교류할 때 그분과 우리의 관계성이 심화됩니다. 또 역으로 관계성이 깊어질 때 통교 또한 역동적이 되지요. 기도의 진정성은 누구보다 주님께서 가장 잘 아십니다.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진정 그분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입'이나 '소리' 이전에 '마음'과 '지향'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과 결심, 전구의 기도가 아무말 잔치가 아니라 진언의 통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마음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마음을 듣고 겸손과 용기를 다해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도 기꺼이 인내와 겸손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겁니다. 마음과 지향이 통하면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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