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2021.06.30.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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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도 무엇을 선택할지 물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다다르신 예수님 앞에 마귀 들린 두 사람이 마주 오며 외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당장에 알아보고 경계합니다. 어둠은 빛과 섞일 수 없고 악은 선과 화합할 수 없으니까요. 빛이신 분이 다가오시자 그들은 지레 겁먹고 예수님을 밀어내려 합니다.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마귀들이 자청해 들어간 돼지떼가 모두 물속에 빠져 죽자 고을 사람들이 놀라서 모여듭니다. 두렵기도 하거니와 재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마귀에게 시달리던 이가 온전히 회복되어 더 이상 고을에 위협이 되지 않게 되었으니 형제를 얻은 셈이지만, 그들에게는 두 사람의 안위보다 죽은 돼지 떼로 인해 입은 손실이 더 크고 중했나 봅니다.
구원은 간절히 갈망하고 바라는 이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지만, 재물과 권력, 지위와 인맥 등 다른 보물을 섬기는 이에게는 그다지 급할 것 없는 부차적 장식품 정도인 듯하지요. 내 재산의 티끌 하나라도 건드리면 악의 축으로 몰아세우고, 정치나 사회 제도조차 자기 재산 관리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세태는 이미 너무 흔해서 악이라고 인식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주러 오셨어도, 아무리 존재 안의 악을 몰아내고 선으로 채워주시려 해도 완고하게 "당신과 제가 무슨 상관이냐?"고 거부한다면 구원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공동체가 그간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게 되더라도 손해에 대한 분노가 감사를 압도하면 결국 빛이신 분께 "떠나 주십시오" 하게 되겠지요.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두 아들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언짢아 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창세 21,12)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을 현대적 시각과 가치관으로 읽을 경우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에 맞닥뜨립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 사라에 의해 아브라함의 아이를 갖게 된 하가르가 이사악 출생 이후 비정하게 내쳐지는 이 장면 또한 우리를 적이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하가르와 이스마엘의 생명을 귀하게 돌봐 주시고 함께 계시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신다는 약속으로 일화가 마무리 지어지면서 위안이 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가르와 사라의 관계를 사도 바오로의 서간 내용과 병행하여 해석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갈라 4,24-31 참조)
하가르가 "이집트 여자"라는 사실 역시 이런 우의적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살이를 하던 곳이었고, 광야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되돌아가고픈 안전지대로 미화된, 유혹의 올가미를 상징하지요.
아브라함은 마음이 언짢으면서도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인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대목이지만, 사도 바오로처럼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선택이라 본다면 분명 냉엄할 정도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복음 속 등장 인물들은 거듭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합니다.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 두려운 이유는 재물이나 이기심, 자기중심성 등 세상 것이 더 좋고 가치롭기 때문이겠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매번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주어지지요. 물질적 세속적 현실적으로 득이 되는 것은 주님의 선물로 여기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와 상관 없으니 그냥 떠나 주시길 바란다면 그리스도교는 신앙이 아니라 기복적 취향일 뿐이겠지요.
관대하고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포용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명백하다면 때로는 손해가 되더라도 단호히 식별하고 의탁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속 가다라인들은 그리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는 열린 결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6월의 마지막날, 한해의 절반을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반기를 결산하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선택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물질적 이익보다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붙잡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시지 않도록 꼭 붙잡으십시오. 그분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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