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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4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21.07.09.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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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길 떠나는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잘 드러난 말씀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며 보호와 가르침을 받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직접 세상과 부딪히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선량하고 호의적인 이들도 물론 많지만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어둠의 세력 또한 반드시 존재하지요.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사도들에게는 슬기와 순박함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권모술수나 잔꾀가 아닌 "지혜", 그리고 무지나 아둔함이 아닌 "순박함"입니다. 예리하면서 부드럽고 단호하면서 포용적인 다가섬과 소통은 상대의 귀를 열고 마음을 두드리며 등짐의 무게를 덜어 주지요. 성령께 의지할 때 발휘되는 사도적 자질입니다.


"걱정하지 마라."(마태 10,19)
"피하여라."(마태 10,23)
복음을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까지 박해하고 해치는 이들과 맞닥뜨리더라도 주님께서 보내신 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지도 않습니다. 그때 필요한 언변은 아버지의 영께서 알려 주실 것이니 있는 힘껏 믿어야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제1독서에서는 야곱이 이집트에 들어가 요셉을 만나는 대목입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창세 46,3-4)
요셉의 소식을 듣고 채비를 차리는 야곱 안에 떠오르는 여러 감정들을 하느님께서 너무 잘 헤아려 주시지요. 죽었다고 생각한 최애 아들의 소식에 기쁘기 그지없으면서도, 하느님 축복으로 키워온 한 가족 공동체가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이방 민족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일도 만만치않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당장이야 요셉의 치적으로 이집트인들이 호의적일 수 있지만, 혈연이나 종교, 지향에서 공통분모가 없는 이들 사이에서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잇권 관계이니까요.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데리고 올라오실 때까지 사백삼십 년이란 시간이 걸립니다.(탈출 12,40 참조) 그 사이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동행과 현존을 어떻게 체험하고 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극한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분은 반드시 오셔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주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화답송)
이스라엘 집안은 주님 말씀을 믿고 대 이주를 감행합니다. 우리가 알기에도 흠 많고 탈 많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의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결단과 떠남이 오직 믿음이란 나침반에 의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의탁하는 이들을 주님은 결코 외면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체험이 될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이를 증거하고, 우리 삶의 구비구비마다 새겨진 각자의 파스카 여정이 또한 증명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우리 저마다에게 주어진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선을 바라고 진리를 추구하며 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수록 어둠은 더 기승을 부리고 탐욕과 절망의 카드를 번갈아 내밀며 끝 모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악에 익숙한 세상은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이들을 이물질처럼 불편해하기에 좁은 길을 가는 이에게는 인내가 더더욱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입니다. 이 말씀들로 용기를 얻고 새로운 발걸음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