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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4주간 목요일 -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2021.07.0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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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 자세를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이르십니다.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복음 선포와 치유, 되살림, 정화, 구마 등의 활동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이 아님을 일깨워 주시는 겁니다. 애초에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 성자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나누어 받아 수행하게 된 것이니까요.


"지니지 마라."(마태 10,9.10)
예수님은 사도들이 이것저것 주렁주렁 챙기지 말고 그저 홀가분하게 떠나길 바라십니다. 교통이나 운송, 치안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당시로서는 만약을 대비한 돈, 보호를 위한 의복, 안전을 위한 지팡이 등은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지만 다 내려놓고 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자기 것이 없어야 하느님의 보호를 깨달을 수 있지요. 가난하기 때문에 하느님 섭리 앞에 겸허히 설 수 있고, 기대하지 않았던 이에게 제공받는 것에 대해 고마운 줄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사심없이 나눌 수도 있게 되지요. 자신이 빈 몸임을 아는 이야말로 거저 받은 것을 기꺼이 거저 줄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요셉과 이복 형제들 사이의 화해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창세 44,18)
요셉이 벤야민만 이집트에 종으로 남기고 돌아가라고 하자 유다가 나섭니다. 오늘 미사 독서 대목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유다는 벤야민 대신 자기가 남아 종이 되겠다고 하지요. 노쇠한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에 이어 벤야민마저 잃게 되면 삶의 의기마저 꺽이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창세 44,33-34 참조)


한때 아버지가 편애한 형제를 시기하고 해치려 했던 형제들이 이제는 오히려 아버지의 편애를 인정하면서 자신을 희생하여 그 사랑을 지켜 주려 합니다. 신분을 감춘 요셉의 혹독한 단련으로 연대의식이 생겨난 걸까요? 이제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밀어넣을 때의 그 형제들이 아닙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는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드디어 요셉이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형들과 자기 사이에 있었던 고통의 흑역사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버림받고 미움 받았던 상처를 하느님의 시각,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통찰하고 승화한 것이지요.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발달심리학 차원으로 보면 어려서부터 받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형제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렇게 사랑 받은 기억이 그를 더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게 했을 수도 있지요. 거기에 더해 요셉이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과 함께 계시면서 지혜와 힘을 주시고 돌보아 주신 하느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요셉은 자기가 받은 상처를 더 큰 악으로 앙갚음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와 사랑으로 되돌려 줍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보호의 기억, 그리고 감사가 사람에게 받은 고통을 압도하고 초월했습니다. 자기가 누린 모든 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아는 이는 이처럼 벌거벗은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겸허히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는 우리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파견됩니다. 꼭 거창하게 어디 선교지를 가지 않아도,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파견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누리고 받은 모든 것을 제 것으로 착각하는 이는 늘 자랑과 공치사로 자기 영광의 바벨탑을 쌓기 바쁘지만,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은 이는 내어주고 나누기 바쁠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뭔가 남들보다 조금 더 주셔서 그만큼 윤택하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았다면 더,더,더 나누라고 미리 채워주신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지요.

삶에서 우리가 받은 사랑과 보호와 위로, 그리고 상처와 고통과 눈물 모두가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통찰되고 승화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 모두가 우리를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며 지혜로운 하느님 사람으로 성장시켜 줄 것이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평화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히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