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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복되신 동정 마리아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년 7월 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2021.07.2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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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 나라가 어떻게 시작해 완성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시작이 너무 작고 미약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일에 골몰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들의 눈에는 감추인 듯 드러나지 않지요.

그런 씨앗이 흙과 물과 양분을 만나면 어떤 풀보다 크게 자랄 싹을 틔웁니다. 새들도 깃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나무로 자라서 그 잎은 채소가 되고 열매는 향신료가 되지요. 눈에 띄지도 않을 크기의 씨앗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입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또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은 음식에 섞는 첨가물로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곡식과 섞여 물과 온도의 조건이 갖춰지면 빵도 부풀리고 술도 만들지요. 누룩은 그 자체로 남지 않고 녹아 버리지만 타자와 섞여 그 가치를 배가시켜 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신 대목입니다.

"그 무렵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시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탈출 32,15-16)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을 지낸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계약의 증언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판을 마련하셔서 그 위에 "손수" 새기셨다고 하지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리고 이 계약을 그분이 얼마나 설레이며 열망하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일련의 관계성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계명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일상의 삶과 신앙 생활에서 지키라고 손수 백성에게 내리신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모세가 받아 온 십계명 안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지들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계명은 백성을 옭죄고 규제하는 올가미가 아니라 '하늘 나라'라는 완성태를 품고 있는 선물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탈출 32,31)그런데 모세가 백성을 떠나 하느님 앞에서 지낸 사십 일의 부재 기간이 이스라엘에게 너무 길었던 걸까요? 그들은 이 선물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신을 만들고 그 앞에서 날뛰고 맙니다.

"자신들을 위하여"이것이 우상의 특징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맞추어 그분을 닮아가다가 종래에 그분과 일치하는 길이 신앙의 영적 여정이라면, 우상은 자기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재단한 맞춤형 신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신의 자리에 놓기는 해도 실은 자신들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요.    

우상은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 자리를 꿰어찬 재물과 권력, 정보와 지식, 외모와 장수는 신앙의 눈에 그저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지요.

반면 십계명이라는 선물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보장합니다. 하느님 자녀로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다 보면, 겨자씨처럼 또 누룩처럼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늘 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이 세상 한가운데서 완성되어 가는 겁니다.

하늘 나라와 우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늘 나라는 잇속만 따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약한데다 느리기까지 해서 특히 현세적 삶에 능한 이들에게는 매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제 맘대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 따분하고 성가시기까지 하니 세상을 아우를 비전과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딱 찬밥 신세일 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십계명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비록 나약한 죄인이어도 하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은 여기 걸려 넘어지고 또 내일은 저기 걸려 주저앉으면서, 번갈아 삐걱대고 절룩거리면서도 미숙하나마 마음 속에 간직한 사랑 덕분에 하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현재의 미소하고 불완전한 모습에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룰 하늘 나라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에는 희미해보여도 하느님은 그걸 선명히 보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계시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대가 곧 완성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니, 함께 힘 내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