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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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선 우리의 운명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다른 예언자 중 하나라고 여겼다고 하지요. 제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각자의 마음속에 맺혀진 상을 직면하고 구체화하는 때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 지식과 믿음과 사랑을 총동원해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베드로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곧바로 사람의 아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요. 이에 놀라고 실망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반박했다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 신원에 대한 각자의 의식은 그분 소명에 대한 이해도와 직결되는데, 그 중심 키워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고통은 싫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가난은 지긋지긋하며, 예수님을 닮고 싶지만 작고 낮게 섬기는 일이 딱 질색이라면 혹시 제자들은(우리는) 예수님 아닌 어떤 허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7)
주님의 종은 세상이 퍼붓는 온갖 모욕과 수모를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거역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역이나 그런 일을 당하는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일 수는 있지만 당하는 주님의 종 자신과, 그와 함께 견디어 내시는 주님께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한 수치가 아닙니다. 주님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치워주시지 않고, 주님의 종이 부끄러움과 움츠림 없이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제2독서는 믿음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 2,18)
신자라면 십자가의 신비를 믿습니다만, 대개는 각자가 감수해야 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두려움 내지 반감, 거부감까지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요. 쉽고 만만하다면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십자가는 편하고 흥하고 승승장구하고 싶은 인간 본성을 반하기에 어렵고 무겁고 불편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껴안아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것"과 실제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실천" 사이의 거리가 바로 그 사람과 주님 사이의 거리일 겁니다. 영광의 허상만 좇는 이는 삶의 실제적 고통을 마주하려 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믿는 이는 그 십자가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가 십자가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거친 인생길을 헤치고 나오면서 십자가가 버겁고 고통스러워 눈물 훔쳐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내적으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외적으로는 숨어있다 튀어나와 주저앉히고 무너뜨리고 해체시키는 복병 같은 어려움들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고 뒷걸음질도 치면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그리고 십자가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복음 환호송)
그토록 징한 십자가지만,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올려드려야 할 진실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 덕분에 사랑을 체득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자랑할 것이란 오직 십자가뿐일 겁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뭐니?"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니?"
묻고 또 물으시는 그분께 진심을 다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과 우리는 공동운명체, 운명공동체이니, 그분에게서 십자가를 빼버릴 수 없다면 우리에게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또 자랑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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