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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3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09.10.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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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살피라고 초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의 감각과 체험을 통해 사물에 대해 배우면서 생활을 익혀가야 하지요. 이는 비단 육적인 시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눈먼 이를 비유로 영적 시력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차라리 육적인 눈의 문제라면 상황은 훨씬 수월할 겁니다. 눈먼 이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적어도 타인에게 무턱대고 길을 인도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혹 그렇더라도 스스로 철저히 준비하고 익힌 뒤에야 조심스레 나서겠지요. 문제는 자신이 눈먼 이라는 걸 모른 채 앞장서 타인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예수님께서 아주 직설적으로 물으십니다. 그런 이를 "위선자"라고 거침없이 부르시면서요. 예수님께서 걱정하시는 이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시야를 꽉 막고 있는 들보 같은 완고함을 간과한 채 스스로 잘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일을 두고 유다인들이 못마땅해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바야흐로 때가 차서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오셨지만, 하느님 백성이 여전히 "듣고 또 들어도 깨치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깨치지 못하는"(이사 6,9 참조) 암흑의 시대에 머물기를 고집하니 참으로 안타까우셨던 겁니다.


제1독서는 눈먼 상태에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눈을 뜨게 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들려 줍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열심한 바리사이답게 철저히 율법을 수호하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을 적대하며 살기까지 띠고 멸절시키던 사람이었지요. 자기가 믿는 야훼 하느님의 뜻을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서, 영혼의 눈이 뜨이기 위해 잠시 육의 눈이 멀어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사도 9,8 참조)      


구약의 질서와 율법 체계 안에서 스스로 잘 본다고 자부하던 사울이 이 체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이 눈먼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는 회심하여 주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됩니다. 영의 시력이 열리면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기다림의 시대를 떨쳐내고 구원을 마주 보는 은총의 시대로 넘어들어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자신을 진솔하게 성찰하면서 관대하고 양선한 영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의 시선에 합하여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은 물론, 삶도 많이 달라질 겁니다. 남의 눈에 묻은 티로 불편해하던 때가 언제였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 그득 들어찰 테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알아서 잘 살고 있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먼저 눈을 떠야 할 겁니다. 오늘도 지치지 않고 말씀으로 눈을 맑고 밝게 행구어내며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