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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한가위 / 오상선 신부님 ~

2021.09.21.mp3

2.07MB


오늘 미사의 독서들마다 각각의 수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풍성한 결실을 선사하십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
주님께서 "정의에 따라" 때에 맞춰 내려 주시는 가을비와 봄비로 세상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흐릅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행복한 광경이 그려지네요.


이 세상에서 맺어지는 모든 결실은 인간의 손과 발품과 수고를 빌리기는 하나 결국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굶주리는 이 없이 모든 이가 영육으로 충만하고 흡족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건 감사와 찬양입니다.

복음은 비유 속 부자의 수확 이야기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루카 12,17)
예수님의 비유 속 어떤 부자는 그해에 원래 소유했던 곳간이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소출을 거둡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수확에 놀란 그에게서 만물의 지배자이신 분을 향한 감사나 찬양은 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는 이 많은 소출을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누릴지에만 관심이 있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당장 오늘 밤에 목숨을 거두어가실 줄도 모르는 그는, 마냥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재화를 온전히 자신의 힘이나 노력, 행운의 결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도, 생명과 죽음의 인간 실존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지요. 잠시 지날 이 지상에서 물질적으로는 두 손 가득 뭔가를 움켜쥐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의 하늘 나라 통장 잔고는 거의 0원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제2독서의 추수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여기서 땅은 이 세상을, 한창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된 곡식은 우리 인류를 가리킵니다. 이 수확은 종말인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표상입니다.


농부가 잘 여물고 튼실하게 자란 열매들을 수확하며 기뻐하듯 주님도 이 지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린 우리의 무르익은 영혼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건만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이들의 쭉정이 같은 상태에 가슴 아파하실 테지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그날에는 다 자라 구별이 확실하게 된 상태에서 가라지는 따로 거두어 불에 태우고, 밀은 주님의 곳간으로 모아들이게 될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수확에 기뻐하고 감사하듯 우리를 수확하실 그분께도 그런 기쁨을 안겨드릴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세상 재물은 그리 풍족히 누리지 못해도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이들,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이라면 그분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 서로서로를 성장시켜주는 부모, 형제자매, 친지, 지인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이 한가위는, 주님께서 맺어 주신 모든 영적 물적 결실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축복의 날입니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인 우리 자신의 시작과 끝을 관상하며, 부족함 없이 돌봐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그분 때문에 흡족하고 그분도 우리 때문에 흡족해하시니, 함께 행복하고 충만한 명절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