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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6주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09.26.mp3

2.97MB

 


교회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정한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경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 기적을 일으키자 제자들이 나서서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막지 말라"고 오히려 제자들을 제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다니는 이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두 견해의 차이는 "우리"의 범위입니다. 제자들의 "우리"의 범위는 아직 닫혀 있고 편협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는 무한히 열려 있기에 경계조차 희미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당신을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예수님께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도 안에서 어떤 신분으로 타이틀이 부여된 이들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 작고 미소해서 눈에 띄지조차 않는 이들까지도 혹여 누군가로 인해 죄를 짓게 될까봐 염려하고 안타까워하시지요.


제1독서는 광야에서 일흔 원로에게 영이 내린 일화입니다.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주님께서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원로들에게 나눠 주신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모세의 시종인 여호수아가 걱정합니다. 원로들이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져 사사건건 주님의 뜻이라고 나서면 모세의 입지가 불안해질까 염려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모세는 오히려 이를 반깁니다.


모세는 자기 혼자 탁월한 지도자로 군림하기보다, 모든 백성이 하느님 뜻을 알아듣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위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울려퍼집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고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 5,1)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부자들이 쌓은 재물과 옷, 금과 은 등이 썩고 좀먹고 녹슬었으며, 바로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리라고 일갈합니다.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는 건 필요도 없는 잉여의 것들을 쌓아두고 다시 찾지도 않았다는 의미이까요.


"품삯 가로채기, 사치, 쾌락, 기름진 마음, 의인을 단죄하고 죽임"(야고 5,4-6 참조)
여기서 부자라 일컫는 이들은 단순히 재물이 많은 이들이라기보다, 스스로 규장해 놓은 "우리"의 범위가 좁디 좁아서 주위의 가난하고 곤고한 이들의 절박한 생존은 아랑곳없이, 차라리 썩고 좀먹고 녹슬어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기를 좋아하는 부류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꾼들의 정당한 삯을 가로채고 사치와 쾌락으로 제 몸뚱이만 섬기며 마음에는 기름기가 가득 차 사람된 도리에 무뎌졌습니다. 가난한 이들 편에 서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의인들을 단죄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이들이지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보면, 후반부는 죄를 지은 지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잘라 버려라,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3.45.47)
죄를 지은 주체는 그 사람이고, 엄밀히 보자면 죄는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런데도 단지 행동에 옮겼을 뿐인 손이나 발, 눈을 제거하라시는 건, 결국 그것들이 없으면 처참해지는 존재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죄를 엄중히 생각하고 전인적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의미를 반어적으로 하신 듯합니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죄는 "우리"의 범위를 축소하고 폐쇄시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범위를 자기와 가족, 뜻이 맞는 사람들 정도로 한정한 이들은 그 경계 밖에 존재하는 이들을 외면하거나 적대하고, 심지어 해를 입혀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으니까요. 그 역시 나와 함께 "우리"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들을 서슴없이 하는 그 자체가 곧 죄일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부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지요.

필요 이상으로 움켜쥐고 닫고 밀쳐내는 손,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형제들을 짓밝고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즐기며 불편한 진실 앞에서는 질끈 감아버리는 눈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없애버리라 하신 지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정치와 종교, 이념과 환경, 생계와 차별 등의 문제로 무수한 이들이 고국을 떠나 삶의 터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잖은 이들이 더 지독한 사고와 질병, 폭력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어가고 있지요. 동방 끝에 자리한 우리나라도 어느새 이 현실을 마주한지 꽤 되었습니다.

인권과 환대, 평화의 지향이 우리 안에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두려움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 함께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찾는 데 마음을 모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범위를 한없이 확장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손을 펴고 발길을 내디디며 눈을 여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작은 자들이니까요. 오늘 특별히 우리 주위에 있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따뜻한 손길과 눈길을 보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