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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7주간 수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10.0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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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기본이며 정수가 되는 정신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제자들 편에서 이런 청을 드린 것은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루카 9,18)라고 복음사가가 기록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단을 구성하실 때 기도부터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서 먼저 그분의 마음과 지향과 삶을 배우고 익혔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기도하시는 스승을 보며 그들 안에도 기도에 대한 갈망이 차츰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버지와 나누는 은밀하고 친밀한 사랑의 친교인 기도는 누가 시키고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신 건 아닐까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
예수님은 흔쾌히 '주님의 기도'라 불리우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를 청하고, 이어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들, 즉 영육의 생명을 위한 양식과 용서와 악, 유혹에서의 보호를 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저희에게/ 저희의/ 저희를"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바를 청할 때 "저"가 아니라 "저희"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일인칭의 존재들이니 각자 저마다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주고받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우리"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 내 가족과 내 단체, 내 편만을 위한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편향적 주술이나 청구서 문구 정도일 겁니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우리"를 위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보편적 선을 향하고 또 모두에게 축복이라면, 앞서 청한 아버지 이름과 아버지 나라는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제1독서는 요나 예언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놀랍게도 요나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아는 예언자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첫 부르심에 도망친 것도 그렇고, 두 번 째 부르심에 따른 결과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받은 것을 도리어 못마땅해하니 말입니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이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 '성읍이 멸망하리라'는 자기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불쾌히 여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누군가 제 길을 돌이켜 당신께 돌아온다면 당신 말씀이 백 번 천 번 공수표가 되더라도, 영 실없는 존재처럼 되어도 괜찮으십니다. 사람에 대한 그분의 갈망과 염원이 모든 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나"를 잊은 아버지시라서 그 아버지의 기도는 "우리'만을 향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우리는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 기도에 우리에 대한 그분의 바람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바람이 하나로 녹아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실존 안에서 주님과 나누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기도들이 주님의 기도라는 프리즘을 거쳐 이 세상에 빛의 향연으로 펼쳐지고 있다면, 우리 기도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대로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바람과 사랑을 주님의 기도에 합하여 정성껏 바쳐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마음에 깊이 머무르는 우리에게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당신 뜻을 알아듣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아드님, 성령과 하나 되어 "우리 모두"를 위해 사랑의 기도를 바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