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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 오상선 신부님 ~

2021.10.04.mp3

2.64MB


저의 사부이신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에 듣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과,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제가/ 레위인도 ...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어떤 사마리아인은 ...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인인 사제,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사뭇 다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머리가 먼저 반응한 것 같지요. 율법의 관점에서, 주검에 몸이 닿으면 부정하게 되어 자기들 앞에 놓인 창창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별 고민 없이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마음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자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의 내면에서 솟아난 '가엾은 마음'이 바로 야훼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검처럼 쓰러져 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살피고 돌봅니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 10,35)
여관에서 사마리아인은 피로도 잊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이로써 충분할 법한데도 떠날 때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두 데나리온은 일꾼의 이틀치 품삯이니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는 다친 이의 현재에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래를 계산해 현재를 모면하려 한 앞의 두 사람과 상당히 큰 차이가 보입니다.


제1독서는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피하여"(요나 1,3.10)
요나는 주님이 부르셨을 때 그분을 피해 달아납니다. 그가 향한 곳은 주님 쪽도 아니고,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니네베 쪽도 물론 아닙니다. 정 반대쪽으로 작정한 듯 멀리멀리 떠나는 요나의 모습에서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의 냉정한 발걸음이 겹칩니다.


요나도 주님을 떠나면서 니네베의 미래에 손을 놓은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서도 손을 뗀 것입니다. '나 아니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어도 그만이고...'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요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나는 니네베를, 그리고 니네베를 통해 하느님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나를 쫓아가십니다. 요나가 겪은 폭풍과 물고기 뱃속 이야기는 어린이들도 귀가 솔깃할 만큼  다이나믹하고 흥미지진하지요. 사실 그분께는 순종적이고 성실하며 잘 준비된 예언자들이 많이 있으시니, 도망간 사람은 말고 다른 누구라도 부르시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요나야, 너 말고도 니네베를 도울 사람은 많다. 그런데 나는 꼭 너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고 싶단다. 너의 구원도 이 일에 포함되기 때문이란다." 하시는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의 비유 속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하느님도 피한 것이고, 피함으로써 버린 것이기도 합니다. 초주검이 되었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강도를 만난 것도 통탄할 일인데 거기에 더해 외면 당하고 버림받기까지 한 거지요.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강도 당한 뒤 고통 속에 버려지기까지 한 그 사람의 존엄성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다가가서 치료하고 돌보며 미래까지 염려해 손을 내민 사마리아인을 통해 영육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이가 되살아납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도 회복하게 된 거지요. 듣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사마리아인은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였던 것입니다.

구원은 자비를 베푼 사람은 물론 자비를 입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어주는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니까요.

"누가 너의 이웃이냐?"

사랑하는 벗님! 이번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덕분에 그가 구원을 체험하고 그 덕분에 우리가 구원되니 이웃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요!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표같이 느껴집니다. 만민의 형제, 성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