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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가 보입니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예수님 주변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각자 나름의 청원과 바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부터 절박한 필요를 안고 온 이들까지, 지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군중과 예수님은 지금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마르 3,9)

군중은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오려고 서로 밀쳐 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밀칠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서 배를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배는 물에 띄워질 것이고, 군중은 호숫가에 남아 그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많은 경우 다정한 접촉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실은 말씀이 중심이지요. 물리적 거리가 군중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걸맞는 해법임을 알겠습니다.

"그들(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밀려드는 군중으로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러운 영들까지 소리소리 지르며 한 몫을 보탭니다. 주님을 아는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진정한 증언은 되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앎이 아니기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이럴 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 효과를 넘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메시아의 신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이들의 경솔하고 섣부른 폭로는 거룩한 이름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묵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1사무 18,7).

승리에 도취된 여인들의 경박한 노래가 사달의 원인이 됩니다. 둘을 대놓고 비교하니 화 나고 속이 상한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의 정화되지 않은 시각, 진실의 채로 거르지 않은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하느님까지도 죽음까지 몰아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1사무 19,5).

요나탄이 승리의 주인공는 사울도, 다윗도 아니고 주님이심을 일깨우며 지혜로이 부친 사울을 설득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각자 하느님과 두고 있는 "거리"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쓰시느냐가 관건이지, 누가 잘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먹이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았기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 일이니 함께 기뻐하며 응원했어야 옳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들 안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욕망과 바람으로 무질서하고 난폭하게 예수님을 밀쳐 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있게 거르지 않은 섣부른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며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지, 예수님을 태운 거룻배가 되어 그분과 밀착하는지...

어느 모습 안에 있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앎이 무르익고 봉인이 해제될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때까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될 때까지 겸손히 침묵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