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독서들 중 한 단어의 말씀이 제게 강하게 다가오셨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쫓아다니는 사울 임금을 해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 24,7)
"어쨌든!"
조건이나 자질, 성품이나 의도가 어떻게 되어 있든지 간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독서의 문맥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로 정당화한 복수보다 하느님과 그의 관계를 우선하겠다는 다윗의 마음가짐이 표현된 말이지요.
얼핏 보면 사울 임금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존중 같지만, 그 깊이에는 사울을 선택하셔서 기름부으신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사울이 어떤 인간이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를 만드시고 택하신 하느님의 그 기대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왕 다윗의 겸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예수님께서 하느님 현존 장소인 산에서 "원하시는" 이들을 택하셨으니, 예수님의 의지가 곧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이들 열두 사도는 첫째, 주님과 함께 지내며, 둘째, 복음을 선포하고, 셋째, 구마의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네 복음서들의 지면 사정상 우리가 그들 모두의 됨됨이와 인성을 세세히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지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사도들을 굳이 우상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부족함과 실패마저도 솔직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둘의 이름 뒤에 감히 나의 이름을 붙여서 나지막히 읽어봅니다. 그렇게 열세 개의 이름을 반복해 읽다 보니 마음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들이 완벽했습니까? 그들이 뛰어나고 재능 넘치는 엘리트들이었습니까? 그들이 부유하고 근심 걱정 없는 금수저들이었습니까? 그들이 분별력 넘치고 지혜로운 현자들이었습니까? 그들이 겸손하면서도 용맹한 의리의 사나이들이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습니까?
"어쨌든" 예수님은 당신의 선택과 부르심을 뒤집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본 모습이 "어쨌든" 하느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와 함께 우리 모두는 "어쨌든" 주님께서 부르시고 보증하시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자신의 부족함이 못마땅할 때, 자신의 찌질함에 위축될 때, 번번이 죄로 기우는 약해빠진 의지가 부끄러울 때, 이 "어쨌든"이라는 말씀을 떠올리면 즣겠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대함과 자비와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또 "어쨌든"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까지도 새겨져 있습니다. 비록 지금의 몰골이 "어쨌든" 우리는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고 신부이며 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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