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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3주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복음 내용은, 루카복음의 첫 도입부(1,1-4)와, 예수님께서 말씀 안에서 당신의 사명을 찾아 선포하신 4장의 유명한 부분(4,14-21)을 이어서 편집해 놓았습니다. 앞 부분 없이 4장의 이야기만으로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독립된 이야기인데 굳이 앞 부분을 결합시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 사실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너무 인위적으로 발췌, 생략하는 편집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편집 의도를 참작해 나름 타당성을 찾아보게 됩니다.

루카 복음 도입부에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쉬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유난히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면서, "아! 바로 이것이구나. 이것 때문이구나!" 깨닫게 된 말씀입니다.

"말씀의 종이 된 이들"(루카 1,2).

루카는 자신의 복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종은 "자유와 주체성을 빼앗긴 채 주인에게 종속되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려지는 비천하고 비참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종이 '주님의 종', '말씀의 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러한 종의 특징은 "스스로 사랑 때문에 종임을 자처하는 자발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을 매혹시켜 스스로를 종의 굴레에 묶게 만드는 신비라 할까요.

바로 이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4장과 결합된 결정적인 이유일 겁니다. 누가 짜집기 한 것인지는 몰라도 참 기가 막힙니다.

4장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행동을 주목해보면, "가시어... 늘 하시던대로... 일어서시자 ...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 펴시고 ... 찾으셨다."(4,16-17)고 전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행동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주체적이고 의지적으로 일어서시고, 건네진 예언서 두루마리를 받아 당신께 다가오신 말씀 내용을 손수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분'이 당신의 사명을 '말씀'에서 찾으시고, '말씀의 종'이 되어 이를 선포하십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리고나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 하게 하셨다."(루카 4,18-19)고 전합니다.

말씀을 찾아 봉독하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는데, 이제 봉독된 내용 안에서는 주체가 바뀌어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이라 부른 하느님, 곧 예수님을 파견하신 성부께서 주체가 되십니다. 이는 사명을 받고 선포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주체적이고 의지적인 당신 힘을 다 빼시고, 온전히 보내어진 이, 파견받은 이로서의 당신 존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힘의 전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발설되신 말씀'께서 '말씀으로 오신 분'을 받아 선포하는 그 자리에서 말씀의 내용이 완성됩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언제일런지, 어떤 식으로일지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완성'이란 모든 것이 완결되어 마지막 방점을 찍는 한 순간이나 찰나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부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을 찾아 선포하신 이 순간, 이 자리에서부터 완성의 영역은 무한대로 열려 펼쳐질 것이니까요.

"말씀의 종!"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성체와 말씀의 두 축으로 지탱되어 이곳 아름다운 하느님 정원에서 사는 우리에게, "말씀의 종"이란 표현은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그만큼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종, 말씀의 종은 자신의 의지가 꺾이거나 억압당하지 않고 기꺼이 말씀께 길을 묻고 사랑으로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찾고 듣고 사랑하고 품고 머물고 따라 살 때,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힘"(느헤 8,10)이라는 걸 절절히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의 종으로 사는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위협받고 고난받다가 죽음까지 당했던 수많은 의인이나 예언자, 그리고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세속적 견지에서는 말씀 때문에 약하나, 신앙의 영역에서는 말씀 때문에 강한 이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많은 지체들 중에서, 드러나거나 주목받거나 힘을 행사하는 은사가 아니어도,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고, 덜 소중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싸지는"(1코린 12,22-23) 그런 지체들이 바로 이들일 겁니다. 어쩌면 '말씀의 종'인 이들이 교회와 세상을 등짐 지고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말씀의 종들인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에즈라의 율법 낭독과 그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말씀의 종이 된 온 이스라엘은 회한과 감사에 벅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느헤미아와 에즈라와 레위인들이 이렇게 축복합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느헤 8,9-10)

이 축복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멘.